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8 - 거리를 걸어서 브라티슬라바 시내를 구경하며 역사를 생각하다!
2022년 5월 9일 새벽에 잠이 깨어 호텔 방의 창으로 밖을 보니 마침 동이 터 오는지라 시시 각각으로
변하는 하늘을 보면서 여명(黎明) 을 몸으로 느끼고는 호텔을 나와 걸어서 시가지를 구경합니다.
아침 이른 시간인지 거리에는 차도 적고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으니 성 마르틴 성당 Dom sv. Martina 은
이른 아침이라 문이 굳게 닫혀있고 그 너머 미할라 문 Michalska Brina 을 지나 구시가지로 접어듭니다.
브리티슬라바 는 슬로바키아어로는 Bratislava 이고 체코어로도 Bratislava (브라티슬라바) 이며
독일어로는 Preßburg (프레스부르크) 이고 헝가리어로는 Pozsony(포조니) 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산 흔적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기원전 200년경 부터 켈트족 이 살기 시작했으나 로마 제국
에 의해 정복당하고 4세기까지 로마 제국의 변방 지역으로 남았는데 5세기 경부터 슬라브족 이 정착하기
시작해 현재의 시 인종 구성이 이 때 자리잡았으며, 907년 마자르족의 침략을 받아 헝가리 왕국 에 편입됩니다.
1526년에 헝가리 왕국이 오스만투르크군 싸운 모하치 전투 에서 패하여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는 등
사실상 멸망한 후에 이 도시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공격 을 끊임없이 받았으나 부다 지역과는
달리 점령되지 않았고 153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헝가리 왕국의 새 수도 가 됩니다.
합스부르크 왕가 군주들의 헝가리 국왕 대관식 은 브라티슬라바의 성 마르틴 성당 에서 열렸으며 브라티슬라바
는 1783년 수도를 다시 부다(페스트) 로 환도할 때 까지 헝가리 왕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로 번영합니다.
1866년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의 패배 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으로
개편되었고, 헝가리인이 독일계와 함께 제국의 지배민족의 위치에 오르자.....
원주민들이었던 슬로바키아인 은 슬로카비아를 지배하던 헝가리인에게 가혹한 탄압 을 받았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10년 인구는 이곳은 42% 가 독일인, 41%가 헝가리인 이었고 슬로바키아인
은 15% 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중분해
되는 바람에 이곳은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산하 슬로바키아 지방의 중심 도시로 다시 출발합니다.
1938년 뮌헨 협정 의 결과 슬로바키아가 슬로바키아 제1 공화국이란 이름 아래 나치 독일의
괴뢰국 이 되면서 이 도시 브라티슬라바도 나치의 영향력 아래 놓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브라티슬라바에 잔류하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양 이 되었습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 되면서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가 되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중심지는 여전히 프라하 였고 여기 브라티슬라바는 인지도 면에서 매우 떨어졌습니다.
1989년 벨벳 혁명 이 이곳 브라티슬라바에서도 일어났으며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
됨으로써.... 브라티슬라바는 독립된 슬로바키아의 수도 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은화의 미술시간 코르셋에 갇힌 황후 가 떠오르니.... 우아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상체를 틀어 화면
밖 관객을 바라보고 서 있다. 정성스럽게 땋은 긴 머리와 새틴 드레스는 화려한 은박 별들로 장식돼
있다.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 가 그린 이 유명한 초상화 속 주인공은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트’
(1865년) 이다. ‘시시’ 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그는 유럽 왕실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비로 손꼽힌다.
빈터할터 는 독일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뛰어난 재능 덕에 장학금을
받아 뮌헨 예술아카데미 에서 수학했다. 프랑스 왕실의 궁정화가 가
된 후 유럽 전역의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 를 주문 받으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 그림은 그의 경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60세 때 그린 것으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가 의뢰한 것이다. 28세의 아름다운 황후는 그 시대 패션의 진수 를 보여 주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화가 앞에 섰다. 머리와 옷을 장식한 별들은 오스트리아의 국화인 에델바이스 를 상징
한다. 독일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시시는 고작 열여섯 나이에 오스트리아로 시집 와 황후 가 됐다.
언니의 맞선 자리 에 따라갔다가 황제가 어린 동생의 미모에 반해 청혼 하면서 이루어진 혼사였다.
시시는 엄격한 궁중 생활 이 버거웠고, 연이은 출산과 첫아이의 죽음, 시어머니와의 갈등
등으로 행복하지 않았다. 미모 때문에 황후가 된 터라 평생 외모에 집착했다.
몇 시간씩 걸리는 긴 머리 손질과 코르셋 졸라매기 가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될 정도였다.
19∼20인치의 가는 허리 를 유지하기 위해 코르셋을 졸라맸을 황후. 아들의 자살후 검은 드레스만 입었던
그는 60세에 스위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코르셋 때문에 암살자의 칼이 몸을 찌르는 통증 도
못 느낀 채 허망하게 죽어갔다. 아름다웠지만 불행했던 시시는 화가의 붓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후의 이미지로 역사에 남았다. 동시에 코르셋에 영원히 갇힌 여인 으로 화폭에 새겨졌습니다.
