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문민정부 시대 내내 '신문 하단'에 [창작과 비평] 광고가 실렸고, 백낙청교수 뿐만 아니라 '남측' '북측'이란 용어의 창시자인 최원식교수도 기고했다. [조선일보] 기고는 수면 위 아닌가?
===> 신문 문화면 안 읽는 노년층의 헛점 노리는 허위사실 적시.
4)"좌파의 문화권력은 60년간 공산주의 이론을 민주와 진보와 통일의 명분으로 <멋있게 맛있게 섹시하게> 각색하여 한국의 현대사를 그 어떤 것이든 조목조목 비판하고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을 마련했기 때문에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논문이든 이들을 말로 굴복시키기는 누런 서해를 푸른 동해로 바꾸는 것보다 어렵다.(꺽쇠 강조는 인용자)"
====> 논술 용어로 눈물 나게 맛 없고 멋 없고 돌탱이같은 표현. 논술시험에서 이렇게 표현 쓰면, 논술교사 천이면 천명. 만이면 만명. 모두에 가위표 짝!(이 순간부터 최고점수는 '미'수준으로 급락.)
솔직하게 말해보면, 이러한 돌탱이같은 몰지성에서 서울대학교수로 늘 폼나는 양복 입고 독일철학적 관념어 휘날렸고, 결정적으로 [조선일보]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내내 좋아했다는 것에 있다. 조선일보 검색엔진에 보면, 권성우교수의 글에서 백낙청교수를 아예 조선일보 사람으로 보는 글을 참조 바람.
5)
"<삼척동자도 아는 통계와 사실 몇 가지만으로도 이들의 궤변과 억지는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지만>, 이들은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여 나름대로의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향해 매진할 따름이다"
(꺽쇠 강조는 인용자)
====> 급하게 쓰는 글에서 문장형식이 균형 없는 점은 별개의 논의로 하고-이 정도 수준은 네티즌이 범할 수 있다고 봐서....
삼척동자도 아는 통계와...... 는 군더더기. 빨간줄 쫙!!
6)
또한 감정과 억측이 이성과 통찰을 압도하는 대부분의 한국의 지성들은 비난과 생떼에는 능하지만 비판과 창조에는 무능하여 <이들이 퍼뜨린 단순한 공식을 줄줄 외고> 있다. 정신적으로 이론적으로 이들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다.(꺽쇠 강조는 인용자)
=====> 누구 이야기 하세요? 최모씨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라 하면 들 분 많을 것임.
7)
백낙청과 이영희 등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적이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공산권 몰락의 도미노 현상 때문이었다. 이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동구와 소련이 1988 서울올림픽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동독마저 서독에 흡수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구세주가 있었다. 그가 바로 김일성이었다. 여전히 김일성 황제와 김정일 황태자는 건재했던 것이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만약 김일성 체제가 무너지면, 이들은 하루아침에 사기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운명공동체!
====> [창작과 비평]에서 공산권 붕괴 당시의 책들 다 모아 보세요. 백낙청교수가 '공황상태'를 잡지에서 노출했던 바 있었나요?
또, 백낙청교수는 [김일성연구]를 책 내주는 출판사가 될 지언정, 그와 가까운 이들에게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칭송하는 어법의 책을 적어도 2002년까지 낸 바 없다.(이후는 이들의 책을 안 봐서 모름)
허위사실.
조갑제기자의 공식을 마구잡이로 써먹으면서, 허위사실과 비약을 일삼는 데에서 참 징그러워짐.
하나 더 추가.
검색 엔진을 조금이라도 두들겨 보았다면, 이영희교수와 친한 사람이 '임헌영교수'이고, (무심코 튼 방송에서 장정일 진행으로, 아예 이영희교수와 임헌영교수가 나란히 출현한 모습을 보았다.) 백낙청교수와 이영희교수는 상대적으로 별로 가깝지 않다고 본다. 이영희교수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책을 낼 만큼 교류가 없는 것도 아니나, 어제 방송에서 우연히 탁 틀어도 도배되서 나오는 프로수준에서의 '친분도'정도에서도 반박 가능한 수준.
