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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정(永湖亭)은 칠금동에 있었다는 정자이고 영호정기를 쓴 현판도 남아있지 않고 기록으로만 그 내용이 전하는데, 살펴보니 오류가 있어 교정하여 실었습니다. 당연히 지금 충주시 칠금동에 없습니다.
충주향교지(1992년)에 나오는 《永湖亭記》를 먼저 싣고, 중복해서 충주향교지(2017년)에 나오는 《永湖亭記》를 실었습니다. 글을 먼저 올렸던 것은 2017년 《永湖亭記》인데 그대로 두었습니다.
<忠州鄕校誌(1992년)에 실린 永湖亭 모습>
이 사진을 언제 찍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주련(柱聯)도 달린 고풍(古風)스런 모습이다.
우선 충주향교지(1992년)에 나오는 내용을 옮깁니다.
『 永湖亭
忠州市 漆琴洞 江邊에 位置한 永湖亭은 檀紀四二五三年(庚申年, 1920년) 月笠 權丙燮(權泰成氏의 祖父) 先生이 建立한 것으로 悔堂 宋之憲이 쓴 懸板이 있다.
建物의 構造는 正面 三間 側面 二間으로 區劃한 後 다시 四面에 前退間을 만들었으므로 全體的으로 보면 正面五間 側面 四間이 되는 比較的 큰 規模의 亭子이다. 規模뿐만아니라 建築技法도 優秀하다. 그리고 懸板外에 바깥쪽 기둥마다 陽刻板으로 걸려있는 柱聯글씨도 達筆이라고 所聞났다.
그런데 管理가 疎忽하여 建物이 頹落해가고 있다. 또 巨木인 銀杏나무 때문에 지붕이 崩壞되어가고 있다. 市當局에서는 文化財保護次元에서 補修해야 할 것으로 思料된다.
다음에 永湖亭記文을 紹介한다.
永湖亭記
亭名以永湖何謂也 湖之上有古亭址焉 即我 十二世祖福成君杖屨之所也 而其後 兩世衣履之箴在於在麓意或亭而因名焉 八世祖府使公辭安邊仍歸于田里 此謂桑梓之鄕無疑矣 然則未知亭廢於何時而鞠爲 茂草者爲幾何日月 先君嘗語余曰 古之人吾廬亦尙愛之 何忍使 祖先奠居之地棄爲葛蕘之場(원문엔 葛蕘로 써 있다. 詩經에 緜緜葛藟라는 표현이 보인다.)
因植樹累石 以識其所矣 余觀夫二水作匯 不流不波 是稱曰湖 雲開雨霽 風清月朗 長天一碧 遠山交翠 至若龍灘暮帆 琴臺 漁笛 亦所助之一致也 湖之大小雖殊 寧不爲南州之眉目耶 噫昔時有亭 既得此勝 而式至於今 徒見其地不見 其亭 尋常行路 猶尙指点咨嗟 況其爲後孫者乎 思所以堂構者 閱歲蘊中 始於今春建六間小亭 扁之曰永湖 者 蓋因舊額無徵 聊追永慕之義而寓之於湖也 於是招賓朋而落之 詩酒琴棋 惟意所適 繼玆以往 隨時登臨 春 或談農 夏或觀漲 秋則賞楓 冬則賦雪 終生倘佯 豈不樂哉 時日似續妣祖築室百堵又曰孝孫有慶 報以介福 嗟 我來昆 尙念余今日之意 勤儉自修不墜 先祖之福音 則庶吾亭之永世焉
太歲癸酉秋八月上弦
八十五歲翁 月笠 權丙燮 識
曉齋 崔翰求 書
永湖亭記 (표점 정본)
永湖亭記
亭名以『永湖』, 何謂也? 湖之上有古亭址焉, 即我十二世祖福成君杖屨之所也. 而其後兩世衣履之箴在於在麓, 意或亭而因名焉.
八世祖府使公辭安邊, 仍歸于田里, 此謂桑梓之鄕, 無疑矣. 然則未知亭廢於何時, 而鞠爲茂草者爲幾何日月?
先君嘗語余曰: “古之人, 吾廬亦尙愛之, 何忍使祖先奠居之地, 棄爲葛蕘之場?” 因植樹累石, 以識其所矣.
