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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묵상글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 의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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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 의식
오늘 축일의 독서인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자기의 회심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일종의 연설인데 그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바오로의 회심은 유다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뀐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저와 연결하여 성찰하니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하던 것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결혼한다면 한국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들을 한국 사람으로 키우지 결코 다른 나라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모든 면에서 참 좋은 나라이고,
다른 나라보다 좋은 나라이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고,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문제가 많습니다.
국민은 1류인데 정치인은 3류, 4류라는 생각이 큽니다.
그런데도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좋은 면에서는 저의 태생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순종하기 때문이고,
나쁜 면에서는 제가 국수주의자 내지는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점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넘어서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전에도 제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지만,
제가 그분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그분이 민족주의자이고 가톨릭 신자여서가 아니라
그분의 사상과 신앙이 민족과 종교를 넘어서 보편적이기 때문이고,
보편적인 분이기에 말 그대로 진정한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이란 아시다시피 보편적이라는 뜻인데
가톨릭 신자 중에 저처럼 무늬만 가톨릭이지
실제로는 보편적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저에 비해 안중근 의사는 참 가톨릭 신자이고 세계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회심과 연결하여 보면
한국 사람에서 세계인이 되는 것보다
한국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낫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유다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이 너무도 넘치고 확신에 차서 유다 정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되는
그리스도인들을 열성으로 박해까지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그가 이제는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로” 또는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울로”라고 자기의 모든 서간에서 자기를 소개합니다.
사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기 나라와 민족을 뛰어넘는 세계인이 될 수밖에 없고,
다른 나라와 민족의 사람들도 차별은 물론 구별도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형제로 초대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성인의 회심은 기념하지 않고,
베드로 사도나 다른 사도의 회심은 기념하지 않고,
유독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특별히 축일로 지내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애국자가 되지 말고 애교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애국자도 되어야겠지만, 그것을 넘어
그리스도와 가톨릭 교회를 진정 사랑하는 애교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오늘은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신원 의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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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합니다. 곧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때 하나니아스는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삶을 신앙생활의 원리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그분이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고, 깨우쳐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듣고 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파견한 분에 속한 이가 우리의 신원이요, 파견한 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복음전파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강론)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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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심은 삶의 방향전환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를 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난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을 가려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바쁘게 서두르다가 그만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의 차를 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차를 갈아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고, 노약자를 도와주고,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사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회심은 바로 방향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거침이 없습니다.
적극적인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신앙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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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면서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지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물렀던 ‘Notre Dame of Jerusalem Center’는 주님의 무덤 성당에서 가까웠습니다. 매일 새벽 성지에서 조배하고 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주님의 무덤 성당으로 찾아갔습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은 경건함과 진실함으로 빛이 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빈 무덤을 향해서 달려갔던 것처럼 신부님들과 함께 무덤성당을 방문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례의 여정 중에 신부님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부님들의 열정과 경건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4명이 왔기 때문에 단체로 오면 가기 힘들었을 성지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이 기도하였던 ‘St. George's Monastery’를 순례하였습니다. 자동차의 바퀴가 4개이기 때문에 자동차는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것처럼 함께했던 4명의 신부님들이 모두 주님께로 가려는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순례의 피곤함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사제가 된 신부님이 이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신학생 때 교구장님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신학생이 교구장님께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주교님, 신학교의 규칙을 완화하면 더 많은 신학생들이 사제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주교님께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교구장님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10사람의 불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10사람의 교만한 사제는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10사람의 욕심 많은 사제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불성실과 교만 그리고 욕심을 비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본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성장시킵니다. 한 사람의 겸손한 사제는 공동체에 큰 위로를 줍니다. 한 사람의 청빈한 사제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합니다.” 그러자 신학생은 규칙을 잘 지키는 신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업에서도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상품이 아닙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특정한 상품이 매출을 선도합니다.
