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온도
안유정
‘네, 내일 혜화역 2번 출구 앞에서 오전 11시에 뵐게요. 좋은 밤 되세요.’
마지막 메시지에 웃음 이모티콘까지 보내고 채팅창을 닫았다. 주말은 유일하게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이었지만 약속 시간에 맞춰가려면 평소처럼 일어나야 했다. 핸드폰 알람을 오전 7시 30분에 맞춘 뒤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딸이 잠에서 깰까 조심스럽게 일어나 베란다로 갔다. 창고 앞에 쭈그려 앉아 빼곡히 모아놓은 쇼핑백들을 자료 찾듯이 훑었다. 표면에 가장 비싼 브랜드가 적혀있는 빳빳한 쇼핑백을 골랐다. 그다음 옷방으로 가서 장롱 맨 위 선반을 까치발 들고 뒤적거렸다. 세탁소에서 남편의 와이셔츠에 씌워준 비닐을 버리지 않고 모아둔 곳이었다. 그중 명품 브랜드가 인쇄된 비닐 커버를 슬슬 당겨 뺏다. 그리고 장롱 맨 구석에 걸려있던 코트를 꺼내 테이프로 먼지를 제거한 뒤 세탁소 비닐을 씌웠다. ‘자, 이제 좋은 주인 만나서 그 사람의 날개가 되거라.’ 하며 옷을 접어서 쇼핑백에 넣었다.
그 옷은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파주 헤이리마을에 갔다가 한눈에 반해 구매한 코트였다. 짙은 자주색에 소매가 한복처럼 봉긋하고 허리에 끈을 묶는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한두 해 입고 유행이 지났다는 생각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 주긴 아깝고 버리기엔 상태가 좋았다. 몇 해 전 이모에게 줬다가 눈에 밟혀서 다시 뺏어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장롱 한구석에 자리만 차지했지, 입진 않았기에 미련 없이 팔기로 결심했다. 바닥에 옷을 펼쳐 놓고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어 중고 매매 사이트에 5만 원에 판매하겠다고 글을 게시했다. 그러자 금세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아마 10년도 더 된 옷이지만 울 100퍼센트에 원가가 20만 원 정도였다는 점이 빠른 판매 요인 같았다.
구매자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아침 식사와 설거지를 서둘러 마친 뒤 딸의 옷을 단단히 여며 집을 나섰다. 공기는 상쾌했지만, 찬바람이 곧 몸으로 스며들었다. 딸은 답답하다며 풀어헤친 목도리를 다시 매달라고 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대학로에 도착해 마로니에 공원으로 갔다. 딸은 유치원에 있는 나무 출렁다리가 있다며 구석에 있는 놀이터로 가자고 했다. 아이와 놀아주며 어떤 사람이 나올지 얘기를 나눴다.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주말에 직거래를 고집했는지 몰라도 내겐 찬밥 신세였던 옷이 누군가에겐 뜨신 밥이 됐단 생각에 잘 판 것 같았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혜화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옷을 사기로 한 사람은 마침 대학로에 약속이 있어서 온다고 했지만, 안산에서 오는 길이 멀어서 늦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다렸다. 잘 오고 있는지 궁금해서 메시지를 보냈지만 깜깜무소식이었다. 연락처도 몰라서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어플로 대화를 나누는 방법뿐이라 답답했다.
12월의 찬 바람은 다섯 살 딸의 코끝을 점점 루돌프 사슴코로 만들었다. 아이는 춥고 배고프다며 집에 가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아침에 아빠와 두 오빠를 따라서 자동차 박물관에 가라고 했건만, 굳이 나를 따라온다고 할 때부터 힘들 걸 예상했다. 딸을 달랠 겸 근처 분식 포장마차에서 소떡소떡을 하나 사줬다. 따끈한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몸도 데우니 아이는 좋아하는 만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가벼운 걸음으로 혜화역 2번 출구 앞으로 갔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계속 문자를 보내는 자신도 치졸해 보였다. 아침부터 했던 내 행동이 허무해 웃음이 났다. 긴 모직 코트에 플라스틱 옷걸이까지 담긴 쇼핑백 끈은 내 어깨를 짓누르듯 파고들었고 발걸음은 더 무거웠다. 사기당한 것 같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즈음 그토록 기다리던 알람 소리가 들렸다.
‘당근!’
