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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로 보는 부여(夫余) [제3편(4-4), 부여(夫余) 篇]
[후한서(後漢書)로 본 ‘高駒驪, 百濟, 新羅, 倭’ 땅(疆域)은, 반도(半島), 열도(列島)가 아니다]
2025년 12월 28일
○ 조선왕조(朝鮮王朝) 일원(一員)이었던 「고구려(高駒驪)」는, 옛 오제(五帝) 때의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아들(子)이다.】의 “고신(高辛)”씨(氏)를 이어받은, “고(高)”를 성씨(姓氏)로 했다고 전(傳)해지는 ‘직계(直系) 후손(後孫)’이다.
그래서 「주무왕(周武王)이 ‘상(商)’【은(殷)나라 :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출토(出土)되어 ‘동이(東夷)=동국(東國)’의 봉건왕조(封建王朝)로, 그 존재(存在)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확인(確認)되었다】을 멸(滅)하니, “당시(當時)의 구려(句麗)【구려(句驪)=구려(駒驪)】와 부여(夫余), 한(馯), 맥(貊)” 등이 길이 통(通)하게 되자 조회(朝會)했다」라고 ‘공안국(孔安國)’은, 상서전(尙書傳)에 기록(記錄)한 것이고,
주무왕(周武王), 그 이전(以前)의 상(商)【은(殷)나라】때도 있었다는 것이고, 그 이전(以前)의 하(夏)나라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려(句麗)【구려(句驪)=구려(駒驪)】는,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의 직계(直系)”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구려(句麗) 곧 고구려(高駒驪)”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라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한글 해설서(解說書)에서 나오는 주장(主張)」으로, 「일제(日帝)에 협력(協力), 부역(附逆)한 학자(學者)로부터 나온 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에 의한 것이다」
「옛 고전(古典) 원전(原典)【소위(所謂) 정사(正史)라고 밀하고 있는 사서(史書)】의 원문(原文)에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라고 기록(記錄)하고 있을까?
「무슨 얼어 죽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사이비(似而非) 학자(學者)들의 사이비 역사해설(似而非 歷史解說)이다.」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일제(日帝)에 협력(協力)하고 부역(附逆)한 학자(學者)로부터 나온 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 주장(主張)」을 정사(正史)라고 일컫는 사서(史書) 기록(記錄)을 통해 하나하나 검증(檢證)하고, 고증(考證)하여, 그 실체(實體)를, 그 진면목(眞面目)을 확실(確實)하게 밝혀보자.
➥ 후한서(後漢書) : 전회(前回)에서 살펴본, “북사(北史)와 위지(魏志)”의 내용(內容)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으로, 모두의 기록은 “반도(半島) 땅과는 ‘일 푼’의 관계(關係)도 없다.”라고 전(傳)한다. ‘후한서(後漢書)’는 남조(南朝) 유송(劉宋) 시대의 “범엽(范曄 : 398年∼445年)”에 의하여 저술(著述)된 것으로 ‘195년간(年間)의 후한(後漢)의 역사서(歷史書)’이다.
【後漢書是記載東漢歷史的紀傳體史書,由南朝劉宋時的范曄[398年-445年]所著。本書分十紀、八十列傳和八志[八志自司馬彪《續漢書》補入],記載了從光武帝稱帝(25年)起至漢獻帝禪讓(220年)的195年歷史。《後漢書》與《史記》、《漢書》和《三國志》合稱「前四史」。魏晉南北朝時稱《史記》、《漢書》、《東觀漢記》為「三史」。唐宋的「三史」以本書取代《東觀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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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부여(夫餘)」에 대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아래의 것이 “대표적(代表的)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學者)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차이(差異)로, “똑같다”라고 봐도 무방(無妨)하다. 즉(卽),
➤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부여(夫餘)」: 《부여(夫餘) : 기원전 1세기경부터 300년까지 현재의 북만주(北滿洲) 농안(農安)ㆍ장춘(長春) 일대에 웅거하였던 우리나라 고대 국가의 하나이다. 그 강역은 동쪽으로는 읍루, 남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선비ㆍ오환과 인접하였다. 일찍부터 농경 생활을 하였으며, 중국의 철기 문명을 수입하고 은력(殷曆)과 복골(卜骨)을 사용하였다. 