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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다다서재 2021
위 책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 올립니다. 자료 공유 측면도 있고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다시 고민해볼 내용도 있다고 여깁니다.
탈성장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역시 ‘인신세’의 산물이다
피해 규모가 다르다 해도 코로나19 팬데믹은 ‘인신세’의 위기를 앞서 보여준 사례로 살펴볼 가치가 있다. 기후변화도 팬데믹도 ‘인신세’의 모순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이다. 모두 자본주의의 산물인 것이다.277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은 지금껏 살펴보았다. 경제 성장을 우선한 전 지구적 개발과 파괴가 기후 변화의 원인이라고 말이다.278
코로나19 팬데믹도 구조는 비슷하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선진국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자본은 자연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삼림을 파괴하고 대규모 농장을 세웠다. 자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면 미지의 바이러스와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는데, 그걸로 끝이 아니다. 자연의 복잡한 생태계와 달리 사람이 만들어낸 공간, 특히 한 가지 작물만 지나치게 재배하는 현대의 모노컬처가 차지한 공간은 바이러스를 억제하지 못한다. 결국 변이를 거듭한 바이러스는 세계화한 사람과 상품의 흐름에 올라타서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278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은 대책이 세워지는 양상도 비슷할 것이다. ‘인명이냐, 경제냐’ 하는 딜레마와 직면하면, 경기 악화를 이유로 근본적 문제 해결이 뒷전으로 밀릴 것이다. 하지만 대책을 늦출수록 더욱 큰 경제 손실이 발생한다. 물론 인명도 잃을 것이다.278
그렇지만 빠른 대책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2020년 코로나의 첫 번째 파장을 진정시킨 중국 정부의 대응은 국가권력을 휘둘러 위에서 억누르는 방식이었다. 도시를 봉쇄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감시하여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엄중하게 처벌한 것이다.279
강압적인 방식을 비웃던 유럽 각국들도 막상 자신의 나라에 감염이 만연해지자 중국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국민들도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받아들였다. 한국 역시 개인의 사생활 노출을 감내하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서 감염 확대를 방지했다.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국가의 강한 개입과 규제를 전문가들이 요청하며, 사람들 역시 자유의 제약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279
늦든 빠르든, 위기의 시대에는 최종적으로 앞서 언급한 사례들처럼 국가권력이 점점 노골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럴까?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사회의 온갖 관계를 상품화하고, 상호부조하던 관계마저 화폐·상품 관계로 바꿔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변화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상호부조의 요령도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가짐도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위기와 직면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이웃이 아닌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위기가 심각할수록 국가의 강력한 개입 없이는 자신의 생활을 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281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원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벽을 세우고 환경 난민을 배제하고 지구공학으로 일부 사람들만 지키는 ‘기후파시즘’이 닥칠까? 아니면 국가가 기업과 개인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철저하게 감시하여 처벌하는 ‘기후 마오쩌둥주의’가 도래할까. 어느 쪽이든 정치가와 테크로크라트technocrat의 지배로 희생되는 것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다.281-282
위기가 정말 심각해지면 아무리 강한 국가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야만 상태’로 단숨에 전락할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282
