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인 3월 16일에 있었던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한국의 지영준은 선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거트 타이스에 1초 늦은 2시간8분43초를 기록하며 2위를 차지했다. 아쉬웠지만 나이가 아직 스물 두 살에 불과하고 이번 기록이 겨우 세 번째 도전만에 나온 기록이라서 그에게 거는 기대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이봉주의 대를 이을 한국 마라톤의 차세대 주자라는 둥, 한국 마라톤의 희망이라는 둥의 찬사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경기가 후반에 접어들 무렵 선두 그룹에서 뛰고 있던 선수들의 특징이 눈에 띄었다. 지영준을 제외하면 한 무더기의 선수들이 모두가 아프리카 출신들이 아닌가. 그 장면만을 본다면 이 대회가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국내 대회라고 오해를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기야 세계 마라톤계가 에티오피아나 케냐 등의 아프리카 국가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 혹시 흑인들이 마라톤에 적합한 신체조건을 타고나는 것이 아닐까? 2002년의 경우 뉴욕 마라톤 남자부 1, 2, 3위와 여자부 1, 3위를 모두 케냐 출신이 차지했고, 보스톤 마라톤에서는 남자부 1위에서 4위까지(5위는 이봉주)와 여자부 1, 2위를 케냐 출신이 그리고 3위는 에티오피아 출신이 차지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미국의 흑인 중에는 유명한 마라톤 선수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럴까?
흑인에게 적합한 운동
미국의 올림픽 대표팀을 보면 흑인들이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육상팀도 예외가 아닌데, 특히 단거리 선수들 중에는 백인은 아예 씨가 말랐다고 할 정도다. 유명한 칼 루이스를 비롯해서 역대 단거리의 제왕들은 하나같이 흑인들이며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올림픽 100미터 경기의 결승에 오른 선수들을 보면 미국이나 아프리카 국가 출신들은 물론이고 다른 '백인국가'(예를 들면 영국이나 캐나다 등)의 대표 중에서도 흑인이 많다는 점도 눈에 띈다. 그래서 예전에 나왔던 주장이 흑인의 체형이 단거리 달리기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흑인의 체형이 장거리에 적합할까 아니면 단거리에 적합할까? 이렇게 상호 모순되는 두 주장의 충돌을 해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흑인은 모든 달리기 또는 모든 운동에 적합한 체형이라고 정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은 장거리에, 그리고 미국에 사는 흑인은 단거리에 적합하다고 정리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두 번째 주장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으므로 아예 논외로 하자. (실제로 96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나미비아의 프랭키 프레데릭스 같은 단거리 선수도 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흑인은 타고난 운동선수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열등'에서 '일부 종목 우등'으로
불과 몇 십 년 전에만 해도 백인들은 흑인들이 운동에서 열등한 인종이라고 여겼다. 비록 권투에서 1930-40년대를 지배한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와 같이 훌륭한 흑인 헤비급 챔피언이 있었고, 제시 오웬스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100m, 200m, 그리고 멀리뛰기에서 3관왕에 올라서 아리안 족이 (신체적으로도) 우수하다는 독일인들의 헛된 신화를 깼지만, 미국의 백인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흑인들보다 스포츠에서 우월하다고 믿었다.
미국 프로야구 내셔널리그에서 생애 통산 3할7푼7리의 놀라운 타율과 최고의 수비수(유격수)로 꼽혀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는 피 위 리스는 자신도 다른 백인들처럼 "흑인들이 큰 리그에서는 잘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저 "공을 던져주면 되던져줄" 줄 아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들 (백인들이) 말하더라고 전했다. 적어도 재키 로빈슨*이라는 흑인 선수가 브루클린 다저스(지금의 LA 다저스의 전신)와 1945년에 입단 계약을 체결하고 47년에 메이저리그에서 뛰기 시작하기 전까지 백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흑인이 '지배'하는 풋볼(미식축구)에 흑인이 제대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도 194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미국 프로농구(NBA)는 마치 흑인들만의 경기인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흑인들이 많다. 그러나 프로농구에 흑인이 뛰기 시작한 것은 척 쿠퍼를 비롯한 세 명이 스카우트 된 1950년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흑인들은 각 종목에서 흑인들만의 리그에서 뛸 수 있을 뿐이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능력과 재능이 뒤떨어져 백인들과 경쟁상대가 안 된다며 시합하는 것을 거부했고, 흑인선수가 있는 팀은 관중수가 줄어들 것이므로 흑인 프로 입단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등의 구실로 흑인들에게는 프로선수 입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대학 스포츠의 경우는 조금 나아서 북부지역에 있던 몇몇 대학의 풋볼팀에는 흑인 선수들이 일찍이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대학은 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남부지역의 대학팀들은 이들이 포함된 팀들과의 경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북부팀들이 남부에 가서 원정경기를 할 때 흑인선수들은 벤치를 지킬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대개는 패하고 말았다. 2차대전이 끝나고 참전했던 흑인병사들이 '참전군인 학비보조'를 통해서 대거 대학으로 들어오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대학팀에 흑인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대학 스포츠는 '열등한' 흑인들에게 문호를 완전 개방했다.