중국 정사(正史)에 보이는 부여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와 《후한서》가 있으며, 이밖에 《진서(晉書)》ㆍ《통전(通典)》 등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여의 멸망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없으며, 대체로 4세기경부터 고구려의 판도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出處 : 海東繹史, 夫餘, [주-D001],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49~151쪽】: 고전번역원 DB, 해동역사 ‘부여’편, 인용(引用).》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그렇다면 : 이와 같은 주장(主張)이나 논리(論理)의 논거(論據)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또 ➤➤➤ 「주무왕(周武王)이 상(商)【은(殷)나라 :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출토(出土)되어 ‘동이(東夷)=동국(東國)’의 봉건왕조(封建王朝)로, 그 존재(存在)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확인(確認)되었다】을 멸(滅)하니, “당시(當時)의 구려(句麗)【구려(句驪)=구려(駒驪)】와 부여(夫余), 한(馯), 맥(貊)” 등이 길이 통(通)하게 되자 조회(朝會)했다」라고 공안국(孔安國)은, 상서전(尙書傳)에 기록(記錄)한 것은, 뭐냐? 하는 것인데… …“공안국(孔安國)”이라는 옛 학자(學者)는, ‘서한(西漢)=전한(前漢)’ 때의 존경(尊敬)받았던 선유(先儒)라고 하였는데,
【孔安國(?∼?),字子國,孔子家族成員,西漢魯國曲阜人,習通經學與董仲舒齊名。學識淵博,《史記》作者司馬遷研究《堯典》、《禹貢》等篇時也曾請教於他,後世尊其為先儒。卒年約六十】
➤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계(界)의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 학자(學者)」들이 「공안국(孔安國)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기원전(紀元前, BC) 12세기(世紀)에도 존재(存在)하고 있었다』라는 “당시(當時)의 구려(句麗)【구려(句驪)=구려(駒驪)】와 부여(夫余), 한(馯), 맥(貊)” 등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사라졌나? “1 천여(千餘) 년(年)”이 지난 뒤 홀연히 “1 만여(萬餘) 리(里)”를 건너뛰어 반도(半島) 땅 북방지대(北方地帶)에 회귀(回歸)했단 말인가?
누가 보아도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아닌 박장대소(拍掌大笑)가 터지는 ‘코믹’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이게 한계(限界)이니, 더 이상(以上)의 역사연구(歷史硏究)는 있을 수가 없다. 더 연구(硏究)해서 무엇에 쓰려하는가?
➥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 및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의 향수(鄕愁)를 위해서… …일제(日帝)와 한통속이 되어 반도(半島)를 팔아먹고, 혈맹(血盟)이라는 “세계(世界) 경찰국가(警察國家)”라고 자칭(自稱)하는 패자(霸者) 양키(Yankee)와 서세(西勢)를 위한 것인가?」
침을 질질 흘리며,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 논리(論理)를 주창(主唱)하는 여러분들에게 물어보자. 도대체 「“方 1 千里”… …“方 2 千里”… …“方 4 千里”… …“方 6 千里”… …“輻 員 之 廣 幾 於 萬 里”… …“數 萬 里”」… …라고 ‘고전(古典)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만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은 이러한 수치(數値)에 대해, 또 그 영토(領土)의 면적(面積)을 산술(算術) 해보았는가? 문과(文科) 쪽이라서 산술(算術)에 약(弱)하시다면 : 필자(筆者)가 대신(代身)해 보겠다. 곧… …,
➊ 방(方) ‘1 천리(千里)’는 대략(大略) : 160,000㎢로 남한(南韓)보다 큰 면적(面積)이며, ‘옛 옥저(沃沮) 땅’의 크기이며,
➋ 방(方) ‘2 천리(千里)’는 대략(大略) : 640,000㎢로 한반도(韓半島) ‘3배(倍)’에 이르며, ‘옛 부여(夫餘) 땅’의 크기이며,
➌ 방(方) ‘4 천리(千里)’는 대략(大略) : 2,560,000㎢로 한반도(韓半島) ‘12배(倍)’ 정도(程度)가 되는데, ‘삼한(三韓) 곧 하삼도(下三道 : ’忠淸, 全羅, 慶尙‘의 三道)의 땅’ 크기이며,
➍ 방(方) ‘6 천리(千里)’는 대략(大略) : 5,760,000㎢로 ‘중원대륙(中原大陸)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하는데, 이 숫자는 수(隋)나라 때의 ‘고구려(高駒驪)의 영토(領土)’ 크기이며,
➎ ‘1 만리(萬里)’는, 대략(大略) : 16,000,000㎢로 ‘아세아(亞細亞)+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를 모두 포함(包含)한 광대(廣大)한 면적(面積)인데, ‘동사(東史)에서 동국(東國)의 크기’를 말할 때 자주 기록(記錄)된 숫자이고,
➏ ‘몇 만리(萬里) 또는 수만리(數萬里)’ 는, ‘아프리카(Africa) 중북부(中北部)+구라파(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아세아(亞細亞) 전부(全部)’를 일컫는 말인데, 바로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서문(序文)’등 “여러 곳에서 강토(疆土) 넓이(幅員)”를 말하는 것이다.