余觀夫合水作匯, 不流不波, 是稱曰湖. 雲開雨霽, 風清月朗, 長天一碧, 遠山交翠. 至若龍灘暮帆、琴臺漁笛, 亦所助之一致也. 湖之大小雖殊, 寧不爲南州之眉目耶?
噫! 昔時有亭, 既得此勝, 而式至於今, 徒見其地, 不見其亭. 尋常行路, 猶尙指點咨嗟, 況其爲後孫者乎?
思所以堂構者, 閱歲蘊中. 始於今春, 建六間小亭, 扁之曰『永湖』者, 蓋因舊額無徵, 聊追永慕之義, 而寓之於湖也.
於是招賓朋而落之, 詩酒琴棋, 惟意所適, 繼玆以往, 隨時登臨. 春或談農, 夏或觀漲, 秋則賞楓, 冬則賦雪, 終生倘佯, 豈不樂哉?
時日似續妣祖, 築室百堵, 又曰 “孝孫有慶, 報以介福”. 嗟! 我來昆, 尙念余今日之意, 勤儉自修, 不墜先祖之福音, 則庶吾亭之永世焉!
太歲 癸酉 秋八月 上弦
八十五歲翁 月笠 權丙燮 識
曉齋 崔翰求 書
<번역문>
영호정기 (永湖亭記)
정자의 이름을 '영호(永湖)'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호수 위에 옛 정자 터가 있으니, 바로 나의 12세조이신 복성군(福成君)께서 거닐며 유유자적하시던 자취이다.
그리고 그 후 2대에 걸친 선조들의 유덕(遺德, 墓所)을 기리며 삼가는 경계의 글(箴, 碑碣)이 산기슭에 남아 있으니, 아마도 정자를 짓고 그 뜻을 기려 정자의 이름을 인(因)하여 지은 것이다.
8세조이신 부사공(府使公)께서 안변(安邊)의 벼슬을 사직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오셨으니, 이곳이 고향(상재지향·桑梓之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정자가 어느 때에 폐해져서 잡초만 무성한 황무지가 된 것이 몇 해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돌아가신 아버님(先君)께서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은 자신이 살던 오두막집도 오히려 아꼈거늘, 선조들께서 터를 잡고 살아가시던 땅을 어찌 차마 버려두어 칡과 땔나무 풀만 우거진 폐허(葛蕘之場)가 되게 하겠느냐?’ 하셨다. 그리하여 나무를 심고 돌을 쌓아 그곳임을 표시해 두셨던 것이다.
내가 보건대, 두 물기운이 합쳐져 못을 이루고 흐르지도 파도치지도 않는 것을 일컬어 ‘호수’라 한다.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면 바람은 청량하고 달은 밝으며, 아득한 하늘은 한빛으로 푸르고 멀리 보이는 산들은 푸르름을 다툰다. 용탄(龍灘, 龍灘을 지금 龍灘洞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己卯名賢인 李延慶(1484년(성종 15) ~ 1548년(명종 3))이 살았다는 곳을 말한다. 號가 龍灘子, 灘叟이며 이규경(李圭景)이 지은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보면 택리지(擇里誌)를 인용하였는데, 《忠州形勝辨證說》에 다음과 같은 나온다.
《自臺(탄금대)渡江而北爲北倉(지금 금가면 盤松마을에 있었다.《충주, 낯선 설렘》이란 책에 자세히 나온다.)。有臨江巖石之勝。倉西卽己卯名賢灘叟李延慶之所居。子姓十世科甲不絶。人以爲江干名基。》
예성춘추(1959년) p475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 280. 李延慶 (儒賢) 字는 長吉 號는 灘
叟라고 한다. 廣州人 奉事 守元의 아들이요, 判中樞府事 世佐의 孫으로 中原郡 金加面 遊松里에서 出生하였다. 』
능바우 주변 지형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다음에 소개할 것이다. 땅은 정직하다. 직접 눈으로 본 것으로 지금 남한강을 생각하면 안된다. 충주댐 준공(1985년) 이전 무렵 지형도 아니다. 충주의 古代史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의 돛단배와 금대(琴臺)에서 들려오는 어부의 피리 소리에 이르기까지, 또한 경치를 더해주는 훌륭한 풍경이다. 호수의 크기는 비록 다를지라도 어찌 이 남쪽 고을의 으뜸가는 경치(眉目)라 하지 않겠는가!
