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석정 가문의 세거지인 홈실[椧谷]은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1리에 속한 마을로 벽진이씨의 대표적인 동족마을로 꼽힌다. 마을의 서북쪽에는 백양산(白陽山)이 있고, 동쪽의 봉악산(鳳岳山 또는 五峰山)과 서쪽의 곡성산(穀城山)이 그 지맥을 형성하여 좁고 긴 골짜기를 이루어 전형적인 명당 터가 되는 지점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홈실은 안골[內谷], 담되[濟南], 뒷뫼[陶山], 새뜸[新溪], 배나무골[梨洞] 등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홈실은 성씨의 발상지인 벽진면 수촌리와 이웃한 곳으로 시조공의 7세손인 이방화(李芳華) 대에 이곳으로 이주하여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홈실이라는 마을 이름에는 유래가 있다. 벽진장군의 11세손(芳華의 玄孫)으로 고려후기에 대제학을 지낸 산화선생(山花先生) 이견간(李堅幹)이 1317년(충숙왕 4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제(元帝) 인종(仁宗)은 선생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선생의 고향을 묻고 지세도(地勢圖)를 그려 보이게 하였다. 선생이 마을의 약도를 그려 보이고 방음(方音)으로 호음실(戶音谷)이라 한다고 응답하였다. 황제가 그 지세도를 보고 명지(名地)라고 극찬하고 명곡(椧谷)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는 마을이 명당이기는 하나 물이 부족할 것이므로 백양산 북쪽 걸수산(乞水山·星山 또는 白馬山)의 물을 나무 홈통으로 당겨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홈실은 현존하고 있는 벽진이씨(碧珍李氏) 세거지 중에서 가장 유래가 오래된 집성촌이다. 양대 계파인 산화공파와 대장군파의 자손은 물론이고, 금능공파의 자손들도 이곳에서 분파·출향하였다.
홈실은 이름난 명지(名地)로서 산화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의 아우인 대장군(大將軍) 성간(成幹), 12세 수문전대재학(修文殿大提學) 대(玳), 14세 경상병마도원수(慶尙兵馬都元帥) 희경(希慶), 15세 이조판서 건지(建之), 병조판서 심지(審之), 이조참판 신지(愼之) 형제 등이 배출되어 고려 말 조선 초에 혁혁한 문벌이 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승지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을 비롯하여 많은 명현석학, 이름난 선비, 충신, 애국지사 등이 배출되었다.
홈실은 1400년대에 알 수 없는 자연재해로 폐허화되었다. 이에 산화공파의 5형제 자손 중 맏집과 셋째 집은 칠곡(漆谷)으로, 둘째 집은 선산(善山)으로, 넷째 집은 창령(昌寧)으로, 다섯째 집은 밀양(密陽)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리고 대장군 성간(成幹)은 벼슬을 버린 후 지례(知禮)로 은거(隱居)함으로써 그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고, 금능공(金陵公)의 후손들은 충청도 금산(錦山)·영동(永同) 등지로 이거(移居)하였다. 벽진이씨가 홈실을 떠난 후 이곳에는 문화유씨(文化柳氏) 일가와 야성송씨(冶城宋氏) 송시연(宋時衍) 일가가 살았다고 전해지며 그들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1622년(광해군14) 정월 이언영이 산화선생의 옛터를 방문하였는데, 수행한 두사충(杜思忠)에게 재입향해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는 “살만 하다(可以居)”라고 답하고 동네입구에서 절을 하면서 “명곡은 장군패검형(將軍佩劍形)으로 성주의 5명기 중 제일가는 대명기(大名基)”라고 찬탄하였다.이리하여 홈실을 떠난 지 약 200여 년이 지난 후 칠곡에 거주하고 있던 산화파의 맏집과 셋째 집 후손들이 폐허가 된 명곡에 다시 터를 닦고 가문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언영은 자가 군현(君顯), 호는 완석정(浣石亭)·운계(雲溪)로 1568년(선조1) 공조좌랑·안동부사 등을 지낸 공암(孔巖) 이등림(李鄧林)과 최호(崔湖)의 따님인 월성최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인 팔거현 석전리는 증조 이인손(李麟孫)이 복거한 곳이었는데, 후일 이곳은 이언영의 사위 이원정(李元禎)의 자손들이 세거하게 되면서 영남의 유수한 반촌(班村)으로 자리매김하었다.
