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황현필 한국사'의 강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영상 출처 : https://youtu.be/WezZAdcSvC4?si=CLtTqWGb-BaGSnnc
: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
거란은 5대 10국 중 하나인
후진의 석경당에게 항복을 받으며
만리장성 이남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얻으니
이를 '연운 16주'라 한다.
거란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건국 초기부터 관계가 좋지 않았다.
아니, 좋게 지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 고려의 3대 군주 정종은 '광군'이라는 이름을 붙인 군사 30만을 선발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 그러나 후삼국 통일 이후 50여년 간,
고려는 거란과 군사적 충돌이 없었다.
그 사이 군주는 다섯 번이 바뀌었고
여섯 번째 군주인 왕치(고려 성종)가
고려를 다스리고 있었다.
: 요나라의 전성기에 50년을 재위한 요 성종, 야율융서는 1차 침략 당시엔 어린 아이로
: 1차 침략 당시는 요 성종, 야율융서의 어머니였던 소태후가 섭정으로 거란을 다스리고 있었다.
: 그 무렵,
5대 10국의 혼란기를 약 80년 만에 종식시킨
만리장성 이남의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되찾을 열망에 차 있었다.
: 이에 소태후와 거란 조정은
송나라와 연운 16주를 놓고 전쟁이 벌어질 시
고려가 송나라와 통교하여
거란을 공격할까 염려하였다.
: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략한다.
: 고려의 6대 군주 왕치(성종)는 거란에 맞서기 위해 몸소 서경으로 간다.
: 거란과 맞붙은 고려군 선봉은 봉산에서 대패한다.
: 왕을 따라 서경에 있던 고려의 대소신료들은
거란군의 강함을 목도하고 불안에 떠는데,
소손녕은 고려 사신 이몽전에게
자신들의 군세를 '80만 병사'라 밝힌다.
: 기병만 수 만에서 십수 만은 족히 되는 숫자,
고려의 광군 30만이 모두 훌륭한 병사라 하더라도
기병 하나에 보병 열은 붙어야 싸움이 되는데
거란군 80만은 상대하기에 중과부적이었다.
: 과거 5대 10국 중 하나인 후진의 석경당 역시 거란에 항복한 바 있었기에
: 고려 조정에서도 항복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 이에 더해 할지(땅을 떼어줌)까지 거론되었다.
: 아무래도 상대가 엄청난 군세를 몰고 온 터라
고려 조정에선 할지론이 더 힘을 얻고 있었다.
서경을 내준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태조 왕건이 개척하고
제2의 수도로 삼은 땅일 뿐더러,
과거 고구려의 수도였기에
국호인 고려와 더불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경은 고려의 북진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기도 한 땅이었다.
: 조정의 대세가 할지론이 되자
고려의 군주 왕치(성종)는 중신들의 설득과
깊은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이고,
항복을 청하기 전에
서경에 쌓아둔 군량미를 거란에 빼앗길 바에야
고려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로 한다.
: 백성들에게 나눠주고도 쌀이 남자
적군의 군량미가 될까 염려하여
대동강에 모두 던져버리게 하였다.
: 이러한 광경을 보다 못한 서희가 나서서 말했다.
* 서희 : 백성이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을 강에 버려 하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렵습니다.
* 서희 : 게다가 항복하면서 땅까지 떼어준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거란군이 80만이라구요?
진짜 80만이 쳐들어왔으면 이미 이 서경은 거란의 손에 넘어갔어야 하고, 개경 역시 거란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어야 합니다.
: 실제로 거란에서 6만 명 이상의 대병력으로
정벌군을 이끄는 직책을 '도통'이라 하였는데,
1차 침략 당시 소손녕은
자신을 '도통'이 아닌 '동경 유수'로 칭하였다.
이 때문에 소손녕의 당시 군세는
6만 미만 또는 그 부근으로 추정된다.
서희가 이러한 거란 사정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서희는 거란군 80만을 부정하며
상황을 좀 더 지켜볼 것을 주장하였다.
