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이윤석의 『하나님 나라와 정치적 중도의 길』을 읽고
가운데에 선다고 해서 반드시 공정하다고 단정 지울 수 없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을 때 그 사이에 서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양쪽에 말을 조금씩 들어주고, “둘 다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말하면 갈등에서 한 발 물서설 수 있다. 그러나 한쪽이 분명히 잘못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도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때로는 가운데가 아닌, 한쪽을 향해 분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공정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중도에 대해서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중도는 회색이나는 색과 잘 어울린다.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은 색. 정치에서도 비슷했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한쪽을 지나치게 지지하지 않고, 양쪽의 의견을 적당히 받아들이는 것이 중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책에서는 이러한 중도의 모습을 처음부터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이 책이 말하는 중도는 ‘아무 편도 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에 동시에 속한 존재인 ‘두 나라’의 정체성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특정 정당이나 진영을 지지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정당보다 먼저 있는 것이 신앙이고, 정치적 소속보다 더 근본적인 소속이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책은 이러한 관점에서 중도를 단순한 중립이나 회색지대가 아니라, 복음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사안에 따라 판단하며 진리와 정의를 따라 행동하는 태도로 설명한다.
“중도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모호하거나 무기력해 보일 수 있다.(25p)”
이 문장에서는 ‘중도’라는 말이 이상한 역설을 가지고 있다. 한쪽으로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입장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도는 애매한 사람처럼 보인다. 어느 편인지, 무엇을 주장하는지도 보이지 않아서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책은 그 둘을 구분한다. 무관심해서 가운데 있는 것과, 쉽게 한쪽에 서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분별하는 것은 전혀다른 태도라는 것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진영은 사람에게 편리한 기준을 제공한다. 당연히 어느 편에 속하면 그다음부터는 판단할 일이 줄어든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말하면 일단 믿어보고, 반대편 사람이 말하면 먼저 의심해 본다. 복잡한 현실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면 세상은 훨씬 단순해 진다.
문제는 그 순간부터 사실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앞서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거창한 정치판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평소에도 일어난다. 동생이 잘못했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가 같은 행동을 하면 쉽게 비난하게 된다. 같은 행동을 보고도 사람이 달라지면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정치적 진영 논리 역시 결국 이러한 마음의 연장선에 있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중도’는 정치적 위치라기보다 인간의 판단에 관한 문제처럼 읽힌다.
누구의 편인가보다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묻는 것.
이것이야말로 중도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책에서 ‘공의와 긍휼’을 함께 이야기하는 대목은 중도를 단순한 타협과 구별하게 한다. 정의를 생각하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긍휼을 생각하면 약한 사람과 상처 입은 사람을 외면할 수 없다. 정치적 판단에서도 하나의 가치만 붙잡으면 다른 중요한 가치를 놓칠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을 넘어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는 책의 주장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다만 여기에서 책에 대한 작은 의문도 생긴다.
하나님 나라라는 기준이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더라도, 현실의 정치에서 무엇이 정말 하나님의 뜩에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공의와 사랑이 충돌하는 순간도 생기고,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권리가 부딪히는 순간도 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원칙이 분명해 진다. 하지만 그 기준을 구체적인 정책과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또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의미가 생긴다. 모든 정치적 문제의 정답을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 정답을 고르는 방식 자체를 바꾸려고 하기 때문이다. 정당의 이름이나 정치인의 얼굴보다 먼저 가치와 원칙을 보게 하고, 하나의 진영에 판단을 맡기지 않도록 한다. 책의 후반부에서 ‘사안별 판단’과 ‘정당보다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중도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양쪽에서 조금씩 가져오는 것일까.
아마 둘 다 아닐 것이다.
중도는 오히려 매번 선택해야 하는 길에 가깝다. 오늘 어떤 문제에서 한쪽의 주장을 옳다고 판단했다면, 내일 다른 문제에서는 같은 진영의 주장을 비판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틀렸다면 틀렸다고 말하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옳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도는 회색이 아니라 오히려 선명함을 요구한다.
자신이 어느 편에 있는지를 선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옳다고 믿는지 선명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의 또 다른 인상적인 개념인 ‘예수당’도 그런 의미에서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정당을 만들자는 말이 아니라, 정치적 정체성을 특정 정당보다 예수에게 두자는 표현이다. 정치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 선택이 신앙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어디에 서 있는가’보다 ‘무엇을 향해 서 있는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어느 순간에도 완전히 중립적일 수 없다. 어떤 문제에서는 선택해야 하고,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중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아니라, 더 신중하게 말하기 위해 먼저 듣는 태도에 가깝다. 책이 말하는 ‘대화의 정치’, ‘공감과 타협의 정치’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정치적 중도의 길』은 정치적 중도를 말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판단에 대해 묻는 책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을 보기 전에 진영을 보지는 않는가.
나는 진영을 보기 전에 가치와 진리를 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진리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욕심과 편견은 얼마나 들어가 있는가.
‘중도’는 가운데를 뜻한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가운데는 목적기자 아니라 오히려 출발점으로 다가온다. 어느 한쪽으로 쉽게 기울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듣고, 때로는 내가 속한 편까지 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도는 양쪽 사이의 빈 공간이 아니다.
중도는 어느 편에 서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편보다 진리를 앞세울 수 있느냐의 문제다.
가운데에 서는 것은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다.
중도는 회색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선명한 기준을 요구하는 길이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6.08.22 1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