이언영의 선대는 문한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있었고, 사환가로서의 전통도 면면히 이어오고 있었다. 산화선생(山花先生)으로 잘 알려진 10대조 이견간은 1317년(충숙왕4) 원나라에 사행시 상주 객관(常州客館)에서 ‘창밖의 두견새 소리 밤새도록 들리는데, 울음은 산 꽃은 몇 째 층에서 나는지(隔窓杜宇終宵聽 啼在山花第幾層)’라는 시구를 지어 원나라에까지 문명을 떨쳤고,7대조 이희경(李希慶)은 경상도 도원수, 6대조 이수지(李粹之)는 감무를 지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과는 4촌간이었던 5대조 이권(李惓)은 학행이 뛰어나 대유(大儒)의 기국이 있었고, 1432년 생원시에 입격한 뒤 개녕(開寧)·영유현감(永柔縣監)으로 부임해서는 곳곳에 치적(治績)을 남겼다. 증조 이인손(李麟孫)은 1519년 진사시에 입격한 뒤에는 과거와 출사를 단념하고 공암(孔巖) 위에 정자를 짓고 후진양성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완석정 가문이 학자가문으로서의 근기를 다지는 토대가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벽진이씨는 비로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이언영의 아버지 이등림(李鄧林:1535-1594)이 그 주인공이다. 이등림의 급제는 완석정 가문의 직계 선대에서는 조선조 최초의 과경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1564년 생원을 거쳐 1573년에 문과에 합격한 이등림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청백으로 이름이 높았고, 덕계 오건(吳健), 한강 정구(鄭逑), 동강 김우옹(金宇顒) 등 당대 영남의 석학들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종유하였다. 비록 그는 벼슬이 공조좌랑에 그쳤지만그에 의해 다져진 사회적 기반과 학문적 연계망은 아들 이언영이 17세기 초반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학자·관료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양란과 인조반정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동기에 학인(學人)이자 관료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이언영은 원칙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인함과 학문과 행실의 순독(純篤)함으로 인해 사우들로부터 추중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쟁의 시대를 살면서도 편협하지 않았던 그의 성품(性品)은 경향을 망라하는 교계(交契) 형성의 바탕이 되었고, 임금을 바르게 보좌하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경세관료로서의 열정과 치적은 관료사회의 미담이자 본보기가 되었다.
9세에 부사(父師)하여 가학을 이은 이언영은 이후 정구·장현광·서사원 등을 사사하며 학문의 외연을 넓혀 나갔다. 한강고제였던 서사원과의 사제관계는 13세 때 어머니의 명에 의해 맺어졌고, 21세 때인 1588년(선조21)에는 회연(檜淵)으로 가서 정구에게 배움을 청한 뒤로는 1620년 정구가 사망하기까지 30여년 동안 수시로 왕래하며 강론·질의하였다.뿐만 아니라 그는 장현광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여크게 추중을 받았고, 장현광 사후에는 사문의 언행록을 짓기도 했다.
〈여헌언행록 찬술 현황〉
순번 |
성명 |
본관 |
호 |
여타사승 |
여헌언행록 |
비 고 |
1 |
趙任道 |
咸安 |
澗松 |
苟全門人 |
「就正錄」 |
「旅門十賢」 |
2 |
申悅道 |
鵝州 |
懶齋 |
|
「拜門錄」 |
「旅門十賢」 |
3 |
申 圾 |
鵝州 |
|
|
「聞見錄」 |
申悅道의 子 |
4 |
張乃範 |
仁同 |
克明堂 |
寒岡門人 |
「記聞錄」 |
張慶遇의 父 |
5 |
李彦英 |
碧珍 |
浣石亭 |
來庵·寒岡門人 |
「記聞錄」 |
|
6 |
朴吉應 |
密陽 |
眞靜齋 |
李安訥門人 |
「記聞錄」 |
|
7 |
張慶遇 |
仁同 |
晩悔堂 |
|
「記聞錄」 |
「旅門十賢」 |
8 |
鄭克後 |
延日 |
雙峰 |
寒岡·芝山門人 |
「記聞錄」 |
「旅門十賢」 |
9 |
金 烋 |
義城 |
敬窩 |
|
「敬慕錄」 |
盧景任의 사위 |
10 |
趙遵道 |
咸安 |
方壺 |
惟一齋·寒岡門人 |
「言行日錄」 |
|
11 |
金慶長 |
順天 |
龜巖 |
|
「景遠錄」 |
「旅門十賢」 |
12 |
崔 轔 |
永川 |
梅窩 |
寒岡門人 |
「景遠錄」 |
|
13 |
李 糸宙 |
京山 |
學稼齋 |
寒岡門人 |
「景遠錄」 |
「旅門十哲」 |
14 |
張 每 |
仁同 |
三優堂 |
|
「景遠錄」 |
張慶遇의 子 |
15 |
張 澩 |
仁同 |
南坡 |
|
「景遠錄」 |
張慶遇의 子 |
16 |
權 崶 |
安東 |
省齋 |
|
「景遠錄」 |
「旅門十賢」 |
17 |
張應一 |
仁同 |
聽天堂 |
寒岡門人 |
「趨庭錄」 |
旅軒의 子 |
한편 이언영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선조26)에는 사재를 팔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에게 동참하였고, 오운(吳雲), 조종도(趙宗道), 박성(朴惺), 성안의(成安義) 등과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언영이 관계에 발을 내디딘 것은 36세 되던 1603년(선조36)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였다. 이보다 앞서 그는 1601년 경상감사가 효렴으로 추천하여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급제 이후 그는 전적(典籍) 공조·병조·형조좌랑, 강원도 도사(都事) 등의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쳤고, 1613년 김제남의 옥사와 관련해서는 당대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는 용단을 보이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1614년(광해군6) 영창대군을 살해한 강화부사 정항을 참수하고, 영창대군의 위호를 추복할 것을 주장한 정온(鄭薀)을 변호하다 호역(護逆)으로 몰려 삭탈관작되고 방귀전리(放歸田里) 되었다. 흔히 ‘갑인봉사(甲寅封事)’라 불리는 정온의 상소는 내암문인이 대북과 중북으로 분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인홍은 남명고제로서의 위상을 바탕으로 강우지역에서 115명에 이르는 문도를 규합하였다. 그러나 내암문인이라고 해서 그 입장과 처지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내암문인은 크게 ①정인홍과 단선적인 사승을 유지하며 이이첨 등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북계, ②영창대군 옥사와 관련하여 정온의 입장에 동조했던 중북계, ③일종의 재야파로 인조반정 이후 후손들에 의해 정인홍과의 사승관계를 부정한 계열, ④역시 재야파로서 인조반정 이후에도 정인홍에 대한 사승의식을 유지한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내홍의 주체였던 정온 등 중북계는 임해군 옥사 당시에는 토역론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영창대군 옥사 때는 이이첨 등 대북 당로자의 주장과는 달리 전은론(全恩論)을 주장하였다. 이 때 정온의 입장에 동조한 이언영(李彦英), 문경호(文景虎), 하혼(河渾), 조응인(曺應仁), 강대수(姜大遂), 강익문(姜翼文), 오장(吳長), 문위(文緯), 이대기(李大期) 등이 중북의 핵심 인사들이었다.
