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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게 기도함은 부처님과 하나되는 길 1월 31일 관음재일 법문 중에서 우리가 기도를 하건 무엇을 하던지 간에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는 데는 업성(業性)과의 알력이 있습니다. 기존의 것과 새것과 알력이 있다는 겁니다. 새로운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하게 되는 것이죠. 입맛도 그렇고, 문화, 환경,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도 처음 보면 ‘뭐 저렇게 생겼나’하지만 몇 개월 보다 보면 ‘나름 괜찮게 생겼네’ 이렇게 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익숙해지게 되는 것, 그것을 업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습기(習氣), 습관이라고 하기도 하죠. 업성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습니다. 좋은 업성은 복업을 쌓이게 하고 나쁜 업성은 악업을 짓게 만듭니다. 기도하는 것은 무엇보다 좋은 업성이지만 그러나 처음 기도를 하면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삼배하는 것도 어색하고 백팔배만 해도 다리가 아프고 그러다가 나중에 익숙해지면 백팔배가 아니라 천배, 삼천배도 거뜬히 해냅니다. 기도하는 업성이 생기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는 기쁜 마음으로 재미있게 신명나게 해야 합니다. 신명나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에너지가 샘솟는다, 끓어오른다,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주 역동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그 에너지가 발산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가로막는 업성 때문입니다. 기도가 신명나게 되면 그 업성이 깨지게 되고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그 역동적인 에너지가 용솟음치게 되는 것이죠. 문리가 트였다, 체질이 되었다, 몸에 배어있다, 라고 하는 것은 전부 업성을 두고 하는 얘기인데 기도를 하되 억지로 하는 것은 아직 기도하는 체질이 되지 않은 거예요. 내 업성이 기도하는 것과 맞지 않는 거예요. 기도에 내 업성이 맞을 때 소위 복업을 쌓을 수 있는 기본적인 자세가 되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복력(福力)의 그릇이 되었다는 겁니다. 복력의 틀, 프래임워크를 짰다라고 하는 거예요. 기도가 신명나는 사람은 복을 잉태하고 생산할 수 있는 틀을 짠 겁니다. 그런데 기도가 신명나지 않는 사람, 억지로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중생의 업력(業力)과 마찰 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능한 기도를 신나고 재미있게 하려고 해야지 남들 하니까 억지로 따라서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물론 그렇게 노력을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인데 그런 마음에서 전환이 돼야 돼요. 노력하다 보면 어느 땐가 기도가 재미있을 때가 있어요. 체질이 될 때가 있어요.
그렇게 되는 단계가 있어요. 중생의 업성이 그대로 있는 단계가 일단계. 그 다음 단계는 중생의 습성이 이렇구나 하는 단계, 중생의 습성이 보이는 단계. 그 다음은 그 업성을 이겨내려는 단계. 이 단계는 기존에 길들여진 업성과 복업을 쌓으려는 의지가 서로 마찰하고 갈등하게 되는데 이 갈등의 단계를 거치고 이겨내면 이제 과거 중생의 업성에서 새롭게 소위 부처님 제자로서의 업성의 틀이 만들어지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 다음 단계는 뭐겠어요? 복을 만들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진 그 다음단계는 복이 복을 쌓고, 복이 복을 쌓고, 복이 저절로 쌓이는 단계, 그리고 마침내 복력이 구족하여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단계에 이르는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 본질로 회귀되는 것입니다. 그 본질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고 모양도 없고 맛도 없고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무한한 창조가 나오고 무한한 생명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습니까? 우주는 변화합니까? 변화하지 않습니까? 두 가지를 동시에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진리다, 라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어요.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유(有)와 무(無), 양변을 떠난 것이다, 텅 비어 있는 가운데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고 소멸되는 것, 그것이 공의 이치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영원하되 그 가운데 변화와 영원하지 않음이 있다, 그 영원하지 않음은 인연에 따라 존재했다가 다시 영원함에 회귀되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영원하지 않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본질로 회귀되는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그렇다는 것이죠.
그 영원한 것을 우리는 아마타부처님, 법신불, 여래, 진여, 공, 진리,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미타’는 영원한 수명, 영원한 생명, 영원한 광명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부처님은 생멸이 없는 존재, 영원한 존재라는 거야. 부처님, 법신, 본질, 우주의 에너지, 이 모두는 영원하다. 그리고 그것 안에서 잉태되는 모든 존재들은 인연따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 휴지를 봅시다. 휴지의 탄생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만들어질 때가 휴지의 탄생이 되겠지요. 그리고 화장실에서 쓰고 버릴 때 휴지의 소멸이 있어요. 그렇게 볼 때 탄생과 끝이 있어요. 그러나 중생이 보기에 휴지는 탄생과 끝이 있으되,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쓰레기이되 우주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에너지예요. 휴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쓰레기가 된 후에도 에너지는 그대로다, 라는 거죠. 그래서 순환은 영원하다는 거야. 우리가 윤회를 거듭하고 생멸을 거듭해도 우리안의 법성의 성품은 영원한 것이다, 그 본래의 마음은 죽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본래 마음으로 회귀했다는 것이다,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우리 절에 식구가 많아요. 이 절 지을 때 방을 많이 지으니까 신자들이 무슨 여관하려고 그러냐고 그랬는데 밑에 방이 다 차가지고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근데 그중에 한 젊은 놈이 있는데, 절에는 왔어요, 그러나 법회에 참석하거나 그러지 않았는데 어쩌다 한번 참석을 해봤어요. 법회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 데 그 놈이 하는 말이 ‘스님, 스님, 기도할 때 대단하시데요. 그 분이 오십니까? 기도할 때 그 분이 오세요?’…. (웃음) 그 분이 오셔야 돼. 그게 기도예요. 불이(不二),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내가 기도하면서 내 업력이 자리하고 있으면 그 분이 안 오셔. 내 업력이 새까맣게 잊어지고 삼매선정에 들었을 때 그분이 오시는 거야.
