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 아버지는 한때 필경사였다. 글이 아니라 글씨를 쓰던 분. 다음날 아침 결재를 받아야 할 서식들을 건네받아 밤새도록 가리방(철필)을 긁었다. 그는 원래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나평 강씨. 올해 예순여섯. 현실적인 능력이 부족했던 이상주의자. 50년대 말엽, 이 땅에 신앙 공동체의 씨앗을 처음 뿌린 사람. 씨 뿌리는 사람과 열매를 거두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한 말이었다. 청년 시절, 교회 종지기였던 종교 이상주의자는 경상북도의 외진 산골로 들어가 그곳에서 무교회주의와 부흥 운동에 바탕한 순수 신앙 공동체를 꿈꾸었다. 함석헌의 글들이 당시 그의 스승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도 용강. 어린 시절, 고향에서 축구화를 신고 축구를 할 만큼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용강에서 진남포로 유학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낙원의 소년이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지주의 아들. 하지만 갑자기 터진 한국전쟁은 그의 생애를 뿌리째 뒤흔들어버렸다. 조만식과 함께 활동했던 그의 조부가 총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순간, 그의 생애는 빗나가기 시작했다. 현실과 맞설 능력이 없던 ‘백면서생’. 그렇다고 타협하는 기술도 없었다. 누이와 단둘이서 월남한 그는 그 고독과 궁핍, 방황이 뒤범벅되어 있던 그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을 만났다. 종교 안에서 생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산골에서 공동체를 일구던 이상주의자는, 그 공동체가 정착되고 내부에서 권력이 생겨나면서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다.
“포탄이 남기고 간 기억 속에 평생 잠기어 사신 아버지,/총살당한 할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오던 날/멀찌감치 미루나무에 기대어 울기만 하셨다지요./낯선 땅에 내려와서도 몇 번의 실패를 겪고/자식만을 결코, 마지막 밧줄처럼 잡고 계셨지만/새가 날아가듯 그 기대와 욕심도 기울어갔지요.”(1;「소원」. 이하 인용된 시 앞에 붙이는 숫자는 시집을 나타냄. 1은 첫 시집 『뿌리에게』, 2는 제2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3은 최근에 나온 제3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임.)
어린 딸은 아버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커다란 간극에서 고통을 겪어온 아버지는 명민한 큰딸을 ‘맏아들’처럼 키웠다. 딸아이가 법대에 들어가 세속적 의미에서 출세하기를 희망했다. 아버지는 똑똑한 큰딸의 성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패한 자신의 삶을 보상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 앞에서 ‘새처럼 날아갔다’. 딸은 국문과에 들어간 것이다.
“욕심이 날아간 후에는/그 자리에 소원이 둥지를 트는가 봅니다./이제 교사가 되고 시인이 된 저에게/희끗한 머리카락 위로 손을 흔드시며 하시는 말씀/내 소원이 무엇인지 아느냐,/네가 진실한 입 하나 가지고 사는 거다.”(1; 「소원」)
늘 청년처럼 맑았고 단정했던 아버지. 조숙한 맏딸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반항심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의 사춘기는 노출시킬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사춘기의 딸은 가출하고 싶어했지만 언제나 마음뿐이었다. 딸은 일찍부터 ‘남의 입장’을 헤아려야 했다. 너무 일찍 몸에 배어버린 자의식. 나이들어 알게 된 것이지만 현실과 연결된 아무런 끈도 없던 아버지에게 큰딸은 유일한 말 상대였다. 아침에 출근할 때, 아버지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딸의 가방을 들어주며 함께 걷고 싶어했다. 아버지의 출근길은 딸의 등교길과 반대 방향이었지만 ‘고운 아버지’는 그 짧은 시간이나마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하지만 딸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설령 듣는다고 해도 아버지와는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고,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을 나꿔채 학교로 달려가곤 했다.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그 못이 아니었다면/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2; 「못 위의 잠」)
못 위에서 잠을 자는 아비 제비가 곧 딸의 아버지였다. 80년대의 한복판을 대학생으로 통과할 때, 딸은 아버지와 아직 화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사가 되고자 했을 때, 그는 어떤 학교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 학교인가를 먼저 따졌다. 서울을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수원에서 숙식이 가능한 자’라는 교사 모집 공고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서울은 곧 가족이었다. 서울을 떠나야 가족으로부터 멀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삼 년간 국어교사를 하며 수원에서 살았다. 그가 이십대 초반에 서둘러 결혼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런데 결혼식 직전, 떠나려는 순간에, 그는 아버지를 받아들였다. 그때의 아버지가 바로 ‘못 위에서 잠자는 제비’였다. 혼수를 트럭에 싣고 집을 떠나올 때, 트럭 차창으로 뒤돌아보니, 아, 아버지는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이 일찍 시집 가는 딸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눈물 속에서 되돌아본 아버지는 세상을 정직하게, 그러나 너무 외롭게 살아온 한 인간이었다.
