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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숙님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촛불집회 978회
오늘의 사회자는 김종희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대책위 기획팀장.
늘 우리가 앉던 자리가 무대가 되고, 우리는 무대에 올라 비를 피한다.
운영팀 막내이자 자문위원인 박석민 님.
먼저 오늘의 역사 이야기.
"3월 5일에 경칩이잖아요. 경칩에 뭐가 나와요? 개구리. 개구리가 나오는데 개구리한테 제가 연락해 보니까 '올해는 3월 5일 날 안 나온다. 3월 14일 날 나온다.'해요. 왜 ?
그날 윤석열 파면이 결정되는 날로 저는 예상해요. 이번에 영국 이코노미가 발표한 게 한국 민주주의가 1년 만에 10계단 추락해갖고 30위로 떨어졌잖아요.
그런 문제가 해결 안 되면 안 나온다고 그래서 개구리들이 3월 14일 정도에 나올 거라고 예상이 됩니다.
옛날 한양의 대문이 4개 있잖아요. 동서남북, 남대문은 숭례문, 서대문은 돈의문, 북대문은 북정문. 동대문은 흥인지문. 1915년 3월 2일 날 일제가 서대문을 철거하고 경매한 날이에요.
동대문은 있는데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일본 장군 2명이 그쪽으로 해서 입성을 해요. 그러니까 애들이 이거를 개선문으로 인정하고 놔둔거에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총독이 취임한 날이 오늘이에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식민 통치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던 게 1906년도인데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11명과 함께 단지 동맹을 결성해서 손을 자른 날도 오늘이에요.
1909년 10월 26일 날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를 공격해서 죽게 하죠.
그다음해 2월 14일 날 보통은 우리가 발렌타이 데이로 기억하고 선물 주고받는 날이지만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받은 날이 2월 14일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에 동생인 안정근하고 안공근을 여순 감옥으로 보내 '항소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 얘기해요. 못된 엄마야 그지? 항소 절대하지 마라니."
조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조마리아의 편지가 세상에 알려진건? 바로 이 편지를 읽고 크게 감동한 일본인 간수가 일기장에 이 내용을 적어 놨던것.
"안중근이 그때 동양 평화론을 쓰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거를 마무리하려고 항소를 하려고 하다가 2월 19일에 항소를 포기하죠.
그때 번호를 다 일본 변호사들이 하는데 일본 변호사들도 항소하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처음부터 무죄였고 그래서 나한테 그 죄를 감해달라고 하는 건 모욕이다.' 며 다 거절해.
바로 밑에 동생 안정근은 북만주 독립군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했어요.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드는 등 조마리아 여사와 자식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자식들 모두를 조국에 바친 독립운동의 어머니, 조마리아!"
지난 토요일 서울 가서 안중근 글씨와 여러 기록물 전시회를 보았는데, 이렇게 안중근의 기록들이 남아 있을 수 있는데는 두 사람의 힘이 컸다고 한다.
"일본인 간수가 지바 토시치라고 하는 일본 헌병이었는데 이 양반이 안중근한테 너무 감동을 받아가지고 '내가 일본인이지만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게 너무 괴롭다' 얘기를 하는데 안중근이 '우리는 각각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다. 나는 대한제국의 참모 중장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토를 척살하는 역할이 내 역할이었고 당신은 당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구애받지 마라.'
더 감동을 받아서 휘호를 하나 써달라고 하는데 거절해요.
3월 26일 날 사형 당하는 날 '전에 얘기했던 거 지금 씁시다.' 이러고 써준 게 '위국헌신 군인본분' 여덟 글자에요.
이 양반이 군인을 때려쳐. 그래갖고 철도원으로 살고 집안에 이 휘호를 걸고 안중근 의사를 평생 기리다가 1980년에 안중근 숭모회에 전달해가지고 지금 이 박물관에 걸린 거예요.
또 하나 안중근 의사의 조선 동포에게 고함, 동양 평화론 이런 게 나오는데 안병찬이라고 하는 변호사 덕분이에요.
안중근 변호를 하러 여순으로 쫓아갔는데 모든 외부 변호사를 못하게 해가지고 거기서 피를 토해요.
생각해 보면 그때 당시에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다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살아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조건이었을 건데 돌아오지 않고, 안중근 모든 공판에 다 들어가서 모든 걸 다 기록에 남겨요.
이완용을 칼로 찔렀던 이재명 변호를 끝까지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독립운동군자금 받아서 오다가 마적을 만나 살해당하고 이렇게 죽은 이런 분들이 있어서 오늘날에 안중근 이야기를 우리가 알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3.1운동 이야기.
