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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대축일]
루카 2,41-52
성가정의 핵심은 각자의 확고한 사명 인식에 달렸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인식이 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모습만 보면 일치하는 가족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모 말을 안 듣고 성전에 남아있었고 성모님과 요셉은 아들이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을 너무 늦게서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거룩한 가정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로 각자 다른 확고한 사명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를 떠올려 봅시다. 이 영화는 일상에 갇히고 권태에 빠진 부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지만 부부가 공동의 사명을 발견하고 함께 외부의 어려움에 맞서기 시작하면서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는 가족이 각자의 욕망을 넘어선 공동의 목표를 발견할 때 비로소 살아난다는 진리를 반영합니다. 공공의 적이 생기면 싸우다가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 가족의 공통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모두가 천당 가는 게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 가운데서도 가족이 서로 분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자가 가진 ‘욕망’ 때문입니다.
영화 ‘17 어게인’은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묵상해보게 합니다.
고등학교 때 유망한 농구선수였던 남자는 여자 친구의 임신으로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당장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야 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년이 되고 회사에서는 능력이 없어 명퇴하고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자녀들도 무능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깨어보니 다시 17살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시 운동 잘하고 인기 있는 학생이 됩니다.
주인공은 학교에서 자기 딸과 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각자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녀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홀했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것에 대한 탓을 가족에게 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다시 농구로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아내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의 상황에서 그는 주저 없이
아내를 다시 택합니다.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다른 욕망이 사라지고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가정은 다시 정상화됩니다.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사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사명을, 성모님은 이 사건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묵상해야 하는 사명을,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뜻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각자 다른 사명이지만, 같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명이기에 가족은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다시 부모에게 순종하고 성모님은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라며 남편을 앞에 둡니다. 요셉 성인인 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각자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나의 청을 알리는 시간만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각자에게 주어지는 사명이 가족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절대 하나인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불만만 쌓여갈 것입니다.
존과 아일린 크롤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엑스트라오디너리 메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세 자녀 중 두 자녀가 폼페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10대 초반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존은 절망으로 일에만 전념합니다.
아일린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이 싫습니다.
둘은 한참을 싸웁니다.
그러다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당장 해야 할 일을 깨닫습니다.
어떻게라도 해 보자는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치료제를 찾겠다고 합니다.
아내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그렇게라도 해보라고 합니다.
존은 치료제를 개발하던 사람을 만나 결국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치료제를 개발하게 됩니다.
두 자녀가 완벽히 치료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데 성공했고
이 치료제는 덕분에 전 세계의 모든 폼페병 환자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부부의 같은 사명이 있고 각자의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때만 가정에 화목이 있습니다.
함께 오래 바라보기만 한다고 사랑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각자의 방식대로 깨닫고 참여할 때 그 가정은 그 뜻 안에서 성가정인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9일 [성가정 축일]
복음: 루카 2,41-52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정말이지 힘든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순명의 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하라시니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하는 순명이 아니라,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내 의지를 과감하게 접는다는 것, 분명 나보다 부족해 보이는 상대방의 뜻에 따른다는 것,
타인의 생각과 계획에 내 삶을 종속시킨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에게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그러한 정황을 아무런 가감 없이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참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 당신의 삶 전체, 당신의 미래를 인간의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극도의 자기 낮춤이요, 지극한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볼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지만,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수도 공동체 안에서 때로 장상들도 회원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때로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순종하신 예수님, 그 놀랍고 감동적인 덕행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이 있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운 나머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살벌한 죽음의 현장,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순명의 덕과 관련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 사이에서는 돈보스코 시대 때 부터 내려온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Faccio Io, Vado Io’(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통입니다.
굳이 장상이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사리 부탁하기에 앞서, 수도자들은 미리 장상의 괴로움을 파악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원장님, 어려운 일이 있으신가보군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제가 하겠습니다.
관구장님, 어디 힘든 자리로 누군가를 보내기 위해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목소리로 ‘Faccio Io, Vado Io’를 외치지만, 어딘가를 보내면 그쪽에서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러니 잘 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어디를 가든 공동체와 잘 어울리면서, 기쁘고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어딜 가든 그쪽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겠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집회서와 바오로 사도가 건네는 권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콜로 3,19~21)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강론>
(2024. 12. 29.)(루카 2,41-52)
<‘말로만’ 말고, 실제로 ‘형제자매’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41-52).”
1)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뽑으신 거룩한 백성,
즉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이니, 신앙인들의 가정은 당연히 성가정입니다.
<최소한 성가정이 되려고 노력하는 가정입니다.>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나름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신자들의 가정들 가운데 일부 망가진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은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부의 모습만 보고 그것이 전체의 모습인 줄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고, 특히 신앙인들의 삶을 너무 깎아내리기만 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보다 착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고, 그래서 이 세상이 그런대로 돌아갑니다.
신앙인들도 대부분은 착하고, 또 열심히 살고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겨도 우리 교회 공동체는 그런 일들을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성가정’을 본받는 것은, 또는 성가정을 이루는 일은, 도달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누구든지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가정이니, 하느님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니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자만심에 빠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너무 자기 자신과 자기 가정을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겸손하게 부족한 점을 살펴서 바로잡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또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2)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라고 묻는다면,
“누구에게나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 주는 교회”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교회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가정이 좋은 가정인가?” 라고 묻는다면, 모든 식구들이 안식처로 생각하는 가정, 지치고 힘들 때 쉴 수 있고,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가정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너무 거창하게 높은 목표를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식구들이 서로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목의 방향을 ‘가정의 복음화’에 맞추고, 그것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1인 가정’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부족한 모습이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독거노인들도 많고, 어려 가지 이유로 젊은 사람들이 혼자 사는 경우도 많은데, ‘가정의 복음화’를 강조하면서 그렇게 혼자서 사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외롭게 사는 이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어 버리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 성모님, 요셉 성인의 성가정은, 요셉 성인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 식구가 함께 살았던 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십오 년이 안 될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뒤에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따라다니셨다고 해도 사실상 혼자서 지내셨다고 말할 수 있고, 승천하신 뒤에는 사도들이 성모님을 모시긴 했어도 혼자서 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도 ‘1인 가정’의 생활을 꽤 오래 하셨던 셈입니다.>
교회는 ‘큰 가정’이고, 각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두 공동체는 따로 떨어져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실 하나의 공동체이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나는 당신을 나의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실제로 형제자매로서 살아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