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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묵상글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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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
오늘 복음을 보며 저 자신을 크게 반성합니다.
특히 저의 신원 의식에 대해 크게 반성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하시는데
나는 과연 예수님의 형제요 어머니인지 반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머니 마리아도 당신도 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분들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하며 하느님 말씀을 그 자리에서
걷어차지 않고 주님의 종이니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주님도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라는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당신 사명으로 삼으셨고 그래서 아버지 뜻이 당신 뜻이었지요.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신 주님은 아버지의 뜻이 당신 뜻이었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그런 일을 하셨고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마리아와 주님과 저를 비교할 때 저도 말로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프란치스코의 말을 인용하여 자주 떠들어대고 있고,
또 매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라고 주문 외듯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신의 뜻은 당신이 알아서 이루시라고 하는 것이지,
여기엔 예수님처럼 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아들이 되려는,
아들은 못 되어도 도구는 되려는 의지와 진정성이 없습니다.
저는 인사이동과 같이 굵직한 일에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지만,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할 때는,
예를 들어 반찬을 먹거나 물을 먹을 때는 거의 대부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까 아무 생각 없이 저 좋을 대로 먹고 마십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저는 주님처럼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만
하느님은 진정 나의 아버지라는 의식이 없거나 약한 것이고,
그러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이 없는 셈입니다.
그러니 기도에 앞서 주님의 어머니라는 신원 의식,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을 가져야겠습니다.
이것을 뼈아프게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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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친척들에게마저도 몰이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하여 당신의 진정한 영적 가족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 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받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엄청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시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말슴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가치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니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이라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앞서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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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형제, 누이, 어머니」
한번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혹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부자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핏줄로 맺어진 연결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더니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라고 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핏줄로 맺어지는 관계를 무시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참된 가족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태어난 모든이와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부모 형제, 자매의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무늬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태양이 형님이요, 달이 누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다하였을 때 그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영이시니 영적인 분을 만나려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떠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관계가 먼저 입니다. 어떤 외적인 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혈연이나 지연을 먼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탓에 “예수님께서 미쳤다”, “악령이 들렸다”(마르3,22) 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회당으로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기적을 믿었지만 그런 능력을 어디서 받았는지 의심하였습니다. 결국 육친의 가족은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눈뜬 가족은 예수님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은 “가족을 먼저 챙겨야지 성당을 우선하면 되겠느냐?” 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당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성당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이 가족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혹시 가족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더더욱 성당에 나와서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신앙과 삶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나의 가족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이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한마음 한뜻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핑계로 가족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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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생 때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가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나환자 마을로 봉사를 갔을 때입니다. 친구는 그곳 아이들에게 자기가 만든 노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가 1983년 겨울이니 어느덧 40년이 지났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노랫말과 멜로디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오늘은 그 노랫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만나던 즐거운 일요일에/ 우리 사랑 영원하라 주님께 기도하며/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마저도/ 우리들의 사랑을 축복하는 곳으로/ 이 세상에 너보다 어여쁜 이 있다면/ 이 세상에 너보다 사랑한 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다 거짓말이야/ 어여쁜 너 어여쁜 너 나의 천사여” 노래의 제목은 ‘나의 천사여’입니다. 