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탑을 수호하는 야차(Yaksa)
야차의 두 가지 모습
인도 산치 대탑의 난간이나 많은 불탑의 문에는 반나(半裸) 또는 전나(全裸)의 모습을 한 약사나 약시상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라도 하듯 돌올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 약사나 약시가 바로 야차로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귀신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과연 그러한 온화한 자태가 야차의 본래 형상일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보통 떠올리는 야차의 얼굴은 송곳니가 밖으로 삐져나온 흉칙한 악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탑의 외변 또는 탑신부에 위치하여 삿된 무리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은 온화한 모습을 한 이건 흉칙한 모습을 한 이건, 이들 모두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 분모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야차는 왜 이다지 상반된 두 가지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것일까. 그 둘은 별개의 인물이었는데 단지 똑같은 이름으로 불려진데 불과할까?
고대 인도 신화에서도 야차는 두 가지 형상으로 나타난다. 좀 전에도 말했듯이 그 하나는 무시무시한 귀신의 일종으로서의 야차이며 다른 하나 온화하고 아름다운 풍요의 신으로서의 모습인데, 후자가 전자보다 훨신 역사가 깊다. 그리고 야차는 북방 산악 지대에 거주하던 재보(財寶)의 신(神), 쿠베라(Kuvera)의 부하로서 나찰(羅刹)과 더불어 여러 신과 재보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기고 하는데, 여기서도 온화한 모습과 흉칙한 모습, 두 가지 얼굴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온화한 모습이 야차의 본래 얼굴이고 나중에 흉칙한 형태로 변한 것일까. 그러면서 두 얼굴이 삶의 현장에서 혼재되면서 혹은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 보여진 것인가?
귀신으로서의 야차
야차의 산스크리트 명은 약사(Yaksa)인데, 야차(夜叉), 약차(藥叉), 열차(悅叉)로 다양하게 음역되었다. 흉악한 모습을 한 귀신으로서의 야차는 사람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기를 좋아하며, 질풍처럼 민첩하게 달리고 폭악한 진무(振舞)를 춘다. 그래서 그를 일러 첩질귀(捷疾鬼), 경첩(輕捷), 용건(勇建), 폭악(暴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그렇다면 그는 원래 아수라의 무리에 속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이도 있다.
이 야차의 수효는 무지무지 많아서 수천명에 달하지만, 8대 야차 대왕이 그 대표격이다. 더불어 거주 지역에 따라 이들 야차는 지상에 사는 지야차(地夜叉), 공중에서 사는 공야차(空夜叉), 지상과 공중의 중간 지점에 거주하는 천야차(天夜叉)로 분리되며 각자의 능력이나 환락의 강도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누어진다. 지기도 한다.
귀신으로서의 무시무시한 야차의 모습은 인도 2대 서사시 중에 하나인 『마하바라타』의 재미난 이야기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내용인즉슨 이렇다.
바라타의 용사 '유디슈티라'는 적과의 싸움에서 패해 처자를 데리고 숲속에서 곤궁하고 고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갈증이 타 오르자 4명의 아우들에게 물을 떠다 줄 것을 요청했다. 첫째 아우가 물을 뜨러갔지만, 몇 시간이 흘러도 종종 무소식이었다. 그래서 둘째, 셋째, 넷째 아우들이 차례대로 궁금해 하면서 물을 뜨러 갔는데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마저도 종적이 묘연했다.
사실 아우들은 물맑고 아름다운 호수에 다다르기는 했지만 물에 손을 대려 한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이유인즉 그들이 물을 뜨려 했을 때, 어디선지 '이제부터 나의 질문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물을 마시지 못하리라'라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우들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 물에 손을 대자마자 물 속으로 끌려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이제는 유디슈트라 자신이 아우들을 찾아나섰다. 호수에 당도했지만, 아우들이 거기 있을리는 만무했다.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 틀림없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꺼야. 누군가에 살해되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며 물가로 다가가자 어디선지 모르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백로요. 이제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면, 그대는 물에 손을 댈 수 없오. 그대의 아우들은 나의 질문에 대답을 못해 죽임을 당했소. 당신도 역시 예외는 아니오'
'새가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당신은 누구냐'
유디슈트라가 이렇게 외치자 그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야차다. 새가 아니다.'
