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2. 27. 화요일.
오후에 아내와 함께 서울 송파구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비뇨기과병원에 들렀다.
2개월마다 병원에 들러서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는다.
오늘은 3종류의 치료를 받았다. 소변검사도 실시하고, 아랫배와 항문을 통해서 X레이사진 촬영도 했다.
의사는 지난번보다 약간 나아졌다며 약은 지난번과 같게끔 처방했다.
귀 어둔 나는 의사가 무어라고 설명하는지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대신에 아내가 의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병원 진료비와 약값은 11만 원이 넘었다.
아무런 돈벌이가 없는 나한테는 의료비가 비싸다.
나는 다달이 내과병원에도 들러서 당뇨 진행여부를 확인받고, 약을 사서 먹어야 한다.
이처럼 나한테는 의료비용이 많이 든다.
밤중에 인터넷 카페에서 내가 가입했던 카페 목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입했던 190여 개 가운데 아직껏 남아 있는 카페는 159개.
40여 개는 이런저런 이유도 사라졌고, 남아 있는 159개도 상당한 숫자는 준회원으로 겨우 남았다.
이제는 특정 카페 이외의 카페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일 게다.
내가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직장에서 처음 만졌다. 본부와 산하기관의 업무를 위한 전산시스템을 개발할 때 나는 세 차례나 팀장을 수행했다. 전산시스템 본질을 모르는데도 수요자의 측면에서 우두머리 팀장이 되어서 산하기관에서 파견된 전산맨과 시중 전산업체의 직원을 통솔했다. 적게는 십여 명에서 많게는 200 ~ 300명의 직원을 통솔해야 했다. 전산개발이 무엇이라는 것쯤은 다소 이해한다는 뜻이다.
퇴직한 뒤에는 시골로 내려가서 살기 시작했다.
산골마을이기에 컴퓨터는 설치하지 않았다.
십리도 더 넘는 읍내로 나와서 전자오락 게임하는 업소 게임방에 잠깐씩 들러서 컴퓨터를 두들겼다.
이것조차도 어쩌다 한 번씩이었다. 아흔 살을 훌쩍 넘긴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나는 읍내에 나와도 이내 귀가를 서둘러야 했다.
2024. 2. 27. 오늘 밤에 내가 예전에 활동했던 카페를 들락거리다가 아래 글을 보았다.
글 쓴 이는 '산다'.
카페 개설 초기에는 내 신분을 감춰야 했던 시절이었기에 내 닉네임도 수십 개나 된다.
이틀 전인 2024. 2. 25. 저녁 때에 어머니 제사를 모셨다.
옛 일기를 퍼서 여기에 올린다.
어머니와 함께 한 봄날
요즘이다.
2017년 1월 들어와 카페에 다다닥 빠르게 치는 '댓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글을 제대로 쓰고 싶었다. 글자가 틀렸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예전 2003년, 2008년에 사서 곁에 두고 펼쳐 보았던 '띄어쓰기 사전'을 꺼냈더니 책 속에서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내가 A4용지를 4등분하여 찢어서 쓴 쪽지 글.
아래에 옮겼다.
2014. 6. 8. 일.
슬프다. 왼쪽 눈이 너무나 나빠졌다.
왜?
사물의 형체 흐릿하다.
글씨는 전혀 읽지 못한다. 오른쪽 눈만으로...
왜 이렇게 변했지? 불과 몇 달 만에.
건강이 나빠졌다.
빠르게. 퇴직한 뒤의 내 건강은?
의욕상실이 주는 피해이겠지.
서울 올라온 지 오늘로써 120일째.
웅천 집은 어찌 되었을까?
끊임없는 걱정이 나를 해쳤나 보다.
어머니와 함께 서울 송파구 잠실 4단지 안 공터에 나왔다.
2014년 6월이면?
빠르게 과거로 돌아가자.
2008년 7월 1일부로 퇴직해서 시골(충남 보령시 웅천읍)으로 내려갔다.