중요한 것은 만년기 마르크스의 관점이다. [자본] 출간 후, 마르크스는 균열을 메울 방법을 찾아 자연과학 연구에 매진했다. 만년기 마르크스의 관점대로 [자본]을 다시금 읽어야 비로소 왜 탈성장 코뮤니즘이 ‘물질대사의 균열’을 메우는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296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는 만년기 마르크스의 도달점에 눈길을 주지 않으며 사회주의만 실현되면 노동자들이 기술과 과학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자연적 제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낙관했다. 기술로 ‘물질대사의 균열’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생산력 지상주의는 잘못된 것이며 마르크스가 만년에 했던 생각과도 다르다. 지금껏 진보사관에 속박되어 있었던 마르크스의 [자본]을 ‘탈성장 코뮤니즘’이라는 입장에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296
그 진정한 구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사용가치 경제로 전환’, ‘노동 시간 단축’, ‘획일적인 분업 폐지’, ‘생산 과정 민주화’, ‘필수 노동 중시’.최종 목표가 전혀 다르다. 핵심은 경제 성장을 감속하는 만큼 탈 성장 코뮤니즘이 지속 가능한 경제로 전환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또한 감속은 가속밖에 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천적이다.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자연의 순환과 속도를 맞출 생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가속주의accelerationism'가 아닌 ’감속주의deaccelerationism'야말로 혁명적인 것이다.297
탈성장 코뮤니즘의 주춧돌⓵−사용가치경제로 전환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경제로 전환하여 대량 생산·대량 소비에서 벗어나자
마르크스는 ‘가치’와 ‘사용가치’라는 상품의 속성을 구별했다.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이 목적인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의 ‘가치’가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첫 번째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팔리기만 하면 뭐든 상관없다. 즉, ‘사용가치’(유용성)와 상품의 질, 환경 부하 등은 어찌 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상품을 팔면 그걸 곧장 버려도 상관하지 않는다.298
가치 증식만 목적하는 생산력 증대는 여러 모순을 만들어낸다. 기계화를 해서 경비를 절감하면 수요가 자극되어 대량의 상품을 팔 수 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는 극심한 환경 파괴도 일어난다. 또한 생산력 증대는 당연히 많은 상품이 만들어지는 것으로도 이어지는데, 상품의 ‘가치’만 중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사회의 재생산에 유익하든 아니든 잘 팔리는 상품을 위주로 생산이 이뤄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회의 재생산에 정말 필요한 것은 경시된다.298-299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는 사회를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인공호흡기, 마스크, 소독제 등을 충분히 생산할 시스템이 없었다. 경비 절감을 위해 해외로 공장을 옮긴 탓에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서 마스크조차 넉넉히 구하지 못한 것이다. 그 모든 일이 자본의 가치 증식을 우선하여 ‘사용가치’를 희생시킨 결과다. 그 결과, 위기 상황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력을 상실했다.299
‘사용가치’를 무시한 생산은 기후 위기의 시대에 치명적일 수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는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식량, 물, 전력, 주거, 교통기관에 보편적 접근성을 보장하고, 홍수와 해일에 대비하며, 생태계도 보호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가치’가 아니라 위기 대응에 필요한 것을 우선해야 한다.299
그러기 위해서 코뮤니즘은 생산의 목적을 크게 전환한다. 생산의 목적을 상품의 ‘가치’ 증대가 아니라 ‘사용가치’에 두고, 사회적 계획에 따라 생산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GDP 증대를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야말로 ‘탈성장’의, 기본적인 입장이다.299
만년의 마르크스라면 생산력을 끝없이 증대하여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이라면 뭐든 생산하려 하는 소비주의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했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소비주의를 끊어내고, 사람들이 번영하는 데 더욱 필요한 것을 생산하며, 그와 동시에 자기 억제를 하는 것. 이것이 ‘인신세’에 필요한 코뮤니즘이다.299-300
탈성장 코뮤니즘의 주춧돌 ⓶ −노동 시간 단축
노동 시간을 줄이고, 생활의 질은 높이자
사용가치경제로 전환하면 생산 영역의 역학 관계도 크게 달라진다. 돈벌이만을 위하던 쓸데없는 일이 대폭 줄어들기 때문이다.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정말로 필요한 생산에 노동력을 의식적으로 배분하게 된다.300
마케팅, 광고, 포장 등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불필요하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금지된다. 컨설턴트와 투자은행도 불필요해진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과 식당도 전부 열어둘 필요는 없어진다. 연중무휴 역시 그만두어도 괜찮아진다.300