한때, 아버지는 필경사였다. “십오 촉 백열등보다도 그의 눈은 더 침침해졌다/그 어두운 눈으로 얼핏 보아도/수입과 지출이 맞지 않는다, 결산심의서/원고 속에 파묻혀 그는 무엇이든 다 쓴다/되는 대로 흘려 쓴 업무보고서/젊은 사람들의 빳빳한 이력서, 편지까지도”(1; 「필경사」)
“형광등이 꺼지고/백열등 하나가 앉은뱅이책상 위에 켜지면/아버지는 비로소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었다//잠 못 이루고 뒤척이곤 했던 것이/여름밤 식구들의 좁은 잠자리 때문이었는지/십오 촉 백열등 빛이 너무 밝아서였는지/천장을 가득 채우던 아버지의 그림자 때문이었는지/그 모든 것 때문이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가리방 긁는 소리가 밤새 들리던 밤/목에 둘렀던 수건을 감아 뜨거운 전구알을 갈던 모습이며/쥐가 난 다리를 뻗어서 두드리던 모습이며/전구 위에 씌웠던 종이갓이 검게 타 들어가던 모습이며/자줏빛으로 죽어가던 손마디와 팔꿈치를 문지르던 모습이며/내가 반쯤 뜬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아버지는 알고 계셨을까 그 방을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것을”(3 ; 「누에의 방」)
“어느 날인가 그의 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활자가 휘청거리고,/십오 촉 백열등처럼 조금씩 흔들리면서/더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을 때까지/그는 무엇이든 다 쓴다/그는 언제까지나 쓴다/더는 두 팔꿈치가 굽혀지지 않을 때까지”(1 ; 「필경사」)
“글을 쓰고 싶어하셨지만/글자만을 한 자 한 자 철필로 새겨넣던 아버지,/그러나 고치 속에서 뽑아낸 실로/세상을 향해 긴 글을 쓰고 계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그 후로도 오랜 뒤였다//오늘 밤,/내 마음의 형광등 모두 꺼지고 식구들도 잠들고/백열등 하나 오롯하게 빛나는 밤/아버지가 뽑아내던 실끝이 어느새 내 입에 물려 있어/내 속의 아버지가 나 대신 글을 쓰는 밤/나는 아버지라는 생을 옮겨 쓰는 필경사가 되어/뜨거운 고치 속에 돌아와 앉는 다/(……)/아무에게도 건네지 못할 긴 편지를 나 역시도 쓰게 되는 것이다”(3 ; 「누에의 방」)
교사가 되고, 시인이 되었으며, 아내와 어머니가 된 딸은 아버지의 글씨가 아니라 아버지의 ‘글’을 책으로 묶어낼 생각이다. 아버지는 이미 60년대에, 신앙 공동체 회보에 실었던 칼럼들을 ‘돌베개의 노래’란 제목의 책으로 펴낸 적이 있다. 요즘 혼자 쓰고 있는 아버지의 글을 보태면 아버지에게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너무 일찍 철이 든 고아원 아이; 그의 성장은 고아원 울타리 안에서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신앙 공동체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한 다음 산에서 내려왔는데, 젊은 부부가 처음 정착한 곳이 충남 연무대였다. 먼 친척이 운영하던 보육원에서 어머니가 총무를 맡았다. 66년, 그는 이 보육원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있는 어린아이는, 부모가 없는 어린아이들과 한데 섞여 자라났다. 아버지는 닭을 치며 채소를 가꾸는 게 고작이었다.(2 ; 「양계장집 딸」) 연무대 보육원에서 열 살 때까지 살았다. 보육원 생활은 그로 하여금 일찍 철들게 했다.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었지만, 그는 친구들에 비해 피부가 하앴고 예쁘장해서 곧잘 눈에 띄었다. 양자, 양녀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번번이 그를 지목해, 나중에는 어른들이 그를 숨기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마다 그는 불편하고 불안했다. 고아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같이 생활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친구들. 그는 일찍부터 타자를 생각하고 배려해야 했다.
