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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호퍼의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다
5월은 다양한 문화 활동으로 가슴 벅찬 나날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연극 <오셀로>와 아름다운 선율로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 <에머슨 콰르텟> 현악 4중주. 그리고 왠지 삭막하면서도 적적한 현대 도시인의 모습을 맞닥뜨리게 해준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시회까지.
그중에서 호퍼의 그림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해외소장품 걸작선’의 일환으로 개최된 이번 전시회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그림들을 국내에 소개한 전시입니다. 야수파와 큐비즘 등 추상화풍이 주류였던 20세기 초에 호퍼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구상화를 꿋꿋이 그렸습니다.
숲과 해안 같은 자연 풍경과 함께 그 대척점에 있는 도시의 삭막한 풍광, 도시인의 외로운 모습 등을 다양하게 그렸습니다. 버려진 건축물, 거대한 기계, 화면을 가득 채운 회색 아파트, 창문으로 들여다본 흐릿한 조명 속 무표정한 인물 등을 고동색, 회색과 같은 칙칙한 색채로 그린 것을 보면 호퍼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호퍼가 그린 그림들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어서인지 전시는 꽤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시간대별로 제한된 인원만 예약을 받았지만 평일에 관람했는데도 전시장 안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른 이유로 전시장을 찾았습니다. 꼭 보고 싶은 호퍼의 그림 한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뉴욕 센트럴 파크에 있는 셰익스피어 동상을 그린 <황혼 속 셰익스피어>(Shakespeare at Dusk)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뉴욕의 풍광을 많이 그렸던 호퍼의 대표적인 뉴욕 이미지 중 하나라고 합니다.
호퍼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지만 그가 셰익스피어를 그렸다는 사실도 이번 전시회 때문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당장 그 그림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림을 보자마자 막연히 이 그림이 단순히 셰익스피어 동상을 그린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여러 파편적인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왜 이 화가는 셰익스피어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그것도 화면 한쪽 구석에 그렸을까? 센트럴 파크의 숲 너머로 뉴욕의 고층 건물도 담고 있네. 가을인가? 나무들이 헐벗었네. 붉은 노을이 보이지만 숲 안쪽은 벌써 꽤 어두운데. 셰익스피어가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등등. 이런 생각과 함께 전반적으로 그림이 쓸쓸하고 우울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여 소더비에서 제공하는 그림 해설을 찾아 읽었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해설을 보니 그림이 주었던 인상이 확 이해되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셰익스피어 소네트 73편이 완전히 녹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대 내게서 그 계절을 보리라 삭풍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잎 달려있거나, 다 떨어지거나 몇 잎 남지 않아 아름답게 노래하던 새들도 떠나 폐허 된 성가대를 그대 내게서 그런 황혼을 보리라 서쪽 노을도 지고 점차 검은 밤이 집어삼켜 모든 것 안식에 들게 하는 제2의 죽음을 그대 내게서 그런 불꽃 보리라 침대에 누워 꺼지기만을 기다릴 제 연료가 되어주었던 젊음이 타고 남은 재에서 피어나는 그대 이것 알기에, 그대 사랑 더욱 강하리 머지않아 남기고 가야 할 것 더욱 사랑하리 (셰익스피어 소네트 73번, 필자 번역)
호퍼는 한 성명서에서 “위대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내면의 삶을 밖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런 그의 주장처럼 <황혼의 셰익스피어>는 단순 풍광 그림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화가의 메시지를 담은 것입니다.
고층 빌딩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잃은 채 욕망에 사로잡혀 내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우리 모두 자신이 지닌 것을 뒤에 남긴 채 쓸쓸히 떠날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할 거라는 옛 시인의 메시지를,
이 그림은 정말 셰익스피어 소네트 73번을 놀랄 정도로 잘 형상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우리 인생의 황혼기를 헐벗은 가을과 황혼에 자주 비유하곤 했거든요. 그런 옛 시인의 글이 현대 화가의 붓을 통해 이렇게 되살아난 것이 신비롭고 경이롭기만 합니다.
얼마 전 셰익스피어 소네트 33번과 60번에서 영감을 받아 류재준이 작곡한 <소나타 2번>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현대 문화와 예술 속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셰익스피어를 만나면서 역시 그는 마르지 않는 문화의 샘이란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런 감정이 실제 그림을 보면 얼마나 더 절절히 느껴질까 싶어 전시회장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황혼의 셰익스피어>는 이번 전시에 빠졌고, <황혼의 셰익스피어>를 위한 습작 여러 점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기대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하지만 이 전시회 덕분에 오래전에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인생 조언을 다시 곱씹었습니다. 허망한 욕망에 사로잡혀 소중한 인생을 소모하지 말고 진정 내게 소중한 것들에 더 집중하고 사랑하라는. 돌아보니 5월 한 달을 오롯이 그리 살았네요.
https://youtu.be/EafkwW1tI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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