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이진숙-이재명의 상승하려는 힘에의 의지를 보면서 부러움과 함께 벤치마킹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에예공은 이진숙 방통위원장을 주시하시라. 만약 내게 여야 총수의 직책이 주어진다면 무조건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줄 사람이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를 그 순간을 위해 오늘도 와신상담하고 있어요. 에스더가 자는지 전화를 받지 않아 복병을 걱정하고 있고 예주가 하트를 날려주지 않아서 기분이 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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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남근 철학을 꺼내 들었다가 방대한 분량에 고름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고름 받게 될 줄 몰랐어요. '남근의 의미'와 '정신분석학 치료의 방향'에서 (요구-욕구-욕망)의 알쏭달쏭 한 차이에 관심이 있어 3일 째 붙잡고 있는데 진도가 나가질 않아요. 나의 요구에서 욕구를 뺀 나머지기 욕망이고 우주에서 유일하게 중력 법칙을 벗어난 것이 남근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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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을 욕망의 차원에서 설명해 줄 뿐 아니라, 남녀가 어떤 식으로 성차하고 분화가 되는지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성차 문제는 프로이트를 굉장히 괴롭혔던 문제입니다. 전형적인 남성적인 것으로 설정을 한 거 같아서 그래요. 유명한 리비도 일원론이 그것입니다. 모든 리비도는 다 남성적인 것입니다. 동시에 성적인 것인데 그러면 남성적인 주제로 발전을 해나가야 되지요. 그런데 어는 순간 거기서 여성이 분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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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도대체 이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분기되는 것인지 프로이트가 설명하려고 한 것 같아요. 남근의 철학 기대하시라! 결과적으로 그가 부닥친 당혹감은 그것을 설명할 길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남성성에 대립되는 소극적 차원 정도의 의미에서 설명이 되는 것들이고, 정확하게 여자, 남자를 대칭적 구조에서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은 없어요. 오이디푸스 논리는 전형적으로 남자아이가 어떤 식으로 성적 주체가 되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차의 문제는 라캉에 있어서도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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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남성의 차원을 거세 콤플렉스라는 차원으로 설명을 했어요. 거세 콤플렉스가 의미하는 건 기본적으로 남성적 리비도를 담보하는 기관으로써 남근이라는 것, 남자아이에게 있어서 남근을 지키고자 하는 거세 콤플렉스는 여자 아이를 보면서 생겨 나게 되는데, 이제 오이디푸스 과정을 종식시키게 하는 거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종식된다는 것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게 아니고 극복되어야 하는 차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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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아버지와 경쟁하려고 하고 어머니를 욕망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정신 장애가 되죠. 근친상간적인 욕망이기에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극복되어야 되고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동기가 바로 거세 콤플렉스라는 겁니다. 아버지로부터 오는 거세의 위협, 이런 것들입니다. 반대로 여자 아이는 페니스 선망한다고 해요. 오이디푸스 시기의 아이는 단 하나의 성기만 압니다. 그것이 남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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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이는 자기 몸의 해부학적인 차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해요. 물론 여성주의 이론에서는 멜라니 클라인같이 여자아이가 어려서부터 자기의 성차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남근에 대립된 질이라는 대립구조를 놓고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건 나중 일이고 먼저는 단 하나의 성 기관 만을 안다는 겁니다. 있다. 없다 이것이 두 성의 아이들한테 똑같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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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는 있는 거니까 지키려고 하는 것이고, 여자 아이는 없으니까 가져보려고 하는 것 여기서 성차의 분화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여자 아이는 아이에 대한 갈망을 해요. 왜냐하면 자기는 없으니까. 그리고 남자아이, 아니 아버지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세 가지 형태로 여성성이 나타난다고 합디다, 라캉은 거세 콤플렉스와 '페니스 선망'을 어느 정도는 남근 우월주의적인 입장에 서 있어요. 적어도 남자아이가 갖는 해부학적인 것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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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이 프로이트에게서 바꾼 것은 굉장히 많아요. 리비도가 성적인 에너지고 그것이 실질적으로 자극과 방출을 통해서 일정 정도의 상태로 유기체를 유지하게 하는 항상성의 원리, 이런 것을 통해서 욕망이 전제됩니다. 프로이트의 이 설명을 라캉은 완전히 뒤집어버립니다. 그런 건 없다. 