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충청북도 백제 때 상당현이었던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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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02:48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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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때 상당현이었던 청주
청주는 실로 우리나라의 한가운데 있는 땅이며, 서울에서 3백 리 안에 있다. 옛날에 현인이 가르침을 편 곳이요, 많은 어진 사람들의 교화의 향기가 남아 있다. 민간의 풍속에 학문이 크게 빛나니 동남쪽에서 으뜸이다.
우암 송시열이 『북루기(北樓記)』에 기록한 청주의 모습이다. “큰 들은 남쪽으로 문의군(文義郡)에 이어져 사라지고, 두 냇물은 서쪽으로 금강에 들어 흐른다”라고 정이오가 노래한 청주는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라고 불렸다. 신라 신문왕 5년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었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청주에 대해 고려 태조 왕건은 “청주는 땅이 기름지고 사람 중에는 호걸이 많다”라고 하였고, 이숭인은 “청주는 실로 동남쪽의 집합지로,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사업이 번잡하다”라고 하였다. 청주시에는 상당산과 우암산 등의 산이 있고, 북쪽에는 미호천이, 중앙부에는 무심천이 흐르고 있다. 청주의 지형은 서향인데 지대가 낮고 청주시내를 흐르는 무심천이 높아서 해마다 수재의 염려가 있다.
청주 여자들은
시집가기 전에도 큰길에 나서지 않는다.
눈 위의 것을 보느라
함부로 턱을 치켜들지 않고
바람 따라 흐르는 소문에
귀 열지 않아
무엇을 물어도 아는 게 없는 듯 그저 우물대며
글쎄유
청주를 노래한 조철호 시인의 시인데, 그만큼 조용하면서도 두드러지지 않는 성품을 지닌 사람이 많은 곳이 청주시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청주 사람들이 서울에 가서 살다가 며칠만 청주에 와서 지내다 보면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느려지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양반의 고장이라 말도 느리고 발걸음도 느렸던 고장 청주에 고려의 공민왕이 피난을 왔던 때가 1361년이었다.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이 무너지자 공민왕은 이곳으로 와서 7개월을 머물렀다. 그전에 피난처를 물색할 때 몇몇 신하들은 개경에서 가까운 수원으로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감찰사에서 수원은 바닷가가 가까워 왜구의 침입이 염려되고, 또 홍건적을 맞아 항복한 곳이기 때문에 인심을 보증하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청주를 추천하였다. 청주는 삼도의 요충지이므로 곡식을 운반하기가 쉽고,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가장 안전한 지역이라고 하였다.
당시 청주에서 두 번의 과거시험이 치러졌고, 그때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방이 망선루라고 고친 취경루에 걸렸다고 한다.
이곳 청주를 진호하는 산성이 상당산성(上黨山城)이다. 청원군 낭성면과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山城洞)에 걸쳐 구축된 상당산성은 석성으로 보은의 삼년산성과 더불어 충북을 대표하는 산성 가운데 한 곳이다. 백제의 상당현이 있던 이곳에 성이 처음 쌓여진 것은 백제 때부터였을 것이다. 토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상당산성이라는 이름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남북국시대 때 관리와 군사가 주둔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당시 충청병사로 있던 원균(元均)이 수축하였고, 이인좌의 난이 끝난 뒤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지금은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당산성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구축된 산성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시대 때 토성으로 처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국시대 때 서원소경이 청주에 설치되었는데 이때 김유신의 셋째 아들 김서현(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이후 조선 선조 29년 임진왜란 당시 개축되었다가 숙종 때 석성으로 다시 개축하였다.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로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쌓고 그 안쪽은 토사(土砂)로 쌓아올리는 내탁(內托) 공법으로 축조하였다. 동ㆍ서ㆍ남쪽 3개소에 성문을 두었는데, 남문은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 문루를 세웠다. 지금은 석축 부분만 남았고, 성문의 높이는 3.5미터, 너비는 4.2미터다. 동문과 서문에도 역시 문루가 있었으며, 성문은 무사석으로 네모지게 축조하였는데 높이 2.7미터, 너비 2.8미터다. 동문과 남문 부근에 1개소씩의 암문(暗門)이 있고 동남쪽에 수구(水口)가 있었으나 지금은 여기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장대(東將臺)와 서장대(西將臺) 터가 남아 있다.
1996년 현재 이 성내에는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읍지(邑誌)』에 따르면 이 산성은 1716년(숙종 42) 고지(古址)에 의거하여 석축으로 개수하였으며, 남문 등의 성문과 성벽에 당시 공사 관계자들의 이름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다. 남문의 문루는 1977년에 복원되었다.
산성을 지나 북동쪽으로 한참 가면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歸來里)에 이른다. 귀래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 이상면의 지역으로 신요(申橈)의 자취가 서려 있다. 신요는 광해군에게 곧은 말을 하다가 귀양길에 올랐고, 귀양살이가 풀린 뒤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를 하였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성공한 뒤에 여러 번을 불렀다. 그럼에도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마을을 일컬어 곧으미, 고디미, 고두미, 또는 귀래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청주시 남문로 2가에는 국보 제41호인 용두사 터 철 당간이 있다. 고려 광종 때 창건된 용두사는 조선 중기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철 당간에 얽힌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절은 폐사되었지만 돛대는 남았으며 높이가 10여 길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처음 주를 설치할 때 술자(術者)의 말을 써서, 이것을 세워 행주(行舟)의 형세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돛대가 세워졌고, 그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흥덕구 성화동(옛 이름은 농촌리)의 오류골에서 남이면 가마리로 넘어가는 무네미고개에는 이 고개를 넘으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흥덕사지
상당산성
용두사지 철 당간
청주시에는 상당산과 우암산 등의 산이 있고, 북쪽에는 미호천이, 중앙부에는 무심천이 흐른다. 이곳 청주를 진호하는 산성이 상당산성이다. 청주시 남문로 2가에는 국보 제41호인 용두사 터 철 당간이 있고, 운천동에는 9세기에 창건되었던 흥덕사의 터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제 때 상당현이었던 청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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