㈠ 「高麗史 地理志」 ‘서문(序文)’에서 “고려(高麗) 영토(領土)” 크기를 말하면서 : 「輻 員 之 廣 幾 於 萬 里 : 우리 해동(海東)은 삼면(三面)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陸地)로 이어져 있는데, 땅의 넓이(幅員)가 커(廣) ➤ ‘몇(幾) 만리(萬里)’이다.」라고 하였는데… …,
그러함에도…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는, 이걸 바꿔치기해 : 「惟我海東三面阻海 : 우리 해동(海東)은 삼면(三面)이 바다에 막혀 있고, 一隅連陸 :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 輻員之廣幾於萬里 : 그 폭과 둘레는 거의 10,000리(里)나 된다.」라고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이건 고의적(故意的)이다.
누굴 위해… …나라(國家), 민족(民族)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自身)이 속(屬)해 있는 식민사학계(植民史學界), 반도사학(半島史學)을 위한 것이다. 당연(當然)히 비난(非難), 지탄(指彈)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 바로 「고려(高麗)의 ‘몇 만리(萬里)’ 땅」이 하루아침에 폭과 둘레(周)【周 : 물건(物件)의 둘레를 말함】로 바뀌면서 한반도(韓半島)의 “동면(東面)+남면(南面)+서면(西面)의 해안선(海岸線) 길이+북면(北面) 길이”를 합하여 ‘1’ 만리(萬里)가 되어 「한반도(韓半島) 땅으로 바꿔치기 당하게 되는 것이다.」
또 ‘번역본(飜譯本)’을 보면 : “넓다, 크다”라는 뜻의 “광(廣)” 자(字)는 “아예 빼먹어버렸다.” 곧 「폭원(幅員)이 넓어 몇(幾) 만리(萬里)나 된다」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럼 이것은 어떤가?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 논자(論者)들에게 물어보자… …비슷한 시기(時期)의 아래 기록(記錄)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서문(序文)에서도, “➨ 당시(當時) 동국(東國)의 강역(疆域)이 ‘수만리(數萬里)’에 달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例)”를 보자.
㈡ 「新增東國輿地勝覽」, 卷首, 進東國輿地勝覽箋[동국여지승람을 바치는 전(箋)] : 《久疲精於數四載,方斷手於若干篇。➥ 數萬里疆域之分,可披圖而瞭心上;千百年興廢之跡,一開卷而在目中。儻於燕閑,時賜乙覽。地旣莫非有,念祖宗開拓之艱難;命惟不于常,庶子孫持守而勤恤。臣思愼等無任激切屛營之至,謹奉進隨箋以聞。: 오랫동안 정력을 써서 4년 만에 바야흐로 몇 편으로 손을 떼었나이다. 「➥ 수만(數萬) 리(里) 강역(疆域)의 구분은」 지도를 펼치면 마음에 환하고, 천백 년 흥폐(興廢)의 자취는 한번 책을 열면 눈에 들어옵니다. 혹 한가로울 때에 읽어주소서. 이미 온 국토가 소유가 아닌 것이 없으니 조종(祖宗)의 개척하기 어려움을 생각하시고, 천명(天命)은 일정한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자손이 지키고 백성을 부지런히 구휼하도록 하소서. 신(臣) 사신(思愼) 등은 감격하고 간설하와 어쩔 줄 모르면서 삼가 받들어 이 책을 바치오며, 전(箋)을 붙여 아뢰나이다. 成化十七年四月十九日,推忠定難翊戴ㆍ純誠明亮佐理功臣、輔國崇祿大夫、宣城府院君、兼領經筵事臣盧思愼等謹上箋。: 성화(成化) 17년 4월 19일에 추충정난익대, 순성명량좌리공신, 보국숭록대부, 선성부원군, 겸 영경연사 신 노사신 등은 삼가 전(箋)을 올리나이다.》라고 하였다.
➥➥➥ 「成化 十七年」은, 「AD 1,481年」이다. 고려사(高麗史, AD 1,451年) 편찬(編纂)은 AD 1,451년(年)이라고 하니, 곧 위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이후(以後) 30년 뒤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수만리(數萬里)」와 고려사(高麗史)에서 말하는「몇 만리(萬里)」, 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말하는 「수만리(數萬里)」의 차이(差異)는 뭐냐 하는 것이다.
