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들녘의 기억
추석이 다가오면 나는 어김없이 고향의 논을 떠올린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황금빛 물결, 그 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 익은 벼의 고개 숙임까지 —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살던 나는 벼가 여물어가는 시기를 가장 기다렸다. 벌초하러 내려가면 논마다 황금빛이
물결치고, 나락 이삭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곧 사람의 도리이자 삶의 지혜였다. 인품이 깊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뜻을, 나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절실히 안다.
가을 들녘의 적은 참새였다. 새벽부터 논으로 나가 허수아비를 세우고, 장대에 줄을 걸어 빈 깡통을 매달았다.
바람이 불면 깡통이 서로 부딪히며 딸랑딸랑 울었고, 우리는 “후여! 후여!” 소리를 지르며 들판을 뛰어다녔다.
황금빛 이삭들 사이로 날아오르는 참새떼, 그리고 들판에 울려 퍼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모든 풍경이 지금
도 눈앞에 선하다.
수확이 끝나갈 무렵이면 논바닥엔 메뚜기들이 뛰어다녔다. 손으로 잡아 꽁지에 끼워 들고 오면, 어머니는 아궁이
불 위에 구워 주셨다.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우면, 그게 그 시절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간식이
었다. 가끔은 논고둥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논바닥의 옴팍한 곳을 파면 통통한 논고둥이 튀어나왔고, 그것을
쪄서 먹으면 꿀맛보다 달았다.
그 시절, 우리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넉넉했다. 들녘의 바람이, 익은 벼의 향기가, 함께
웃던 가족과 이웃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세상살이가 각박하고, 서로의 마음이 메말라가는 시대에
그때의 시골은 내게 ‘진짜 풍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황금들녘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행복, 가족의 온기, 그리고 겸손과 감사의 마음이 깃든
삶의 풍경이다. 지금도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날이면, 나는 마음속 들녘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조용히 되뇐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그 말 속에 담긴 삶의 진리를, 황금빛 들판이 언제나 내게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