이언영이 정인홍의 문인이라는 근거는 『완정집』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정인홍과의 의절 사실을 특서한「완정연보(浣亭年譜)」의 기록, 문경호, 정온, 강린(姜繗), 강응황(姜應璜), 강익문, 조응인, 김응성(金應成), 황여일(黃汝一), 정홍서(鄭弘緖), 박문영(朴文楧), 박성(朴惺), 곽준(郭䞭), 문위(文緯), 오장(吳長), 박민(朴敏), 이언영, 허돈(許燉), 성호정(成好正), 강대수 등을 한강·내암 양문을 출입한 인물로 언급한 선행 연구, 손처눌의『모당일기』의 기록등을 종합할 때, 이언영이 정인홍을 사사 또는 종유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더욱이 인조반정 이후 정인홍계의 대북파로 몰려 처벌된 박종주(朴宗冑)가 그의 사위라는 점도 이런 추측을 더욱 가능케 한다.
박여량(朴汝樑)·유중룡(柳仲龍)·박종주(朴宗冑) 등과 같이 정인홍만을 사사하고 이이첨(李爾瞻)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북계와는 달리 정온, 이언영 등의 중북계는 정인홍은 물론 정구·장현광과도 사승관계를 맺고 있었고, 또 정인홍과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인조반정 후에도 등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조반정은 조선후기 정치사에 일대 분수령을 이룬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서인들은 정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영남의 정치세력과 학계는 심각한 지형 변화를 감수해야 했다. 북인의 몰락과 정인홍의 패망은 남명학파의 쇠퇴로 이어졌고, 그간 조식(曺植) 또는 그 수문 정인홍과 사우문인관계를 형성했거나 정치적으로 북인을 표방했던 세력들의 정치·사회·학문적 입지도 격감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혼란과 동요 속에서 상당수 남명학파권의 인사들이 정구·장현광을 매개로 퇴계학파 쪽으로의 전향 또는 편입의 움직임을 보이게 됨으로써 영남학계는 세력 재편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결과로서 퇴계학파는 몸집을 크게 불리게 되며 영남학파 내에서 정통성을 획득,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1623년 3월 이귀, 김류 등이 주도하여 성사시킨 인조반정은 향후 300년 서인정권의 초석을 다진 정치적 사건이었다. 반정은 대북정권의 패륜성 그 자체보다는 대북의 독주에 대한 서인의 반발에 그 주된 원인이 있었다. 반정 후 서인들은 남인을 이른바 관제야당(官制野黨)으로 삼아 서인·남인의 연립정권을 세웠다. 서인은 대북이 일당독재하다가 패망한 것을 목도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남인과 소북의 일부를 관제야당으로 육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집권방편이자 민심수습책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여론은 반정 자체를 단지 군주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공신세력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정태화는 반정공신 중에 순전히 종묘사직을 위하는 데서 발분한 사람은 최명길, 장유, 이해 등 몇 명에 불과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정권은 각종의 저항운동에 직면하게 되는데, 인조 초반에 집중된 이괄의 난, 이인거의 난, 유효립의 역모사건 등 여러 모역 및 고변사건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에 서인들은 이러한 위기 국면을 극복하기 위해 강온(强穩) 양면에서 태개책을 모색하여 인조정권에 반대하는 행위는 역모로 처단하는 한편 청서계를 비롯하여 일부 남인들의 조용을 통한 민심의 수습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이원익, 정경세(서애문인), 이준(서애문인), 정온(내암·월천·한강문인), 이언영(한강·여헌문인), 최현(한강문인), 조정(학봉·한강문인), 전식(서애·여헌문인), 김영조(서애문인), 이윤우(한강문인), 권도(한강·여헌문인), 김응조(서애·우복·여헌문인) 등이 조용되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의 성격이다.