아! 예전에도 정자가 있어 이미 이러한 절경을 누렸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낱 그 터만 보일 뿐 정자는 보이지 않는구나. 길을 지나가는 평범한 나그네도 오히려 손가락질하며 탄식하거든, 하물며 그 후손된 자야 어떠하겠는가?
정자를 다시 지을 방법을 생각하며 세월을 보내고 마음속에 품어왔더니, 이번 봄에 비로소 6간의 작은 정자를 세우고 현판을 영호(永湖)라 하였다. 대개 옛 현판을 증험할 길이 없어, 애오라지 선조를 영원히 사모하는 뜻(聊追永慕之義)을 호수에 그 마음을 기탁한 것이다.
이에 벗과 손님들을 초대하여 낙성식을 열고, 시와 술, 거문고와 바둑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기며, 앞으로도 때에 따라 계속해서 이곳에 오르고자 한다. 봄에는 농사일을 논하고, 여름에는 불어난 물을 구경하며, 가을에는 단풍을 감상하고, 겨울에는 눈을 시로 읊으며 평생을 유유자적 노닐 수 있다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때마침 선조의 업적을 계승하여 담장을 높이 올리고 집을 지으니, 이른바 “효성스러운 자손에게 경사가 있으니, 큰 복으로 보답하리라” 한 것과 같도다.
아! 우리 후손들은 부디 나의 오늘의 뜻을 기억하여,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스스로를 修養하여 선조의 복된 가르침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우리 정자가 영원히 세상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태세 계유년(癸酉年, 1933년) 가을 8월 상현(초순)
85세 노인 월립(月笠) 권병섭(權丙燮) 지음
효재(曉齋) 최한구(崔翰求)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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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永湖亭記
亭名 以永湖 何謂也
湖之上有 古亭址焉
卽我十二世祖 福成君 杖屨之所也
而其後 兩世衣履之箴在於在麓
意或亭因名焉
八世祖 府使公 辭安邊 仍歸于田里
此謂桑梓之鄕 無疑矣
然則 未知亭廢於 何時 而鞠爲茂草者 爲幾何日月
先君嘗語余曰
古之人吾慮 亦尙愛之 何忍使祖先奠居之地
棄爲葛蕘之場因植樹累石 以識其所矣
余觀 夫二水作匯 不流不波 是稱曰湖
雲開雨霽 風淸月朗 長天一碧 遠山交翠至
若龍灘暮帆 琴臺漁笛 亦所助之一致也
湖之大小 雖殊寧不爲 南州之眉目耶
噫 昔時有亭 旣得此勝 而式至于今
徒見其地不見
其亭尋常行路 猶尙指 点咨 嗟矧其爲後孫者乎
思所以堂構者 閱歲蘊中始於今春
建六間小亭
扁之曰 永湖者 蓋因舊額無徵聊
追永慕之義 而寓之於湖也
於是 招賓朋 而落之 詩酒琴棋
惟意所適繼玆 以往隨時
登臨春或談農 夏或觀漲 秋焉(則字가 맞음)賞楓
冬焉(則자가 맞음)賦雪 終生徜徉
豈不樂哉 時曰 似續妣祖築空百堵(詩經에 나오는 말로, 築室百堵가 맞음)
又曰 孝孫有慶 報以介福嗟
我後昆尙念 余今日之意 勤儉自修不墮(不墜가 맞음) 先祖之福蔭 則庶吾亭之永世焉.
太歲 癸酉 秋八月 上弦
八十五歲翁 月笠 權丙燮 識
曉齋 崔翰求 書
<원문 교정 및 표점>
永湖亭記
亭名以永湖,何謂也?
湖之上,有古亭址焉,卽我十二世祖福成君杖屨之所也。而其後兩世衣履之箴,在於在麓,意或亭因名焉。
八世祖府使公辭安邊,仍歸于田里。此謂桑梓之鄕,無疑矣。
然則未知亭廢於何時,而鞠爲茂草者,爲幾何日月。
先君嘗語余曰:「古之人,吾慮亦尙愛之,何忍使祖先奠居之地,棄爲葛蕘之場?」
因植樹累石,以識其所矣。
余觀夫二水作匯,不流不波,是稱曰湖。雲開雨霽,風淸月朗,長天一碧,遠山交翠。至若龍灘暮帆、琴臺漁笛,亦所以助之一致也。
湖之大小,雖殊,寧不爲南州之眉目耶?