이제 흑인들은 미국의 주요 프로 스포츠를 지배하고 있다. 새처럼 날아서 통쾌한 덩크슛을 터뜨리는 마이클 조던을 보면 "역시 흑인들은"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그들의 '타고난' 운동신경과 신체조건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선천적으로 운동을 타고난 인종이라면 왜 다른 종목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을까? 비너스와 서리나 윌리암스 자매가 세계 테니스계를 지배한다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이름을 댈 수 있는 흑인 선수가 몇 명이나 되나. 타이거 우즈가 골프 황제라고는 하지만 그는 그야말로 수 백 수 천의 선수들 중에서 한 손에 꼽힐 정도에 불과한 흑인 선수들 중의 한 명에 불과하지 않은가.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테니스, 골프, 수영, 체조, 폴로, 스키,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승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목에서 흑인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흑인이 백인보다 스포츠에 적합하다는 주장은 이런 종목들을 고려해보면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흑인들이 농구를 잘 하는 것은 그들이 백인보다 키가 크거나 점프를 높이 해서가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사회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야구, 농구, 풋볼 등은 경제적으로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스포츠지만 수영은 그렇지 못하다. 골프나 아이스하키는 큰돈을 벌 수 있기는 하지만 배우기 위해서 역시 큰돈을 들여야만 하는 스포츠여서 부유한 백인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종목이다. 폴로나 승마의 경우처럼 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배우는데 많은 돈이 들어가야만 하는 종목들은 애당초 가난한 흑인들이 고려할 수 있는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저 동네 공터에서 싸구려 공 하나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다가 잘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그런 종목만이 고려해볼 수 있는 것들 아니겠는가.
칭찬의 이면
우리는 백인 선수가 잘 하면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면서 흑인 선수가 잘 하면 타고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프로선수로 성공한 대부분의 흑인선수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피나는 노력의 대가라고 답변한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마치 흑인과 백인 사이에 선천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이미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운동능력을 타고났다는 칭찬은 듣기에 좋은 말일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흑인이 타고난 운동선수라는 주장에는 은연중에 흑인은 운동에만 적합한 사람, 따라서 지적인 활동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편견이 들어있을 수 있다.
미국 CBS방송의 유명한 스포츠 해설가였던 지미 스나이더는 1988년 TV인터뷰에서 흑인이 농구에 있어서 유전적으로 백인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주장의 근거가 재미있다. 과거의 노예 소유주들이 큰 (노예)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서 큰 남자노예와 큰 여자노예를 교배시켰고, 그래서 그들은 백인보다 우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 날로 해고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발언은 미국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의 운동능력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무식한 게 힘만 쓴다'는 시각이다.
이런 편견은 미국 스포츠 분야에서 묘한 결과를 낳았다. 풋볼은 경기의 특성상 공을 배급해주는 쿼터백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 그런데 흑인은 운동만 잘하고 지적 능력이 떨어지므로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고 뛰어난 판단 능력을 가져야하는 쿼터백에 적합하지 않다고 (백인감독이) 생각해서 대학과 프로를 막론하고 이 역할은 거의 예외 없이 백인이 맡고 있다. 또한 그렇게 많은 흑인 선수가 배출되는 종목에서조차 흑인 지도자는 거의 없는 상황을 낳았다.
흑인들이 스포츠에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그들이 자주 보여서 그런 것 아닐까. 주로 TV에서 중계를 해주는 인기 종목, 즉 돈을 벌 수 있는 종목에 그들이 집중해 있어서 그런 착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운동, 그것도 일부 종목의 운동은 연예인이 되는 것과 더불어 흑인들에게 가난과 범죄를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탈출구 역할을 한다. 학교팀에서 함께 뛰던 백인 동료는 졸업하면서 이런저런 선택을 할 수 있어도 흑인 선수들은 프로팀 입단 말고는 뾰족한 수가 별로 없다.
죽자살자 운동을 하는 흑인선수들이 운동능력을 타고났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들은 백인들과 다를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흑인이 타고난 운동선수라는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 인종주의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