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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기생들 카페를 들여다 보다가 우연히 석강 박윤호님의 둔산동 옻골마을 이라는 글을 읽었다
그 집은 오래 전부터 인터넷에도 소개되었던 바도있어서 본적도 있고 유형원의 문집 반계수록이 그곳에서 필사되었다는것은 몰랐으나 유형원의 반계수록 서거정의 동국통감 정약용의 목민심서.... 이런정도는 우리역사를 배운 학생들 이라면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글을 읽다보니 석강님의 매달린 문짝이 아마 다락이나 선반정도의 용도로 쓰였을것 같다는 감상이 있길래 나의 생각을 말씀 드렸던 것이었지요
언제나 처럼 부지런한 탄아님의 댓글이 벌써달려있고 비분강개를 피력하고 있었는데 나도 댓글을 달다보니 금새 글자수가 초과되어 쓸수가 없기도 했고 썼다 지웠다를 수도없이 반복하다가 돌아가신지 50년도 넘는 어머님 생각, 내 기억속의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내가 서너살 되었을때)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산소에서 멋도 모르고 잠자리잡고 뛰놀던 생각에 넋을놓고 앉아 있었답니다
나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한 사람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내 어머님 이라고 자신있게 말씀 드릴수가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가엾게 생각하시고 언제나 남을 배려할줄 알게 가르쳐 주셨던 어머니... 길윤(나의 아명)아, 판검사, 경찰, 신문기자 세금쟁이 그런것은 안 하는게 좋다 하셨던 어머니... "엄마 왜요?" 라고 물으면 "가만히 생각해 봐라 판사가 판결을 할때 물론 죄를 지은것은 나쁘지만 죄수를 사형이나 징역을 보낼땐 마음이 편하겠으며 서로 잘 잘못을 따질떄(민사소송을 말씀하신듯) 이긴자야 좋겠지만 진 사람은 얼마나 원망을 하겠느냐 경찰은 도둑놈을 잡아야 하겠지만 도둑놈은 오죽했으면 도둑질을 했겠느냐" 신문기자는 당시 못된 놈들이 엉터리 기자증을 만들어서 남의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공갈, 협박을 일삼던 사회상때문 이었겠지요
"엄마 그러면 이것도 안좋다 저것도 안좋다 그럼 무얼해야 좋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것을 가르쳐주는 선생님, 아픈병을 낫게 해주는 의사, 그래서 인술이라고 하지" 이런식의 대화가 늘상 이었답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형제 자매가운데 형님 한분과 누님 한분이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직자가 되기도 했었지요
6 25가 나고 피난민이 많이 내려와 거지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구걸도 하고 심지어 물건을 도둑질까지 했던 시절이라 갓 시집온 형수님이 대문을 걸어 잠그면 얘야 문을 열어 놓아야 물길러 오는사람이 불편하지 않지...
"물길러 오는 사람이 아니라 거지들이 자꾸와서 동냥하라는데 하나 둘도 아니고 쌀뒤주 밑바닥 나겠어예"
싱긋이 웃음 지으시며 "집집마다 모두 문닫아 걸면 거지들은 어디가서 동냥을 하겠노, 조금씩 준다고 불평하는 거지는 없지않겠나 그러니 조금씩만 주드라도 문은 닫지 말아라 사람이 사는집에 사람이 와야 좋지..."
"소년은 이노하고 학난성하니 일촌의 광음인들 불가경이라 지당의 춘초목은 미각하여서 계전의 오엽들이 이추성이라" 한문을 쓸수가 없어 유감이지만 뜻 풀이는 "어린 아이는 얼른늙고 배움은 이루기가 어렵나니 짧은 한순간도 가볍게 생각하지 말지어다 앞마당에 봄에 돋아나던 초목들은 느끼질 못 하노니 섬돌아래 오동나무 잎들이 벌써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대강 이런뜻이 아닐까요? 나는 이것을 노래로 내 어머니에게서 배웠답니다 물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지요 제 어머니는 임인생범띠 1902년생 이신데 대구에서 신학문을 배운 최초의 여성세대 였답니다 달서여학교 였다는건 들어서 아는데 언제 설립되고 어디에있었는지 여쭤보지 못한게 후회스럽네요 향토사학자들 혹시 아신다면 좀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꼭 같은것을 중학교때 말본(문법) 시간에 배학보 선생님께서 한문으로 가르쳐 주신적이 있지요
나의 외 할아버지의 산소는 대구 중리동에 있었답니다 어릴땐 해마다 산소엘 다녔고 뛰놀던 동산 정말 아담하고 멋진 동산이었답니다 야트막한 동산아래에 십여가호의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초갓집이었지만 단 한집만이 덩그런 기와집 이었는데 그 집이 외할아버지의 묘택을 지키는 갓지기 집이었답니다 내가 나서 자란 우리집은 초갓집이었는데 우리집보다 훨씬 좋았답니다 그냥 집만 있는게 아니라 산소를 지키고 돌보는 댓가로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라는 사리답도 십여마지기 있었고요 산소앞엔 못이있어 가뭄에도 걱정없는 소위 옥답이었고... 세월이 수십년이 지나고(내가 독일에서 살아온 세월만도 벌써47년이 지났습니다) 언젠가 한국에 갔을때 형님에게 물어 보았지요 그 중리동 외 할아버지 산소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형님 말씀이 자손들이 돌보지않아(내 외갓집) 갓지기가 산도 집도 논도 모두 팔아 집어 삼켰다나요 갓지기가 법률자문을 받았던지 몇번이나 명의를 이전등기를 하고 했다나 뭐라나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내가 한 말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산소도 돌보지 않은 후손들보다 해마다 철따라 풀깎고 벌목하며 산소를 돌본 갓지기가 팔았다면 더 잘된 일이라고...