불필요한 것을 만들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노동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노동 시간을 단축해도 무의미한 일을 줄인 것이라서 실질적인 사회의 번영은 유지된다. 실은 유지 정도가 아니다. 노동 시간 단축은 사람들의 생활에도 자연환경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 역시 「자본」에서 ‘사용가치’의 경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노동 시간 단축이 “근본조건”이라고 했다.300-301
현대 사회의 생산력은 이미 충분히 높다. 특히 자동화 덕에 전에 없을 만큼 생산력이 높아졌다. 사실 이 정도면 인간이 임금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에서 자동화는 ‘노동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로봇의 위협’ 또는 ‘실직 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실직이 두려운 우리는 여전히 과로사할 만큼 필사적으로 일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불합리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처럼 불합리한 자본주의는 한시라도 빨리 버리는 게 낫다.301
그에 비해 코뮤니즘은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GDP에 반영되지 않는 생활의 질 향상을 목표한다. 노동 시간이 단축되면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육아와 돌봄이 이뤄지는 가정에서는 역할 분담이 수월해질 것이다.301
다만 노동 시간 단축이 중요하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생산의 자동화를 추진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현재 에런 바스타니 같은 가속주의자는 물론 일부 탈성장파도 ‘노동으로부터 해방’, ‘주 15시간 노동’ 같은 구호를 널리 퍼뜨리고 있다. ‘순수 기계화 경제’ 같은 말은 꽤 매력적이긴 하다. 하지만 만년의 마르크스는 분명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완전 기계화로 노동 시간을 점점 줄인 끝에 아예 노동을 없애겠다는 극단적인 발상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이다. 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해 이 이상 생산력을 높이면 자연환경에 파멸적인 영향이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301-302
또한 다른 측면에서도 자동화에 의한 노동 시간 감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에너지문제다. 어느 공장에 신기술이 도입되어 그때껏 10명이 하던 작업을 혼자 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생산력은 10배가 오른 것이지만, 노동자 개인의 능력이 10배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노동자 9명이 하던 일을 화석연료의 에너지로 바꾸었을 뿐이다. 노동자라는 임금 노예 대신 화석연료라는 ‘에너지 노예’가 일하는 것이다.302
여기서 문제는 화석연료의 ‘에니지 수지 비율ERoEI, Energy Return on Energy Invested’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에너지 수지 비율은 에너지 투자 비율이라고도 하는데, 1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써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지 나타내는 지표다. 1930년대의 원유에 대해 살펴보면, 당시에는 에너지를 1만큼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100이었다. 즉, 투자한 에너지를 제외한 99의 에너지는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원유의 에너지 수지 비율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요즘은 1의 에너지를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10 정도에 불과한 것이 문제시되고 있다. 채굴하기 쉬운 원유를 전부 파냈기 때문이다.302
점점 감소하고 있지만 사실 원유의 에너지 수지 비율은 재생에너지에 비하면 무척 높다. 태양광은 에너지 1을 투자해 2.5~4.3밖에 얻지 못한다. 심지어 옥수수 에탄올은 1대 1에 가깝다고 한다. 1을 투자해서 얻는 게 1이라면 아예 무의미한 셈이다. 이런 재생에너지를 가리켜 이른바 농도가 대단히 ‘옅다’고 하는데, 옅은 만큼 에너지를 얻기 위해 많은 자본과 노동을 투자해야 한다.302-303
탈탄소 사회로 전환하려면 에너지 수지 비율이 높은 화석연료를 버리고 재생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에너지 수지 비율이 저하되는 만큼 경제 성장은 어려워진다. 이처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다 생산력이 저하되는 것을 ‘배출의 함정emissions trap’이라고 부른다. 에너지 수지 비율이 저하되어 ‘에너지 노예’가 줄어들면, 그 대신 인간이 장시간 일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생산력 증대로 하는 노동 시간 단축에 제동이 걸리고, 생산도 감속된다.303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생산 감속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배출의 함정’에 빠져 생산력이 저하될 것이기 때문에 ‘사용가치’를 만들어내지 않는 무의미한 일을 줄이고 그 외 필요한 부문에 노동력을 배분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생산력을 증대하여 ‘노동으로부터 해방’이나 ‘노동폐기’를 실현하는 것은, 탈 탄소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노동의 본질을 충실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던 마르크스의 주장을 재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구상을 이어서 이야기하겠다.303