그의 기억의 끝은 다섯 살 때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두 개의 원체험. 하나는, 길의 끝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노을의 끝이었다. 보육원에서는 호남고속도로가 빤히 보였다. 다섯 살 난 어린 여자아이는 ‘저 길을 따라가면 무엇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풀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느 날, 코스모스가 핀 길을 따라 혼자 걸어나갔다. 그 길의 끝에는 둥그런 광장이 있었고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었다(나중에 보니 그게 인터체인지였다). 그곳이 그가 처음으로 체험한 세상의 끝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어두웠다. 캄캄했다. 울면서 보육원을 찾아간 어린아이는 한바탕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 보육원 마당에는 그네가 하나 매어져 있었다. 한번은 노을이 진한 저녁답에 혼자 그네를 탔다. 노을이 너무 강렬해 그네를 계속 지쳤다. 노을이 없어질 때까지, 노을의 끝이 보일 때까지 그네를 탔다.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2 ; 「땅끝」)
열 살 때 상경했지만 그의 고아원 생활은 대학 때까지 계속되었다. 서울 면목동에 있던 보육원 ‘애향원’. 그는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이 많지만, 그 친구들의 개인사도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그 고단한 삶들은 아직 그의 문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 삶들 역시 분명한 그의 삶의 토대이지만 아직 문학 안으로 초대할 수가 없다. 그 친구들에게 누를 끼칠 것 같기 때문이다.
부채의식에 시달리던 대학 생활; 대학 시절(연세대 국문과), 그는 이중 삼중의 부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 그 자신도 어려운 학창 시절이었다. 고학으로 학비를 장만하고 가족들까지 부양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다섯 개까지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보육원에서 함께 자라났던 친구들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은 행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면목동 보육원에서 신촌까지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시절, 19번 버스 차장 가운데 그의 옛 친구가 있었다. 그 버스를 탈 때마다 그 친구가 없는 버스였으면, 하고 마음을 졸이곤 했다. 이같은 부채의식이 그로 하여금 사회과학에 경도되도록 했다.
당초에 국문과를 택했을 때 글을 쓰기 위한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철회하기는 했지만 그는 늘, 글을 쓰기에는 자신이 너무 평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백일장에 나가 입상하던 글은 진정한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학자가 되고 싶어했다(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근 그는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회과학 서클이었다. 한 선배의 권유로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뒤에 알고보니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조직’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 사태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명분과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는 이용당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어쩌지 못했다. 결국 2학년 때 문학회로 옮겼다.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가만히 내려놓고 펴보는 날이 있네/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그런 날이 있네/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누구에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한 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火傷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던지지 못한 그 돌/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3 ; 「뜨거운 돌」)
운동권 체험 또한 부채 의식으로 남았다. 여기에 종교적 분위기가 겹쳐졌다. 그때까지 그의 가족은 매일 가족 예배를 보았다. 사회과학과 종교가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커다란 혼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를 끄적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그의 문학은 사회과학, 즉 80년대적 현실과 종교 사이로 난, 비좁은 탈출구였다.
성장 과정에서 침윤된 공동체와 종교적 생활은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부모의 종교적 성향은 그대로 그에게 이어졌다. 지나친 종교적 지향은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갈등이 쌓여갔고, 조금씩 삶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남달랐던 성장기는 결혼 이후 단촐한 식탁 앞에서 그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남편과 아이, 그리고 그. 이렇게 셋이 앉는 식탁은 그의 기억에 없는 풍경이었다. 매우 낯설었다.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산 속의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예배를 보고, 같이 밥을 먹을 때, 그는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며칠 동안의 기도원 생활을 마치고 귀가할 때, 그는 오히려 불안해했다. 그가 가정에 뿌리를 내린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그리고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가도, 거기에서 특별한 그 무엇을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자, 곧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문학’은 중3 때. 글쓰기를 싫어하던 중학생이었다. 빈틈이 없었던 그의 어머니(역시 독실한 신앙인이다)는 딸이 교과서 이외의 책을 읽는 것을 금했다. 중3 때 국어교사의 권유에 의해 백일장에 나갔다가 입상을 했던 것이 문학과 인연을 맺게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문예반 활동을 했다. 이때 한 고등학교 문예반 남학생을 알게 되었는데, 그 치기어린 문학소년은 문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그 남학생의 입에서는 그가 모르고 있는 작가와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가 쉴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집에 돌아와 그 남학생이 언급한 작가와 작품을 구해 읽었다. 방학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종로서적으로 ‘등교’했다. 종로서적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집을 읽었다. 김춘수에서 강은교, 박재삼, 김수영, 그리고 세계시인선들을 독파했다.