噫!昔時有亭,旣得此勝,而式至于今,徒見其地,不見其亭。尋常行路,猶尙指點咨嗟,矧其爲後孫者乎!
思所以堂構者,閱歲蘊中,始於今春,建六間小亭。
扁之曰永湖者,蓋因舊額無徵,聊追永慕之義,而寓之於湖也。
於是招賓朋而落之,詩酒琴棋,惟意所適。繼玆以往,隨時登臨:春或談農,夏或觀漲,秋焉賞楓,冬焉賦雪,終生徜徉,豈不樂哉!
《詩》曰:「似續妣祖,築室百堵。」又曰:「孝孫有慶,報以介福。」
嗟!我來昆,尙念余今日之意,勤儉自修,不墜先祖之福蔭,則庶吾亭之永世焉。
太歲 癸酉 秋八月 上弦。
八十五歲翁 月笠 權丙燮識。
曉齋 崔翰求書。
<번역문>
永湖亭記(영호정기)
정자의 이름을 영호(永湖)라 한 것은 무슨 뜻인가?
호수가에는 옛 정자의 터가 있다.
곧 우리 12세조 복성군(福成君)께서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고 거닐던 곳이다.
또 그 뒤로 두 대에 걸친 선조의 의관을 묻은 묘소가 산기슭에 있으니, 아마도 정자를 세우고 그로 인해 이름을 붙였던 것 같다.
8세조 부사공(府使公)께서는 안변부사를 사직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이곳이 바로 선영이 있는 고향임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정자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무성한 잡초만 우거진 지가 얼마나 오랜 세월인지도 알지 못한다.
선친께서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옛사람도 오히려 옛 자취를 소중히 여겼는데, 어찌 차마 조상께서 자리 잡고 사시던 곳을 칡과 나무꾼의 땔감터로 버려두겠느냐."
하시고는,
나무를 심고 돌을 쌓아 그 자리를 표시해 두셨다.
내가 살펴보니,
두 물줄기가 합쳐져 잔잔히 고여 흐르지도 물결치지도 않는 곳이 있어 이를 호수라 부른다.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갠 뒤,
바람은 맑고 달은 밝으며,
하늘은 끝없이 푸르고,
먼 산은 푸른빛을 서로 드리운다.
또한 용탄(龍灘)의 저녁 돛배, 금대(琴臺)의 어부 피리 소리도 이 경치를 더욱 빛내 준다.
호수의 크기는 비록 다를지라도,
어찌 남쪽 고을의 아름다운 경관이 아니겠는가.
아, 옛날에는 정자가 있어 이미 이러한 절경을 누렸건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터만 남고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조차 늘 그 자리를 가리키며 탄식하거늘,
하물며 후손된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이에 다시 정자를 세울 뜻을 품고 여러 해를 마음속에 간직하다가,
마침내 금년 봄에
여섯 칸 규모의 작은 정자를 세웠다.
편액을 영호(永湖)라 한 것은,
옛 현판의 이름을 고증할 길이 없어,
다만 옛일을 길이 추모한다는 뜻을 빌려
호수의 이름에 그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에 친지와 벗들을 불러 낙성연을 베풀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는 등
마음 가는 대로 즐겼다.
앞으로도 때를 따라 올라와
봄에는 농사를 이야기하고,
여름에는 불어난 물을 바라보며,
가을에는 단풍을 감상하고,
겨울에는 눈을 읊으며,
평생 이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할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조상의 집을 이어 다시 크게 세우고(似續妣祖 築室百堵),"
또 이르기를,
"효성스러운 자손에게는 경사가 있어 큰 복으로 갚아 준다(孝孫有慶 報以介福)."
아, 바라건대 나의 후손들도
오늘 내가 품은 뜻을 항상 생각하여,
근검으로 몸을 닦고
선조의 복된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이 영호정 또한 영원히 보전될 것이다.
계유년(癸酉, 1933년) 가을 8월 상현
85세 노인 월립(月笠) 권병섭(權丙燮) 씀
효재(曉齋) 최한구(崔翰求) 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