순간, 구매자가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화가 났지만 5만 원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나는 대학로에서 다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왔지만, 상대는 멀리서 오느라 힘들었을 거란 생각을 하며 문자를 읽었다.
‘지금 일어났습니다.’가 상대의 답이었다.
황당함으로 똘똘 뭉친 그 내용은 내 배를 가격한 듯 입김이 터져 나왔다. 하얗게 피어올라 간 입김처럼 오늘 일도 하늘 위로 모두 올려보내고 싶었다.
나는 온갖 육두문자를 퍼붓고 추운 날씨에 딸과 내가 받은 신체적, 정신적, 금전적 피해를 보상하라고 쏴붙이고 싶었다. 그래도 옷을 해치우고 싶은 마음에 택배로 부칠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기본도 안 되는 인간과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삼 남매를 육아하며 길러진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여 감정을 뺀 채 답장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분과 거래하겠습니다.’라고.
내가 옷을 판매하려고 게시한 중고 매매 어플에는 약속을 지키는 행동에 따라 개개인의 매너 온도가 측정된다. 나는 그 사람의 온도를 영하로 확 내려버리고 싶었다. 황금 같은 주말을 망쳐버린 괘씸함에 앙갚음하려고 이를 갈았다. 거래 후기를 안 좋게 적고 ‘신고하기’ 버튼을 눌러서 악성 구매자로 낙인찍고 싶었다. 옷이 급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늦잠을 잘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세상에 별사람이 다 있고, 미성숙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라고 치부했다. 딸과 다시 버스에 타서도 복수할 궁리만 했다. 그렇게 눈에 쌍불을 켜고 앉았는데 이와 비슷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결혼 전 회사에 다닐 때였다. 창립기념일을 맞아 소백산 등정이 예정된 토요일이었다. 분명 오전 6시에 알람을 맞춰 놓고 잤는데 눈을 뜨니 버스 출발시간인 8시였다. 팀장에게 전화해 황망한 목소리로 “지금 일어났어요!”라고 실토했다. 그 당시 대리 직급이었던 내가 무슨 정신에 단잠을 잤는지 두 시간 동안 내 영혼을 도둑맞은 것 같았다. 그 후 월요일에 나는 정수리를 조아리며 팀장 앞에 섰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올려보더니, 괜찮다고 했다.
또 한번은 내가 대학생일 때였다. 한 교수가 연구실에 선물로 들어온 화분이 많으니 필요한 학생은 가져가라고 했다. 꽃을 좋아하는 나는 내가 가지러 가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없어 연락도 없이 가지 않았다. 그 후로 꽤 시일이 지났지만, 그 교수는 화분에 대한 아무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흐지부지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졸업 후 스승의날에 그 교수를 몇 차례 찾아갔어도 나는 화분을 못 가지러 간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졸업 후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언젠가 그 교수를 만나면 풀고 싶은 죄책감으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만약 창립기념일 산행이 승진과 관련이 있었어도 늦잠을 잤을까? 화분을 가지러 가는 일이 학점에 영향을 주었어도 약속을 어겼을까? 코트를 구매하려던 사람의 약속 온도가 그 사람의 신용 점수에 반영되었어도 늦게 일어났을까? 모두 손해 볼 것 없는 남의 일이라고 가볍게 여긴 엉큼한 속내에서 비롯된 잘못이었다.
소백산행 관광버스에 앉아 연락 두절 된 부하직원을 기다리며 임원들 눈치를 봤을 팀장의 초조한 얼굴이 떠올랐다. 화분의 새 주인이 온다며 나를 기다렸을 기대에 찬 교수의 모습도 눈앞에 선했다. 약속은 맺어지는 순간 서로의 일인데, 상대에게 실망감을 준 철없던 시절의 내 과오가 부끄러웠다. 이글이글 타던 복수심도 긴 한숨과 함께 차갑게 식어갔다.
비록 대학로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바람을 맞았지만, 한편으론 내 치부에 대한 죗값을 치렀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기분도 들었다. 나 또한 누군가의 마음속엔 약속 온도가 꽁꽁 언 영하로 떨어져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딘가에 내 약속 온도가 계산되고 있는 장부가 있다면 오늘 일을 계기로 그 온도가 좀 따듯하게 올랐기를 바라는 건 비겁한 걸까.
집에 도착한 뒤 장롱을 열고 다시 묵직한 코트를 걸었다. 그리고 중고 매매 어플에 ‘예약 중’으로 되어 있던 판매 상태를 ‘거래 완료’로 변경했다. 그러자 거래 후기를 남기라는 팝업 창이 떴다. 나는 옛날에 팀장과 교수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 글도 적지 않았다.