➠➠➠ 답(答)은, 공(功)은, 주류사학(主流史學)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학계(史學界)에 던져져 있다. 추측(推測)하건대 「“100”% “오류(誤謬)이며, 과장(誇張)된 표현(表現)” 등으로 묵살(默殺)할 것은, 보지 않아도 훤하다.」 이렇게 “개기는 식(式)”으로 100년(年)을 이어온 한국(韓國)의 사학계(史學界)다. 이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나?
㈢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제31장 : 《爰有蹇馬, 雖則屢蹶, 三十年皇, 悍謀何濟 : 저는 말이 몇 번을 넘어진들 【唐 太宗은】 삼십(三十) 년의 임금(皇)이시니 모진 꾀를 이루겠습니까만? 爰有石壁, 間不容尺, ➠ 數萬里主, 縣崖其跌. : 돌 절벽이, 한 자 사이인들, 【太祖 고황제(高皇帝)는】수만리(數萬里) 강토(疆土)의 임금이시니, 백 길이나 되는 허공 절벽에 내려지겠습니까》하였는데… ….
‘후구(後句)’에서 이르기를 : 《數 萬 里 主 : 수만리(數萬里)의 주(主)【임금】이시다》라고 하였다. 이건 누구를 지칭(指稱)하는 것일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인공(主人公)인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가 수만리(數萬里) 강토의 임금이셨다」라는 것을 칭송(稱訟)하고 있다.
➥➥➥ 《여기서 필자(筆者)가 강조(强調)하며, 말하고 싶은 것은 :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완전(完全)한 것이 없고, 또 국가기관(國家機關), 학교(學校) 등등에 보관(保管)되어 있는 것 역시(亦是) 똑같은 것들이고, 이 모두가 식민지(植民地) 때 일제(日帝)【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 바로 오늘날의 ‘서울대학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다】에 의해 첨삭(添削) 과정(過程)을 거쳐 재편찬(再編纂)된 것들로, 솔직(率直)하게 말하면 : “일제(日帝)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해도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닐 정도이다. 따라서 후세(後世)들에게 남겨질 결정적(決定的)인 기록(記錄)에 대해서는 “첨삭(添削)”을 거쳤을 것은, “100”% 일 것이다.
일제(日帝)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편찬(編纂)된 그 내용(內容)을 가지고 가불가(可不可)를 따진다는 것도 그렇고, 이것을 가지고 ‘보물(寶物)로 지정(指定)’하고… …소중(所重)한 문화재산(文化財産) 취급(取扱)하는 것도 비웃음당하기 ‘십상팔구(十常八九)’이다】
㈣ 「예종실록(睿宗實錄) 1년 기축(己丑)(1,469) 6월 29일(신사)」 : 《工曹判書梁誠之上書曰 : 공조 판서(工曹判書) 양성지(梁誠之)의 상소(上疏)에서 이르기를 : 議長墻。 臣竊惟本國, 表裏山河, 幅員幾於萬里, 戶數百萬, 兵一百萬 : 신(臣)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➊ 넓이가 몇 만리(萬里)이고,」 「➋ 호(數)가 수백만(數百萬) 호(戶)이고」, 「➌ 병사(兵士)가 일백(一百) 만(萬)이다」.》라고 하였는데,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어디 감히 주군(主君)에게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었겠는가?」 당시(當時) 조선(朝鮮) 곧 ‘자국(自國)의 실정(實情)’을 가감(加減) 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에서 눈여겨 볼만한 내용(內容)인데… …‘➊’을 보면 : 특이(特異)하게도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번역(飜譯)한 분께서는 「幅員幾於萬里 : 넓이가 몇 만리(萬里)」라고 하였다. 이게 올바른 번역(飜譯)이고, 정석(定石)이다.
의도(意圖)가 무엇이었든 : “몇 만리(萬里)”라는 것은, “한반도(韓半島)와는 관계(關係)가 없다”라는 뜻이 된다. ‘강토(疆土)=영토(領土)’가 “몇 만리(萬里)”라는 구절(句節)로 표현(表現)할 수 있는 곳은 : 「중원대륙(中原大陸)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곳이다.」
◈ 그러나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서문(序文)의 번역본(飜譯本)」에서는「幅員幾於萬里 : 그 폭과 둘레는 거의 10,000리(里)나 된다.」라고 하였으니… …「처음부터 고려사(高麗史)를 “한반도(韓半島) 땅에 가둬놓기로 작정(作定)한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이런 일은 벌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➋+➌’ 「戶 數 百 萬 : 호수(戶數)가 백만(百萬)」이라고 하였지만 : 이는 잘못된 것으로, 「호(戶)는 ‘수백만(數百萬)’」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이때가 “AD 1,469년(年)”이다. 수백(數百)이란 ‘백(百)의 여러 배(倍)’를 뜻하는 말이니, “수백만(數百萬)”이란 최소(最小)한 「3∼4백만(百萬)」을 뜻한다고 보는데,
➥ 「3∼4백만(百萬)×5.8구(口)=17,400,000∼23,200,000구(口)」가 되어야 하고, 이 구(口)가 400년(年)이 지난 뒤인 ‘19’ 세기(世紀)에는? 예측(豫測)하기 어렵지만 “몇억(億) 구(口)”이상(以上)은 되지 않았을까! 【2,000만이 1억(億)이 되는데, 100년이 걸렸다면? 400년 뒤에는 계산(計算)상으로는 ‘몇’억(億) 이상(以上)은 되지 않을까?】
또 여기에 ‘➌’을 보면 :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군사(軍士)가 “1백만(百萬)”」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반도조선(半島朝鮮)은 없었다』라는 뜻이다.