지난 12월 31일에 선종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이러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신자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기에 위기가 생기고, 기도와 전례에 대한 미지근한 태도가 나타나며, 선교를 등한시합니다. 참된 개혁은 토착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개혁은 내적인 각성, 불타오르는 마음입니다.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할 일은 그리스도께 대해 확실히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타협과 무기력과 같은 모든 유혹에 맞서 하느님 말씀의 위대함과 순수성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과 계명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다. 세상 끝날 까지 율법과 계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에 친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건함이 없는 친교는 참된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성지순례인지 여행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면 그것은 이미 성지순례가 아닙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몇 번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헌신은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본과 재물에 대한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권력이라는 우상을 섬기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내 안에 있는 나태함과 교만을 끊어내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 대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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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좋은 인간관계? 직장에서 좀 더 많은 권한과 자유? 더 나은 새 직장? 좀 더 자상한 배우자? 아기의 탄생? 회춘? 공부 잘하는 자녀? 질병이나 장애의 치유? 더 많은 시간?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알아내는 것? 등등….
대부분 이런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의 연구 결과는 이런 요소들로는 행복해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점에서 볼 때,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마틴 셀리그만 교수는 우울증 환자에게 행복감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그날 있었던 좋은 일 세 가지씩을 기억해서 적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94%가 증세의 호전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는 첫 단계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에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좋은 일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일상의 삶 전체가 자기 행복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열정을 키우는 것입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로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 의지적 활동을 뽑습니다. 이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50%의 유전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의지적 활동이 40%, 환경적 요소가 10%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인 60%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40%인 의지적 활동으로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침팬지와 99% 유전자가 같지만 다른 1%의 유전자의 차이로 침팬지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40%라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비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바꿀 수 없는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에 계속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의지적 활동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행복을 일상 삶 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지요.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지만, 회심한 뒤에 열정적으로 주님을 세상에 선포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의 주님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는 사도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에 매여 있지 않고, 의지적 요소에 열중해서 주님을 굳게 믿고 따랐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의지적 요소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듯 진정한 회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에 매이지 않고, 열정을 다해 자신의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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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을 알면 세상이 넓어지고, 욕심을 부리면 우주도 좁아진다(증국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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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심(回心)의 여정
-만남, 회심, 선포-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요한15,16)
요즘 들어 최고의 강추위지만 오늘 밤하늘은 참 청명(淸明)하여 별들도 유난히 영롱합니다. 마음 하늘의 믿음의 별, 희망의 별, 사랑의 별도 저리 맑고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회심한 마음 하늘의 별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자 제 서원 37주년이 되는 날이라 감회가 깊습니다. 감사(感謝)와 더불어 회심(回心)하는 마음이 됩니다. 1982년 수도원 입회하여 1985년 한해 수련을 마치고 1986년 1월25일 첫서원을 했고, 1988년 요셉수도원에 부임했으며, 다음해 1989년1월25일 종신서원을 했으니 요셉수도원 1호 종신서원자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영성생활에 회심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문득 요셉수도원의 제1호 순교자와도 같은, 배밭 노동중 불의의 사고로 2013년 8월17일 선종한 정훈만 요한 세례자 수사가 생각납니다. 바로 수도원 정자를 지날 때마다 요한 수사의 작품인 “회심정(回心亭)”이란 현판 글씨를 만나게 됩니다. 앉아 쉴 때마다 회심하라는 회심정이란 명칭이 참 기발합니다.
제 좌우명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하루단위의 삶을 살아가는 상징적 표현이 서품이후 하루하루 날마다 봉헌한 미사에 써온 강론입니다. 또 2주 단위로 토요일마다 삭발하니 2주 단위로 사는 느낌이며 매월 첫 수요일 병원 진료차 가니 1개월 단위로 사는 느낌입니다. 저절로 이 날을 감사와 더불어 회심의 계기로 삼게 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수도원의 일과표는 그대로 ‘회심의 시스템’과도 같습니다. 평생 하루하루 매일 여덟번 성전에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러 갈 때 마다 찬미와 감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회심의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이 회심의 일상화, 회심의 생활화를 이뤄주니 참 감사한 일이지요.
제가 요즘 특히 강조하는 바, “선택-훈련-습관”입니다. 날마다 회심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회심도 의식적 훈련입니다! 도대체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감사도 기도도 모든 수행이 훈련입니다.