서인들은 이원익으로 대표되는 근기남인과 정경세로 대표되는 영남남인의 일부를 일종의 정치적 파트너로 수용하였는데, 후자의 대부분이 서애·우복학맥 또는 한강·여헌학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즉, 서인들은 영남남인 중에서도 학통상 퇴계학파에 속하고 지역적으로는 안동(풍산), 상주, 인동, 성주, 단성(진주) 등 서부지역[강우지역]의 인사들을 주로 인진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장현광과 유진을 산림으로 징소하는 과정에서 더욱 분명해졌다.이로써 정경세와 장현광은 인조조 영남남인의 양대 축을 이루게 되면서 그 문인들의 정치적 진출도 활발해졌던 것이다.
〈인조조에 활동한 주요 영남남인〉
순번 |
성 명 |
거주 |
경 력 |
사 승 |
비 고 |
1 |
張顯光(1554~1637) |
인동 |
유일/찬성 |
|
|
2 |
鄭經世(1563~1633) |
상주 |
문과/이판 |
서애문인 |
|
3 |
權 濤(1557~1644) |
단성 |
문과/대사간 |
한강·여헌문인 |
|
4 |
崔 晛(1563~1640) |
선산 |
문과/감사 |
학봉·한강문인 |
|
5 |
全 湜(1563~1642) |
상주 |
문과/대사헌 |
서애·여헌문인 |
|
6 |
金 靈(1567~1650) |
선산 |
문과/참지 |
한강·여헌문인 |
|
7 |
金知復(1568~1635) |
상주 |
문과/장령 |
서애문인 |
|
8 |
李彦英(1568~1639) |
성주 |
문과/승지 |
한강·여헌문인 |
|
9 |
李潤雨(1569~1634) |
칠곡 |
문과/참의 |
한강문인 |
檜淵書院 從享 |
10 |
李民宬(1570~1629) |
의성 |
문과/부제학 |
여헌문인 |
|
11 |
申達道(1576~1631) |
의성 |
문과/수찬 |
여헌문인 |
|
12 |
金榮祖(1577~1648) |
안동 |
문과/참판 |
서애·학봉·한강문인 |
|
13 |
全以性(1577~1645) |
상주 |
문과/부사 |
한강·우복문인 |
|
14 |
黃 紐(1578~1626) |
상주 |
문과/지평 |
서애·한강·우복문인 |
|
15 |
曺希仁(1578~未詳) |
상주 |
문과/군수 |
우복문인 |
|
16 |
柳 袗(1582~1635) |
상주 |
유일/지평 |
서애·한강·여헌문인 |
柳成龍의 3자 |
17 |
趙任道(1585~1664) |
창녕 |
유일/좌랑 |
구전·여헌문인 |
|
18 |
洪 鎬(1586~1646) |
상주 |
문과/대간 |
서애·우복문인 |
|
19 |
金應祖(1587~1667) |
안동 |
문과/집의 |
서애·여헌·우복문인 |
顯宗朝에 右尹 |
20 |
申悅道(1589~1659) |
의성 |
문과/지제교 |
여헌문인 |
|
21 |
金 羾 |
선산 |
문과/부제학 |
서애·여헌문인 |
|
22 |
李之華(1588~1666) |
대구 |
문과/한림 |
한강·여헌문인 |
|
23 |
全克恒(1590~1636) |
상주 |
문과/봉교 |
우복문인 |
全湜의 아들 |
24 |
李景義(1590~1640) |
군위 |
문과/참판 |
우복문인 |
李好閔의 조카 |
25 |
姜大遂(1591~1658) |
합천 |
문과/대간 |
한강·여헌문인 |
|
26 |
金宗一(1597~1675) |
경주 |
문과/교리 |
여헌문인 |
|
27 |
申弘望(1600~1673) |
의성 |
문과/지평 |
여헌·구전문인 |
申之悌의 아들 |
28 |
李道長(1603~1644) |
칠곡 |
문과/한림 |
한강·여헌문인 |
李潤雨의 아들 |
29 |
金廈樑(1605~未詳) |
선산 |
문과/판윤 |
여헌문인 |
|
30 |
盧峻命(1606~1652) |
상주 |
문과/정언 |
우복문인 |
盧守愼의 증손 |
31 |
康喬年(1607~未詳) |
상주 |
문과/정자 |
우복문인 |
|
이로써 영남남인들은 정경세, 장현광, 정온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한편 1623년 4월 권반이 성주유생에 대한 금고를 해제할 것을 요청하여 인조의 허락을 얻음으로써 조용의 폭이 한려학파(寒旅學派)의 거점인 성주·인동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이언영이 중용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복직의 기회를 맞은 이언영은 직강, 사예, 장령 등을 거쳐 1624년(인조 2)에는 동부·우부승지, 1625년에는 좌부승지로 승진하였다. 이 해 2월 3사에서 인성군(仁城君)에게 극형을 가할 것을 주장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당시에는 분조(分朝)를 따라 전주까지 호종하는 한편 朴敏(진주, 우도의병대장), 李民宬(의성, 좌도의병대장), 金寧(선산, 종사관), 李民寏(의성, 종사관), 裵尙龍(성주, 참결군정), 李之華(대구, 향군주관), 蔣文益(밀양, 12邑 의병장), 申適道(의성, 의병장), 趙遵道(청송, 의병장), 김수(선산)를 비롯하여 趙宗岳(영천), 趙宗岱(영천), 張慶遇(인동, 인동의병장), 呂煜(성주), 孫起業(밀양), 鄭好信(영천) 등과 함께 장현광을 보좌하여 근왕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장현광은 이언영을 직접 발탁하는 등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이후 이언영은 1628년(인조6) 밀양도호부사, 1631년(인조4) 청주부사, 1633년(인조11)에 선산도호부사에 임명되어서는 문교진흥과 민생안정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성주의 낙동강가에 완석정(浣石亭)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 교육에 진력하다가 1639년 9월 16일에 향년 72세로 졸서하였다. 당초 약목면 남계리 두만산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678년(숙종 4) 11월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로 이장했다. 행장은 차남 창진(昌鎭), 묘갈은 조경(趙絅), 묘지명은 이민구(李敏求)가 지었다.