➥➥➥ 「이 모두는 중원대륙(中原大陸)에 토착(土着)하고 있던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한반도(韓半島) 땅에 몰아넣기 위해 만들어진 조작(造作)된 이야기」라는 것을 스스로 밝혀주고 있는 증거(證據)라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필자(筆者)가 첨언(添言)한다면 :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그들 스스로 발간(發刊)한 정기간행물(定期刊行物)에서 말하기를 : 「백제(百濟) 망시(亡時)의 호구(戶口)가 ‘760,000 여호(餘戶)’라는 것에 대해 믿을 수 없다」라고 스스로 기록(記錄)해 놓고 있는데, 이는 「일제(日帝) 스스로 “반도조선(半島朝鮮) 즉(卽), 반도백제(半島百濟)는 없었다.”」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무슨 얼어 죽을 무녕왕릉(武寧王陵)!
◈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사라져야 한다. 언제까지 ‘일제(日帝) 귀신(鬼神)’들의 말장난에 놀아날 건가? 말도 되지 않는 헛빨짓과 헛소리로 코믹연기를 할 텐가?」
㈤ 강토(疆土) “예(例)”를 보면 : 「일만(一萬) 리(里)」
… 동명집(東溟集) 제8권 / 七言古詩 61수 : 送李子善 基祚 出按嶺南〔이자선, 기조가 영남을 안찰하러 가는 것을 전송하다〕 : 「君不見長白山連一萬里, 走勢南來鳥嶺起 : 그댄 보지 못하였나 장백산(長白山)이 만리(萬里) 뻗쳐, 남쪽으로 내달려 와 조령 고개 일으킨걸」
➥ 「장백산(長白山)이 만리(萬里)에 뻗쳤다는 것도, 폭과 둘레(周)를 합한 것인가?」
… 백호전서(白湖全書) 제2권 / 시(詩) : 閱文山集杜詩感懷步韻[오언절구(五言絶句) 문천상이 쓴 집두시를 보다가 감회가 일어 그 운대로 읊다] : 「一萬里山河, 續箕聖舊業 : 일만(一萬) 리(里) 뻗은 산하에, 기자의 유업 이어오는 곳」
➥「일만(一萬) 리(里) 산하(山河) 또한 폭과 둘레(周)를 합한 것인가?」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20권 / 雅亭遺稿十二 [응지각체(應旨各體)] [성시전도(城市全圖) 칠언 고시(古詩) 1백운(韻)] : 「金尺山河一萬里, 漢京翼翼黃圖裏 : 금척의 산하 일만(一萬) 리(里)가, 한양 서울 황도 속에 번성하네」라고 하였음을 보면 :
➥ 「금척(金尺) 산하(山河) 일만(一萬) 리(里)도 폭과 둘레(周)를 합한 것인가?」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조선(朝鮮)”의 강역(疆域)은, “수만리(數萬里) 또는 일만(一萬) 리(里)에 뻗쳐 있었다”」라는 것에 대해 : 「‘반도(半島) 조선(朝鮮)’의 실체(實體)는 없다.」라는 것인데… … ➠ “반도(半島) 사학계(史學界)가 답(答)할 차례다”
◈ 『‘수만리(數萬里)’ 또는 ‘몇 만리(萬里)’ 또는 ‘일만(一萬) 리(里)’』는, ‘강토(疆土)=강역(疆域)’의 크기를 말하는 것으로 사용(使用)되거나 기록(記錄)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토(領土)를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을 말하는 것일까? 턱없는 소리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반도(半島 : 韓半島) 땅은, 너무 좁고 협소(狹小)하여 위에서 말하는 동국(東國)의 영토(領土)를 놓을 자리가 없다.」
➤ 이렇게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된 것을 번역(飜譯)하고, 해설(解說)하면서… … “글자를 빼먹고, 또 그 뜻을 자신(自身)들의 임의(任意)대로 바꾸는 것은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 것이다.” ➥ 이러한 실정(實情)이 작금(昨今 : 요즈음)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학계(史學界) 현실(現實)이다. 이건 팩트(Fact)다.