"3.1 운동은 3월 1일 날 태화관에서 한 거잖아요. 근데 이 태화관은 1905년 을사 늑약, 1907년 7조약 만드는 것도 여기서 했고 한일 합방 조약을 만드는 문서 초안도 여기서 했어요.
그래서 좋게 해석하면 여기서 일제가 조선을 합방하는 모든 나쁜 짓을 했으니까 그거를 다 무효화하고 자주 하려고 하는 이런 의미가 있었다고 하는 해석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별로 동의가 안 됩니다.
대중들은 저 탑골공원에서 - 태화관하고 700m밖에 안 되는 자리에 모여 있는데 - 대중들이 있는데 안 나오고 태화관에서 자기들끼리 하고 종로서로 자진출두 한 거 아니에요?
33인 말고 예비가 15명 또 있어요. 그러니까 시위를 하다가 다 연행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비로 시위를 주도할 사람들을 뽑아놨는데 33인 중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간 사람들은 최남선, 최린, 박희도 등이고, 전체 48명 중에 5명이 완전히 변절했어요 .
일제가 헌병을 통해서 조선을 통치할 때 바늘 하나 집에서 움직이는 걸 확인할 정도로 자신 있었다고 얘기하는데, 삼일절, 이 독립운동 민족 해방 운동은 감지를 못했는데 이게 드러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어요.
33인 대표인 손병희가 이완용을 만나서 함께하자고 제안을 해요. 좀 이상하죠? 이완용이 갖고 있는 지위나 이런 것 때문에 제안했던 걸로 보여지는데 이완용이 끝까지 일제한테 얘기를 안 해줬대.
그리고 최린이 누굴 만나냐 하면 신철이라고 하는 고등계 형사를 만나는데 신철이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압수해 갖고 챙겨가 들통이 나게 생긴 거야.
최린이 신철을 만나서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 물으니 '조선 사람이다.'
'그러면 이 일을 절대 며칠만 참아달라' 이렇게 얘기를 하니 만주로 출장을 가요.
근데 나중에 이게 드러나면서 신철은 자살을 했어."
3.1운동때 활약한 여성들 이야기가 나온다.
"3.1 운동을 기념하는 노래가 여러 개가 있지만 '이 산하에' 노래 2절이 민족 해방 운동을 기념하는 노래예요.
기나긴 밤이었거든
죽음의 밤이었거든
저 삼월 하늘에 출렁이던
피에 물든 깃발이어든
목메인 그 함성소리
고요히 어둠 깊이 잠들고
바람부는 묘지위에
취한 깃발만 나부껴
나는 노여워 우노라
이 3.1 민족 해방 운동은 단순한 만세 운동이 아니고 7500명이 죽어요, 3.1 운동 하는 과정에. 거기에 3.1운동을 빛나게 했던 여성 안경신이라고 하는 분 얘기를 하면, 서울과 평양에서 3월 1일 날 같이 해요.
남쪽은 다 내려가면서 하게 되는데 북은 평양이 1시에(서울은 2시) 만세 운동을 하고 그다음에 인근 지역에서 동시에 하게 돼요.
안경신이 3.1운동 이후에 원래는 경찰서를 폭파하려고 폭탄을 던졌는데 이게 불발돼 가지고 평양 시청을 폭파시켜 일본인이 죽고 했는데 잡고보니 만삭인 거야.
하여튼 여성 폭파범으로 불렸던 안경신이 3.1운동을 평양에서 주도했죠.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10년형으로 감형이 돼요.
근데 7년을 살고 나와 보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재판정에서 젖을 물리고 이랬던 그 아이가 딸 아이였는데 영양실조로 눈이 멀고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싸웠던 이런 분이 계세요.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되고 난 다음에 쭉 내려가잖아요. 내려가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유관순이 4월 1일 정도로 아우내 장에서 만세 운동을 했어요.
해방되고 난 다음에 유관순을 정권 차원에서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해서 띄운 거지. 왜냐하면 17살 잔다르크와 딱 나이가 같았잖아. 조선의 잔다르크 프랑스에 잔다르크 이런 식으로 해서 애국심에 동원된 측면이 없지 않아 있죠.
근데 그렇다고 해서 예를 들면 박정희가 이순신을 영웅화시켰다고 해서 이순신의 업적이, 그리고 유관순의 그 투쟁이 빛을 바랠 일은 없는 거 아니에요 그죠?
4월 1일 산에 올라가서 봉하를 올리고 해서 그래서 유관순이 잡혀가요. 딱 1년 후인 1920년 3월 1일 처형 당하죠.
이런 시위가 쭉 내려가면 부산이 있어요. 1916년에 부산에 전차 사고가 나서 조선인 4명이 죽어요. 그래서 전차를 다 때려부셨어.