8)
<위기는 기회였다.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이른바 PD(민중민주주의)파가 뿔뿔이 흩어지는 틈을 타서 NL(주사)파가 운동권의 패권을 잡았다.> 이어서 이들은 그렇게 입에 달고 다니던 '통일'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부까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의한 평화통일은 확고부동한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이었고 국민들도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이들은 그것이 정통성이 부족한 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한 반공정책일 뿐이라고 호도하고 통일 논의를 개방하자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남북이 화해하여 평화적으로 자주통일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우겼다. 이들은 과감하게 임수경과 문익환과 황석영을 올려 보냈다.(꺽쇠 강조는 인용자)
===>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고개 저으며 끝까지 거짓말 하는 송두율교수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예 안하니 만 못하다.
====> 일단 하나만 짚자. 박홍총장의 사건만 해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이합집산이 심했던 것은 민족해방계열이었고, 민중민주계는 애초에 크지도 않았고 그리고 그렇게 찌그러진 적도 드물었다고 본다. 대학내 근거가 아니라 민주노총이 근거였기 때문이다.
====> 그 시대 살았던 대학생 모두가 주사파의 짜증나고 역겨움을 별개로 하고, 최성재님의 글에 손가락질 할 것이다. 이 정도의 헛소리로 채우고, 그 시대 대학가의 좌파 기지화때 눈물 났던 이들을 끌어들이지 못함은, 무능이기 앞서서 도덕이 없는 것이다.
9)
이들이 주장하는 통일은 실은 고려연방제 통일인데, 통일은 이제 누가 봐도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대세가 아닌가. 기껏 통일 논의를 광장으로 끌어냈더니, 한국 역대 정부의 통일방안이야말로 가장 좋은 통일방안임을 세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증명해 준 것이다.
====>조선일보 검색엔진에 검색어 '백낙청'을 치면 '분단체제론'이야기가 나온다. 서울대 출신학자들은 단 한차례도 용공어휘로 2002년까지 쓴 바 없다. 그러니, 조선일보가 끝까지 착각하며 밀어주었기도 했다. 코드 심층에서 결국은 송두율교수와 북한식 유물사관이 있고 북한의 정치에 가깝다는 논증은 전체의 독자들에 가능한 게 아니다.
그런데, 딱 이렇게 생뚱맞게 결론을 내놓으면 좋아할 사람 있나? 좋아하긴 커녕 손가락질 하며, 최성재님에 근거 있을 수 있는 말하면서도 '마녀사냥'한다고 손가락질 할 것이다.
=====> 서울사람 시골사람 속이기 스타일의 허위사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참을 성 강한 논술 선생은, 글쓰기 학생을 불러서 글쓰기의 도덕에 대해서, 기초도덕을 가르칠 것임.
이제, 중간생략.
글의 제목은 나중에 '대충' 뽑았음을 암시하는 부분도 나온다.
글의 핵심주제는 가치판단 내리고 싶지 않다.
10)
<1>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은 2000년 6월 15일 이후로 영원히 날아가 버렸다.>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다. 이 날 이후로 다시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와 민족주의자들은 통일 논의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연 신이 났다. '자주평화'통일을 소리 높여 외치게 된 것이다. 말은 남북이 대등한 입장에서 통일한다고 하지만, 결국 고려연방제로 통일한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해서 적화통일하자는 것이다. 그 분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까지 들어섰으니 이제 거칠 것이 없다. 제도권 밖에서 20년 문화권력을 누리던 이들이 제도권으로 급속히 들어섰다. 제일 먼저 방송을 장악했다. 이어서 신문도 완전 장악하기 위해 조중동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다. 드디어 백낙청은 2005년에 광복 60주년 경축 ‘자주·평화·통일 민족대축전’ 공동준비위 상임대표를 맡아 통일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대국민 일성으로 '태극기를 흔들면 분열 축구가 된다.'고 했다.
(2005. 8. 16.)
