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이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 이었음으로 나는 좀 늦게
까지 같이 술을 마셨다. 새벽 두시까지 마셨는데 퍽도 많이 마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반쯤 취해서 흥헐거리면서 집에 들어 갔다. 두시쯤이면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실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내가 나갈때 부터 시작하신 뜨게질을 뜨고 계셨
다.
"어? 어머니 안 주무셨어요? 전 술 좀 마셨어요."
"꿀물 타주니?"
"아뇨 괜찮아요."
"네 아버지가 안계시니까 이상하다. 가끔 주말에 못오시면 내가 내려갔었는데..."
"어머니 저때문에 아버지께 못 내려 가신거에요?"
"아니 나도 내일 점심 약속이 있어. 너때문은 아니다."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으세요? 그런데 어떻게 주말부부로 지금까지 지내셨어요?"
"그건 말이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일정 기간을 정해 놓고 반드시라는 믿음이 생기
면 다 기다려 진단다. 하지만 끝이 어딘지 모를 기다림은 어렵지. 네 아버지를 기
다리는것은 일주일이면 되잖니. 그리고 난 그 일주일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서
그 일주일이 길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래서 매번 토요일이면 만나다가도 이렇게
못 만나면 다음주일이 될동안은 내내 허전하단다. 늦었으니 들어가서 자거라."
"네. 어머니."
나는 어머니 앞에서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하면서 내방으로 들어 갔다. 이런 어머
니께 내 휘청이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유미란을 생각했다. 기다림이란 정해진 기간을 알
고 기다리는것과 모르고 기다리는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면 유미란은 못할일을 겪
은 셈이었다. 사라져 버린 남자를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적 이론아래에 막
연한 희망만으로 기다려온 셈일거다. 시간이 갈수록 오지 않을거라는 생각으로 중
무장하지 않으면 안되었을지도 모른다. 몇년전 유행했던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것
의 의미는 바로 이런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깨끗한 헤어짐이 나았다. 하지
만 중간에 사라져 버리는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었다.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것
만큼 사람한테 더 잔인하게 굴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술에 취하기는 했지만 이런 생각이 들자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대학교 일학년때
산 286 컴퓨터를 켰다. 대전 집에 있는 486보다 어려모로 보아서 별 쓸모가 없지
만 그래도 채팅이나 테트리스를 하기에는 이보다 더 적당한 것은 없다라고 생각되
었다. 그것은 자판기를 부수는 일에 속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연희의 스트리트
화이터가 생각나지만 나는 포맷을 시키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는 까닭은 내 컴퓨터를 포맷 시켜줄 그 누구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댓가는 내가 치루는 법이었다. 가끔은 연희가
부러울때가 있다. 고집쟁이에다 일을 만드는데는 선수고 거기다가 원하는것을 놓
친적이 한번도 없는 그런 연희가 부럽다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한편
으로는 동료
연구소 직원들이 유미란을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여자라고 생각하듯이 나도
연희에 대해서 그런 착각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희는 진짜로 고
민이라든지 아니면 상처라든지 그런것 따위는 없는 것일까?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
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상처받지 않고 살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상처받지 않
기 위해서 단순하게 살아가야 하는것일까. 각각 삶의 방식이 다른 때문인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결국 벽을 쌓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은 벽을 쌓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테트리스를 하기 시작했다. 테트리스는 쌓아지는 벽돌을 한줄로 맞춰서 부수
는 게임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테트리스인것 같다. 부수기. 부
기. 누군가 테트리스와 섹스와의 공통점을 재미 있게 표현한것이 있지만 나는 테
트리스와 삶과의 공통점을 말하고 싶다. 첫째. 계속 쌓아져 올라가는것만큼 치명
적인것은 없다. 둘째. 한줄 없앨때마다 마음은 편해진다. 셋째. 빈칸을 잘 맞추어
야만 줄은 사라진다. 고로 어느곳에 끼울지 선택을 잘해야 한다.
게임이 끝났다. 나는 담배라도 한대 피울까 하다가 적어도 서울집에는 담배같은건
없다는것을 인정해야 했다. 나가서 편의점에서 사올수도 있었겠지만 담배를 사러
나가는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컴퓨터 전원을 끄고 방불도 껐다. 침대
에 가만 누워서 천정을 바라다 보았다.
바람.