오로지 상징계와 주체의 작용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는데 남근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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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남근에 대해 정의하기를 남근이라는 것은 페니스나 음핵 같은 성기관도 아니고 상상적인 이미지도 아니라고 해요. 남근이 '거세의 상징계적 기능'이라는 말이 남근에 역할에서는 굉장히 중요해요. 남근은 하나의 시니피앙으로서 분석적 상황에 상호 주체성의 구조 속에서 신비 속 기능을 감추는 베일의 기능을 한다네요. 왜냐하면 남근이라는 기표는 자신의 현존을 통해 시니피에의 효과를 조건으로 전제하고 지시하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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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라캉은 상상적 남근과 상징적 남근을 구별할 것을 제안해요. 상상적 남근은 소문자 파이로 표기, 상징적 남근은 대문자 파이로 써요. 두 기호를 유념해서 보시라. 오이 디스 푸스의 단계는 남근에 의해서 매개가 되기 때문에 오이디푸스 1단계라고 나중에 바꿉니다. 이 단계에서 엄마와 아이를 매개시켜 주는 게 바로 상상계 남근의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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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것은 자기에게 결여가 있기 때문인 것이고 동시에 엄마가 자기에게 똑같이 의존하는 것은 의존이라기보다 사랑 차원에서 엄마 역시 결여가 돼 있다고 아이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의 결여를 메워 주는 게 바로 상상적 남근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엄마의 남근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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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나 하나만 있으면 돼, 내가 엄마의 모든 걸 채워 줄 수 있어. 그런데 지나면서 보니까 엄마는 자기가 아니라 엉뚱한 것에서 여전히 대상을 찾고 있는 겁니다. 이때 때 아닌 좌절 하면서 분노하게 돼요. 이게 오이디푸스로 들어가는 과정이에요. 그 대상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엄마는 나만 사랑하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 그것도 나보다 훨씬 강력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 대항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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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아버지를 향한 경쟁과 증오의 심리가 나타나고 이것이 어머니를 향한 욕망과의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어머니를 선택하자니 아버지가 무섭고,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자니 어머니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이게 오이디푸스적인 삼각관계입니다. 여기서 아이는 남근이 되어야 하느냐, 아니냐를 고민합니다. 내가 남근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대항한다는 거고 사실은 남근이 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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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이는 상상적 남근이에요. 자기가 남근이라고 생각하니까 허구지만 아이는 자기가 남근이면 엄마는 아버지한테 눈을 돌릴 필요가 없지요. 그 자체로 자기를 충족할 테니까. 바로 이 이자 관계는 정신병에서 원형처럼 작용하기에 빨리 이 단계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이 단계는 아이에게 행복한 것 같지만 엄마의 욕망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는 단계이기 때문에 아이한테는 위험한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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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아이는 어머니가 결여가 안 되어 있다고 가정을 해요. 아버지를 향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엄마는 결어가 없는 존재로 어머니의 거세를 부정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남근을 가진 엄마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엄마의 남근,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독수리의 환상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집트 벽화에 남근을 가진 존재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로 그려지는 이것이 바로 상징적 의미에서 어머니의 남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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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을 가진 어머니, 그래서 결여가 없는 존재, 물론 이런 존재는 불가능합니다. 어머니는 결어가 있지만 어머니의 결여를 부정하려는 것이 도착증으로 나타납니다. 이 결여를 뭔가를 통해서 가려야 하니까 사실은 도착증을 부인합니다. 거세가 안 돼 있다고 믿으면서 거세의 빈자리를 자꾸 다른 것으로 채워보려고 하는 페티시즘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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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증 환자들이 어떤 물건에 매달리는 것은 그 물건 자체가 나에게 만족을 주기보다는 그게 일종의 대체 대상입니다. 엄마의 결여를 메우는 존재, 그래서 신경증보다 도착은 상상적인 이자 관계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단 게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다중적 도착증이랄까.
2024.8.12.mon.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