첫댓글 나는 처음 문봄 창립할 때 속 터지는 줄 알았어요.
30분 늦는 것은 애교고 1시간 늦으면 '좀 늦었네요'. 두 시간 늦게 오고선 '늦였죠?'
5분만 늦어도 자아비판하게 했던 버릇이 남아서였는지 우와~ 정말 주먹이 운다였지요.
18년 전의 일인데 결국은 내가 지치더군요. 다행이 지금 우리 회원님들은 걱정하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작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일 때 늦었었습니다 (ㅡㅡ) ㅋㅋㅋ
예전에 선물받은 고급 운동화가 안 맞아서 저가에 당근에 내놓았는데 소식이 없어서 값을 세배로 올렸더니 금방 팔리더라는...
어머! 세배나요? 와.. 너무 싸도 안사나봐요~ 당테크 잘 하셨네요! ㅋㅋ 당근 재테크 ㅎ
복수 당하셨군요.ㅋㅋ
인과응보가 멀리 있는 철학이 아니었군요.
이제 일어난 그 사람도 언젠가는 복수를 당할 겁니다.
재미있는 수필이기도 합니다.
겸허한 성찰 잘 엿봤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누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이제는 속으로 '너도 언젠가 당할거다'하고 말아요 ㅎㅎㅎ 뿌린대로 거두더라구요. ㅎㅎㅎ 그래서 착하게 삽니다.
당근에게 당했군요 ㅋ
당근약속은 항상 마음 한켠에 조금의 불신을 남겨두고 성사되면 안도하며 불신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그런게 있죠.
맞아요 맞아요. 약속 어기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저는 와플 기계 하나 9,000원에 팔았는데 (그것도 택배 포함가) 밥 한번 먹자고 계속 연락이 오는거에요. 그래서 거절했더니 환불 요청하더라구요. 그래서 당근 어플을 아예 삭제했어요. 근데 누가 그러더라구요. 밥 먹자고 할 때 다섯 식구 다 가서 먹지 그랬냐고여 ㅋㅋㅋㅋ 그럴껄 그랬어여 ㅎㅎㅎ
약속~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며
지내려고 노력합니다.
부득이 못 지킬 때는
정중한 양해를 미리 구해야 했는데
상대방의 소중한 시간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속상함까지 보태줬으니
참 야속하네요.
그쵸 맞아요. 근데 요즘에 온라인으로 맺어진 약속들 중에는 그냥 어겨버리는 사람들도 꽤 많더라구요. 아흑 ㅎㅎ 감사합니다. 글 읽어주셔서^^
누구나 한 번쯤은 약속을 어긴 경험이 있을텐데, 당근의 거래가 작가님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가르침의 시간이었네요
솔직하게 써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 정말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게 인생 같아요. 그래서 저도 사람 관계에서도 늘 노력하고, 돕고 살려구요 ㅎㅎ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저는 당근 거래가 잘 되지 말라는 팔자 같아요. 싸게 내 놓아도 아예 연락도 안오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치우기는 해야 되겠고 버리기는 아깝고 해서 그냥 제공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러는게 팔자인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가져가더군요.
안유정 작가님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네요^^ '내겐 찬밥 신세였던 옷이 누군가에겐 뜨신 밥이 됐단 생각에 잘 판 것 같았다.'
이런 구절만 보아도 부러울 정도로 쉽게 잘 쓰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머 작가님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당근이랑은 팔자가 안 맞나봐요. 싸게 팔아도 환불해달라고 하고, 구매자가 밥 먹자고 하질 않나 그래서 아예 어플을 삭제했어요. 차라리 의류수거함으로 넣고 '미얀마에 사는 누군가에게 가거라~' 합니다 ㅎㅎ
상종도 못할 인간이라고 구매자를 원망하는 듯 했다가 정작 자신에게는 관대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성찰의 계기로 삼는 글 맺음이 압권이에요. 그러면서 우리는 한 단계 씩 성장해 나가는 거겠지요.
맞아요. 결국 저도 그랬던적이 있었더라구요. ㅎㅎ 진짜 철부지였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마도 분노는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밖에는 해소할 수 없나 봅니다.
작가님은 이미 그 경지에 들어서셨구요.
내려놓음 내려놓음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