바람이 불어 왔다. 아직은 아직 그 힘이 미약했지만 내일 또는 모레 그렇게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바람부는것에 따라서 그 날의 날씨를 좌우할것이다. 아니 바람은
지금 아무런 힘도 없는게 아니었다. 바람은 숨을 죽이고 여름 내내 우리를 지켜
본것이다. 아무런 힘이 없어서 여름이 가도록 기다린게 아니라 여름 내내 우리로
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는 바람이 그 강한 권력을 우리에게
보여줄 시간이다. 나는 숨을 멈추고 바람이 내 머릿결로 그리고 다시 목덜미를 통
해서 그 아래로 흐르는것을 느꼈다. 바람이 흐르는 것에 맞추어서 내 심장이 이완
과 수축을 했다. 이번 여름은 잊지 못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대전에 내려
가면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유미란이 어떻게 잘 했
는지도 궁금했고 불현듯 연희도 보고 싶어 졌다. 빨간 사과 사는것 잊지 말고. 내
가 짧게 한숨을 내쉬자 바람도 훅 불어 왔다. 이제는 가을을 상상할수도 있다.
다음날 어머니의 점심 약속에 맞추어서 나는 대전으로 내려 갔다. 내가 대전에 가
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께 두통이나 전화를 하셨다. 어차피 어머니의 수입에서
전화세를 내는것이니까 상관없지만 서울에서 부산이라면 말한마디가 돈 떨어지는
소리와 같은 곳이다. 어머니는 내게 다음주에는 아버지가 꼭 올라 오신다고 약속
하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냥 말씀이 아닌 자랑이시겠지만.
나는 대전에 도착해서 사
과를 하나 샀다. 지금쯤 사과가 나왔을라나 싶었는데 운
이 좋겠도 사과가 있었다. 물론 어느 이상한 나라에서 농약에 절궈서 가져온 사과
일지 몰라도 사과는 분명 백화점에서 팔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그런 빨간색은 아
니었지만 그럭저럭 붉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내 짐을 다시 이층 내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연희에게로 가
보았다. 분명 몇일 안 본사이 입이 십센치는 나왔을 것이다.
내가 연희 방에 들어 갔을때 연희는 머리를 빗고 있었다. 여름동안 머리를 묶고
있어서 몰랐었는데 봄보다 머리칼이 많이 길러져 있었다.
나는 사과를 연희앞에 내밀었다.
"세상 어떤 거울이 너한테 이쁘다는 거짓말을 하겠냐?"
"흐응.. 그것도 연구소에서 만들면 어떻게 안될까?"
"차라리 연구소 망하라고 굿을 해라."
연희가 사과를 옷에 문질렀다. 그럼 그렇지 이방에 오기전에 사과를 물에 닦아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아마도 그냥 먹을 것이다.
"오빠. 뭐 물어 봐도 돼?"
"뭔데?"
나는 연희침대에 걸터 앉았다.
"미란씨... 와.... 결혼 할꺼야?"
얘
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왜?"
내가 묻자 연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요즘 자주 만나는거 같아서. 그럼 새언니가 될테니까 잘 알아 둘려고."
"넌 내가 미란씨와 결혼했으면 좋겠니?"
연희의 얼굴이 어두워 졌다.
"아니."
"그래. 알았어. 사과나 먹어."
나는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서 내 방으로 갔다. 솔찍히 고백하건데 아까 연희 표정
이 어두워 졌을때 난 사실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욕심장이 정석우같으니라고. 내
방으로 들어온후 혹시나 유미란이 와 있을까 싶어서 전화를 걸려고 했다가 말았
다.
요즘은 혼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런 생각의 연속뿐이었다. 굳건히 살아야
지. 씩씩하게 살아야지. 행동파 대원이 되야지. 휴우.. 이것도 생각뿐이다.
나는 방청소를 할 생각이었음으로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었다. 먼저 진공 청소기
를 작동시키고 내 방부터 청소해 나가기 시작했다. 구석 구석 잘 살펴 보니 언젠
가 연희가 잃어 버렸다던 귀걸이도 나오고 입던 와이셔츠 단추도 나오고(그 덕에
입지 못하고 놓아 두었던 와이셔츠를 입을수 있게 되어서 경제적 손해를 줄이고
나아가서 환경보호에 이바지했다는 확신과 신념을 갖게 되었다.)오백원 짜리 한개
와 백원짜리 두개. 그리고 십원짜리는 무려 네개나 나왔다. 이 돈의 반은 연희것
일테니까 한쪽에 잘 뒀다가 저녁 식사 시간에 연희 주고 그리고 귀
걸이도 연희주
고 그런데 만원짜리나 그런것은 안 나오나? 그런거 나오면 내가 갖을 텐데. 물론
그게 연희 돈이라 할지라도 내가 갖을 것이다. 뭐 일하고 나면 팁이라는게 있으니
까. 난 팁으로 일만원. 이층을 다 청소하고 일층도 마저 청소 했다. 바람이 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이라고 움직이게 되자 불구덩이에 빠진것 같은 기분이
었다. 그래도 걸레질도 하고 물을 받아서 유리창도 깨끗이 일층과 이층을 닦아 냈
다. 종종 집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남자가 집안일을 혼자서 하는것을 보자 홀애
빈게벼. 우리 옆집 과부댁 소개시켜 주리오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아까 결심한 대
로 나는 아주 씩씩하게 일을 해냈다. 청소를 다하고 나자 바람이 더 많이 불었다.