부처님이 십팔불공(十八不共), 중생과 다른 열여덟 가지의 특성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부처님은 모든 선정을 했다, 중생은 선정을 성취하지 못했다, 이거예요. 부처님은 삼매를 성취했고 중생은 삼매를 성취하지 못했다. 삼매가 뭐냐면 그 분이 오신거야. 쉽게 얘기해서 몰입상태에 들어가는 거야, 몰입상태. 그 몰입상태는 무한한 에너지를 만드는데,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도 이 놈이 천재냐 아니냐는 몰입상태에 따른 것이에요. 아이큐가 높냐, 낮냐, 이런 것은 의미가 없어요. 사업을 하는 데도 사업에 몰입이 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사업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삼매고 불이라 이야기하고, 경계(境界)와 내가 하나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 하는 거야. 하나가 되어 있으면 신통이 생기는 거예요. 달통하는 거야. 주식매니져, 펀드하는 사람들 보면 동물적 감각으로 한다고 그래. 동물적 감각이 뭐예요. 이성적인 논리가 아니고 그 분이 오신다는 거야. 삼매에 들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 주식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거야. 느낌이 온다, 필이 온다는 거야. 필이 막 온다 말이여. 이치가 다 똑같은 거예요. 기도를 하는데 신명나게 해야 되는 이유가 이런 거여. 그냥 오만 잡생각을 다 하면서 억지로 하면 소양없다. 신명나게 재미있게 다이내믹하게 해야 중생의 업성이 사라지고, 본 마음이 드러나고, 본 마음이 드러나야 부처와 하나가되고 진리와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거예요.
부처님의 명호 중에 여래(如來)가 있습니다. 아미타여래, 석가여래, 유리광여래. 이렇게 여래라고 붙이죠. 이 여래는 타타가타(tathagata)라는 범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타타가타는 ‘있는 그대로 오신 분’, 이런 뜻을 가지고 있어요. 있는 그대로 오신 분, 즉 진리 그대로 오신분이라는 거야. 우주의 진리와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진리 그대로 오신 분, 법 그대로 오신 분, 이치 그대로 오신 분… 그런데 우리 중생은 진리와 상관없이 살단 말여. 지 마음대로, 지 생각대로 살아. 산은 산, 물은 물로 봐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머물러서 본단 말이에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본다는 거야. 생각이 어디에 머물고 있으면 그 생각에 갇혀, 난 안되는 놈, 팔푼이 같은 못난 놈… 저 여편네는 원수 같은 여편네, 뭐 같은 여편네… 이렇게 자기 생각이 머물고 있는 곳, 그 안에서 살게 되어있는 것이다. 여래라는 것은 생각 안에 머물러 지 생각대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고 업성의 안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안경을 벗어 던지고 바로 부처님과 하나 되어서 부처님의 무한한 생명, 무한한 창조, 이 능력을 내안에서 끄집어낸다는 거여.
기도는 바로 이런 거여. 그 무한한 생명, 무한한 창조를 끄집어내는 가운데 거기에 여러분들 업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거기에는 재앙이라는 것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재앙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여건이 되야 뿌리를 내려요. 부처님이 무슨 재앙이 있다는 것 봤어요. 부처님이 삼재를 겪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어요. 부처님이 실연을 당했다는 거 봤어요. 부처님이 무슨 팔난(八難)을 겪었다는 것을 봤어요. 여러분들이 삼재, 팔난, 재앙, 환란, 이런 것들 겪는 것은 중생의 업성 때문에 겪는 것인데 기도를 한다는 것은 멉니까, 그 업성을 제껴놓고 부처님과 하나가 되어서 결국은 그 삼재팔난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자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무한한 능력들을 끄집어내서 내가 창조주가 되어서, 내가 부처가 되어서, 내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라고 하는 거죠. 기도는 다이내믹하게 역동적으로 간절히 재미있게 해야 되는 것이다. 체질화가 돼야 되는 것이다. 억지로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밥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숨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자연스럽게 체질화가 되어야 만이 그런 가운데 원하는 데로 모든 것이 성취될 것이고 재앙은 소멸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정진하는 여러분들 되실것을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대한불교조계종 전주 참좋은우리절 주지회일스님 법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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