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편에서 계속>
9사단 30연대는 불과 1시간 만에 중공군에게 밀렸다. 중공군은 그 기세에 올라타 거센 공격을 펼쳤다. 9사단은 예비로 있던 29연대를 움직여 중공군 공세를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상황은 중공군 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그 시점은 국군 7사단을 돌파한 중공군 선봉대가 이미 오마치 고개를 향해 신속하게 기동하던 때였다. 최석 사단장은 새벽 3시 무렵에 유재흥 군단장에게 철수를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은 더 꼬이고 있었다. 유재흥 군단장은 미 10군단에 당시의 전황을 문의했으나 역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여러 정황을 감안하면 미 10군단의 대응에도 상당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이미 국군 7사단이 돌파를 당해 마구 무너지면서 후퇴를 거듭했고, 전면을 돌파한 중공군이 종심 깊숙이 기동을 벌이고 있는데도 그를 지휘하는 미 10군단의 정보 신경 계통은 잠을 자고 있었던 셈이다. 국군 7사단이 전면을 돌파당했다는 사실을 미 10군단에 제대로 알리지 않은 점도 큰 문제였지만, 미 10군단의 상황판단 계통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에 매우 중요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과 동쪽으로 인접해 함께 적을 맞았던 국군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의 관계다. 전사를 따르면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5월 18일 아침 8시에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과 통화를 했다고 한다.
미군과의 불화
알몬드는 그 통화에서 중공군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이 아닌 한국군 3군단의 작전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박절하다 싶은 태도로 비칠 수 있겠으나, 자신이 이끄는 부대가 죽느냐 사느냐의 중차대한 결정을 이끌어야 하는 전선 지휘관으로서는 크게 나무랄 수도 없는 태도였다. 알몬드의 그런 태도에서 미 10군단과 한국군 3군단의 불화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이는 생사(生死)를 걸고 적에 맞서서 함께 싸워야 하는 전선의 우군(友軍)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다. 어깨를 함께 걸고 싸우는 우군 사이에는 서로 신뢰가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군 위문공연은 늘 이어졌다. 1952년 위문공연을 관람하는 당시 국군 장병을 촬영한 사진이다.
알몬드 장군을 전적으로 비호할 수는 없지만 전력과 화력, 나아가 전투 경험에서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 미군의 신뢰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는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의 매우 큰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군 3군단의 상황이 최악을 향해 다가갔던 이유의 하나다. 그런 이유로 9사단장의 철수 건의는 3군단의 승인을 얻어내지 못했다.
군단 차원의 조처가 내려지지 않자 9사단장 최석 장군은 후방의 중공군에게 길목을 차단당하는 것을 우려해 먼저 야포와 차량 등 기동장비를 먼저 철수시켰다고 한다. 후방으로 이동하는 일에 앞서 먼저 해당 지역으로 가서 필요한 설비 등을 마련하는 부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오마치 고개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길을 되돌아왔다.
부대가 종국에는 벗어나야 할 막바지 길목,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이미 점령당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퇴로가 막혔다는 점은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단장은 그런 상황을 파악한 뒤 새벽 4시에 전 부대의 철수를 명령했다. 그 시점에 지휘관은 심각한 고민을 해야 했다. 무조건 밀려 내려갈 것이냐, 아니면 오마치 고개를 돌파해야 할 것이냐. 그게 아니면 목숨을 내던져 앞에서 다가오는 중공군, 뒤로부터 공격하는 중공군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냐 하는 점을 따져야 했을 것이다.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사단의 전술지휘소가 있던 후방 용포에 9사단 예하 부대가 도착한 시점은 17일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길 중간에서 예하 부대들은 중공군에게 공격을 자주 당했다. 중공군 공격이 잠잠해지면 다시 집결해 움직였으나 대부분은 아예 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육군본부의 전사는 적고 있다. 그런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듯하다. 적 앞에서 아예 싸울 의지를 간직하지도 못하는 상황 말이다.
이를 후퇴라고 해야 옳을까, 아니면 철저한 와해라고 해야 맞을까. 후퇴는 엄연한 작전이다. 나름대로 체계를 지니면서 목표를 세워둔 채 질서 있게 움직이는 일이 후퇴다. 당시의 9사단은 그런 점에서 후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때 9사단은 이미 마음으로, 행동으로 무너지고 있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