이 상태로라면 가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리라. 여름이 갔다! 엄마 여름이 갔어
요. 국민 여러분 이 악마같은 여름이 드디어 가요. 흑흑흑.. 이렇게 기쁠수가.
나는 샤워를 하고 저녁 시간이 되서 테레비젼을 켰다. 테레비젼에서는 뉴스 속보
가 나오고 있었다. 그 속보는 태풍이 분다는 것이었다. 언제 부터 우리나라 사람
들이 태풍이 온다면 이렇게 좋아했을까 의심이 들정도로 사람들은 기뻐 하고 있었
다. 사실 나도 기뻤다. 더위도 더위였지만 저번에 부산에 가면서 본 논의 대부분
이 물기 하나 없이 쫙쫙 갈라져 있었던 탓이었다. 그래서 부산에서 신나게 논 것
이 쑥쓰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그나마 비가 와준다니 눈물이 날 정도
로 태풍이 반갑고 고마웠다. 나도 이 정도로
우리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강한데 누
가 표창장 안 던져 주고 가나?
"오빠 밥 먹어."
연희가 이층 계단에서 내려 오지도 않고 소리만 냅다 질러대고 있었다.
"연희야 이리 와봐."
"응? 왜?"
"하여간 이리 와봐."
"알았어."
호기심 많은 연희가 아래층으로 내려 왔다.
"뭔데 그래?"
"너 있잖아.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하면 안되니?"
"에게 그거 말할려고 내려 오라고 한거야?"
"그럼. 연희야. 자고로 오라버니 한테는.."
퍽! 에고 에고... 사람살려.
그래도 다행인것은 연희가 직접 주먹을 날린게 아니라는 것이다. 주먹이 아닌 소
파 위에 올려져 있던 방석을 내게 던진 것이었다. 덕분에 덜 아팠지만 방석에서는
먼지가 폴폴 났다. 그리고 보니 청소를 하기 전에 방석과 이불등을 밖에서 털고
들어 왔어야 했다. 지금 이렇게 한번 청소 하고 나면 연희 어머님이 청소 해 주시
는 것을 빼고는 내년 봄까지는 이 모양 이대로 일것이다.
요즘은 범죄와의 전쟁 안하나? 아니 폭력과의 전쟁. 아마 연희같은 애들이 맘만
독하게 먹으면 전화박스에서 칼을 휘두르고도 남을 것이다. 또 전화박스에서만 칼
을 휘두를까. 아마도 화장실에서도 휘두를것이다. 혹시라도 급하면 남자 화장실까
지 칼을 들고
들어 올런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런지도 모르는게 아니라 그게 확실
하다. 불쌍한 남자들 같으니라고 다들 고자되는줄 알고 헐레 벌떡 뛰어나오는 모
습이라니.
"그래 가자. 밥 먹으러. 그런데 너 요즘 살찐거 같다."
"어? 정말?"
"그래. 특히 허리쪽이 오목에서 볼록으로 바뀌는거 같으다."
흐흐흐.. 이 기회에 놀려 줘야지.
"정말이야?"
연희 입술이 오리새끼 마냥 삐죽 나왔다.
나와 연희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다시 베란다로 그리고 연희방을 통해서 아래층 부
엌으로 내려 갔다. 소매가 없는 원피스 차림의 연희 어머니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
녀 같아 보였다.
"와.. 엄마 천사 같다."
연희가 연희 어머님을 보더니 그 뒤로 가서 꽉 껴안았다.
"얘는 징그럽게."
"엄마. 정말로 우리 엄마가 이렇게 이쁜줄 처음 알았어. 나도 엄마 딸인데 나중에
이쁠수 있을까?"
자못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희가 말했다.
"당연하지. 연희는 엄마보다 더 예뻐요. "
"그럼 나한테도 아빠같은 왕자님이 나타날까? 응?"
"연희한테는 더 멋진 왕자님이 나타날꺼야."
연희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연희 어머님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서
아주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 이쁘데."