: 그 사이 거란군은 고려의 안융진을 공격하는데,
안융진을 지키던 장수는 발해 유민 대도수였다.
거란의 침략으로 인해 발해는 멸망했고,
유민 일부는 탈출하여 고려에 정착했던 것이다.
: 고려의 장수 대도수와 유방은 안융진에서 소손녕의 거란군을 격퇴하였다.
: 안융진의 승전보가 서경에 닿자
서희의 주장이 점점 힘을 얻었다.
소손녕이 정녕 80만 병사를 이끌고 온 것인지
의문시되었다.
왕치(성종)는
거란군에 다시 사신을 보내기로 한다.
서경의 신료들 중 서희 만이 자청한다.
이에 왕치는 이례적으로
성 밖 나루터까지 서희를 배웅한다.
: 거란 군영에 당도한 서희는
회담의 주도권을 노리고 의도적 기싸움을 벌인다.
회담을 바로 시작하지 않고
의전 문제로 관사에 드러눕기까지 한 것이다.
: 결국 서희의 요구대로 의전이 행해지고
마침내 고려 대 거란의 회담이 시작된다.
: 그리고 서희와 소손녕은 후대까지 널리 알려진
그 유명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 서희가 옛 고구려의 강역을 언급하면서
요나라의 동경을 특별히 짚어낸 것은
바로 앞에 마주앉은 소손녕이
그 동경의 유수(지방관)였기 때문이었다.
•소손녕 : 거란은 과거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니..
그렇다면 고려는 송나라가 아닌
거란과 더욱 친하게 지내야 하지 않은가?
* 서희 : 이게 다~ 여진족 때문인 거 아시죠?
여진 때문에 거란과 통교할 수 있는 길인
압록강 부근이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여진을 압록강 부근에서 쫓아낼 수만 있다면
고려가 거란과 통교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 소손녕은 이러한 서희의 주장을 받아들여
고려와 거란의 교통을 위해
압록강 부근의 여진족을 격퇴할 것을 합의하고,
압록강 이남의 280리를 고려에 귀속토록 하였다.
소손녕은 거란의 후방 안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였기에
이 합의에 매우 흡족해하였다.
: 소손녕은 정말 흡족해했던 것 같다.
: 소태후와 거란 조정은 소손녕의 보고를 받고
또한 꽤나 흡족해하였다.
: 그러나 진짜 흡족한 쪽은 따로 있었다.
: 왕치(고려 성종)와 서희는 쉽게 얻었다 하여
강동 6주를 소홀히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거란은 자신들에게 사대하라며 땅을 내주었지만
서희는 그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훗날을 대비했다.
: 고려의 군주 왕치(성종)는 치우치지 않는 외교로
대외관계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실리를 얻었다.
: 서희는 강동 6주를 온전히 고려 영토로
만드는 일에 자신의 마지막 5년을 바쳤다.
결국 과로로 병을 얻어 사망한다.
: 서희가 병으로 몸져 누웠다는 소식에
왕치(성종)는 직접 문병도 모자라
사원에서 쾌유 기도까지 올린다.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서른 여덟의 나이에 고려 임금 왕치(성종)가
먼저 승하하고,
그 뒤를 서희가 따르게 된다.
: 만약 서희가 아니었다면,
다른 중신들 주장대로 할지를 하였다면
고려엔 미래가 없었을 것이다.
황주-자비령 국경으로는 그 다음 침략에서
개경 점령이 한층 더 수월하였을 것이다.
: 거란의 2차 침략, 3차 침략 당시
전황을 가른 전투가 벌어진 대부분은
서희가 얻어낸 바로 그 강동 6주였다.
첫댓글 서희랑 강감찬이 활동한 시대가 달라서
두 사람도 당연히 세대가 다를거라 생각했는데
둘이 6살밖에 차이 안남
강감찬 귀주대첩(1019) 당시 72살 1차 침공 당시인 993년 때라 해도 46세...
진짜 대단하다 외교로 땅을 얻다니ㄷㄷㄷ
와 ㄷㄷㄷ
고려입장에선 바리게이트가 몇겹 더 쳐진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