【《폭원(幅員) : 땅이나 지역(地域) 넓이. 【맘대로 “둘레를 뜻한다”라는 건가?】 광(廣) : 넓다. 평면(平面)이나 넓은 물체(物體)의 가로로 건너지른 거리(距離). 기(幾) : 기미, 거의, 얼마, 어느 정도》】
○ 이제 오늘의 주제(主題)인 “후한서(後漢書) 부여(夫余)” 편(篇)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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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夫 余 國」
1. [後漢書 夫余國 原典 原文 4-1] : 《夫余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 부여국(夫余國)은, 현토(玄菟) 북(北)쪽 천리(千里)에 있다. 남(南)〉쪽은 고구려(高句驪), 동(東)쪽은 읍루(挹婁), 서(西)쪽은 선비(鮮卑)와 연이어져 있고, 북(北)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땅은 사방 2 천리(千里)인데, 본래 예(濊) 땅이다.》라고 하였다.
➥ 「옛 부여국(夫余國)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알 수 있는 구절(句節)이며, “첫째는 현토(玄菟), 두 번째는 약수(弱水)이며, 그 영토(領土)의 넓이는 사방(四方) ‘2’ 천리(千里)였다”」라는 것이 중요(重要)한 대목(臺木)이다.
(1) 「현토(玄菟) 북(北)쪽 ‘천리(千里)’에 있다」 : 「부여국(夫余國)」의 위치(位置)를 찾을 수 있는 단서(端緖)는, ➥「현토(玄菟)」다. 「‘현토(玄菟)’는, 곧 현토군(玄菟郡)」을 말하는 것인데,
➊ 「동서(同書)【후한서(後漢書)】‘동옥저(東沃沮)’」편(篇)의 「개마(蓋馬)」에 대한 「당(唐) 이현(李賢 : 장회태자(章懷太子)」의 주석(註釋)에서 찾을 수 있다.
즉(卽), 「注[一]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即王險城也 : 개마(蓋馬),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군(玄菟郡)에 속했다. 그 산【蓋馬大山】은 지금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라고 하였으니, 「부여(夫余)는,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서 찾아야 한다.」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 조건(條件)이다.
이 하나의 대목(臺木) 곧 ‘당(唐) 장회태자(章懷太子)의 후한서(後漢書) 주석(註釋)’으로 인하여 “현토군(玄菟郡)”은, 평양(平壤)의 북방지대(北方地帶)가 아닌 “평양(平壤)의 서방(西方)에서 찾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즉(卽) 「현토군(玄菟郡) 곧 현토(玄菟)는, 오늘날의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없었다」라는 확답(確答)이다.
또 「평양(平壤), 왕검성(王儉城)은,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 개마대산(蓋馬大山) 또한 반도(半島) 장백산(長白山 : 白頭山)이 아니다」라는 것을 고증(考證)하고 있으며, 이는 옛 사료(史料)가 이를 당당(堂堂)하게 확인(確認)해주고 있다. 아래의 고증본(考證本)을 보자.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개마대산(蓋馬大山)」 조(條)에서 말하기를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평양(平壤) 서(西)쪽의 그 동(東)쪽 곧 옛 동옥저(東沃沮)의 땅이다. : 蓋馬大山, 在平壤城西其東即古東沃沮國地」라고 하였다.
이왕지사(已往之事) 말 나온 김에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및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서 말하는 조선국(朝鮮國)의 영토(領土)에 대해 ‘꼭 한 말씀’ 드리고 싶다.
㈠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조선국(朝鮮國)’ 첫 서두(序頭) 글에서 이르기를 : 「조선국(朝鮮國)은 동서(東西) ‘2’ 천리(千里)에, 남북(南北)은 ‘4’ 천리(千里)이다. : 東西二千里南北四千里.」라고 하였다.
㈡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서 이르기를 : 「조선(朝鮮)은, 성경(盛京) 동쪽 1,800리(里)에 있는데, 동서(東西) ‘2’ 천리(千里), 남북(南北) ‘4’ 천리(千里)이다. : 在盛京東一千八百里, 東西距二千里, 南北距四千里.」라고 하였다.
또 여기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는 : “웃기게도 성경(盛京)에서 동(東)쪽으로 1,800리(里) 떨어진 곳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그곳이 어딘가? 오늘날의 만주(滿洲) 땅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허황(虛荒)된 말인가?
