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동상
김세중 교수에게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 할 동상을 세위라!
이 한마디로 세종로에 세종이 아닌 장군의 동상이 들어섰다.
동상 형태는 노산 이은상(李殷相), 월탄 박종화(朴鍾和), 팔봉 김기진(金基鎭) 등 국가 원로들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갑옷은 복식전문가 석주선(石宙善)의 고증을 받았다.
장군은 왼손잡이지만, 왼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손으로 뽑아야 사리에 맞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이다.
그래서 동상은 이긴 자의 당당한 모습이다.
김세중 교수 아내 김남조 시인의 찬(讚)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청동 녹위에 꽃잎을 피워
더운 가슴으로
사랑 안에서 영원히 쉬고 있다.
조각이 국가 대표 브랜드가 된 것
미국의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한국의 이순신 장군 동상도 넣어야 할 것 같다.
선생은 릴케의 ‘로댕 어록’에 감명을 받아 조각가가 되었다고 한다.
선생이 선종한 이듬해, 서울대 미술대 조소과 동문회와 서울조각회 등 후학들이 세운 추모비를 세웠다.
한 방울 한 방울 바위에 파고드는 물처럼, 느리고 조용한 힘을 가져야 진정한 예술가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의 찬
선생의 일화
한 여학생이 투정을 부린 듯이, 고개를 숙이고 무언의 반항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야단치기는 커녕, 빵을 주시면서 “이거 먹고 힘내시게”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카리스마는 시선이 바라보는 곳에 있었다.
학생들 작품에 미진한 것이 있으면 그곳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으시며 어깨를 어루만져주셨다.
작품을 직접 수정해주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이 지나가고 나면, 과제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선생님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주셨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아버지 같은 인자함에 감격했다.
선생의 발자취
서울대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1회로 졸업한 후 평생을 후진을 양성했다.
서울대 미술대학 학장과 한국미술협회이사장, 서울조각회장, 가톨릭미술가협회장,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맡아 미술계 발전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문화예술상과 대한민국문화훈장(추서)을 받았다.
선생님은 금전에 초연하여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래서 40년간 한 번도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
선생님은 정부를 설득해서 국립현대미술관을 지었다. 그리고 과천 공사 현장을 수시로 찾아가, 인부들에게 사비로 식사를 제공했다.
provenance
신현중 교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국 뉴욕 프렛 대학원)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샤프란님
감사히 담아 갑니다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행복한 4월 보내세요.^^
좋은글 주셔서 감사 합니다
4월에는 모든일 잘 되시길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