저녁상이 다 차려지자 연희 아버님이 방에서 나오셨다. 그리고 오랫만인것 같은
연희네 가족과의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연희는 좀전에 내가 뚱뚱해진것 같다
고 놀린것도 다 잊고는 밥 한그릇을 뚝딱 먹어 치웠다. 저녁 식사후 연희 어머님
과 아버님은 두분만의 와인 파티라도 할 생각이신지 나와 연희에게 커피를 한잔씩
타준후 이층으로 올려 보냈다.
연희는 방에 들어가자 음악을 틀었다. 나는 편안한 기분이 되어서는 연희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 앉았는데 연희가 내 옆에 와서 같이 같이 앉았다. 적어도 사람옆에
기대고 끌어 안는 점에서 볼때 연희는 사랑받을 것이다. 단 나중에도 아무나 끌어
안지만 않는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나 도서상품권이 하나 들어 왔는데 어떤 책을 사면 좋겠어?"
연희가 물었다.
"네가 사고 싶은걸로 사야지."
내가 말했다.
"오빠가 책은 더 많이 읽잖아. 난 책읽는거 별로 안하잖아. 아마 우리나라 국민이
다 나같으면 책장사들 다 망할껄? 그리고 난 만화책이 가장 좋더라."
"글쎄.. 네 나이에 만화책은 좀 그런거 같고. 요즘 잘 팔리는 책이 뭐더라. 나도
요즘은 책방을 잘 안가니까. 그런데 도서 상품권 한장 받았니?"
"응."
"너 그거 한장 가지고는 책한권 사기 힘들껄?"
"에? 정말? 내가 마지막으로 책을 샀을때가 삼천 오백원이었나 그랬는데.. 그럼
그냥 책방앞에 쪼그
리고 앉았다가 사원오백원으로 세일해서 도서 상품권 팔아 먹
을까?"
"그러지 말고 한권쯤 사보는것도 나쁘지 않잖아. "
"그래. 오빠말도 맞아. 그런데 뭘 사지?"
우리는 정말로 지루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태풍이 분다고 하더니 아까보
다 바람이 더 많이 불었다.
내가 이번에는 연희에게 질문할 차례였다.
"넌 이제부터 뭘할거야? 의상실도 그만두고는..."
"아.. 그거? 있어. 비밀이야."
"그 비밀 나한테만 조금 흘려 주면 안되냐? 넌 무슨 애가 구한말의 비밀 결사대라
도 조직한 것 같다."
"뭐 그런지도 모르지."
연희는 말을 해줄까 말까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이제 부터는 내가 잘하
면 대답을 들을 거고 못하면 마는것이다.
아까는 못 봤었는데 연희 책상앞에 내가 준 사과가 놓여 있었다. 아까 부터 문질
렀는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치 대머리 같았다.
"이렇게 기대니까 참 좋다. 몇년만인거 같애. "
나와 연희는 음악을 끄고는 테레베젼을 보기 시작했다. 적당히 잘 짜여진 테레비
젼 프로그램들은 이렇게 별 생각없이 정신을 딴곳에 두고 싶을때 보는것으로는 아
주 적격이었다. 같은 날의 반복들. 사람들은 같은 날의 반복을 지켜워 할런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렇게 편안한 사람과 가끔은 아무런 생각없이 테레
비젼을 보고 그러다가 가끔은
산책도 나가고 배가 고프면 밥을 해먹고 커피도 같
이 마시는 그런 단조로운 생활이 보통의 사람들이 원하는 스릴감 넘치는 생활보다
훨신 낫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극히 드물다. 열정적이고 스릴넘치는 생활의 해피
엔딩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것이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열정과 스
릴에 대한 댓가를 받기 마련이었다.
"오빠?"
연희가 나를 불렀다.
"응?"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어. 어떤게 가장 중요한가라는 생각말이야. 내 멋대로 의
상실을 그만둔것은 그런 생각때문이야. 오빠는 내 고등학교때를 모르지?"
연희가 나를 쳐다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표시. 그렇지만 망설임도 같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럴때는 차라리 대답하지 않는 편이 연희가 혼자서 말하기에
편안할 것이다.
"그때 되고 싶은게 있었어. 내가 그게 무엇인지 말하면 비웃겠지만.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는 반드시 남들이 인정하는 보편적 방법이 가장 해답에 가까운건 아
닐거라고 생각해. 그냥 이건 내 생각인데 난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을
할까 하고 생각중이야."