내 외할아버지의 함자는 경주 최씨에 석자(주석 석) 항렬 이었지요 마지막 함자는 썼다가 지웠습니다 하두 사기꾼, 협잡꾼들이 판치는 세상이라 내 외삼촌들은 최 x 호 호자 항렬입니다 경남 김해에서 2대와 5대(장면정권)국회의원을 지낸 사람도 있고 구포(김해군 대동면)엔 작은 외삼촌, 큰 외삼촌은 대구 칠성동칠성동파출소 뒷쪽의 2층집에서 살았었는데 내가 서너살 되었을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외할머니를 마지막 뵌적이 나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얼굴의 모습은 떠 오르지 않으나 길윤아 잘가거래이~ 하시던 음성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칠성파출소 옆에까지 따라 나오셔서... 그 외삼촌은 내가 알기론 평생 자기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후에도 어릴때 외삼촌집엘 가면
그집 마루가 거울처럼 얼굴이 비쳐서 신기했던 기억이 있었지요
내 외사촌들은 최병 X 라는 병자 항렬도 있고 최해 X 라는 해자 항렬도 있답니다
그 밑에 항렬은 최 X 환 환자항열 입니다 지금 말썽도 많은 친박계의 최X환 의원이란 자도 혹시 경주 최씨가 아닌지 모르겠네요 내가 우리집안에서 (큰집 작은집 통털어서)가장 막내인데다 내 어머님께서 마흔이되어서 낳은 소위 마흔둥이라 나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들도 친가, 외가에도 많이 있었답니다
이 외삼촌이 늙으막에 가세가 기울었는지 한 동안 소식이 뜸 했었는데 대학교에 입학한 61년 봄이었지요
나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음식을 가려서 안 먹고, 못 먹는것이 많아 평생을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고나 할까요 밥은 아무렇게나 먹고 잠자리는 가려서 자라는 말이 있는데 잘못된 나쁜 습관이었다는걸 나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집에서도 꼭 내 수저라야 밥을먹고 심지어 내가 군대에 입대 할때도 세면도구 가방에 내 수저를 챙겨서 입대를 했었답니다 에피소드가 많지만 여기선 생략하고... 하숙이나 자취는 생각할수도 없었고요 형님이 두분이나 공무원생활을 해서 부산에 사셨기 때문에 당시엔 내가 가고자 했던 무역학과가 서울대와 부산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부산으로 가서 공부하게된 계기랍니다 각설하고,
그 61년 봄에, 5 16 혁명나기 직전이었답니다
죽포 정윤진 은사님 회고록의 에필로그에서 밝힌바가 있지만 내 이모부(어머니의 형부)는 하회류씨 인데 장택상씨와 처남매부지간 이었답니다 서애 류성룡의 직계 자손이라 이모부님과 이모님 모두 안동 하회 선산에 누워 계시지요
탄아형은 내가 따로 얘기를 한번 풀어야할 것도 있지만 얘기가 자꾸 곁가지로 흘러서... 백정호가 박철언의원 부근에 얼쩡거린다는 얘기도 들은바 있고.... 정말 알고싶은 부분이었지요 왜 영어의 몸이 되었었는지...
그쪽에서 국회의원 두어번 했던 전직 은행장 그사람이 내 이모에게 큰어머니라고 했으니 촌수는 짚어 보시길...