유안진 선생님은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의 허물도 모두 예뻐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허물이 크고, 늘 죄를 짓고 살지만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023년을 시작하면서 저도 ‘천사’를 몇 번 만났습니다.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께서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덕분에 새해가 시작하는 1월 1일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성지순례로 시작한 2023년은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 같습니다. 새벽 5시에 무덤성당으로 조배를 갔습니다. 미사를 예약하지 못해서 미사를 봉헌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천사 같은 수녀님이 부활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미사를 봉헌하는데 순례 온 한 교우분이 미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의 몸가짐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덤으로 미사를 봉헌한 네 명의 사제들의 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 주님공현 대축일을 앞둔 화요일에 베들레헴 주님 탄생 성당으로 순례를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현지에 사는 한 형제님이 친절하게도 주님의 탄생 성당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고, 경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4박 5일의 짧은 성지순례였지만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 덕분에 감사하고 은총이 충만한 순례가 되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저 역시도 이웃을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천사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에는 27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태조, 한글을 창제한 세종,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정조, 나라의 문을 닫아야 했던 고종 등이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존경받는 왕은 세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국방, 과학, 문학, 외교, 예술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글의 창제는 세종의 가장 빛나는 업적입니다. 한글은 그 만든 목적이 유일한 문자이며, 창제의 원리가 전해지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창제원리는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 되는 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을 사랑했고, 백성들의 고충을 이해했고, 백성들에게 문자를 선물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입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세포는 끊임없이 주위에 있는 다른 세포에게 영양분을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세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양분을 나누지 못하는 세포는 ‘암’세포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새해에는 ‘나’라는 틀에 갇혀있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의 것들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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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남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평생 살아가면서 이혼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또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떨까요? 그런데 어떤 연구 결과를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평생 살아가면서 200번 정도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또 50번은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극도의 혐오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부부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바로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질 때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삶 안에서 고통과 시련도 커지게 됩니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부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였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미련한 사람은 상대방을 적으로 여겨서 항상 결점을 없애려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을 전우로 여기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함께 어려움을 짊어집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지혜가 가득해야 합니다. 이 지혜는 자신이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지혜롭고 완전한 사람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생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삶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요구하는 삶이 아닌,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하는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내게 요구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마르 3,22).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친인척이 찾아왔으니 다른 것을 다 뒤로 하고 먼저 만나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군중이었습니다. 영적 갈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육체적으로도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진정한 형제, 누이,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요구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요구를 들어주는 삶을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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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카렌 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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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회개, 비움, 친교, 섬김-
어제 설날 연휴에 우리 수도형제들은 ‘영웅’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후에 수도형제들의 표정을 얼핏보니 흡사 단체피정한 분위기 같았습니다. 얼마전 ‘탄생’과 ‘영웅’을 영화를 본 제 느낌 역시 ‘성지순례’한 또는 ‘대피정’한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으로 강렬한 ‘회개의 표지’와도 같은 영화 작품이었습니다.
어제처럼 저녁9시 늦게 취침하기는 처음입니다. 다음날 12:30분쯤 기상하기에 늦어도 오후8:30분에는 취침하기 때문입니다. 다큐멘터리 경남 진주의 의인義人, ‘어른 김장하’ 2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후부터 틈틈이 1부에 이어 2부까지 다봤습니다.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1944년 생이니 저보다 5년 연상이니 거의 동시대분입니다. 또 많은 분들에게 동영상 보기를 권하기도 처음입니다. 흡사 상쾌한 숲속을 산책한 느낌이었습니다. 산소같은, 나무같은, 산같은 참 좋은 사람,진인眞人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닮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현 시국時局 삶의 하늘이 흡사 짙은 구름으로 덮여있다 하더라도 일시적 현상으로 얼마 지나 푸른 하늘이 나타날 것이니 지극한 인내로 참고 기다리며 분투의 선한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호흡을 길게 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푸른 하늘을 가린 어둠의 구름들 오래 가지 않고 곧 지나갈 것이라는 이런 믿음이, 희망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구원합니다.