이언영은 영남출신이었지만 그의 교유관계는 곽재우(郭再祐), 손기양(孫起陽), 장이유(張以兪), 임숙영(任叔英), 이윤우(李潤雨), 강복성(康復聖), 이지영(李之英), 채선길(蔡先吉), 배상룡(裵尙龍), 이준(李埈), 김중청(金中淸), 박수춘(朴壽春), 박이장(朴而章), 박정번(朴廷璠), 최항경(崔恒慶) 등 영남 인사는 물론 이춘원(李春元: 朴淳 문인), 채유후(蔡裕後: 근기남인), 민형남(閔馨男: 화담학통의 閔純 문인), 이식(李植:서인), 신익성(申翊聖: 상촌 申欽의 아들), 최명길(崔鳴吉:서인, 인조반정 원훈), 김세렴(金世濂: 金孝元의 손자), 이경직(李景稷: 서인), 심희수(沈喜壽: 盧守愼 문인), 박동선(朴東善: 서인, 朴世堂 조부), 김장생(金長生: 栗谷 문인) 등 경향의 서남 인물에 망라되어 있었다. 특히, 서인 기호학파의 영수 김장생과 사돈을 맺은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혼사라 하겠다.
3) 완석정의 자손들
이언영은 초취 현풍곽씨에서 1녀[朴宗冑], 재취 안동권씨에서 4남[斗鎭·昌鎭·文鎭·潁鎭] 2녀[李元禎·許垓], 부실에서 3남[重鎭·徽鎭·景鎭]을 두어 자손이 매우 번창하였다. 이들 자녀 및 그 자손들은 완석정의 내외혈맥이라는 혈연의식을 공고히 하며 족의·세의를 다져나갔다. 자녀 가운데 아들의 경우는 차자 창진이 찰방을 지냈을 뿐이지만 맏사위 박종주는 광해 정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둘째사위 이원정은 이언영의 지우이자 한강문하의 동문이었던 이윤우의 손자였다. 그는 숙종조 남인정국에서 영남의 공론을 주도하며 막강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변국제조(變局提調)’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리고 아들 이담명 역시 숙종조 정국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점했다.
이후 이언영의 자손들은 영남남인의 정치적 영락 속에서도 다수의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며 사환전통을 지속시켜 나갔다. 문과 출신으로는 현감을 지낸 손자 해준(海準), 사림의 극선인 한림(翰林), 호당(湖堂)을 거쳐 사헌부지평을 지낸 증손 주천(柱天), 현감을 지낸 주태(柱泰), 승정원 주서, 병조좌랑을 지낸 주세(柱世), 양지현감(陽智縣監)·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6세손 현(鋗), 사헌부 지평을 지낸 필(鏎), 승정원 주서를 지낸 8세손 응모(膺模) 등이 있다. 이 외 무과를 거쳐 자산도호부사(慈山都護府使)를 지낸 현손 수풍(遂豊), 공조좌랑을 지낸 수점(遂漸)도 완석정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비록 관직을 지내지는 못했지만 자손들 중에는 학문에 매진하여 문집 등 저술을 남긴 인물이 40여명에 이르는데, 이는 이 가문이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의 계승에 철저했음을 말해 준다.
완석정가문이 지니는 명가로서의 면모는 전술한 순천박씨[朴光先 가문], 광주이씨[李潤雨 가문] 외에도 야성송씨[宋希奎 가문], 해평윤씨[尹斗壽 가문], 흥양이씨[李埈가문], 풍산류씨[柳雲龍·成龍 가문], 안동권씨[權諰 가문], 남원윤씨[尹鑴 가문], 인동장씨[張顯光 가문], 나주정씨[丁時翰 가문], 경주최씨[崔興遠 가문] 등 경향의 명벌에 두루 걸쳐 있었던 혼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창진(昌鎭)⇒해발(海發)⇒주천(柱天)·주우(柱宇)로 이어지는 차자 계열은 안동권씨, 남원윤씨, 나주정씨 등 전형적인 기호남인들과 혼맥을 형성한 특징이 있다.