말이 난김에 석포형 만난 술자리에서 말했던 서울특별시장도 지냈고 총무처장관, 새누린지 한나란지 정책위 의장을 지냈던 그 사람은 내 고모의 사위였지요 박근혜가 국회의원 입문을 했던 그 달성,고령 선거구에서 3당 합당이라는 야합으로 김종필의 몫으로 자리를 빼앗아 김석원이가 국회의원이 된 그곳, 그곳에서 내 유년기의 죽마고우였던 김종기 의원이 4선을 했던 곳입니다 우리동기 유순문이네 대한민예사 뒷골목에 살았고 유순문이네 민예사 옆에 영남지물포를 했었지요 그 지물포도, 대한민예사도 창업하기 이전 시절에 종기의 아버지께서는 화물차를 가지고 계셨답니다 요즈음 이북에서 볼수있는 목탄차 였답니다 종기와 그 동생 종우는 나중에 수창학교를 다녔지요 종기, 종우의 제일 큰누나 이름이 영희였는데 엄마 친구들이 영희네라고 불렀지요 내가 다섯살때쯤 하루는 종기랑 종우 나 셋이서 그 화물차 옆의 조수석에 앉아서 고령에 장작을 실러가시는데 따라 갔다온 기억이 있답니다 그날 기억이 어딘가 언덕을 오르는데 차가 힘이 없어서 차를 세워놓고 적재함 앞쪽구석에 있던 화통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핀다음에 또 달렸던 기억도 선명하고 그동안 차가 후진으로 굴러가지 않게 뒷타이어 뒷쪽에 장작 토막을 고였던것 까지 기억이 납니다 낙동강 고령철교(6 25때 폭격으로 부서진것을 훗날 현대건설에서 정주영회장이 단돈 1원인지 10원인지 입찰받아 건설했다는 그 다리)를 건너서 얼마 안가서 왼쪽으로 돌아들어간 산판에서 장작을 실었던 기억이...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정도 입니다) 또 그 골목이랄까 동산약국 뒷길에 동산목욕탕이란 목욕탕이 있었는데 그 목욕탕 뒷쪽이 종기네집 마당이라 한번은 그 동산목욕탕에 불이 난 것입니다 그랬으니 목욕하던 사람들이 벌거벗은 채로 수건 하나만으로 앞을 가린채 밖으로 뚸어 나왔으니....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현장에 있진 않았는데 종기네 어머니께서 우리집에 오셔서 우리 어머니께 얘기 하시던걸 들은 기억이 납니다 "아이구 성님, 말도 마이소 뺄가버슨 아지매들 하고 말만한 가시나들이 마당으로 풀쩍 풀쩍 뛰 들어 오는데.... 그 시절에는(70 여년전) 미니 스커트는 커녕 장딴지, 발목까지도 긴치마와 버선으로 감싸고 다녔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당시 며칠을 두고 동네에서 화제꺼리가 된적이 있었지요.
나는 지금도 종기의 아버님 성함을 기억하고 있는데 국회의원 중에서 그 이름과 똑 같은 사람이 있더군요
김종기 의원이 계성학교 출신이었는데 계성학교에서 유도를 가르쳤던 신도환(자유당시절 반공청년단장도 역임) 체육선생의 제자였던 인연도 있고...
훗날 내가 중학교 2학년때 대구 동인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한번은 우리집 대문간에서 내 어머님과 신도환씨가 얘기를 나누는것을 본적이 있었지요 내 어머니께서는 그때 벌써 뇌졸중이 와서 거동이 불편하실때 였는데 신도환씨가 국회의원 출마를 해서 집집마다 유세를 다녔던 모양이었지요 그날도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말하는 투로보아 저의 어머니를 옛날부터 좀 아는사이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대화도중에 엄무이(어머니란 대구사투리) 엄무이 하는 소리가 자주 들렸고 우리 어머니께서는 너 시간을 얘껴쓰야지 우리집에는 온 식구가 내말 이라카마 걱정 없스이꺼네 얼릉 가보거라 하시면서 쫒아내다시피 독려을 해 주신걸 기억합니다 자유당 말기었는데 그때 신도환은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었답니다
얘기가 자꾸 곁 가지로 흘러서...