이런 싸움들을 하다가 1919년에 3.1 만세 운동이 부산으로 내려와서 3월 11일 날 부산은 좀 일찍해요. 그게 아마 경부선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우내는 걸어가서 늦게 알려지게 되는데 부산은 경부선이 있으니까 김천을 지나서 3월 11일 날 그러니까 열흘 만에 만세 운동을 하게 되는데 이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게 일신여고예요. 지금의 동래여고. 일신여고 여학생들과 주경애라고 하는 교사가 밤에 창문 다 가리고 난 다음에 광목을 끊어가지고 태극기를 만들어요.
그래갖고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한테 이게 우리 태극기라고 '이걸 들고 만세, 독립을 외칩시다.' 학생들이 이렇게 얘기를 해요.
형사한테 잡혀갔던 여학생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불경한 짓을 하냐?' 얘기하는데 '3살짜리 애도 자기 밥그릇에 밥을 떼이면 항의하고 싸우는데 나라를 뺏긴 우리가 이것을 하는 게 얼마나 온당한 일이냐?' 당차게 얘기하고 막 이러죠.
이 학교가 시위를 한 것 때문에 6개월 휴교령이 떨어지는데 그다음에 학교 문을 못 열어요. 학생들이 주동자들을 밀고한 교사하고 학생을 처단하라는 싸움을 또 하기 시작해 1년 가까이 학교 문을 못 열어요.
마지막으로 한 분만 더 소개하면 김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있어요.
김마리아는 1919년에 일본에 유학 가 있던 학생이었는데 만세 운동이 있기 전에 이 3.1 만세 운동을 있게 했던 게 2.8 독립 선언이란 말이에요. 마치 60년 4.19가 있기 전 대구에 위대한 2.28 투쟁이 있었던 것처럼.
2.8 독립선언을 일본 유학생들 중심으로 하는데 남자들 11명이 대표로 한 걸 보고 한편으로는 속상한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여학생 친목회장이라고 했던 김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데 여성들과 논의하지 않고 여성을 빼고 하냐?' 그래갖고 2.8 독립선언서를 품에 안고 조선으로 넘어와서 3.1운동을 주도해요.
3.1 운동 끝나고 이들이 감옥에 잡혀가 6개월 정도 살고 나온 다음에 이제 신분 세탁을 하기 위해서 교사 역할을 해야 돼요.
교사하면서 애국 부인회를 만들고 이런 활동을 쭉 하다가 1919년 말에 또 연행돼서 지독한 고문을 받고 이러는데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으니까 고문을 했던 일본 형사가 감동을 받아요.
그래서 뭐라고 얘기를 남기냐 하면 '김마리아는 대한의 여성이고, 대한민국의 여성이고, 김마리아를 낳은 대한민국은 위대하다.'
그러다 이분이 망명해서 학교 다니다가 귀국하는데 조건이 뭐냐 하면 독립운동을 안 한다가 조건이었어요.
나중에 평안도 지역하고 원주 이런 데서 교사하면서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3월 13일 날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고 평생 남은 게 딱 하나였대요. 수저 한 벌."
" 어저께 이제 대구에서 집회 때 '여기서 끝내면 안 되는 거다. 이후 과제가 더 있는 거다. 윤석열 파면되고 난 다음에 어떤 사회를 우리가 만들 거냐? 그래서 이 촛불의 이런 행동이 유지되고 더 힘을 발휘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제 이런 얘기를 하길래 그거를 받아서 마지막으로 시 한 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10년째 사드 반대 투쟁을 하는 것 우리 역사를 지키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현재 촛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 올라와 봤습니다."
우리는 바람 불면 꺼지는
촛불이 아니다
우리는 바람 불면 더욱
활활 타오르는 들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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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촛불은 바람을 두려워하지만
백만 개 천만 개 촛불은 바람을 삼켜버린다
하나의 촛불은 어둠을 숨차하지만
백만 개 천만 개 촛불은 어둠을 지워버린다
- 이재무 ‘바람을 삼키는 촛불이여!’ 에서
하나의 촛불은 어둠을 숨차하지만 100만 개, 천만 개 촛불은 어둠을 지워버립니다.
이런 촛불을 끄지 않고 사드 반대 투쟁 평화가 올 때까지 끝까지 우리가 기대합시다. 투쟁!"
연명 국수집 아지매 박순남! 노래도 맛있게 말아주러 나왔다.
부초같은 내 인생
남이가
평행선
뜨거운 호응 속에 노래가 끝났다. 비록 촛불 시민 중 두 집이 상을 당한 슬프고 우울한 날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또 웃으며 끈기있게 싸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