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규 사진전
경성감옥 춘천분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려고 하는 옛 교도소,
그리고 교도소 안의 많은 흔적들이 그의 필름에 각인되어 공개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앞으로 역사의 미궁을 찾는 학자한테도 중요한 자료가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글 : 공간루 제공
[2011. 3. 10 - 3. 23 공간루]
[공간루]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4가 188-4 인설B/D 1층 T.02-765-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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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류은규는 일반인에게 절대 출입금지 구역인 교도소 안에 교도소 경비를 설득하여 출입을 허락받고 촬영을 한 후 그와의 약속을 지켜 공개하지 않은채 사진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2009년 춘천교도소가 경성감옥 춘천분관으로 건립 된지100년이 되던 해부터 발표를 시작하였다. 사진전과 더불어 사진집을 출간하기 위해 그는 춘전교도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사진에 기록된 건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교도소가 가지고 있는 옛 사진자료도 제공받았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는 스스로의 사진의 의미나 시대를 기록하는 사진가의 사명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춘천시 약사동의 교도소 자리는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되어 교도소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옛 춘천교도소는 일제시기로부터 6.25사변, 70년대 말 군사정권 시절까지 우리의 근현대사에 많은 흔적을 남겨둔 중요한 국가시설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옛 건물에 ‘시계점’이나 ‘우마수리점’ 등 한자가 남아 있었다. 교도소 안에 왜 이런 글씨가 있었을까? 오랫동안 이곳에서 근무한 분도 전혀 알 수가 없는 이 글씨를 그 당시 본 기억마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려고 하는 옛 교도소, 그리고 교도소 안의 많은 흔적들이 그의 필름에 각인되어 공개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앞으로 역사의 미궁을 찾는 학자한테도 중요한 자료가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흔적을 남길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는 그의 말과 함께 그에게 사진가로서의 첫 걸음을 내 딛게 한 ‘307號/경성감옥 춘천분감’의 잃어버린 흔적을 찾아 나서는 사진전이 되길 기대한다.
류은규 작가노트 - 춘천교도소 연역
춘천에 사시던 큰아버지 댁을 나는 어릴 때부터 일 년에 몇 번씩 왕래했다. 큰아버지 댁은 춘천시 약사동에 있었고, 집 바로 옆에는 춘천교도소가 있었다. 높은 담에 둘러싸인 교도소는 어린 마음에 너무나 커 보이고,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나는 늘 교도소 앞 공터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놀곤 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서 사진을 배울 무렵이니까 70년대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춘천교도소가 이전한다고 들었다. 그 다음 내가 찾아갔을 때, 이미 수감자는 다른 곳으로 옮겨 아무도 없었고, 경비가 아무도 못 들어오게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춘천교도소는 영욕(榮辱)의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구 출신 의병장 최도환(1851∼1911년) 등이 일제강점기 당시 이곳에서 투옥 중 순국했다. 그 당시 이곳은 일제의 국권침탈을 저지하려는 항일 의병을 수감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미군정 시기에는 '폭동 음모사건', '직원 월북사건' 등 좌·우익 극한 대립의 장이 됐고, 6·25 전쟁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에는 춘천교도소가 박격포탄의 공격을 받아 수용자 1천250명을 직원 70명이 직접 인솔해 도보로 수원에 있는 임시 수용시설로 이송 중 수용자가 총기를 탈취해 교도관과 교전을 벌이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투옥돼 춘천교도소에서 2년 여간 수용생활을 했다고 한다. ‘뺑끼통’으로 불렸던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으며, 수용자들은 마룻바닥이 아닌 온돌에서 잠을 잔다. TV와 신문은 물론 인터넷으로 편지도 보낼 수 있다. 서신 검열도 폐지됐다. 법무부 인권국과 국가인권위에 진정도 자유롭게 제기할 수 있다. 교도소에서 애를 낳던 풍경도 사라졌다. 임산부는 출산 1개월 전부터 형 집행 정지를 받아 외부에서 출산을 한다. 800여 명이 수감 중인 춘천교도소는 지난해에는 검정고시와 학사고시에 각각 24명이 합격하는 등 학과 및 전문 정예직업훈련 우수 교정시설로 인정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