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도 어진 형님,(한문을 쓸수가 없어 한글로 인형이라 써 놓고보니 영...)
내가 어째서 앨범에도 없는 동기생들 이를을 줄줄이 꿰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 학급문집 "구송"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들의 이를만 있는것이 아니라 출석부처럼 번호대로 성명도 있고
본적 현주소 심지어 장래희망이 무엇인지(예를 들자면 정치가 실업가 과학자 군인등등)
그리고 우리들이 쓴 문예작품들(예를 들자면 서정돈 이사장의 "나는 고백한다"
라든가 김대환 변호사의 "경주수학여행기" 등등)이 있지요
헌데 지금보니 오류도 있더군요 내 출석번호는 28번 이었고 27번은 서정남 이었는데
내 번호가 27번으로 되어 있었으니...내 앞의 3명은 여경우 김대환 서정남 그리고 나
내 뒤의 3명은 조병준 김대광 정기수... 이었지요
탄아형이 반창회를 해 볼까하고 윤병우 교수에게 운을 떼었다기에 구송을 복사해서
보내주었던 동암 여경우형도 생각이 나고, 동암의 얘기를 빌자면 그 얌전했던
윤병우가 술은 이태백이 같이 마시더라나 뭐라나~~~
어제 그 구송의 맨 마지막 장을 보았더니 김진복의 글이 있는걸 보았지요
졸업때도 물론 읽어 본적도 없었고 지금 까지도... 어제 처음 읽어 보았습니다
정윤진 선생님을 회상하는 글을 쓸때 홈룸 시간에 김진복이 발의를 하고
편집위원을 정하고.... 내 기억이 틀림 없었다는것을 확인 했답니다
또 김진복의 글에 구석에서 어쩌고 저쩌고 선생님께 꾸중들었다는 얘기는
그날도 내가 기억을 하는데 졸업날자는 임박하고 빨리 문집은 등사를 해야 하는데
원고정리하랴 문서편집하랴 시간이 없어서 구석에 자리를 바꾸어 앉아 "Lay Out"/을
하다가 선생님이 수업하러 들어 오신줄도 모르고 학생들을 "차렷 경례' 도 하지않고
..... 수업하러 들어오신 선생님이 뻘줌하게 서 계시다가 "실장 뭐 하는짓이야" 하고
화를 내시고 진복이가 꾸지람을 들은것이 었지요
참 보고싶은 친구였답니다 그래서 그의 짧은 글이지만 여기에 올려 봅니다
"벗들이여 자네들은 가슴에 담고 갔을테지? 나도 가슴에 담아 두련다"
편집완료에 제하여
김진복
"어려웠다" 이것이 이번 "구송" 발간에 최후로 남기고 싶은 말이다
실상 한개의 잡지를 만들어 낸다는것이 어렵다는 것은 예측 하였던 비나
이처럼 번거로워야 한다는것은 예측 못했다 2월3일 첫시간 "홈룹"에서 내가
이 안을 제안한 이래 즉석에서 편집위원을 정하고 요행이도(?)
내가 편집위원장으로 뽑혀 일해온것이 이미 십여일이었다
처음에 생각하기에는 학생들의 원고만 잘 들어오면야 무엇이 되지 않으랴 싶어
학생들 원고 모으기에만 노력 했으나 일은 묘하게 돌아가 (예측 아니한바 아니지만)
금전이란 이를테면 자금부족에 봉착하였다 반면 원고는 형용사로 쓰면 산더미 같이 쌓였다
나날이 수고해준 편집위원에게 감사를 올리지만 이책이 과거 꿈많던 중학시절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우리의 포부를 이루려는 실사회에 나아가는 이때에 즈음하여
지금의 이 그리운 벗들의 이름석자를 잊어서야 될말이냐? 자꾸만 다시 생각이 간다
한권의 책을 만든다는 무거운 중책을지고 매일의 편집에 여념이 없던 나였다
나는 학급을 사랑하고 싶었다 누구나가 가지는 공통적인 의견이지마는 한결더 그립다
하루는 조회를 빼먹고 그 구석에 있었던 까닭에 선생님에게 호통을 당했던 그때
이런것들이 우리편집의 최후룰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추억으로
남게되었다 3년 5년 아니 100년 때는 서슴치 않고 흘러간다
그때는 우리들이 퍽이나 변모할것이다 비로 작은 책자이지만 또 서투른 표현의 글이지만
우리들이 영원의 세계로 사라지기 직전까지 아니 그 후라도 깊이가슴속에
품어 주어야 할것이다 그립던 벗들 이제 우리는 각기 다른 인생 행로를 따나게된다
나중에 친구들을 만나볼 그때를 환상하고 지금 책을받는 이 마당에서 책장을 넘기며
친구의 모습을 하나 하나 기억해 두자.
첫댓글 수업하러 들어오신 선생님이 뻘줌하게 서 계시다가ㅡ "실장 뭐 하는짓이야" 하고 화를 내시고ㅡ 진복이가 꾸지람을 들은것------깜짝 놀란 우리 學級員 들은, 이때, 함께 꾸중들은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도 그랬구나~~~. 대학 학보사에서는 30년 후의 후배들에게, 아니 100년후의 후배들에게 라는 말하자면 타임 캡슐 운동을 벌였는데
결국 수집함에는 쓰레기 만 쌓여서 당대의 현주소를 알았다고 실망하던 모습이 떠오르네~~~.
영원한 기록자들이여~~~.
와운의 자태가 대화창에 보여서 대화를 시도하여보았는데 산너머 바다건너 너무 멀어서 그런지 소통이 되지 않는군.
요즘은 카페보다 카톡망이 구축되어서 거기서들 많이 "노는데" 와운의 체질에는 맞지 않을것이야~~~.
이곳에서 길고 깊은 이야기를 듣보는 맛과 어찌 비교하리오.
톡방에는 또 주구장창 편식의 주장을 애국의 이름으로 퍼다놓는 바람에 식상하고 체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기고~~~.
원평재 형이 경대학보사 기자출신 이란건 십여년전에 카페에서 알았지만 진복형은
어느 대학을 갔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고 후일 동아일보에서 근무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은것 같기도 했었다오 진복이는 수창국교 출신 어었는데 중 1 때
나랑 다툰적도 있었지요 에이~ 오랫동안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더니만 한글을
쓰자니 오타가 많이나서... ㅉㅉㅉ 한글 자판이 아니어서 어디에 ㅋ이 있는지
겹모음 ㅛ는.... 열손가락으로 장님 점자책 읽드시 기억과 습관에만 의존해서
글을 쓰는데... 참 어제(16일) 지헌형이 소식을 전해 왔다오 잘 지낸답디다
臥雲學友가 올리는 글이 ㅡ그냥 쉽게 탁탁쳐서 올리는게 아니라니-----------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