동영상 내용중 “장학금을 받았는데 특별한 인물이 못되어 죄송하다”는 제자의 말에,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는 어른의 말씀도 감동적이었고 곳곳에 심금을 울리는 말도 내용도 많습니다. 이웃들의 증언이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하루 삼식三食은 “놈”, 이식二食은 “님”, 일식一食은 “양반”이란 유머에 웃었습니다. 선생은 자신을 세끼 차려주는 음식을 먹는 삼식이라 했습니다. 또 김장하 선생은 “결이 다른 사람이다” 란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 사랑의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시종일관한 김장하 선생의 한 생애였으니 세례 유무를 떠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예수님의 참 형제임을 깨답습니다. 이분 또한 강렬한 회개의 표지가 되는 인물입니다. 세례 받아 명시적으로 가톨릭신자가 아니되었더라도 이렇게 사심없는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은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예수님을 닮은 참으로 ‘결이 다른’ 예수님의 참 형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제 피정와서 면담고백성사를 본 열심한 자매가 제 ‘행복기도’를 나누고 싶다 하기에 수백장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제 참 좋은 깨달음 덕분에 행복기도 처음에 ‘참회합니다’를 넣었습니다. 제 행복기도를 바치는 분들은 꼭 다음처럼 맨앞에 반드시 ‘참회합니다’를 넣어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참가족에 속한 참으로 ‘결이 다른’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희망,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반드시 맨처음에 ‘참회합니다’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 공생애 첫 일성도 회개하라 였고, 미사도 자비의 참회송으로 시작합니다. 영성생활도 ‘회개(메타노니아)-비움(케노시스)-친교(코이노니아)-섬김(디아코니아)’의 순서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전갈에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주신 예수님의 응답 말씀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감동의 울림을 주는 생명과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어디에 있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가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마리아 성모님을 격하하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최고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시종일관 아드님 예수님과 함께 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순종과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이셨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역시 빛나는 예수님의 참 형제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성인의 생애가 참 화려하며 파란만장합니다. 참으로 모든 좋은 자질을 지닌 성인으로 ‘개신교의 로마’라 일컫는 악조건의 종교개혁의 본산지 제네바 교구장의 재임중 활약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설립자인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의 영적우정도 널리 알려진 미담입니다.
성인은 고전에 속하는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이란 책도 저술하셨습니다. 특히 ‘신심생활입문’은 ‘준주성범’과 더불어 가톨릭 신자들에게 양대 권장 도서에 속합니다. 성인은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리옹에 있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원의 작은 방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뇌일혈을 일으켜 병자성사와 고해성사를 받고 만55세에 선종합니다. 바로 다음 마지막 감동적 임종어가 예수님의 참 형제였음을 입증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 예수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
그대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백을 닮았습니다. 은혜롭고 감동적인 대목 둘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대로,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참 유익하고 감동적인 강론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 실행한 하느님의 뜻 자체인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강론의 요지 셋이 아주 분명합니다.
1.하느님의 말씀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The Word of God is for everyone).
2.하느님의 말씀은 모두에게 참회를 요구한다(The Word of God calls everyone to conversion).
3.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선포자로 만든다(The Word of God makes us heralds).
얼마나 은혜로운 요약인지요!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한 분이요, 부단한 참회를 요구하는 분이요, 우리를 복음 선포자로 만드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과 예닮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여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을 한결같이 순종하여 실행할 때 비로소 우리 모두 참으로 ‘결이 다른’, 예수님과 ‘결이 같은’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됨을 깨닫습니다.
이보다 큰 기쁨도 행복도 없을 것이며 우리 삶의 모두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예수님과 깊은 우정의 형제자매들로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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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1-35)
찬미 예수님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으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을 다른 많은 종교에서 공격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셨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믿음과 신앙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칼로 가슴을 찌르는 고통의 삶을 사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주님께서는 자기 제자에게 ‘이분이 어머니시다.’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인간들 중 그 누구보다 하느님 말씀에 순명 하신 분,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님, 천상모후의 관을 쓰신 우리들의 어머니 성모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묵상할 수 있는 오늘의 되기를 바랍니다.
오(吾)상(喪)아(我)
내가 나를 죽였다. 즉 내가 나를 버렸다로 해석되며 ‘장자’의 말이다.
풀이하면 이런 뜻이다. 태어날 때 우리는 백지로 태어난다. 그리고 삶을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내 모습을 만들어 간다. 그렇게 우리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살면서 만들어진 나를 버리면 새로운 내가 된다는 뜻이다.
살면서 얻게 된 티끌만 한 지식과 경험이 하느님 앞에 우리의 겸손을 방해한다. 살면서 얻게 된 자존심은 하느님 앞에서도 우리의 고개를 뻣뻣하게 만든다.
내가 살아오면 얻었던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봉헌한다면 우리는 우리 내면의 순수함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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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미사
https://youtu.be/aCULkMPoDBY 1:02:40
i Kolbe
미사 12:50 – 40:45 중 강론 21:12 –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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