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과 함께한 나의 인생
돌아보면, 내 인생은 한결같이 ‘가방’과 함께 걸어온 여정이었다. 마치 운동장의 계주에서 손에 쥔
바통처럼, 그때그때 내 나이에 맞는 가방이 내 곁에 있었다. 그 가방 속에는 교과서나 옷가지만이
아니라, 그 시절의 꿈과 걱정, 그리고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집에서 십 리나 떨어진 학교로 걸어 다니던 나는 책보 하나를 등에 메고 다녔다.
천으로 된 책보 속에는 교과서와 공책, 연필과 지우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얇은 책보는 무게
보다 더 큰 책임을 내 어깨에 얹어주었다. 그 시절엔 비가 오면 책이 젖지 않게 품에 꼭 안고 걸었고,
겨울바람이 매서워도 그 가방 하나가 친구처럼 따뜻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나는 생애 첫 ‘진짜 가방’을 가졌다. 네모난 모양의 가죽가방은 내게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을 주었다. 그 속에는 교과서와 공책, 그리고 잉크병과 펜이 있었다. 하지만 잉크병은
가끔 새어나와 교과서와 공책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그 얼룩진 자국들은 공부의 흔적이자, 미숙했던
나의 청춘이 남긴 자취였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 그날 필요한 책 몇 권만 손에 들고
다녔다. 가방의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대신 내 마음은 세상의 무게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졸업
후 해군에 소집되어 군복무를 마치고, 선원으로 일하게 되었을 땐 커다란 여행용 가방이 필요했다.
배에 오를 때마다 그 속엔 사시사철 입을 옷가지와 생필품을 가득 채웠다. 배가 어느 바다로 향할지
몰랐기에, 내 가방은 언제나 세계지도를 품고 있었다. 남반구의 더위와 북반구의 추위, 열대의 햇살과
온대의 바람을 함께 담은 그 가방은, 내 청년기의 모험심과 두려움을 함께 실어 나른 동반자였다.
세월이 흘러 육상으로 직업을 옮기자, 작은 서류가방 하나가 내 곁에 생겼다. 직장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집으로 가져오던 그 가방은, 이제 나의 책임과 가족의 생계를 상징했다. 마침 큰딸이 신혼
여행을 다녀오며 이태리에서 사다 준 서류가방은 세련되고 단단했다. 나는 그 가방을 오랫동안 들고
다니며, 마치 딸의 사랑을 품고 다니는 듯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나이가 들어 교직을 내려놓자, 새로운 가방이 또 하나 생겼다. 등산용 룩색. 매주 토요일이면 친구들과
근교 산을 오르며 그 속에 음료수, 과일, 그리고 간단한 먹거리를 챙겼다. 젊은 시절의 무거운 가방들이
인생의 의무였다면, 이 룩색은 여유와 건강을 상징하는 자유의 가방이었다. 네팔 여행 중 ‘언젠가 쓰이
겠지’ 하고 사둔 그 룩색이 이렇게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이제 팔십 고개를 넘어 또 다른 가방을 준비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이번엔 어떤 가방이 될까. 병원
진료표와 약봉지를 넣을 작은 가방일지도, 아니면 여행 대신 추억을 담는 마음의 가방일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가방 속에도 여전히 내 삶이 들어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내 인생은 수많은 가방이 이어준 여정이었다. 그 가방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인생의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징검다리였다. 어린 시절의 책보에서부터 지금의 룩색에 이르기까지, 가방은 언제나 나와
함께했고, 내 삶의 무게를 함께 들어 주었다.
아마 마지막 가방을 내려놓는 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참 많은 길을 함께 걸어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