거리에서 유모차를 끌고가는 엄마 를 보는데 등에 가방까지 울러멨으니 아이가 셋 인데 그중 2명은 초등
학교에 등교하는 길이라 유모차를 끌고 데려다 주러 가는 것 같은데.... 아이를 바라 보다가
문득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가 떠오르니.... “불법 ‘아동 수출’ 배상판결... 부끄러움 기억해야” 입니다.
과거 해외 입양 과정의 불법성 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그제 서울
중앙지법 민사 18부는 1979년 고아 신분으로 미국으로 입양된 신성혁 씨가 홀트
아동복지회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홀트가 1억 원을 배상하라” 고 판결
했다. 입양기관이 입양만 보내놓고 사후 보호관리 의무를 방기 한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신 씨는 친부모의 경제 사정 으로 복지원에 맡겨진 상태였다. 부모가 엄연히 있는데도 홀트는 고아 호적 을
만들어 만 세살 때 미국으로 입양 을 보냈다. 당시 고아의 해외 입양 절차는 간소했다. 입양 후 신 씨의
인생은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양부모의 아동학대와 두 번의 파양을 거쳐 열여섯살 때 노숙자 로 전락했다.
더구나 입양기관이 무관심 으로 방치하는 사이 양부모들이 신 씨의 시민권 취득 절차 를 밟아
주지 않는 바람에 불법 체류자 가 됐다. 신 씨는 2016년 미국에서 추방당해 37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한국어도 모른 채 힘겹게 살다가 2019년 소송을 제기했다.
우리나라는 1960∼1980년대 ‘수출’ 식으로 연간 수천명씩 해외 입양 을 보냈다. 지금까지 한국 출신 해외
입양아는 17만명 으로 추정되니 오래동안 고아수출국 1위 라? 좋은 가정을 만난 입양아도
있지만 신 씨처럼 시민권 획득 같은 기본적 사후 관리도 받지 못해 신산한 삶을 영위한 경우도 적지 않다.
현재 미국 입양 후 시민권을 얻지 못한 사람은 1만 8000여명 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열악했던
경제 상황, 입양을 터부시하는 문화, 국가의 방조와 더불어 입양 수수료는 챙기고
입양아를 보호하는 조치에는 소홀했던 일부 입양기관의 무책임이 심각한 인권침해 를 부른 셈이다.
법원은 이번에 “불법 입양 과정에 개입한 증거가 없다” 며 국가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법적
책임에 앞서 어린아이들이 불법과 무관심 속에 머나먼 타국에서 고통받는 걸 막지 못한 책임
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고국이 길러주지 못했다면 이제 피해 입양아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려고
노력하는 자세라도 보여줘야 한다. 한때 ‘고아 수출국’ 으로 불렸던 부끄러운 기억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슬로바키아 국립극장 은 1776년 최초 건립되었으나, 1886년 Fellner와 Helmer 가 재건했으며 브라티슬라바
출신 조각가 빅토르 틸그너가 만든 '가니메데스 (그리스신화의 술시중을 드는 소년)' 분수가 유명하며
2007년 도나우강변에 신국립극장이 건립되면서, 양 극장 모두 다양한 오페라, 발레, 연극 공연을 개최합니다.
레두타 음악홀 은 슬로바키아 교향악단의 전용 공연장으로 1773년 마리아 테레지아 의 명령으로
곡물 저장소 로 지어졌다가 1919년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재건 되었다. 이후 시립
음악 학교 및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50년부터 교향악단의 전용 연주장으로 사용됩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보지는 못했지만, 슬라빈 묘지 는 제2차 세계대전중 슬로바키아 서부에서 나치에
대항해 싸우다가 전사한 6,845명의 소비에트 군사들 을 기리는 오벨리스크 (39.5m) 가
있는 공동묘지로 국가 문화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유명하답니다.
에스테르곰 대주교 궁전 은 1781년에 건립된 고전주의 건물로 현재는 시청사로 사용 중인데 1805년 나폴레옹
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 완승을 거둔 후, 이 궁전의 '거울의 방' 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프레스부르크 조약 이 체결되었고 2층에 있는 17세기 영국산 벽걸이 융단(테피스트리) 이 유명하며,
첨탑의 꼭대기 부분에는 후에 대주교가 된 버티아니(József Batthyány) 추기경의 모자장식 조각이 있습니다.
데빈성 은 도나우강과 모라바강의 합류 지점에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역 중심지로 석조 고딕 건축물의
폐허만이 남아있으나, 브라티슬라바 외곽의 조용한 강가 언덕에 있어 주말에 자연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가족 단위 로 찾는곳이지만 보지 못하고 떠납니다.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