탈성장 코뮤니즘의 주춧돌 ⓷−획일적인 분업 폐지
노동을 획일하게 하는 분업을 폐지하여 노동의 창조성을 회복시키자
마르크스는 노동을 ‘매력적’으로 바꾸길 원했다. 노동 시간이 단축되어도 노동 자체가 지루하고 힘들면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소비주의적 활동에 몰두할 것이다. 그래서 노동이라는 활동의 핵심을 바꿔서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인간다운 생활을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현대의 생산 현장을 보면 자동화로 인한 자본의 ‘포섭’이 노동을 한층 더 단조롭게 만들고 있다. 철저한 매뉴얼화 덕에 작업 효율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자 개개인의 자율성은 박탈되었다. 그 탓에 지루하고 무의미한 노동이 만연하고 있다.304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탈성장파는 노동문제를 기피하여 이 문제에 제대로 파고들지 않았다. 기존 탈성장파의 논의에서는 어디까지나 노동 이외 시간에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노동 시간을 자동화로 가능한 단축한 다음에는 괴로워도 참고 견디라는 것이다.304
그에 비해 마르크스는 노동을 기피해야 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이 매력적인 노동이기 위한, 다르게 표현해 개인의 자기실현이기 위한 주체적·객관적 조건들”을 획득하여 창조성과 자기실현의 계기로 삼는 것을 지향했다.304-305
여가를 위한 자유 시간을 늘릴 뿐 아니라 노동 시간에서도 고통과 무의미함을 없애자는 뜻이다. 그러면 노동을 더욱 창조적인 자기실현 활동으로 바꿀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의 창조성과 자율성을 되찾기 위한 첫 단계는 바로 ‘분업 폐지’다. 자본주의 분업체제에서 노동은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작업 속에 갇힌 채 이뤄진다. 그에 저항하여 노동을 매력적으로 바꾸려면 사람들이 다종다양한 노동에 종사할 수 있도록 생산 현장을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거듭해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및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미래 사회의 과제라고 주장했다.305
마르크스는 말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에도 그런 점을 강조했다. 미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분업에 노예적으로 종속되지 않게 되고”,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첫 번째 생활 욕구”가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능력은 틀림없이 “전면적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305
마르크스는 이 목적을 위해서라도 평생에 걸친 평등한 직업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동자가 자본의 ‘포섭’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로 산업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이뤄지는 활동을 평가한다면, 노동자협동조합을 비롯한 여러 협동조합이 열심히 직업 훈련을 하는 것에는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305-306
실은 여기에도 만년기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더욱 파고들어 말할 것이 있다. 인간다운 노동을 되찾기 위해 획일적인 분업을 그만두면,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효율화는 더 이상 최우선 사항이 아니게 된다. 이익보다 보람과 상호부조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활동하는 폭을 넓히고, 평등한 작업 부담 분담과 지역 사회 공헌 등을 중시하면, 역시 경제 활동의 속도가 늦춰질 것이다. 이는 바람직한 변화다.306
변화하는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을 거부할 필요는 전혀 없다. 실제로 기술의 도움을 받으면 사람들은 한층 다양한 활동에 종사할 수 있을 것이다. ‘열린 기술’은 그렇게 활용해야 한다. 다른 그런 열린 기술을 발전시키려면 노동자와 소비자를 지배하기 십상인 ‘닫힌 기술’ 중심 경제, 즉 이익 우선 경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생산의 중점을 ‘사용가치’에 두는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306
탈성장 코뮤니즘의 주춧돌 ⓸−생산 과정 민주화
생산 과정에서 민주화를 진행하여 경제를 감속시키자
‘사용가치’를 중시하면서 노동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열린 기술을 도입하자. 그처럼 일하는 방식을 개혁하려면 노동자들이 생산 과정에서 의사결정권을 지닐 필요가 있다. 바로 피케티도 강조하는 ‘사회적 소유’가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소유’를 실현해 생산수단을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생산 과정에서 어떤 기술을 개발하고 어떻게 사용할지를 더욱 열린 형식으로 민주적인 토의를 거쳐 결정하는 것이다.307
기술뿐 아니다. 에너지와 원료에 대해서도 민주적으로 결정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가령 원자력으로 발전하는 회사와 계약을 끊고, 지역에서 생산해 지역에서 소비하는 재생에너지를 선택할 수도 있다.307