내 어머님 말씀이 "너 시메끼리(녹산 이란건 나중에 알았음)에 계시는 외삼촌 한테 이모부가 안동에서 구해오신 횟덩어리를 갖다 드려라"고 하시면서 시멘트포대 종이에 둘둘말린 덩어리를 주셨답니다 외삼촌께서 허리가 많이 아프신데 고려장엣서 뜯어낸 횟덩어리를 불에 달구어 허리에 찜질을 하면 났는다는 얘기를 듣고... 이모부께서는 안동지방에 옛날 고려장이 남아 있을것이라 부탁하여 구해오신 것이었지요 "엄마 주소를 주셔야지 찿아서 갈수가 있지요" 그때 내어머니 말씀이 걸작 이었답니다 시메끼리에 가서 "최씨네 염창(소금창고)이 어딘교 물으면 동네 강아지도 다 안다" 참 난감한것이 태어나서 한번도 가 본적도 없고(구포에 있는 작은 외삼촌댁에 내가 두살때쯤 가본 기억은 있음 왜 두살때쯤이라고 말씀드리느냐하면 그때 실오래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발가벗고 고구마 삶은 소쿠리를 앞에놓고 찍은 사진이 있음) 그날 내 외사촌 형님인 해도형이 카메라를 가져와서 사진을 찍은 기억도 나고 또 그날의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내가 변소에 가면서 내가 갔다올때까지 아무도 고구마를 먹지말고 기다리라고 했다나~~ 두고 두고 놀림을 당했던 탓에 그 기억은 특히나 지워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부산에서 마산가는 뻐스를 타기전에 이 차가 김해 시메끼리 라는곳을 지나가느냐고 운전수에게 물었더니 그렇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뻐쓰를 탔는데 한참이 지나도 말도 안해주고... 그래서 여자 차장에게 또 물었지요 김해 시메끼리가 아직도 멀었느냐고.... 얼마 안 남았다고 하면서 수문에 내려줄건지 또 뭐라고 했는데 내가 알아야 뭐라고 답을하지요 그래서 아무데나 내려 달라고 했답니다 이 계집애 차장이 내가 대답하는게 아니꼬왔던지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같이 사방이 왼통 논뿐인 곳에다 내려놓고... 논에는 벼가 무릎정도 자라 훤하게 보이는 들판에 사람이 없으니...
낭패 스럽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관계시설 같은게 있고 수로에 물을 막는 시설물이 있는걸로 보아서 이곳이 수문이겠구나 하고 뻐스가 달려간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 갔답니다 한참 가다보니까 반갑게도 저쪽 논두렁에 사람이 보이는게 아닙니까 어찌나 반가운지 거의 뛰다시피 그 쪽으로 달려 갔지요 숨을 헐떡이면서 아저씨 말 좀 묻겠심더 내가 이곳은 초행길인데 혹시 최씨네 염창이 어딘지 아십미껴? 그 아저씨가 나를 물끄럼이 쳐다보시더니 이쪽에 논이 끝나는 곳에 집들이 나오는데 그쪽이 전부 최씨네 염창이라오 그러는게 아닌가 우선 어딘지 알기는 했으니 반갑기는 한데 논만 보이고 집들은 보이지도 않으니....
그래서 서울 김서방집 찿아 가드시 외삼촌을 찿아 간적이 있었답니다 그날 그 마을에 들어서서 제일 첫번째 집엘 들어가서 누구 계십니까? 하고 물었으나 인기척이 없었고 세번짼가 네번째 집에 똑 같이 물으며 들어갔더니 아무 대답도 없어서 다시 나오려는데 내 외숙모가 나오시면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시었지요 이 외숙모는 눈이 사슴눈처럼 커서 우리 어머니께서 왕눈이 형님 이라고 불렀는데 음식을 얼마나 정갈스럽게 잘해 내는지 그것으로 집안에 소문이 났었고 언제나 새까만 비단으로 종이배를 접을때처럼 납작한 모양의 족도리(?)를 쓰고 계셨는데 하얀 진주알이 서너개 달려서 한들 한들 흔들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횟덩어리는 옛날 고려장을 지낼때 쌓아올린 돌과 돌사이에 회를 발랐던 것이라고 하더이다 그리고 이 외숙모는 1967년 내가 군제대를 하고 1968년 가을쯤 일본 후꾸오까에 사시다가 미국으로 들어가서 사시던 내 작은 이모님과 같이 대구의 우리집을 찿아 오신적이 있었답니다
내 어머님께서는 1966년 1월에 내가 군에 있을때 돌아 가셨으니 언니를 만나지도 못한채... 그 작은 이모는 내가 아주 어릴때 아마도 두세살때 우리집에 오셔서 언니에겐 갈탄 한수례, 나에겐 일본식 나막신(게다 ㅠㅠ게 생겼지요 )을 선물로 사주고 일본으로 떠나 갔던걸 기억하지요 내가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 인간인지...그까짓 직장이 뭐라고 그 이모와 외숙모를 모시고 하루종일 시간을 보낼생각도 못하고... 평생 후회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밤새도록 해도 못다할 얘기, 어머님, 감사 합니다
남자가 입이 무거워야지 저렇게 가벼워서야, 아흔아홉근이 되어도 못쓴다 적어도 백근은 되어야지 하시던 어머님 물론 신중함을 어찌 무게로 달기야 하겠습니까 마는 평생 가슴에 담고 가야할 가족사가 있는가 하면 친구들이 들려준 한두마디의 말 까지도....관주형, 형이 네델란드 대사로 재직시 우리가 만났을때 이건 정말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하면서 나를 힐끔힐끔 눈치 본것 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지요 내가 비분강개 하기는 형보다 몇배나 더 하면 더했지.... 기억 하시나요? 어떤 친구얘기끝에... 이런얘긴 아무한테도 하지마래이 한말... 남을 모함하는 놈들은... 그리고 그런걸 관운이라고 한다는걸 알고있지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모두가 남을 시기하고 모함하여 생긴사건들 아니겠습니까. 없는말도 지어내서 모함하는 세상에...