말을 배우기 이전부터 시작된 공동체 생활과 몸에 밴 종교적 분위기. 그리고 너무 빨랐던 결혼 생활. 그는 자신의 성장기를 돌이킬 때마다 문학적 치기와 감상을 그때그때 발산해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그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문학을 옥죄는 것은 아닌가, 라고 혼자 곱씹어볼 때도 있다.
시인과 두 차례의 하관식; 내가 나희덕 시인과 약속을 하고 단둘이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 1월 하순, 교보문고에서 그를 만났다. 새삼스러웠다. 내 기억에, 나희덕 시인은 두 개의 하관식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과 하관식? 그렇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고 기형도 시인의 장지에서, 그리고 소설가 고 김소진의 장지에서 나희덕 시인을 먼 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문단의 모임에서 몇 차례 스쳤을 뿐이다. 문학에 관해서건,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건 한 번도 오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나에게 그는 큰누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속내가 내비쳐지지 않는 낯빛이지만 그렇다고 얼굴에 그늘이 끼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늘 잘 웃었고, 모임에서도 언제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에게서는 흔히 글쟁이들이 갖고 있는 감정의 과부하, 이른바 포즈가 없었다. ‘시인을 찾아서’를 핑계 삼아, 그의 이야기를 오래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때에는 내 쪽에서 심문하듯이 캐묻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시인을 찾아 가는 초입’에서 멈추었다. 나는 졌다. 그는 큰누이였을 뿐만 아니라 큰어머니였고, 큰사람이었다. 그는 나보다 5∼6년은 덜 살았고, 또 그만큼 뒤늦게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의 삶은 나보다 훨씬 큰 것이었고, 그의 글은 그 삶을 끌어안은 깊은 것이었다. 시와 시인의 삶이 같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지만, 나희덕 시인의 시와 삶 앞에서 나의 시와 삶은 하찮은 것이었다.
시인의 삶을 알고 난 뒤에 그 시인의 시를 읽는 일만큼 맥이 빠지는 일도 없다. 이때 독자가 설 자리는 위축되고 만다. 앞에서도 확인했지만 삶의 이력을 알고 난 뒤에 읽게 되는 시는 행간이 좁아진다. 시인의 구체적인 삶과 생각은, 시 읽기를 억압한다. 그러나 어쩌랴, 나희덕의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도 적지 않은 여백과 공명이 있으니.
나는 그가 지금까지 발표한 세 권의 시집에서 각 시집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시 세 편을 읽으면서, 반환점조차 다다르지 못한 이 ‘시인을 찾아서’를 매듭지으려고 한다.
나무를 중심으로 한 순환의 구조; 나희덕 시인의 데뷔작 「뿌리에게」는 순환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인 화자가 그 흙에 “숨결 처음 대이”는 뿌리를 대하는 입장은 애인 혹은 어머니의 그것이다. 연한 흙인 ‘나’는 제 몸에서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떤”다.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이다. 2연은 뿌리의 성장이다. 뿌리의 성장은 곧 흙에게는 희생이거니와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나를 뚫고 오르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연에서 ‘나’는 뿌리의 ‘착한 그릇’이고, 뿌리가 뻗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하냥 축복하는 나는/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누린다. 시간이 흐른다. 뿌리, 즉 나무의 성숙은 흙에게는 늙음이다.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마지막 잔을 마셔다오”라고 이르면서 흙은 퇴장을 예비한다. ‘착한 그릇’은 ‘껍데기’로, 이윽고 ‘빈 그릇’으로 변모한다. 어머니는 죽어간다. 그러나 그 죽음은 또다른 탄생의 바탕.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라는 마지막 문장. 이때 ‘너’와 ‘나’ 사이에는 오랜 시간과 거리가 존재하고 있다. ‘연한 흙’은 다시 첫 연 제2행의 ‘막 갈구어진 연한 흙’으로 귀향하는 것인데, 물론 이때의 두 흙은 같으면서 또 서로 다른 흙이다. 모든 아들딸들이 보기에 어머니는 다르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 모든 생명은 같다. 대지적 모성. 그의 삶에서 길어올려졌을 이 넉넉한 대지적 모성이 나희덕 시의 출발점이자 한 핵심이다. 이 대지적 모성은 수많은 동심원을 그려나가면서 현실 세계와 뭇생명,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끌어안는다.