마침내 훈련으로 습관화될 때 성격도 운명도 바뀌어 점차 주님을 닮게 되어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은총충만,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작년 12월에 이어 2023년 1월까지 제가 면담고백성사시 써드리는 보속 처방전 말씀 역시 참 좋은 영성 훈련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님(자매님)!”(필립4,4)
써드린후 “1.화내지 말고, 2.기쁘게, 3.웃으며, 4.감사하며, 5.평화롭고, 6.행복하게 살라”고 권고합니다. 이 또한 의식적 노력의 선택이자 훈련으로 습관화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제의 각별한 체험도 길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 애송하는 행복기도 첫 연에 “주님” 다음 “참회합시다”를 붙였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행복기도가 완성된 느낌이었습니다. 반드시 “주님” 다음 “참회합시다”가 나와야 합니다. 첫 연을 다시 나눕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성 바오로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이유는 사도의 회심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방인들의 사도로 변화시켜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이미 10세기 말경부터 축일을 지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바오로를 눈여겨 봐온 주님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전격적인 주님과 바오로 사도의 만남의 은총이 참 신비롭습니다. 은총의 만남에 자연스럽게 뒤따른 바오로의 회심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인 사울의 다른 이름입니다. 마치 사울이 바오로로 바뀐 것처럼 잘못 이해해선 안됩니다. 주님과 바오로의 만남의 장면이 너무 눈에 보이듯 실감적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거기에서 누가 일러줄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주님과의 만남과 회개가 참으로 전격적으로 이뤄집니다. 바오로만 몰랐지 이미 주님의 계획표에는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마 우리의 경우도 그럴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표대로 전개되는 주님 섭리 은총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섭리 은총에 잘 화답할 수 있도록 경청과 순종의 겸손한 자세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위의 주고 받은 대화중 주님의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주님을 믿는 제자들 하나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한 주님이시니 제자들에 대한 박해는 바로 주님께 대한 박해라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웃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니 얼마나 존엄한 품위의 사람인지요! 이어 바오로는 주님의 사람, 하나니아스를 만나 회심에 이어 그를 통해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이제 예전의 사울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 사울이요 바오로 사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그대로 바오로를 통해 실현되어 이제 회심에 이어 본격적복음 선포의 삶이 펼쳐집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모두가 바오로일수도 없고 바오로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바오로처럼 비상한 회심 체험에 비상한 선교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그 회심과 복음선포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내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요, 주님과 만남의 자리이자 회심의 자리이며,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주님과의 만남이나 회심이나 선포가 아니라 평생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만나야 하고, 회심해야 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자들의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 회심의 여정, 선포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만남의 여정, 회심의 여정, 선포의 여정에 항구할수 있게 해주는 주님의 미사은총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날마다 새하늘 새땅을, 영원한 삶을 살게 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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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바오로 사도 회심 축일입니다. ‘회심’이란 말의 의미는 ‘마음을 돌리다.’ 혹은 ‘마음의 방향을 달리한다.’ 정도로 그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회심은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의미보다 그 방향을 달리한다는 의미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신자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죄가 커서 성당에 나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나올 때마다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저는 이분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행했던 이전의 모든 잘못에 대한 깊은 통감은 주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욱 주님 앞에 나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와 잘못과 어둠은 늘 우리에게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다지고 주님 앞에 나설 때 우리의 어둠은 주님의 빛 앞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그것은 나의 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은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슴속에 나의 죄와 어둠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말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가장 큰 축복이다.
언젠가 ‘회개의 기회가 가장 큰 축복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 깊이 동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회개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다윗왕과 사도 베드로, 사도 바오로까지, 성인 중에서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그 대표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그 의미의 중심을 주님의 은총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죄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끄심과 은총과 정화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저도 이 회개의 길을 걸었고, 또 걷고 있습니다.
회개의 은총은 또한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 감사와 찬양 드리는 삶을 살도록 그 방향을 바꾸어줍니다.
우리가 모두 가장 큰 축복을 누리기를 빕니다. 우리 모두 그 은총 속에서 오늘도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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