군대에 가 보면 자기집에 금송아지 안메어 놓고온 사람 없다는 걸 아시지요?
친구 잘못 사귀어 패가망신을한사람, 장가 잘못들어 패가망신을한 사람... 말해 무었하겠습니까.
경주최씨 가문에서 청구대학 대구대학을 설립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알고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북에선 농지를 모두 국가소유로 몰수를 하고 남한에선 국채를 발행하여 농지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회수를 하여 소작인들에게 분배를 하였는바 7년인가 몇년인가 소작인 들에게 농지대금을 갚아라는 법을 만들었지요 그래서 어떤 정당을 밀어 주어야 하느냐는 논의가 가문에서도 있은게 사실이고 학교재단을 설립한것도 부의 대물림의 한 방편이었다는걸 어리석은 백성들이 잘 알기나 했을라구요. 경주최씨 본가는 경주최부자로 알려져 있으나 경남동래군 김해군쪽에도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가 봅니다 녹산공단으로 잘 알려진 소위 시메끼리란 곳은 육이오 피란민이 몰려오기전의 경남 사람들은 거의 다 들어 본적이 있을것이고 대학교 말고도 학교재단을 만든게 많을 것입니다 내가 잘 아는 김해가 고향인 노무현의 형 노건평이와
학교동기동창인 친구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기에 너 어느학교를 나왔느냐고 물어봤드니 무슨 고등학교라기에 그 학교재단 이사장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최 X 호 라고 하길래 아하~ 싶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청구대학, 대구대학은 통합하여 박대통령이 퇴임후 뒷날을 생각하면서 영남대학교 재단을 만들었는데 세상일이란 참으로 묘하여 최태민이란 희대의 사기꾼이 온갖 비리는 다 저질러 놓고... 그 후덕으로 그 자식들이... 호의호식하고...
석강 박윤호님 때문에 괜히 댓글 한줄 달다가 이렇게 푸념을 늘어 놓았습니다 진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시작도 못하고... 이제 내가 살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것 같습니다 빨리 몇가지 얘기는 우리의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우리 나라의 국사도 있겠고 우리 군의 전사도 있으니까요) 국기를 문란하게 하고 반역질을 한 빨갱이 놈들을 척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앞날은 없습니다 그래서 짧은 몇줄이라도 증거를 남겨 놓야야겠다 싶기도 합니다
두서 없다는 말, 정말 이 글을 두고 한 말일테지요 한글프로그램도 하나없어서 메일을 쓰고 임시보관함에 담아두었다가... 이런식 이다보니... 이 글은 오늘 여기에서 맺을까 합니다
2017년 11월 19일 독일 본에서
첫댓글 "이렇게 푸념을 늘어 놓았습니다" ㅡ 푸념이라니요ㅡㅡ대단한 鄕土史인데요-------
어제와 오늘 오전엔 몇몇 사람을 만났는데 무두가 의사들 입니다 내가 전생에 의과대학 수위직을 직업으로 삼았던지....
아시다 시피 우리 동기생들중에 얼마나 많은 의학박사 교수님들이 있습니까 우리 사랑방에서 듣고 보는 총장님, 학장님 의료원장님, 무슨 원장님... 심지어 사리못 친구들 가둔데도 카톨릭대 학장이니 국민학교 졸업후 소식도 몰랐던 김재화(경북중학교엘 같이다닌줄도 몰랐지요)도 의사였다는 얘기를 동곡, 석포형한테서 들었습니다
독일에서도 많은 의사친구들이 있답니다 어제도 만났고 금요일날 또 만나는 사람도 의사인데 그 사람 얘기를
한토막 해야 겠군요 그리고 복심이 라는 여인 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