연희는 끝까지 연희가 하고자 하는게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 말을 잠시 하고는 내내 테레비젼을 봤고 그리고 아주 깜깜한 밤이 되어
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연희와 내가 베란다가 나가서 세상을 쳐다 봤을때
는 사람들은 사라져 버리고, 아마도 태풍때문이겠지만, 남은것은 바람뿐이었다.
한여름동안에는 이 베란다에 둘이서 같이 서 있어 본적이 없었다. 너무 더워서 였
을까? 차라리 이 베란다가 저녁 부터는 훨씬 더 시원하지 않았을까. 사람들도 참
도 잘 망각한다.
"있잖아. 오빠 혹시 sbs봐? 거기서 예전에 출격 로보텍이라는 만화를 했었거든.
그런데 그거 원래 제목은 마크로스야. 내용이 어떤가 하면 외계인이 지구를 공격
하는데 우리는 열심히 맞써 싸우지. 그러다가 마지막쯤에 그 외계인이 우리 지구
의 선조들이 변화한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다시 지구인처럼 되는 방법을
알아 내게 되는데 그 외계인들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적이라서 매일같이 서로 싸
우는데 그 싸움을 멈추는 방법이 노래라는 것을 알게 돼. 그래서 어떤 여가수가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음악상자 같은것에 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되거든. 사람들은
그 오래된 음악 상자속의 음악과 가사가 외계인들에게 어떤 큼 힘이 되어서 싸움
을 멈추게 하는거라고 믿게 돼. 그런데 그 음악 상자의 가사를 해석한 여자가 있
었는데 그 여자한테 어떤 사람이 그 노래는 과거에 어떤 의미로 쓰였던 거냐고 묻
거든. 그랬더니 하는 대답이 그냥.. 과거에 있어서 흔히 들을수 있는 유행가중 하
나일 뿐이래. 그러니까 유행가가 전쟁을 멈춘거지? 반드시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
어야만 효과를 볼수 있는것은 아니지? 도서상품권으로 내가 만화책을 사본다면 그
건 나쁜것이 되는걸
까? 응? 오빠? "
그게 어떤 노래였든 상관이 없었다는 뜻일거다. 노래라면 다 된다는 것이리라. 세
상도 그런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지만 나는 연희에게 그렇다라든지 또는 아니다라
는 대답을 해줄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희에게 만화책을 사서 보라는 말은 해줄수
가 있었다.
"만화책 사서 봐. 그게 너한테는 가장 필요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많이 불더니 비가 한두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에서야 태풍이
대전 근처를 지나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서로의 방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연희야 잠자다가 무서우면 나한테로 와. 언제나 처럼."
"응. 그럴께."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려 창문안으로 들어 가려다가 문득 멈춰 서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빠?"
나는 연희를 바라 보았다.
"오빠 난 만화를 그릴거야. 그래서 그만뒀어."
연희가 하려던 말이었다. 연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창문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
도 창문안으로 들어 갔다. 조금 지나면 베란다가 다 젖을 것이다. 나는 방안에 서
서 창문밖으로 베란다가 젖는것을 지켜 보았다, 연희가 하고 싶었던 일이 만화가
가 되는 일이라고? 아직은 우리나라에서의 만화가 대접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 고등학교때 되고 싶었던게 만화가 였단 뜻일거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연희
가
만화가가 되려고 했던 것을 몰랐을까. 더군다나 그 고집쟁이가 만화가가 되기를
포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연희의 고등학교 생활은
남들처럼 평범하기만 했었던것 같은데 하고자 하는 일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나의 추
측일뿐이었다. 추측이라는 것은 추측일따름이다. 결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시
작도 아닌 전혀 엉뚱한 것이 될수 있는게 추측인 것이다.
금새 비가 꽤나 많이 내렸다. 아마도 새벽까지 내내 내릴것 이다.
이럴땐 밤새 연희와 도란 도란 얘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잠들어도 좋고.
연희도 잠이 안오는지 연희 방에서 작은 스텐드를 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음악 소리도 들렸다. 연희는 이런식으로 의사표시를 하기도 한다. 나 안자는 중이
니까 놀러 오세요라는.
이렇게 비가 계속 내린다면 아마도 내일 아침 뉴스에는 대부분의 논이 해갈되었다
라고 나올것이다. 내일이면 유미란도 그 갈증이 해갈되었을까? 또는 연희는 어떨
까? 나는 어떻고? 건조한 사람 마음에도 비는 반드시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라질테니까. 우리는 여름 무더위와 가뭄을 가슴속에 담고 같이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나도 흙냄새를 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비가 오고 그래서
평소보다 그 흙내음이 진할것이다.
이층.. 내방에서도 맡고자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