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와 고토(五島)의 성지 순례(제2편)
◆ 박해 시대에 기리스탄의 신앙과 삶
일본의 천주교는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그들을 기리스탄이라고 불렀다. 1580년에 집권자 오다 노부나가의 보호 아래 교세가 확장되어 신자가 십만 명을 넘었다.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에 선교사를 추방하고 금교령을 내렸다. 1597년 2월 5일에 26인을 처형하였다. 그들이 오늘의 26인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나가사키에 26인 성인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은 400여 년의 가톨릭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처음에는 선교사가 들어와 영주에게 선교하여 신자가 급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1600년에 이르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시대에는 신앙의 철퇴로 박해가 더욱 거세져 교세가 늘어나지 못했다. 지금에도 신자가 전체 인구의 0.4%(41만)이지만, 나가사키의 고토 섬의 신자는 그곳 주민의 20%(하오드 15%, 상오도 25%)이다.
고토 섬은 박해를 피해 모여든 사람으로 250여 년간 박해를 받았다. 고토 섬의 신앙은 병에 걸린 영주를 치료하기 위해 1566년 알메이다 수사(의사)가 후쿠에 섬에 와서 치료하여 영주의 병을 낫게 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신앙을 전파하게 되었다. 또 1797년 고토 영주가 오무라 영주에게 넓은 땅이 있다며 소토매 농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때 들어온 자가 3,000명이며, 기리스탄들이 불교 신자로 가장하여 들어왔다.
고토 섬에 기리스탄이 숨어 들어왔다고 밀고하여 탄압이 시작되었다. 박해가 심할수록 신자들의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좁은 감옥에 수백 명을 집어넣어 생활하게 했으며 아침과 저녁에 감자를 하나씩 주었으니 죽지 않고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어 나갔다. 그러던 세월이 흘러 신앙의 자유가 찾아왔다.
신앙의 자유를 찾은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선하여 성당을 지었다. 작게는 다섯 가구 많게는 오십 가구인 마을이 합심하여 성당을 지어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런 성당이 고토 섬에 50곳이라고 한다. 하여 고토 섬의 순례는 성당 순례였다.
일행은 이틀 동안 섬 곳곳을 더듬으며 성당 순례를 했다. 후쿠에 성당을 찾았다. 그곳은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 성당만 그대로 보존되고, 마을은 전소되어 기적의 성당이라고 한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부님은 강론에서 순교자는 떠났지만 남은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순례자의 마음에 자극제를 불어넣어 주었다.
토자기 천주당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순교 성인 요한 고토가 나신 곳이었다. 이모치우라 성당에는 성모당을 만들고 루르드의 성수를 가져와 축성하여 성모님을 모시는 곳이며 효험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고 했다. 일행 중 한 명은 그 물을 먹고 다친 다리로 지팡이에 의지했는데 그때부터 지팡이 없이 걸어서 다녔다.
상고토의 성당은 대부분 데즈카와의 작품이었다. 기리 성당을 비롯한 물거울 성당이라는 나카노우라 성당,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돌로 다듬어 지은 가시라가지마 성당, 고토 열도에서 최초로 사제가 남을 기념하여 지은 에부쿠로 성당 등 그들 신자들이 합심하여 재산을 털어 손수 지은 성당이었다. 심지어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까지 돌을 나르게 하여 신앙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모든 순례 여정을 마치고 저녁 만찬에는 바오로 신부님의 축일을 함께 축하하며 건배했다. 제3편은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