첫 시집은 「뿌리에게」를 필두로, 나무 이미지들이 하나의 숲을 이루고 있다. 그 나무는 “바람에 눈이 찔린 나무”(「연가」) 또는 “벌목의 슬픔으로 서 있는 이 땅”(「음지의 꽃」)에서처럼 80년대 사회과학적 상상력이 발휘된 나무이거나, 매미로 은유되는 시인의 한 생애(「매미」)인가 하면, 고난 속에서도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는 어머니의 생애가 밑둥 잘린 ‘나이테’의 응시(「겨울산에 가면」)로 비유되기도 하고, ‘덩굴’이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나무도 있다.(「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첫 시집은, 이후 2, 3시집을 예고하고 있다. 「필경사」가 「누에의 방」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거니와, 가족사를 주제로 한 시편들은 이후의 시집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로서 체험한 80년대 교육 현장, 가족사에 녹아들어 있는 분단 현실,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딸과 아내에서 어머니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체득한 모성이 2시집으로 이월되고 있다.
두번째 시집의 「풀포기의 노래」에서 나타나는 도저한 피학증은 가학증을 끌어안으면서 삶과 세계에 대한 당당함으로 솟아오른다. 쉬지 않고 폭포의 ‘매’를 맞고 있는 바위 틈의 풀 한 포기. “일어설 여유도 없이/아프다 말할 겨를도 없이/내려꽂혀라, 거기에 짓눌리는/울음으로 울음으로만 대답하겠다”고 말하는 풀 한 포기는 “너를 본 것이/나를 영영 눈뜰 수 없게 하여도,/그대로 푸른 멍이 되어도 좋다”고 선언한다. 이때 ‘너’ 즉 폭포가 지시하는 대상은 다양하다. 폭포는 멀리 신에서부터, 개인을 짓누르는 전체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으며, 내 안의 또다른 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도저한 각오는 “네 몸은 얼마나 또 아플 것이냐”는 마지막 한 구절에서 「뿌리에게」의 대지적 모성을 이어받고 있다. 흙에서 물로의 대전환이다. 「뿌리에게」에서의 일방적인 보살핌과 희생은 「풀포기의 노래」에 와서 현실감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풀포기의 노래」는 나희덕 시의 ‘입사의식’과 같은 것이다.
‘어미 되기’의 낯설음과 고통, 그리고 느꺼움이 자연스럽게 2시집으로 넘어오고, 1시집의 「필경사」는 2시집의 「밤, 바람 속으로」를 거쳐 3시집에서 「누에의 방」과 만난다. 2시집에서도 나무는 무성하다. 「겨울 산에 가면」에 등장했던 어머니의 나이테는 2시집의 「그런 저녁이 있다」에서 ‘나’에게 육화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나무의 나이테를/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옹이로 박힐 때까지” 나이테의 육화는, ‘나’의 어머니 되기와 관련되어 있다. 다람쥐가 자라는 깊은 산길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나를 어미라 부른다/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어미인 ‘나’는 모든 것들의 어머니로 거대해지는 것이다.
소리의 등장, 몸의 시대로 가는 중요한 징후; 2시집에서부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때의 소리는 공감각적이다. “별 몇 개가 떨어졌는지/잡풀 뒤에서 누가 울고 있다”(「소리에 기대어」)든가 “숨을수록 햇빛은 더 크게 소리쳤다”(「양계장집 딸」)에서처럼 시각이 청각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최근 시에서 ‘소리의 등장’을 주목한다. 소리의 발견은 소위 ‘몸의 시학’과 불가분의 연관이 있다. 몸을 무시하고 있는 이 문명은 다름아닌 시각이 지배하는 시각의 문명이다. 시각은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식민지화한다. 보라. 청각은 시각의 종속물이다. 후각은 질병에 대한 정치학과 위생학에 의해 갈수록 퇴화하고 있다. 미각은 어떠한가. 식품은 상품의 논리에 편입된 지 이미 오래이다. 부엌은 사라지고 있으며, 먹을 거리는 급속한 속도로 획일화하고 있다. 미각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의 소중함과 기다림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인스턴트 식품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촉각 또한 대상과의 직접성을 상실하고 있다. 시각 패권주의는 결국 몸의 직접성, 몸의 총체성을 시각의 권력 밑에 두고 나머지 감각을 획일적으로 패턴화한다. 몸은 시각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 소리에 대한 예민함은 감각의 회복을 통해 몸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징후이다. 몸의 시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이 온전하게 살아 있는 시대이다. 감각이 왜곡되고 퇴화하는 한, 인간은 몸으로 자연의 품에 안길 수 없다.
