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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꿈사★공무원을꿈꾸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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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한국사 심화 학습 독립협회.
세라00 추천 0 조회 152 08.04.25 23:47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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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4.26 00:44

    첫댓글 1번지문은 부연설명이 부족하여 무어라 말씀드릴수 없구요..독립신문은 최초 "일간"지 가 맞습니당...보통 한성순보가 최초신문이라 조금 착각하신듯 한데요..한성순보는.."순보"라는 말이 열흘마다 발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그래서 최초일간지는 독립신문이 맞답니당..아차차...그리고 민간이라는 말도 맞구요..한성순보는 관보성격입니당..열공!!

  • 08.04.26 15:14

    헌의 6조는 정부에 요구는 하였지만 실행되진 못하였죠....헌의 6조의 내용중 '칙임관을 임명할때는 의회에 물어 가부를 결정한다'는 조항이 있는데...이것은 입헌군주제를 의미합니다...절대황권을 원했던 고종과 측근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독립협회를 강제해산하게 됩니다...

  • 08.04.26 00:51

    헌의6조는 관철되지 않은걸로 알고 있어요~~

  • 08.04.26 00:54

    1896년 7월 2일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위해 발족했음

  • 08.04.26 00:54

    독립신문이 독립협회보다 먼저 간행되었음

  • 08.04.26 00:54

    자주독립과 충군애국의 강령

  • 08.04.26 00:57

    독립협회는 사회 일반의 참여 뿐만 아니라 관료와 왕실의 지원을 받아, 짧은 기간에 거대한 사회단체로 부각/거의 모든 고급관료와 다수의 일반 민중이 독립문 건립 보조금을 내었고 독립협회의 회원이 되었다/1896년 말에는 회원수가 2,000명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일반민중 회원은 아직 표면에 나서지 못했고, 독립협회는 개혁파와 보수파 고급관료의 주도 하에 있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 고급관료의 사교 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 08.04.26 00:58

    토론회는 독립협회의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97년 말기에는 독립협회 토론회와 ≪독립신문≫은 러시아인 재정고문 고용문제와 관련해 보수파 정권의 외세의존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

  • 08.04.26 00:58

    이 때문에 보수적 관료층은 독립협회에서 점차 이탈/독립협회는 개혁파 관료들과 재야·신지식층이 주도하는 민중적 사회단체로 전환

  • 08.04.26 00:59

    독립협회가 구국운동을 선언한 1898년 2월 /구국운동선언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독립협회가 민중의 정치활동을 통해 민의를 국가 정책에 반영한 시기/

  • 08.04.26 01:00

    이 시기에는 외세의 이권 침탈과 내정 간섭을 민중의 힘으로 배제하려는 국익·국권·국토 수호를 포괄하는 자주국권운동과, 전근대적인 압제와 수탈로부터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 등 인권을 보장하려는 자유민권운동, 그리고 민권의 신장과 국권의 강화를 위해 관민의 합력기구로서 의회 설립을 추구한 국민참정운동이 전개되었다.

  • 08.04.26 01:00

    또한 이 시기에는, 국권·민권 운동의 담당 세력도 만민공동회를 계기로 독립협회 회원 중심에서 민중체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띠었다. 집요한 민중운동은 정부와의 대립 의식을 발생시켜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추방

  • 08.04.26 01:02

    보수내각을 붕괴시키고 진보내각을 구성하도록 했음/관민공동회를 열어 인민헌의안을 수락하게 하였음

  • 08.04.26 01:03

    민선의회의 성격이 가미된 중추원 관제를 공포케 하여 인민참정권을 공인하게 하였음

  • 08.04.26 01:07

    관민공동회는 국가주권의 자주화, 국가이권의 수호, 국가재정의 일원화, 국민자유권의 보장, 인사행정의 공정화, 의회식 중추원의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국정개혁안)’를 채택하고, 참가 대신들의 서명을 받은 다음 국왕의 재가를 요청하였다. 이에 국왕은 ‘헌의 6조’를 재가함과 동시에 서정쇄신을 다짐하는 조칙 5조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11월 4일에는 관선 25명,민선 25명의 의석을 규정한 근대의회의 성격을 지닌 ‘중추원관제’가 반포되었다. 이 관제는 독립협회의 중추원 개편안을 거의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헌의 6조’의 재가와 의회식 ‘중추원관제’의 반포는 국왕과 정부가 민회와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 08.04.26 01:07

    설립에 의한국민참정권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공인한 것이다. 이는 독립협회가 추진한 국민참정운동의 거대한 승리를 의미

  • 08.04.26 01:11

    독립협회가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의 협력을 받아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참정권을 공인하게 한 1898년 11월 4일, 수세에 몰린보수반동세력은 국왕을 움직여 일시에 박정양 내각을 붕괴시키고, 조병식의 보수파 내각을 조직케 하였다. 보수반동세력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추진한다고 고종을 충동하고, 윤치호대통령설을 암시하는 모략 문서를 퍼뜨린익명서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독립협회 등 모든 민회가 혁파되고, 이상재·남궁 억·정교 등 독립협회 요인 17명이체포되었으며, 의회식 중추원의 발족도 좌절

  • 08.04.26 01:12

    정부 대신들의 민중대회 해산요구가 거부되고, 어용단체인 황국협회가 동원한 부상단의 만민집회 습격에 의한 유혈 충돌로 사상자가발생

  • 08.04.26 01:13

    고종을 헌의 6조실천을 재천명/ 독립협회 약속대신에 실천하라 요구

  • 08.04.26 01:14

    12월 12일 부터 민중들이 요구사항의 실천을 촉구하는 실력해사 돌입

  • 08.04.26 01:15

    중추원의회에서 만민측 대표가 주동이 되어 민중이 신망하는 인물로 박영효 서재필등 11인을 투표로 선정하여 정부에 추천/ 만민집해는 이를 지지/ 일련의 이런 사태는 고종과 보수세력에게 위협감을 줌/

  • 08.04.26 01:15

    그리하여 12월 25일 정부는 민회 금압령을 내려 무력으로 민회활동을 탄압, 금지시킴으로써 독립협회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

  • 08.04.26 01:16

    1896.7~1898.12 해산 / 고종이 약속만 하고 실천을 못하였음 / 관철 못함/ 결국 이로인한 강제해산당함

  • 08.04.26 01:22

    요구>수용,반포 보수파 즉각 반격> 좌절>민중봉기>국왕의 약속,민중이 약속말고 실천요구>조용히해!!!!제발!!!>실천하라!!!!!>에잇 다죽어버려라!!~~~~~~~~~~~~~~끝내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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