[독일의 통일비용 과다는 통화정책의 실패 때문]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독일은 통일비용으로 연간 약 2000억 마르크씩 총 1조9200억 마르크(약 1243조 원)를 쏟아 부었다. 예상보다 2배 이상을 지출했다. 그 기간 동안의 한국의 총예산보다 많이 들었다. 조사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한국은 통일비용으로 500억 달러 내지 6700억 달러를 지출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한국인들은 통일하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는 사람이 많다. 대성공!>
독일의 통일 주역 콜 수상은 너무 흥분했다. 당시 정부 관료들이 대부분 그랬다. 2020년 이후로 생각했었는데, 30년 앞당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일이 찾아왔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흥분은 치명적인 실수를 가져온다. 그것이 바로 통화정책이었다. 인도적 차원에서 동독 주민을 서독 주민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민족주의 입장에서 콜 수상은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를 1:1로 교환한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글의 초점이 없다.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 대한 충고인지,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자위'해보자는 것인지, 불명료하다. 이러한 글은 대체로 자기가 뭔 소리 하는지를 자기가 모른다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6.15 이전에 흡수통일이 가능했을 때 기점으로 타임머신으로 되돌아간다면 이러할 수 있다는 '가정법'이 있다고 봐야, 겨우 봐준다.
그렇다면, 가정법의 글쓰기는 글 앞에서 명료하게 드러내주지 않으면, 독자 기만 죄로 빨간줄 쫘아아아악.
****. 우파네티즌들의 다수는 '자구'와 '문장'과 '부분들의 공식'에 매달리기에, 이러한 비논리와 무능한 글쓰기가 묻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준으로 뭔가 남들에 설득하고 남들의 마음을 바꾼다는 가정법을 가진다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대딩과 30대와 40대 거의 모두가 동의할 것이며, 논술평점으로 가장 낮은 점수에, 길게 썼다는 이유만으로 '에프'를 면할 수준으로 사료됩니다.
글에 있어서 글답게 쓰는 우파 논객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게 쓰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비하여 길게 쓴다는 만의 허세로서의 비논리적인 글도 있습니다. 특히, 글쓰기에 있어서 저학력 시대를 살아간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저열한'트릭이 너무 심합니다. 젊은층은 동의할려다가도 고개 돌립니다.
7160 조 회 1098
이 름 최성재 날 짜 2005년 8월 19일 금요일
통화정책으로 통일비용을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60년에 걸쳐 쌓은 문화권력의 바벨탑]
장준하와 백낙청으로 이어지는 좌파의 문화권력은 80년대 들어 주사파라는 막강 행동대원을 얻음으로써 정통우파를 3류 극장에서 흘러간 가요나 부르며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시키고 지성인들의 정신세계를 거의 지배하게 이르렀다. 그 결과 90년대초에 이미 우익조차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자연스럽게 좌익의 목소리를 내면서 민족화합을 부르짖게 되었다.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1987년의 6·10투쟁과 6·29선언으로 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이들 앞에는 언제라도 아라비아산 백마를 타고 질주할 수 있는 초원이 펼쳐졌고 독일산 스포츠카를 타고 제한속도 없이 달릴 수 있는 좌파 전용 고속도로가 마련되었다.
이들은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때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지만 기부금, 유상증자, 무상증자, 사업확장 등으로 자본금을 획기적으로 늘려 제도권의 문화권력을 압도하는 힘을 비축했다. 마침내 김대중 동지와 노무현 제자가 잇따라 청와대로 5년간 무보증 무월세로 이사가면서, 이들은 제도권 문화권력을 차례로 접수하기 시작했다. 좌파의 문화권력은 60년간 공산주의 이론을 민주와 진보와 통일의 명분으로 멋있게 맛있게 섹시하게 각색하여 한국의 현대사를 그 어떤 것이든 조목조목 비판하고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을 마련했기 때문에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논문이든 이들을 말로 굴복시키기는 누런 서해를 푸른 동해로 바꾸는 것보다 어렵다.
삼척동자도 아는 통계와 사실 몇 가지만으로도 이들의 궤변과 억지는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지만, 이들은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여 나름대로의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향해 매진할 따름이다. 또한 감정과 억측이 이성과 통찰을 압도하는 대부분의 한국의 지성들은 비난과 생떼에는 능하지만 비판과 창조에는 무능하여 이들이 퍼뜨린 단순한 공식을 줄줄 외고 있다. 정신적으로 이론적으로 이들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다.
