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신 하느님
- 조규만 주교님 도서 '날마다 생각한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루카 18,19)
우리는 어떤 사람을 '착하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을 '예쁘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미인대회에서 심사위원들이 뽑습니다. 미스 코리아 진, 선, 미로 등위를 정합니다. 그 기준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조선 시대의 미인과 우리 시대의 미인의 기준이 다릅니다. 심사위원들의 안목도 서로 다릅니다. 때때로 뇌물이나 인맥 등이 좌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착한 사람을 가리는 선발대회는 없습니다. 선행상이나 공로상 또는 그 밖의 포상 행위로 어떤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수상자가 반드시 착한 사람이라고 동일시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상자와 실제로 착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어떤 경우에는 선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착한 사람에게는 드러난 선행이나 공로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기준으로 누군가를 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에서 선을 논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최고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가까울수록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누군가를 착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기준이 되시는 최고선의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루카 18,19)고 말씀하십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모습은 성경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착하신 하느님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선사하십니다. 동생 아벨을 죽이고 쫓겨 다니는 카인에게 앙갚음하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하십니다. 무지개 징표에서 노아의 홍수를 후회하시는 하느님의 착한 마음을 봅니다. 폭력배에게 아내를 빼앗긴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 주십니다. 바람난 아내를 돌보아 주는 호세아 예언자에게서 아내를 사랑하는 착한 남편의 모습으로서의 하느님을 봅니다. 아벨과 야곱과 다윗에게서 보잘것없는 사람을 돌보시는 약자의 하느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무엇보다도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소개해 주십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20-32)
둘째 아들만이 아니라 시기하고 욕심 사나운 첫째 아들도 타이르고 설득하시는 착한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선하신 하느님의 모습은 예수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 인터뷰에서 페터 제발트가 그의 어린 아들이 “아빠, 하느님은 어떻게 생기셨어요?”라고 질문한 데 대하여 답을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그대로 하느님의 모습을 상상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의 이야기 전체를 고찰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탄생에서부터 시작하여 공생활과 위대하고 감동적인 말씀들, 그리고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부활에 이어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에 이르기까지가 되겠지요. 그러면 어느 정도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한편으로는 엄숙하고 거대합니다. 우리의 잣대를 훨씬 벗어나지요. 하지만 그 모습의 실질적인 기본 특징이라면 선하심, 그리고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과 세상》, 31-32쪽)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 선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하루를 살기 위해 필요한 하루 일당을 지급하는 착한 포도밭 주인이 그렇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 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렇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배고픈 군중을 위해 빵의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이 그렇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고발자들에게 노기를 띠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에서도 착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강생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선하신 모습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저는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착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야 땅,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산으로 갑니다. ‘사흘’이란 표현이 아브라함의 고통을 드러냅니다. 마치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 아들을 잃고 사흘 동안 찾아 헤맸던 것과 같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 것과도 같습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는 이사악의 질문에 마지못해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라고 대답하는 아브라함의 답변에는 아픔이 묻어납니다. 결국 하느님은 이사악의 제물 봉헌을 막으시고 손수 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사악 제물 봉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로 봉헌한 사건을 준비하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는 이사악을 봉헌하는 것을 만류하시며 자신은 당신의 사랑스러운 외아들을 인류를 위하여 기꺼이 봉헌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시기에 좋게 창조한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영원한 생명을 함께 하시고자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사랑스러운 아들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듣고 동의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36)
사도 바오로는 착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그 감동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로마 5,7-8)
착한 사람이란 결국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얼마나 가까운가에서 그 착함의 정도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는 것입니까?
- 날마다 생각한 하느님 / 조규만 지음 / 가톨릭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