유디슈트라가 섬짓 놀라며 물가로부터 물러서자 야차는 감추었던 모습을 불가사의하게 드러냈다.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며, 키 또한 엄청나게 크고 그 몸은 불타는 태양처럼 반짝이면서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조그만 산처럼 거대했다. 그 야차가 뇌성 같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자 유디슈트라는 슬기롭게 답해 목숨을 구했을 뿐더러 아우들 역시 산채로 돌려받았다.
이 이야기 속에서 야차는 물가 근처 가까이서 갑자기 출현한 귀신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약사(Yaksa)의 산스크리트 의미는 '근사하게 나타나다', '불가사의한 출현'이란다. 그리고 그의 신화적 기원을 볼 것 같으면, '물을 숭배하는 자'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 흉칙한 야차는 물과 관련이 깊은 자로서 갑작스럽게 나타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귀신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야차와 비슷한 인물이 나찰이다. 그 또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귀(食人鬼)로서 공중 속을 아주 빨리 날아 다니기에 속질귀(速疾鬼)라 불렸기 때문이다. 붉은 눈을 반짝이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는데 그 속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내 비치는 형상이다.
풍요의 신으로서의 야차
무시무시한 야차의 모습과는 달리 그가 풍요를 관장하는 온화한 신으로 묘사되고 있는 경우를 살펴보자. 인도 민간 신앙에서 이 야차가 나무의 신, 산의 신, 토지의 신 등으로 섬겨져 인간들에게 풍요와 결실, 부귀와 재보를 가져다 주는 신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인도의 문화 유적에 드러나 있는 그 형상을 떠올려 보겠다. 남성상과 여성 두 모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남성상은 약사라 함에 비해서 하고 그 배우자인 여성상은 약쉬(Yaksi)라 한다. 그 약시를 약사의 여인이라는 뜻에서 야차녀(夜叉女)라 한역하고 있다.
남성상인 약사의 모습은 이렇다. 상반신은 나체로 가슴과 허리에 띠를 두르고 있으며, 엷은 옷으로 하반신을 감싼 채 똑바로 서 있다. 손은 가슴에 모아 합장하거나 재보를 쥐고 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여성상 약시는 풍요를 상징하듯 풍만한 가슴과 허리, 엉덩이를 노출한 채 여러 가지 장신구로 몸을 치장하고 있으며 몸은 비슴듬히 기울여 손으로 과일 나무를 잡고 있는 어찌보면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약쉬는 아름답고 우아할 뿐더러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은덕을 베풀며 다산(多産)을 약속하기에 지모신(地母神)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던 듯싶다. 즉 어떤 약쉬상은 한쪽 발로 나무 밑둥을 부드럽게 감아 쥔 모습이 있는데, 이는 모성적 에너지로서 자연물에 생명을 잉태시키는 상징적 표현이다. 여기서 약쉬는 나무의 신부일 뿐만 아니라 나무의 수액, 곧 생명수를 상징한다.
마야부인이 룸비니 동산에서 싯타르타 태자를 출산하는 광경을 표현한 조각품에서도 이와 유사한 인물상이 보인다. 거기서 마야부인은 손으로 나무가지를 부여잡고 비슴듬히 나무 곁에 서 있다. 이것은 출산의 신으로 약쉬의 모습이 싯타르타 태자를 출산하는 마야부인상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야차와 그 반려자가 언제부터 흉악한 귀신의 모습을 하게 되었까. 아마도 힌두교의 밀교적 영향이거나 주변 여건에 따른 환경의 변화가 거기에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티벳의 관음보살상을 볼 것 같으면 무시무시할 뿐더러 귀신처럼 흉칙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티벳처럼 자연 조건이 거칠고 열악한 환경에서 삿된 무리를 물리치려다보니 그렇게 무시무시한 형상을 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근대 인도에서는 출산 때문에 죽거나 물에 빠저 죽은 여성의 혼을 약시로 보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렇게 한을 풀고 죽은 원혼의 이미지가 무시무시한 야차의 형상으로 나타났으리라고 추측해 본다.