[동구 몰락과 소련 해체와 독일 통일은 한국 좌파를 공황상태로 몰고 감]
백낙청과 이영희 등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적이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공산권 몰락의 도미노 현상 때문이었다. 이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동구와 소련이 1988 서울올림픽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동독마저 서독에 흡수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구세주가 있었다. 그가 바로 김일성이었다. 여전히 김일성 황제와 김정일 황태자는 건재했던 것이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만약 김일성 체제가 무너지면, 이들은 하루아침에 사기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운명공동체!
위기는 기회였다.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이른바 PD(민중민주주의)파가 뿔뿔이 흩어지는 틈을 타서 NL(주사)파가 운동권의 패권을 잡았다. 이어서 이들은 그렇게 입에 달고 다니던 '통일'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부까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의한 평화통일은 확고부동한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이었고 국민들도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이들은 그것이 정통성이 부족한 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한 반공정책일 뿐이라고 호도하고 통일 논의를 개방하자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남북이 화해하여 평화적으로 자주통일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우겼다. 이들은 과감하게 임수경과 문익환과 황석영을 올려 보냈다. 그로써 정부 독점의 '멸공'통일 방안의 대안으로 '자주평화'통일 방안을 전국민에게 일깨웠다고 자평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미제의 식민지라던 한국이 운동권이 이상향으로 선전하던 동구보다 훨씬 잘 살고 훨씬 자유롭다는 것이 1988년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오비이락(烏飛梨落)처럼 바로 그 다음 해부터 동구가 무너지고 이어서 공산주의 모범국가 동독이 속절없이 서독에 흡수통일되어 버린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통일은 실은 고려연방제 통일인데, 통일은 이제 누가 봐도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대세가 아닌가. 기껏 통일 논의를 광장으로 끌어냈더니, 한국 역대 정부의 통일방안이야말로 가장 좋은 통일방안임을 세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증명해 준 것이다.
이 때부터 이들은 그 때까지와는 정반대로 통일 논의를 접는 데 사력을 다했다. 나아가 흡수통일 반대를 가장 큰 이슈로 내걸었다. 독일통일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 중에서 이들이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게 바로 통일비용이다. 준비 안 된 통일로 통일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들어서 독일 전체가 깊은 불황에 시달리게 되어 구서독 지역은 구서독 지역대로 구동독 지역은 구동독 지역대로 불만이 팽배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서로 베시(Wessi 서독인) 오시(Ossi 동독인)라고 경멸하면서 갈등이 심화되는 와중에 동독지역의 주민들의 고통이 훨씬 심하다는 것도 이들은 잊지 않고 강조했다. 정작 게르만족 8000만은 통일 자체를 후회하는 사람은 1%도 없다는 사실은 쏙 뺐다. 이들의 동지인 DJ도 입만 열면 흡수통일 반대를 천명했다. 그렇게 해야만 북한을 통일동반자로 인정하여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독일의 통일비용 과다는 통화정책의 실패 때문]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독일은 통일비용으로 연간 약 2000억 마르크씩 총 1조9200억 마르크(약 1243조 원)를 쏟아 부었다. 예상보다 2배 이상을 지출했다. 그 기간 동안의 한국의 총예산보다 많이 들었다. 조사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한국은 통일비용으로 500억 달러 내지 6700억 달러를 지출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한국인들은 통일하고 싶은 생각이 달아나는 사람이 많다. 대성공!
독일의 통일 주역 콜 수상은 너무 흥분했다. 당시 정부 관료들이 대부분 그랬다. 2020년 이후로 생각했었는데, 30년 앞당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일이 찾아왔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흥분은 치명적인 실수를 가져온다. 그것이 바로 통화정책이었다. 인도적 차원에서 동독 주민을 서독 주민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민족주의 입장에서 콜 수상은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를 1:1로 교환한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높게 쳐주어도 동독의 화폐 가치는 서독의 2분의 1이 안 되었다. 그런데 이를 동등하게 취급한 것이다. 동독의 물가가 순식간에 100% 올라갔다. 당연히 임금도 두 배 이상으로 급등했다. 동독의 기업들은 모조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실업자가 넘쳐 났다. 예상치도 못한 지출이 폭증했다.