그때까지 아흔 살이 되어서도, 혼자서만 외롭게 살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2014년 2월 8일.
내가 갑자기 대상포진을 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함께 다음날 서울로 급히 상경했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아흔여섯 살의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기가 뭐해서 그냥 서울에서 눌러 지냈다.
추운 시골집보다는 따뜻한 서울 아파트가 사람 살기에 훨씬 편하기에 시골로 내려가지 않았다.
겨울철이나 지내자면서 그렇게 겨울을 보냈고, 6월을 맞았다.
따뜻한 초여름이 되었기에 어머니를 휠체어 태워서 아파트 현관 바깥으로 나갔나 보다.
내가 잠깐 쉬면서 쪽지 꺼내서 볼펜으로 끄적끄적했나 보다.
그리고 1주일도 안 된 6월 중순에 저녁밥인 미음을 떠드리다가 119 응급차를 불렀다.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을 거친 뒤 중환자실로 옮겼다.
그 미음 이후로는, 아무것도 음식물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다.
고향(충남 보령시)에 있는 보령아산종합병원 중환자실 등에서 8개월간 코에, 팔뚝에 주사기를 주렁주렁 매달고는 끝내...
2015. 2. 25. 봄이 오는 길목에서 어머니는 혼자서 멀리 여행 떠나셨다.
2017. 1. 14. 오늘, 내가 위 쪽지 글을 읽으면서 '어머니와 함께 한 봄날'을 떠올렸다.
2017. 1. 14. 토요일. 산다(최윤환).
첫댓글 나이들면 병과 친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노후 자금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노후 자금이 더 필요하다는 조언에 감사 드립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병원비, 약값이 계속 늘어나더군요.
등허리뼈 굽어져서 먼거리 도보여행은 거의 불가능하고.....
나이 많다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지요.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았던 내가 요즘에는 문득 '슬프다'라는 생각이 이따금씩 들대요.
정신력은 아직껏 괜찮은데도 거울 속에 비친 어떤 노인네를 보면 그게 바로 나!
노후자금...
제 연금통장은 아내가 가졌으니 저는 땡전 한푼 쓰지도 못하지요.
아흔 살이 넘으신 어머님을 모신
효자시네요.
어머님과 함께 한 봄날의 이야기가
감동입니다.
2월25일이 어머님 기일이군요.
저의 아버지는 2월24일이었습니다.
어제와 그저께 이틀에 걸쳐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건강검진 받고나면 약 한 가지가
더 늘어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곤 합니다.
올 봄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하셨던
그 봄을 마음껏 추억하시기 바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예... 저 어머니는 차 멀미를 아주 심하게 해서 차 타기를 싫어했고,
서울 사는 아들, 하나뿐인 저한테도 오셔도 이내 시골로 내려가셨지요.
어머니 5살 때 이사왔다는 시골집에서 혼자서 사셨지요. 제가 퇴직한 뒤에서야 시골로 내려가서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치매기가 진행 중이어서.....
저는 말하지요. '늙은 부모님을 모시는 게 아니다'라고.
마음고생이 엄청나다는 뜻이지요. 시집 간 세 누이들.... 어쩌다가 어머니한테 와서는 '왜 이렇게 모셨어?' 하고 구박하대요.
막내여동생은 만2년이 넘도록 전화 한통도 없다가 병원에 누운 어머니를 보고는 '오빠는 뭐했어? 어머니가 왜 지경으로 되었어?'라고 오라비를 꾸짓대요.
올봄 고향에 내려가거든 엄니 묘소에 들러서 절 올려야겠습니다.
아버지 묘소에 합장했지요.
야산 꼭대기에 있으니 멀리 서해바다(충남 보령시 웅천읍) 무창포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 원산도, 외연도 등이 내려다보이겠지요.
울창한 솔나무 바람소리만 들리는 산...
님의 따스한 댓글 정말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