2시집의 소리들은 3시집에서도 자욱하다. 삶은 곧 소리내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두 복숭아뼈나 부딪히며/생각한다 모든 존재의 소리는/삐걱거림이라는 것을/뜨거움과 차가움/사이에서 수축과 팽창, 단절과 소통/사이에서 흐르는 물조차/삐걱거린다는 것을/삐걱거리는 몸만이/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나희덕 시인은 매우 중요한 소리를 발견해내고 있는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시세계는 큰 이야기에서 작은 이야기로 심화하는 도정에 있다. 시대와 역사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깊어지고 있는 것인데 이같은 변화의 맥락은 하나의 대상이 어떻게 새롭게 씌어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무를 중심으로 한 그의 대지적 모성의 상상력은 2시집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와 3시집의 「품」을 나란히 읽을 때 그 간극과 낙차가 측정된다.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에서 새와 나뭇가지의 관계는 「품」에서 까치와 오동나무 빈 가지로 변주되는데, 그 변주는 보다 큰 울림을 울리고 있다. 앞의 시에서 ‘나’는 “새가 차고 날아간 나뭇가지”여서 “오래 흔들린”다. ‘나’는 새가 떠난 나무의 처지에서 ‘당신’을 헤아린다. 이 시에서 나무인 ‘나’와, 새인 즉 ‘당신’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그러나 뒤의 시 「품」에 와서 시인은 객관적 거리를 확보한다.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게 되자 시의 시야는 훨씬 넓고 깊어진다. 시인은 오래되어 크지만 반쯤 썩어버린 오동나무에서 ‘빈 가지’를 본다. “빈 가지가 있어야지,/제 몸에 누구를 앉히는 일/저 아닌 무엇으로도 풍성해지는 일.” 아마 시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시가 말하려 하는 바는 평면적이었으리라.
시는 한 연 더 나아진다. “툭 툭 터지는 오동 열매에/까치들 놀라서 날아올랐다가/검은 등걸 위로/다시 하나 둘 내려앉고 있었다.” 오동나무의 빈 가지는 죽음이다. 한때 “제 잎으로만 무성하던 때”가 있었지만 오동나무는 자신의 생명의 일부를 죽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인 까치떼를 품는다. 까치떼라는 타자를 품었을 뿐만 아니라, 오동나무 스스로도 ‘툭 툭’ 오동 열매를 터뜨리며 삶을 지속한다. 까치와 오동나무의 죽은 가지, 그리고 오동나무 열매는, 오늘날의 인간과 그 문명이 외면하고 있는 생명의 만다라를 단순하고 경쾌한 구도로 제시하고 있다. 첫 시집의 시 「뿌리에게」가 다양한 나무 이미지를 거치면서 도착한 한 지점이 바로 이 「품」이다.
나희덕 시인의 세 시집은 나무 이외에도 물이나 흙, 돌, 빛 등의 이미지를 창(窓)으로 삼고, 그것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길을 열어왔는지를 들여다보아도 흥미로운 그래프가 작성될 것이다. 「어떤 항아리」나 「이끼」 「속리산에서」 「마지막 양식」 「거리」 「손의 마지막 기억」 「발원을 향해」 등을 함께 읽고 싶지만 좋은 시는 많고 지면은 적다.
나희덕 시인과 헤어지면서 “혹시 소설은 안 쓰냐”고 물어보았다. 그가 살아온 삶을 듣다보면 그는 시가 아니라 소설을 써야 할 사람이다. 그는 웃으면서 “단편 몇 편 써보았는데, 영 소설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리 감각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존재를 냉정하게 관찰하는 능력이 그에게는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관찰은커녕, 대상 속으로 빨려들어가 그 대상과 하나가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관찰자 시선을 갖게 된다면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는 말로도 들렸다. “내 시가 고백적인 것처럼, 앞으로 소설을 쓰게 된다면 소설도 그러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일산 가는 좌석버스를 기다리면서 그는 광주에서 황지우 시인을 처음 만났던 때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명옥헌과 그 일대를 둘러본 다음 헤어지는데 황지우 시인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하루 종일 박완서 선생하고 다닌 것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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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로 말하는 것이겠지요..
나희덕 님의 시..두편 함께 올립니다.
* 序時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흔들리는 것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