〈안동권씨 가계도-이주천의 처가〉
위 가계도에 따르면 이주천은 탄옹 권시(權諰)의 손서로 정온의 증손 정중원(鄭重元), 역시 영남 출신인 김원섭(金元燮)과는 동서간이고,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에게는 처질서가 된다. 또 이주천의 처고모부 윤의제(尹義濟)는 아우 주천의 장인 윤하제(尹夏濟)와 형제간이므로 완석정 가문은 안동권씨를 매개로 남원윤씨 윤휴가문과도 연혼·중혼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주천은 권시의 손자 권이진(權以鎭)과 4촌의 척분을 지니며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1709년(숙종35) 3월 이주천이 권이진의 임지 동래로 가서 창수·화답하고, 1714년(숙종40) 권이진이 경주부윤직을 사임하고 돌아오는 길에 성주에 들러 이주천을 문상키도 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완석정 가문에서는 다수의 문인·학자를 배출하는 가운데 근세에 와서도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유수한 법조인, 관료, 학자, 외교관 등을 배출하며 파조 완석정 이언영 이래의 가성(家聲)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본서에 수록한 자료들은 李彦英의 13세손인 李鍾健 종손가에서 보전해 오던 것들이다. 이 자료들은 크게 古文書, 成冊古文書, 古書로 구분되며 그 유형과 수량은 아래의 【표1】과 같다.
【표 1】 성주 벽진이씨 소장 고문헌 현황
종류 |
유형 |
종/점수 |
비고 |
古文書 |
敎令類 |
6종 73점 |
|
疏·箚·啓·狀類 |
6종 75점 |
|
牒·關·通報類 |
2종 6점 |
|
證憑類 |
7종 22점 |
|
明文·文記類 |
3종 31점 |
|
書簡·通告類 |
4종 181점 |
|
置簿·記錄類 |
8종 21점 |
|
詩文類 |
10종 207점 |
遺墨書畵 및 기타문서 포함 |
합 |
46종 616점 |
|
成冊古文書 |
|
112책 |
|
합 |
112책 |
|
古書 |
經部 |
1종 1책 |
|
史部 |
14종 36책 |
|
子部 |
4종 12책 |
|
集部 |
11종 26책 |
|
합 |
30종 75책 |
|
이와 같이 고문서와 고서를 포함한 전체 고문헌의 수량은 약 800여 점이며, 본서에 수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 종류와 내용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령류에 해당하는 문서는 6종 73점이다. 종류별로 보면 紅牌 1점, 白牌 1점, 有旨 2점, 告身(敎牌) 24점, 告身(敎旨) 43점, 祿牌 1점이다. 인물별로 보면 李彦英, 李斗鎭, 李海潤, 李遂豐 등과 관련된 것들이다. 전체적으로 이언영과 관련된 문서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1591년(宣祖24) 生員試에 합격하여 발급받은 白牌를 비롯하여 有旨 2점, 1603년(宣祖36) 文科 壯元으로 급제하여 宣務郞守成均館典籍에 임명하면서 발급받은 敎牌 등 18점, 敎旨 33점, 1604년(宣祖37) 宣務郎工曹佐郎 재직시 李彦英에게 발급한 祿牌 1점 등 모두 55점이 李彦英(1568~1639)과 관련된 문서들이다. 교지 가운데 이언영이 折衝將軍行忠武衛司正에 임명됨에 따라 그의 妻 玄風郭氏(1567~1615)와 安東權氏(1600~1671)를 각각 贈淑夫人, 淑夫人으로 임명할 때 발급한 교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언영의 長子 李斗鎭(1617~1688)과 관련된 문서는 敎牒 5점이다. 이때의 교첩은 모두 1648년(仁祖26) 6월과 7월에 발급받은 것으로, 이언영이 軍資正, 淸州牧使, 善山府使, 密陽府使, 副護軍에 재직해 있을 당시 別加받은 것을 아들 斗鎭이 代加받은 것이다. 이 別代加에 따라 이두진은 2개월 사이에 從仕郞(정9품)→通仕郞(정8품)→務功郞(정7품)→宣敎郞(종6품상)→承議郞(정6품상)으로 승진하였다.
이두진의 長子 李海潤(1638~1700)과 관련된 문서는 敎牒 1점으로 妻父 靈光郡守 姜汝床이 康律縣監으로 재직해 있을 때 別代加로 발급받은 것이다. 이해윤의 손자인 李燧豊(李熙元)(1703~1767)과 관련된 문서에는 1727년(英祖3)武科에 급제하여 발급받은 紅牌 1점과 敎牒 10점이 남아 있다. 교첩의 경우, 그의 妻 羅州丁氏(1705~1755)를 夫職에 따라 淑夫人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것까지 포함하였다. 이수풍의 교첩 가운데 1743년(英祖19) 7월에 折衝將軍으로 임명되면서 발급받은 교첩은 이수풍이 호랑이 3마리를 잡은 공로로 加資받은 것이다,
소차계장류에 해당하는 문서는 6종 75점으로 청원서 성격의 所志類가 대부분이다. 所志類에 대해서는 원문서에 기재된 문서명에 따라 上書·所志·白活·稟目으로 나누어 정리하였으며, 그 나머지 草本에 해당하는 것은 별도로 구분하기 난해한 점이 있기 때문에 편의상 所志類(草)로 구분하였다. 圖形의 경우, 윤병태의 고문서분류안에 따르면 證憑類에 해당하지만 내용상 上書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서이고 수량 또한 1점뿐이다. 따라서 자료의 관련성과 정리의 편의를 고려하여 소차계장류로 분류하였다.
