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 여행4 - 델피에서 언덕을 올라 유적지에 아폴론신전과 야외 음악당을 구경하다!
2024년 5월 2일 아테네 리오시온 Liossion Bus Terminal B에서 버스를 타고 파르나소스
산을 올라 태양의 후예 드라마를 촬영한 아라호바 Arachova 를 지나서
3시간 만에 신탁으로 유명한 해발 750m 의 델피 Delphoi (Δελφοί 델포이) 에 도착합니다.
쿠로스 호텔 Kouros Hotel 에 체크인을 하고는 나와 300미터를 걸어서 유적지에 도착해 12유로 입장권
을 끊어 박물관을 보고 나와 언덕을 올라 고대 유적지 (Archaeological site of Delphoi) 에 올라
아테네인들의 보물창고를 지나서 세상의 배꼽이라는 옴파로스 Omphalos (Ομφαλος 돌을 구경합니다.
델포이라는 말은 “자궁”을 뜻하니 세상의 중심으로 신탁을 전하는 무녀들은 ‘피티아’
라 불렸으니 아폴론의 신탁은 피티아가 신전의 삼각의자에 앉아 무아지경에
빠진채 중얼거리면...... 사제들이 그 말을 운문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내려졌습니다.
신탁을 받으려는 도시 국가나 개인 할것 없이 모두 '패리노스' 라는 세금(보통을 금으로 지불)
을 내야 했다. 그래서 그리스의 각 도시 국가들은 자신들의 보물을 저장해
둔 보물 창고를 이곳에 짓기 시작했으니 아테네인들의 보물창고를 복원해 놓은 것을 봅니다.
아폴론신전에 이르니 세 마리 뱀이 서로 몸을 꼬아 올라가는 형상을 묘사한 청동 기둥이 있는데, 청동
뱀 기둥(Serpent column) 은 BC 478년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가 페르시아와 싸워 승리한
플라타이아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페르시아군으로 부터 노획한 청동 무기
들을 녹여서 만들었으며...... 이 전투에 참전한 31개의 도시 국가들의 이름을 기둥 밑에 새겼습니다.
이 기둥 위에 세발 솥단지가 올려 있고, 신의 계시를 직접 전달하는 「피티아」 가 그 위에 앉아
있었다고 하는데..... 신의 말을 피티아가 전하니, 몽롱한 상태에서 전하기에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했으니 신탁자들은 그 말을 유리하게 생각도 하고, 잘못 해석해 화를 입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 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6년에 청동 뱀기둥을 수도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로 가져가서 히포드롬 광장(Hippodrome Square, 또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 에 세워버렸으니..... 현재 델포이에 있는 이 청동 기둥은 2015년에 만든 복제품 이라고 합니다.
원래 높이는 8미터로 기둥 꼭대기에 세 마리의 뱀 머리 위에 황금 그릇(솥)이 있었지만 지금은 윗 부분
이 훼손된 상태로 5.5m 의 기둥만 남아 있으니 황금 그릇은 지금 볼 수 없지만 세 마리의 뱀
머리 중에 하나는 터키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 또 다른 하나는 영국 대영 박물관에 있다고 합니다.
아폴론 신전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문구가 이 곳에 있었으나 현재는 볼 수
없는 상태라는데 전성기는 BC8~BC 6세기이며 최전성기에는 3명의 피티아(무녀) 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폴론은 자신의 신전을 짓고자 했으나 뱀 괴물 형상을 한 '피톤(Πύθων, Python)'
이 허락하지 않자 화살로 쏘아 죽인후 지명을 델포이로 바꾸고 신전을
지어 여사제 '피티아(또는 퓌티아 Πυθία) ' 를 통해 신탁을 내리게 했다고 합니다.