이는 곧 「“성경(盛京)”은, 옛 기록(記錄)인 후금(後金), 대청(大淸)에서 말하는 성경(盛京)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이는 「산해경(山海經)과 회남자(淮南子)까지 거슬러 올라는 가는 것인데, 숙신국(肅愼國)은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다」라는 옛 기록과 100% 일치(一致)하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조선국(朝鮮國)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땅에 있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명일통지(明一統志),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리수(里數)를 수치화(數値化)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즉(卽),『‘2’ 천리(千里)는 800㎞요 × ‘4’ 천리(千里)는 1,600㎞다. 면적(面積)은, “1,280,000”㎢에 이르는, 오늘의 “한반도(韓半島)+부속도서(附屬島嶼), 220,000㎢”의 “6”배(倍)에 이르는 큰 땅에 있었다』라는 것인데, 바로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황하(黃河) 유역(流域)으로부터 장강(長江) 유역(流域)까지의 중원(中原) 옛 중국(中國) 요충지(要衝地) 땅에 해당(該當)되는 크기이다.」
즉(卽), 「20세기(世紀) 이전(以前)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라는 것이다. 이때가 『‘AD 1,461년(年)’에 성서(成書)하였다【成書於明英宗天順五年(1461年)四月,共90卷】』라고 하였으니, 조선왕조(朝鮮王朝) ‘세조(世祖) 7년(年)’의 일이다. 이걸 누가 “오(誤)”라고 말할 수 있나?
➋ 또 하나는, 「진서(晉書) 재기(載記)」의 기록(記錄) 서두(序頭)에서 찾을 수 있다. 즉(卽), 「然則燕築造陽之郊, 秦塹臨洮之險, 登天山, 絕地脈, ➨ 苞玄菟, 款黃河, 所以防夷狄之亂中華, 其備豫如此.」속에서 말하고 있는 「현토(玄菟)」로 볼 때,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총령(葱嶺) 및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6,995m)과 천산산맥(天山山脈) 및 하(河)【‘총령(葱嶺)=곤륜(崑崙)’에서 흐른다는 하(河)】가 있는 곳이다.」 【우리 카페(Cafe)에 여러 차례 걸쳐 게재(揭載)되어 있으므로 참조(參照)】이러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➌ 「부여(夫余) 현토(玄菟) 북(北)쪽 ‘1’천리(千里)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천산(天山)과 천산산맥(天山山脈)의 “현토(玄菟)”를 고려(考慮)하면 “1” 천리(千里) 북(北)쪽은… …「자이산호[Zaisan湖=宰桑泊=基台湖]∼발하슈호[Balkhash湖=巴爾喀什湖=異播海]의 북방지대(北方地帶)로 오늘날의 카자흐스탄(Kazakhstan) 카라간다(Karaganda), 아스타나(Astana) 땅이며 그곳의 북(北)쪽에는 이르티시강(Irtysh, R)【액이제사하(額爾濟斯河)】이 흐르는데, 이곳에는 늪과 택(澤)이 많은 곳이다.」
「이곳은 ‘준갈이(準噶爾) 분지(盆地)’의 서(西)쪽 땅으로, 「자이산호[Zaisan湖=宰桑泊=基台湖]∼발하슈호[Balkhash湖=巴爾喀什湖=異播海]의 북방지대(北方地帶)는 대평원(大平原) 지대(地帶)이다.」
➍ ‘전회(前回)에서도 인용(引用)’했듯이 : ➨ 한참 후대(後代)인 명사(明史)에서도 「‘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합밀(哈密)’ 동(東)쪽에는 조선(朝鮮)이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興復哈密國王記:馬文升, 明 : 奏至,上不貴遠物,諫官交章請卻之而回,其餘貢至者亦不及昔年厚賞賚,乃教誘阿黑麻詐稱領夷兵一萬,用雲梯攻肅州城並蹂甘州。➨ 報至,朝野頗驚。➨➨➨ (「朝野頗驚」, 「野」原作「鮮」,據明朱當㴐國朝典故本改) 予以為彼張虛聲以挾我耳,且吐魯番至哈密十數程,中經黑風川,俱無水草,哈密至苦峪又數程,亦無水草,入貢昔往返皆馱水而行。】
➥ 「명(明)나라 초(初) 마문승(馬文升)의 흥복합밀국왕기(興復哈密國王記)」에서 보듯이 “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금산산맥(金山山脈)=알타이산맥(Altai, 山脈)” 동(東)쪽의 땅은, “조선(朝鮮)의 것”이었다고 하였다. 당연(當然)하게도 ‘외적(外敵)의 침입(侵入)’ 상소문(上疏文)을 받은 「조선(朝鮮)은 놀라고 두려워하였다」라는 것이다. “1” 만리(萬里) 땅, 그것도 바다 건너에 있는 “반도(半島) 조선(朝鮮)” 입장(立場)에서야 까짓 서역(西域) 오랑캐의 공격(攻擊)이 있거나 말거나 뭔 상관(相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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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北)쪽에 약수(弱水)가 있다」 라고 하였다.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의 「약수(弱水)」는, 「눈강(嫩江) 또는 흑룡강(黑龍江)이라고 추정(推定)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것으로 그 인식(認識)을 알 수 있다.
