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생명을 어머니같이
뭇 생명들을 도와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 비록 지금 현재는 자신과 관계없는 듯 여겨지는 사람들 일지라도, 사실상 그들과 자신 사이에는 매우 친밀한 끈으로 매듭져 있다. 그래서 그들 모두를 도울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 끈은 서로서로를 어머니와 자식의 처지로 복잡하게 얽어매고 있다. 현재의 나는 결코 우연히 빚어진 존재가 아니다. 수없는 지난 생(生)의 산물(産物)이다. 시작없는 옛적부터 네 가지 방법 - 자궁을 빌어서, 알에서, 습기에서, 그리고 하늘 나라에 탄생할 때 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식으로 - 으로 수 많은 생을 되풀이 해왔다. 이 중에서 자궁을 빌거나 알에서 태어날 땐 반드시 어머니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태어난 햇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므로 자신이 만났던 어머니도 그 수를 모를 정도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세상에 한 번쯤 내 어머니 되지 않았던 생명이 누구겠는가?
물론 이러한 논리가 설득력 있기는 매우 어렵다. 윤회의 참모습과 자기 자신이 지난 세상에 수많은 생을 겪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명만 갖고서 확신을 심어 주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바르고 합리적인 명상을 깊이 하면, 확신은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직관(直觀)으로 닥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 까닭에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삶은 다만 이 목숨 붙어 있을 때까지이며 윤회따위는 절대로 없다' 라는 그릇된 견해를 고집한다. 여기에 대해서 더 확고한 신념을 가지려면 의식의 본성(本性)과 존재방식, 말하자면 의식(consciousness)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는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여전히 많은 의혹이 남을 것이다. 예리한 관찰을 통하여,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단지, 갖가지 상이(相異)하고 거칠거칠한 생각들에 불과함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다. 아무튼 일단 자신이 과거에도 무수(無數)한 생을 겪었다는 확신만 서면, 뭇생명을 자기자신의 어머니로 여기려는 명상은 큰 힘을 얻는다.
이 생에서의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반성이 필요없다. 이와 비슷하게 뭇생명들을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어머니를 대할 수 있다면, 이 단계의 명상은 성취된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든, 한 마리의 짐승이든 똑 같은 사랑으로 맞이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 훈련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자신이 인간의 아들이지만, 과거 어느 세상에서는 한 마리의 강아지였을런지 모른다. 겉 모습은 달라도 '어머니였고 아들이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두 관계가 동일 한 것이다. 자신과 뭇생명 사이의 이러한 맥락(脈絡)을 인정하는 마음 훈련이 곧 모든 생명을 자신의 어머니로 여기는 수행이다. 이 단계와 마음의 평정을 구하는 명상 사이에는 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후자는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반면에 이 단계는 뭇생명에 대한 동족의식(同族意識)과 평등한 감정을 기른다. 갓 떠오르는 태양은 평원(平原)을 두루 비추지만 그다지 만물에 따스함을 주지 않는다. 태양이 점점 높이 솟아 오를수록 평원의 열기로 더해간다. 이 단계의 명상이 일출(日出)이라면, 다음 단계는 태양이 중천(中天)에 떠오르면서 점점 강한 열기를 발산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