문서의 종류는 상서·소지·발괄·품목 등으로 구분되지만 내용으로 살펴보면 山訟(偷葬)과 관련된 문서가 다수를 차지하며, 다음으로 浣亭公을 泗陽書院에 追享하는 일로 廣州李氏측과 벌어진 일, 漆谷 石田에 있는 孔巖精舍遺址에 새로 개간한 밭의 경계를 두고 다툰 사건, 山直의 婢夫 尹石의 손자들이 墓下에 있는 立案田畓의 量案상의 명의를 僞造한 일, 묘지기가 墓下의 位田을 몰래 매매한 일, 家舍放賣 등과 같은 사건들이 있다.
所志類(草)에 해당하는 문서는 書院追享 관련으로 廣州李氏측의 문서가 함께 傳寫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양측의 정황을 좀 더 사실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첩관통보류는 2종 6점으로 傳令과 解由文書가 여기에 해당한다. 전령은 모두 5점이고 이 가운데 4점이 李遂豊과 관련된 것이다. 나머지 1점은 漆谷에 사는 李尙厚(1852~1921) 등이 呈訴한 바에 따라 偷葬과 관련하여 金山郡守가 孔子洞의 尊位와 頭民에게 申飭하는 내용이다.
해유문서는 前丹城縣監 이수풍의 解由와 관련된 자료이다. 이 문서는 후임관 行縣監 鄭某가 전임관 이수풍의 해유를 위해 慶尙道觀察使에게 올린 解由牒呈과 이 첩정을 확인한 후 경상도관찰사차 戶曹에 보낸 關이 왼쪽에 점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關은 뒷부분이 결락된 상태이고, 일반적으로 背面에 기재되어 있는 戶曹에서 吏曹로 보낸 關도 남아 있지 않다. 해유첩정에 대한 내용은 사례마다 기재양식이나 범위가 다양한데, 이 문서에서는 傳授秩, 公廨, 貢物, 各司奴婢貢木秩, 傳與秩 등에 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증빙류에 해당하는 문서는 7종 22점으로 立案 3점, 戶籍類 6점, 完文1점, 侤音 1점, 手記 6점, 完議 3점, 證書 2점이다. 입안의 경우, 각각 다른 사안으로 발급받은 것으로 첫 번째는 1626년(仁祖4) 이언영의 부모묘소 주변의 空閑地에 대해 思患豫防條로 입안을 成給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仁同府에서 발급한 것으로, 이언영의 奴 香福이 올린 所志가 입안과 함께 점련되어 있다. 두 번째는 1721년(景宗1) 繼後立案으로, 李柱世(1671~1751)의 2子 이수풍(李熙元)을 이언영의 曾孫인 李柱昆(1662~1717)의 長子로 계후한 사실에 대해 예조로부터 공증받은 것이다. 세 번째는 1755년(英祖31)에 李鼎視(1725~1765)이 奴 2口를 매득한 후 이 사실을 漆谷府로부터 공증 받은 斜給立案으로, 所志·明文·招解·立案이 차례대로 점련되어 있다. (관련문서 분재기2 참조)
戶籍類에는 李海潤(62세, 1638~1700), 李時夏(20세), 李鉉(44세, 1752~18271) 李萬僅(61세, 1825~1885)의 準戶口 및 戶口單子에 해당하는 문서 4점, 대한제국기에 星州郡의 李尙厚(49세, 1852~1921)와 李喆厚(36세, 1865~1948) 의 戶籍表1점, 戶籍臺帳으로 추정되는 落張 1점이 포함되어 있다.
完文 1점은 면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先生奉祀戶에 대한 煙戶雜役을 蠲減한다는 내용이다. 이 문서와 관련되는 자료로 所志27번을 참고할 수 있다.
侤音 1점은 李基德이 李溵永(1775~1852)의 先山에 入葬한 무덤을 掘去하겠다는 뜻으로 작성한 것이다.
手記에는 越界하여 入葬하지 않겠다는 산송관련 1점, 江亭儒契錢 납부와 관련된 문서 2점, 宗錢을 빌려 쓰고 自己畓을 典執하는 문서 1점이 있다. 또 노비를 屬良하면서 작성한 문서 1점이 있는데 이 문서는 明文18번과 관련된 자료이다. 끝으로 杖配를 당한 同生 등에 대한 贖錢을 냈으므로 모두 蕩條한다는 내용의 수기 1점이 있는데, 문서의 말미에 「官准(押)」이라고 기대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完議 3점은 泗陽書院에 浣亭先生을 追享하는 問題, 敦睦, 江亭有稧錢 등과 관련된 일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다.
證書 2점은 일제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모두 金錢借用에 관한 내용이며 국한문혼용으로 기재되어 있다.
명문문기류는 分財記 2점, 繼後明文 1점, 明文 28점 등 모두 3종 31점이다. 분재기 1점은 1642년(仁祖20) 이언영의 자녀 10남매(7남 3녀)의 和議文記로 분재대상은 奉祀位條, 前母郭氏奉祀位條, 李斗鎭衿 (1子), 李遠鎭衿(2子), 李文鎭衿(3子), 李穎鎭衿 (4子), 朴宗冑衿(1女), 李元禎衿(2女), 第三妹衿(3女), 李名鎭衿(5子), 李徽鎭衿(6子),李景鎭衿(7子)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문서 말미에 따르면, 초취 현풍곽씨의 1녀(朴宗冑), 재취 안동권씨의 4남(斗鎭·昌鎭·文鎭·穎鎭) 2녀(李元禎·許垓), 부실의 3남(重鎭·徽鎭·景鎭)순으로 분재에 참여하고 동의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들 가운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막내딸(許垓)의 참여여부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筆執은 李元禎(1622~1680)이 담당하였는데, 본문 내용 가운데 추가한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한 부분에는 작성자인 이원정의 着名이 곳곳에 표시되어 있다.