검은 빛깔을 띤 아폴로 신전은 길이가 60m, 폭이 23m 크기로 38개의 도리스식 기둥이 받치고 있었
는데, 현재는 복원된 6개만 있는걸 보는데..... 신전 뒤 작은 방에 신탁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도리스(도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아폴론 신전(Απόλλων ναός, Temple of Apollo) 은 최초 신전은 월계수
나무로 지어졌으나 여러 번의 자연 재해와 BC 548년 대화재 이후로 대리석 건물로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신전은 전실, 후실, 신실로 총 3개의 방으로 나뉘었는데 신실 안에는 여사제인 '피티아' 만이
들어갈 수 있는 신탁소가 있었다는데 신화에서 아폴론은 그가 싸워 죽였던
뱀 괴물 피톤의 아내 피티아를 인간의 몸으로 바꿔 첫 여사제(무녀) 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1년에 9개월만 진행했던 아폴론 신전에서의 신탁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성스럽고 엄격하게 이루어졌으니
신의 대답을 들은 피티아는 몽환적인 상태에서 혼자 중얼거리듯 신탁의 결과를
말했고 이 말을 다른 남사제들이 듣고 받아 적은 후 해석해서 신탁을 요청한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피티아가 어떻게 신으로부터 예언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유황
가스로 인한 '환각' 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니 신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피티아는 마지막에 성소
안의 바닥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들이마셨는데...... 이 수증기 속 환각 성분에 취했을 것으로 여겨진답니다.
실제 신전이 있는 파르나소스 산 하부 지역이 테르모필레('뜨거운 입구'라는 뜻) 인데 이곳은 예로 부터
유황 온천이 많은 곳이었으니..... 이런 신비로운 자연 현상과 더불어 당시 고대인들은 신의
거룩함과 영험함을 실감했을 것이고 신탁에 대한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사진 계단길을 조금 더 올라가서 신전 위의 4세기에 지어진 야외 원형극장 (Amphitheater) 은 2층 35
계단으로 이뤄져 있고..... 5,000명의 관중을 수용했다고 하는데 보관상태가 양호한게 놀랍습니다?
원래는 목조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BC 4세기 로마 제국
시대에 석조로 건축된 것이라는데, 돌로 만든 지름 7m, 약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35열의 관람석과 분장실, 무대를 갖춘 상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극장은 피티아 제전 기간 동안 연극과 음악을 공연하는 데 사용되었다. 매 4년마다 치뤄진 피티아(Pythian)
제전은 아폴론이 피톤과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축제로 5일 간 치뤄지는 축제 기간 동안
문학 예술 경연과 운동 경기 등이 열렸으며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이 참여하는 범그리스적인 행사 였다.
야외극장 옆 경사 길로 10여분 오르면 델포이 정상 못미쳐 산비탈에 고대 경기장
이 있으니 북쪽 12계단이 복원되었다는데.... 7천명 가까운 수용으로
피티아 제전이 열렸으니 ......육상 보다는 음악이나 무용이 중점이었다고 합니다.
고대 스타디온(στάδιον, stadion) 은 원래는 그냥 넓은 공터 형태였으나 기원 2세기에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관람석을 지어 기부해서는 관람객 6,500명 수용할 수 있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타디온'이란 말은 그리스 내의 각 지역에 있던 경기장의 길이 단위로도 쓰였는데 각 경기장의
크기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각 스타디온의 길이도 달랐다는데 이곳 델포이
경기장의 1 스타디온은 177.7m 이고 올림피아의 경기장 1 스타디온은 192.25m 였다고 합니다.
경기장에서는 합창을 겻들인 무용, 반주와 가창, 반주와 함께 호메로스 낭창, 피티아
가곡 콘테스트가 열렸으니.... 피티아 가곡은 아폴론과 용의 싸움을 묘사한
음악으로 서곡, 개전, 전투, 승리 및 용의 죽음 5개 악장으로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보통은 더운 날씨로 인해 고지대에 자리한 고대 경기장은 방문객들이 일부만 오른다고 하지만
오늘은 보수공사 중이라 아예 계단 길이 막혀 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어 좋습니다?
여기 야외 극장만 해도 높은 곳이라 아래를 내려다 보니 파르나소스산의 계곡들과, 뾰족하게
뻗은 삼나무, 유적지의 유물, 파란 하늘의 풍광이 장관을 이뤄 올라온 보람이 있습니다.