[통일 후 북한 화폐와 한국 화폐는 최소한 10년 따로 관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남북이 통일되면, 절대 북한의 원화와 한국의 원화를 바로 1:1로 교환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장원리에 맡기고 화폐만이 아니라 경제 전반을 따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로 휴전선 이남으로 북한 주민이 내려오는 혼란도 피할 수 있다.
2002년 7월 1월 경제개선조치로 북한은 유명무실해진 배급체제를 포기하면서 물가를 대폭 현실화했다. 한꺼번에 10배 이상 올린 것이다. 이 때 달러 대비 환율도 약 2:1에서 150:1로 올렸다. 시장에선 이미 그 당시에 200:1이었다. 지금은 시장에서 2500:1로 올라갔다. 그래서 북한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1달러밖에 안 된다. 전세계에서 가장 낮다.
소련이나 동구의 예를 보면, 통일되는 순간 최소한 달러 대비 북한 원화는 10000:1로 치솟을 게 틀림없다. 계획경제가 시장경제로 돌아선다고 갑자기 공급이 늘어날 수 없기 때문에, 초기에는 물가가 천장부지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달러 대비 한국 원화의 환율이 현재 약 1000:1이니까, 올해 당장 통일된다고 해도 한국과 북한의 화폐는 그 가치가 10:1로 벌어진다는 말이다. 북한의 공식환율을 들먹이고 민족화해를 앞세우며 오히려 북한 화폐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며 크게 선심을 써서 1:1로 교환해 주는 순간, 북한 주민은 통일되기 전보다 더 가난해질 수 있다.
현재 10달러면 북한에선 한 가족이 한 달을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다. 이런 물가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면 통일비용을 예상보다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월급도 50달러 정도만 주면, 설령 물가가 대폭 인상된다고 해도 북한 노동자를 현재 수준에서 적어도 10배 이상 잘 살게 만든다. 그러면 한국의 기업들이 앞다퉈 북한에 진출하게 되고, 정부 예산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다시 봇물처럼 쏟아지는 통일 구호]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은 2000년 6월 15일 이후로 영원히 날아가 버렸다.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다. 이 날 이후로 다시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와 민족주의자들은 통일 논의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연 신이 났다. '자주평화'통일을 소리 높여 외치게 된 것이다. 말은 남북이 대등한 입장에서 통일한다고 하지만, 결국 고려연방제로 통일한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해서 적화통일하자는 것이다. 그 분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까지 들어섰으니 이제 거칠 것이 없다. 제도권 밖에서 20년 문화권력을 누리던 이들이 제도권으로 급속히 들어섰다. 제일 먼저 방송을 장악했다. 이어서 신문도 완전 장악하기 위해 조중동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다. 드디어 백낙청은 2005년에 광복 60주년 경축 ‘자주·평화·통일 민족대축전’ 공동준비위 상임대표를 맡아 통일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대국민 일성으로 '태극기를 흔들면 분열 축구가 된다.'고 했다.
(2005. 8. 16.)
첫댓글글은 그 글을 읽고서 '지식정보'라고 파악할 독자들을 위해서 써야 된다. 물론, 이글은 '정보란'에 정보 차원으로 읽으란 곳에서 펀 것이다.(어딘지는 알 분 많을 듯) 대졸 미만이 일반이어서 '대충'하여 허위사실을 적으면, 결코 좌파 편을 들지 않는 입장에서도 울화가 뻗침이 정당할 듯. (안 느끼면 능력 미달)
첫댓글 글은 그 글을 읽고서 '지식정보'라고 파악할 독자들을 위해서 써야 된다. 물론, 이글은 '정보란'에 정보 차원으로 읽으란 곳에서 펀 것이다.(어딘지는 알 분 많을 듯) 대졸 미만이 일반이어서 '대충'하여 허위사실을 적으면, 결코 좌파 편을 들지 않는 입장에서도 울화가 뻗침이 정당할 듯. (안 느끼면 능력 미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