불교 문화 속의 야차
야차는 불교권으로 들어와서 팔부중의 한 무리로서 역할을 담당하는데,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중 탑을 보호하는 데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인도의 불탑에 이 야차 상이 많이 조각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 불탑 보호의 역할은 푸샤미트라가 불탑을 파괴하려 하자 야차의 무리들이 나타나 그 일당들을 물리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아쇼카 왕의 손자 프샤미트라가 불교를 박해할 당시 그 왕이 석가모니불의 치아를 모신 불치탑(佛齒塔)을 파괴하려고 위협을 가하자 탑을 지키던 야차는 다른 야차를 끌어대어 왕과 그의 네 군단을 쳐 부수었던 것이다. 이렇게 야차는 법난으로부터 불교를 수호하는데 앞장서기에 아수라, 용 등과 더불어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 자리잡는다.
더불어 이 야차는 정법의 수호신으로서 여러 경전에 그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약사여래의 권속으로서 12야차 대왕(12신장)이 있으며, 그것의 발전된 형태가 『대반야경』을 수호하는 대반야 16선신이다. 게다가 북방을 지키는 재보의 신 쿠베라가 불교의 사천왕 중 북방 비사문천(毘沙門天)으로 들어오면서 그 비사문천의 부하로서 불법을 훼방하는 악귀를 막아내는 데서도 야차의 호법적 특징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쿠베라는 야차의 대장이라고 해서 그 역시 야차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설도 있는데, 금강역사(金綱力士) 또한 야차류의 신이었다.
불경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무시무시하게 그려 내고 있다. '사자나 코끼리, 호랑이, 사슴, 말, 소, 낙타, 양 등의 형상을 하고 있거나 큰 머리에 마른 몸, 하나의 머리에 두 얼굴, 세 얼굴, 네 얼굴을 하고 있다. 거친 털이 바짝 솟아나 있는 모습이 마치 사자의 털과 같다. 혹은 두 개의 머리, 혹은 가위 머리에 한 개의 눈을 지닌 채 톱같이 날카로운 길다란 송곳니가 거친 입술 사이로 삐져나와 있고, 두 겹의 귀를 늘어트리며, 목덜미를 들먹이는 등 이상한 형태로 세상에 공포를 준다. 방패, 칼, 창, 철퇴, 몽둥이 등을 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공포를 주는데, 변화무쌍하며 힘 또한 무지하게 세서 땅을 움직일 정도' 라고 『천길의신주경(天吉義神呪經)』에는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에 따르려 했음인지 우리 문화 속에 모습을 들어내고 있는 야차상은 인도의 약차나 약시처럼 온화한 얼굴은 간데 업고 하나같이 험악하다. 12신장으로 얼굴을 내미는 12야차 대장도 여기서 묘사되어 있는 대로 호랑이 , 말, 양 등의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들고 있는 지물도 방망이나 칼 등이다.
팔부중에 끼여 탑신부에 부조되어 있는 야차상은 보통 양손을 가슴에 대고 새의 부리에 보관을 쓰거나(숭복사지 3층석탑의 팔부중), 머리 위에 불꽃 무늬를 하고 입에 염주를 문 모습을 하고 있거나(석굴암 팔부중,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의 팔부중), 머리 위에 물고기르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진전사지 3층석탑 8부중).
첫댓글 나무관세음보살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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