조금 내려와 다시 아폴론 신전 앞에 서니 문득 소크라테스 일화 (Σωκράτης, Socrates)라는게 떠오르니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BC 399년에 아테네인들의 시기로 고소되어 결국 독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보고 다들 지자(知者) 라고 하였지만 그 자신은 누가 정말로 이 시대에
똑똑한 사람인지 궁금하였으니.... 델피를 방문한 그가 델피의 신탁에게 이 시대의 현자
가 누구인지를 질문하였고 델피의 신탁은 바로 당신이 이 시대의 현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델피의 신탁은 신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항상 애매모호하게 말을 전하여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을 전하는데....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대답을 듣고 사색에 잠겨
나오는 중에 벽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고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다른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기에
바로 소크라테스 자신이 다른이들 보다는 똑똑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지요? 그는 대화를 통하여 사람들의 무지함을 일깨웠으나 사람들의
시기로 죽게 되었고 '악법도 법이다', '빗진 닭 한 마리 갚아라' 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 입니다.
다르게는 소크라테스의 친구이자 제자인 카이레폰 (Χαιρεφῶν, Chaerephon) 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신에게 물었고 피티아에게서 소크라테스 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기쁜 마음으로 이 소식을 전하자 늘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있었던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을 것
이라며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찾으려 세상의 여러 자타공인 현자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눴답니다.
그러나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안다는 것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지지도 못하고 참된 지혜를 알지도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으니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이들과는 달리 자신
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한 신탁이 내려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신이 자신에게 준 의무를 수행하는 차원에서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려 했다고 합니다.
문득 왕은철 전북대 교수가 동아일보에 “소크라테스 스토리와 치유, 개인을 닮아야 좋은 국가”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누군가에게 고통인 일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이 되기도 한다. 서글프고 어이없지만 때로는
현실이 그러하다. 그런데 아무리 다른 사람의 고통이라 해도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한 반목과 악의에 원인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분열적 현실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아야 제대로 된 국가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누군가의 고통과 눈물이 나의 고통과 눈물이고, 누군가의 성공과 실패가 나의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다.
그가 국가에 가장 해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마저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분열이다. 그 분열이 감정의 공유를 가로막는다. 그에 따르면, 국가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가능한 한 모든 시민이 기쁨과 고통을 공유하는 것” 이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을 닮은 국가”가 좋은 국가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손가락을 다쳤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몸 전체가 고통을 느낀다. 손가락이 몸의 유기적인 일부이기 때문에 몸 전체가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만이 아니라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다른
감정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분이 느끼는 기쁨이나 즐거움은 전체가 느끼는 기쁨이나 즐거움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를 인간의 몸에 비유하며, “훌륭하게 경영되는” 국가라면 손가락과 몸의 관계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몸의 한 부분이 경험하는 것을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느끼듯, 개인이 느끼는 감정들을
모든 시민과 국가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개별 시민에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면, 개별 시민을 자신의 일부로 여기고 전체로서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국가가 좋은 국가” 이다.
국가도 인격체여야 한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2000여 년 전에 했던 말이지만, 국가
가 개인의 상처와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고
소중하다. 우리가 지독한 불신과 냉소와 증오의 시대를 살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큰 도로로 내려가 카스탈리안 샘물을 지나는데 물리 차가운게
더운날에 여행자들 에게는 가히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델포이 유적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위쪽유적지를 보았으니 우린 위쪽을 이제
도로를 따라 300미터를 걸어서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을 찾아갑니다.
건축물이 특이한데다가 또 일부이긴 하지만 완전하게 보존이 되어 볼만한데 어떤
여자분이 사진사를 데리고 여러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것을
보니 단순한 고나고아객이라기 보다는 무슨 잡지용 사진을 찍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는 300미터를 걸어 마을로 돌아와 입구에 선 당산목 같은
큰 느티나무 아래에 차려진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습니다.
여기 느티나무 아래 야외테이블에서 점심겸 저녁을 먹는데.... 2인분
음식에 맥주 까지 합쳐서 모두 22유로를 내니 싸긴 합니다!
레스토랑 건물로 들어가서는 내일 아침에 메테오라를 보기 위해 칼람바카 까지 가는데 바로 가는
교통편은 없으니 우선 새벽 6시 30분에 라미아 가는 버스표를 1인당 9.9 유로씩에 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