만년기 마르크스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중요한 것은 생산 과정의 민주화 역시 경제 감속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생산 과정의 민주화란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생산수단의 공동 관리를 뜻한다. 즉,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지 민주적인 의사결정으로 정하는 것을 목표한다. 당연하지만 의견이 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강제적인 힘이 없기에 의견을 조율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 소유’가 일으킬 결정적인 변화란 의사결정 과정의 감속인 것이다.307-308
이는 일부 대주주의 의견이 우선하여 반영되는 현재 대기업의 의사결정 과정과 크게 다르다. 대기업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맞춰서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경영진의 의향에 기초하여 비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자본의 전제’라고 불렀다. 그런 대기업에 비해 마르크스의 어소시에이션은 생산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중시하기에 자연스레 경제 활동의 속도가 느려진다.308
탕성장 코뮤니즘이 목표하는 생산 과정의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생산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신기술을 특허로 보호해 제약회사나 GAFA 같은 일부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독점하게 하는 지적재산권이나 플랫폼 독점은 금지된 것이다. 지식과 정보는 사회 전체의 ‘커먼’이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본래 지식에 있던 ‘근본적 풍요’를 회복시켜야 한다. 물론 그러다 보면 이윤 획득과 시장 점유율 경쟁이라는 동기가 사라져서 사기업에 의한 혁신이 느려질 가능성이 높다.308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인공적 희소성’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단힌 기술’ 개발이 오히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방해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고타 강령 비판」에도 쓰여 있듯이, 시장의 강제력에서 해방된 개개인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새로운 혁신으로 효율화와 생산력 상승을 일으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정리하면, 코뮤니즘의 목표는 노동자와 지구를 우선하는 새로운 ‘열린 기술’을 ‘커먼’으로서 발전시키는 것이다.308-309
탈성장 코뮤니즘의 주춧돌 ⓹−필수 노동 중시
사용가치경제로 전환하여 노동집약적인 필수 노동을 중시하자
마르크스는 만년에 생산력 지상주의와 결별하고 자연적 제약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이 점과 관련하여 최근 유행하는 자동화와 AI화에 명확한 한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넘어가겠다. 일반적으로 기계화가 어려워서 인간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문을 가리켜 ‘노동집약적산업’이라고 하며, 돌봄노동은 그 전형적인 예다. 탈성장 코뮤니즘은 노동집약적산업을 중시하는 쪽으로 사회의 방향을 전환한다. 그리고 그 전환에 의해서도 경제 활동의 속도가 느려진다.309
우선 명백한 사실은 돌봄노동을 자동화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돌봄을 비롯해 소통이 중요한 사회적 재생산 영역에서는 획일화와 매뉴얼화를 철저하게 하려 해도, 필요한 작업이 복잡하고 경우의 수도 많은 탓에 늘 변수가 발생한다. 변수를 도저히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로봇이나 인공지능으로는 전부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310
이런 특성이야말로 돌봄노동이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생산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예컨대 사회복지사의 일이란 단순히 매뉴얼에 따라 식사와 목욕과 옷 갈아입기 등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상대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신뢰관계를 쌓는 동시에 사소한 변화로부터 상대의 몸과 마음을 살피고 그때그때 유연하게 상대의 성격과 배경에 맞춰 대처해야 한다. 보육사나 교사의 일도 마찬가지다.310
이런 특성 때문에 돌봄노동은 ‘감정노동’이라고 불린다. 벨트컨베이어에서 이뤄지는 작업과 달리 감정노동은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면 엉망진창이 된다. 그래서 감정노동은 한 노동자가 돌보는 사람의 수를 두 배, 세 배 늘리는 식으로 생산성을 올릴 수 없다. 돌봄과 소통에 충분히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봄노동을 받는 이들이 빠른 속도를 원하지 않는다.310
물론 돌봄과 간호 과정을 철저하게 패턴으로 만들어 효율을 높일 수는 있다. 하지만 돈벌이(=가치)를 좇아 노동 생산성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최종적으로는 서비스의 질(=사용가치)자체가 저하될 수밖에 없다.310-311
이렇듯 기계화가 어렵다는 이유로 오늘날 노동집약적인 돌봄노동 부문은 생산성이 ‘낮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관료부터 현장 감독까지 관리자들이 노동 현장에 무리한 효율화를 요구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혁과 비용 절감을 단행하기도 한다.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