나머지 1점의 분재기 또한 화회문기인데, 이 문서는 1727년(英祖3)에 王夢良과 王夢相 두 형제가 積債를 갚기 위해 부득이 분재한 것이다. 背面에 따르면 1728년 노비 2구를 放賣하면서 尙州牧으로부터 斜給받은 내용과 1755년(英祖31) 2월에 李鼎祿(1725~1765)에게 노비를 방매하면서 漆谷府로부터 확인받은 배탈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정록이 왕씨가의 노비를 사들인 이유로 위 분재기가 이 집안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문서 입안 3참조)
繼後明文은 族弟 安模의 2子 萬瑾을 宗孫 李宗模의 繼後子로 後關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宗會所에서 작성한 것이다.
明文은 모두 28점이다. 주로 士地賣買와 관련된 것이 많고 이 밖에 奴婢賣買나 家舍賣買(柿木, 釜, 盤, 葛席 포함), 守護禁養 山地의 賣買, 松秋納上 등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서간통고류는 4종 181점이며 通文 18점, 簡札 156점, 慰狀 3점, 婚書 6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간찰의 경우, 문서상태가 좋지 못하여 도판으로 수록하기에 부적합한 문서와 후대에 작성된 것을 제외하고 156점 가운데 82점만을 수록하였다.
通文의 내용은 크게 浣亭先生 追配와 관련하여 鄕中·廣李門中·李氏門中·泗陽書院·虎溪書院·屏山書院 등과 주고받은 것과 金山에 사는 崔在玉의 偷葬사건으로 大邱鄕校, 仁同鄕校, 漆谷鄕校, 知禮鄕校, 星州鄕校 등에서 金山鄕校로 보낸 것으로 구분된다. 이외에 寒江先生門人錄이나 山花先生의 實記纂述, 繼後 등과 관련된 내용도 있다.
치부기록류는 8종 21점이다. 이 가운데 笏記 1점, 執事記 2점, 碧珍李氏世系 1점만 수록하였으며, 이외 나머지는 목록으로만 제시하였다. 다만 喪祭示禮文書에 해당하는 陳設圖, 祭文, 宗廟服制, 服制圖, 訃告 등은 서로 관련된 자료들이기 때문에 별도로 분류하지 않고 같은 유형으로 구분해 주었다.
시문류는 10종 207점이다. 이 가운데 작성시기가 후대인 경우나 문서상태가 도판으로 수록하기에 부적합한 문서들은 목록으로만 제시하였다. 祭文의 경우 52점 가운데 35점, 墓文類는 5점 가운데 2점, 詩文은 40점 가운데 3점만 수록하였다. 이 밖에 輓詞 24점, 遺墨書畵 16점, 기타 66점이 있다.
성책고문서는 모두 112책이다. 낱장 형태의 고문서에 비해 도판으로 수록하기에 그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부득이 자료의 중요도나 가치 등을 고려하여 5점을 선별하여 수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본서에 수록된 성주 벽진이씨 소장 자료의 종류와 수량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의 〔표2〕와 같다.
〈표 2〉 성주 벽진이씨 소장 자료의 수록 현황
종류 |
유형 |
수량 |
비고 |
古文書 |
敎令類 |
紅牌 |
1 |
|
白牌 |
1 |
|
有旨 |
2 |
|
告身(敎牌) |
24 |
|
告身(敎旨) |
43 |
|
祿牌 |
1 |
|
疏·箚·啓·狀類 |
上書 |
24 |
|
所志 |
27 |
|
白活 |
10 |
|
稟目 |
2 |
|
圖形 |
1 |
|
所志類(草) |
10 |
|
牒·關·通報類 |
傳令 |
5 |
|
解由文書 |
1 |
|
證憑類 |
立案 |
3 |
|
戶籍類 |
6 |
|
完文 |
1 |
|
侤音 |
2 |
|
手記 |
6 |
|
完議 |
3 |
|
證書 |
2 |
|
明文 ·文記類 |
分財記 |
2 |
|
繼後明文 |
1 |
|
明文 |
28 |
|
書簡·通告類 |
通文 |
18 |
|
簡札 |
156 |
82점만 수록 |
慰狀 |
3 |
|
婚書 |
6 |
|
置簿·記錄類 |
笏記 |
1 |
|
執事記 |
2 |
|
碧珍李氏世系 |
1 |
|
詩文類 |
祭文 |
52 |
35점만 수록 |
哀辭 |
1 |
|
誄文 |
1 |
|
試券 |
1 |
|
墓文類 |
5 |
2점만 수록 |
詩 |
40 |
3점만 수록 |
浣亭集考疑 |
1 |
|
成冊古文書 |
합 |
|
112 |
6점만 수록
http://archive.kostma.net/Family/T2/html/sub1_2.aspx?fid=B064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