중요(重要)한 것은, 당시(當時)의 약수(弱水)가 지금의 어떤 하천(河川)인가 하는 것이지, ‘눈강(嫩江)이나 흑룡강(黑龍江)’이라고 추정(推定)하는 것이 아니다. “흑룡강(黑龍江)”은 “흑수(黑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근세(近世)의 것이다.
➊ 「해국도지(海國圖志) 국지총론(國地總論)에서 이르기를 : 「흑수(黑水)는 북해(北海)로 흐르는 아피하(阿被河)이다 : 黑水當為注北海之阿被河.」라고 하였는데, 「아피하(阿被河)」는, 「이르티시강【이르티시하(河), 오-브 강(江)의 지류】」 곧, 「액이제사하(額爾齊斯河)=액이제사하(厄爾齊斯河)」를 말하는 것이고, 오늘날의「이르티시강【Irtysh,R=이르티시河, 오-브강(江)의 지류(支流)】」을 말하는 것이다. 곧 「흑수(黑水)는 이르티시강(Irtysh,R)」을 말하는 것이다.
《額爾濟斯河【衛拉特語:ᡄᠷᡒᡅᠰ 或 ᡄᠷᡔᡅᠱ;哈薩克語:Ертiс өзені,羅馬化:Ertıs özenı;俄語:река́ Ирты́ш,羅馬化:reká Irtýsh】,古稱曳咥河[예질河]、也兒石河、也兒的石河、也里的石河、葉兒的石河、也里的失河,清代也稱得益河,主源發源於阿爾泰山東南部的新疆富蘊縣,是中國唯一的北冰洋水系河流。額爾濟斯河上游有2大河源,分別是庫依爾特河和喀依爾特河。庫依爾特河發源於新疆富蘊縣的托依克達熱斯、沃依塔斯騰達熱斯和札班達拉斯。喀依爾特河發源於新疆富蘊縣阿斯道恰。庫依爾特河和喀依爾特河在可可托海水庫匯合後成為額爾濟斯河,一路上將喀拉額爾濟斯河、克蘭河、布爾津河、哈巴河、別列則克河、阿拉克別克河等右岸支流匯入後,在中國境內全長593公里,出國境後流入哈薩克齋桑泊,繼續北流進入俄羅斯,最後在漢特-曼西斯克城附近匯入鄂畢河。額爾濟斯河全長4248公里,流域面積164.3萬平方公里。[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額爾濟斯河, 引用]》➥「액이제사하(額爾齊斯河)=액이제사하(厄爾齊斯河)」는, 「아피하(阿被河)」를 말하는 것이고, 오늘날의「이르티슈 하(河), 오-브 강(江)」을 말하는 것이다.
【阿拉湖 / 阿拉科爾湖(哈薩克語:Алакөл,突厥語「花彩」的意思)是一個位於哈薩克斯坦的鹹水湖,為傑特蘇州和阿拜州所管轄。海拔347公尺,面積2,650平方公里。最大深度54公尺。地質上是一個斷層湖,是阿拉山口的延伸。湖西北有薩瑟克爾湖,中間以沼澤相連。主要水源為額敏河。】
【발하슈호(Lake Balkhash) / 巴爾喀什湖(哈薩克語:Балқаш көлі,羅馬化:Balqaş kölı,俄語:о́зеро Балха́ш,羅馬化:ózero Balkhásh),中國唐代稱爲夷播海[1]或得嶷海,是位於中亞東部的一個內流湖,屬於哈薩克共和國的內湖。巴爾喀什湖面積16,996平方公里,是世界上第十三大湖泊,東西長而南北窄,東西長約605公里,南北寬約8至70公里,整個湖被中部的半島分成東西兩個部分,而半島以北的湖峽只寬約3500公尺,略略把湖分成東西兩部分。巴爾喀什湖流域流入七條河流,伊犁河是其中主要的一條,流域內多數河岸帶由其形成。其它河流如卡拉塔爾河則形成地下徑流。伊犁河的河水水主要靠降水(春季的大量雪山融水)補給。就像鹹海一樣,巴爾喀什湖也因為其流入的河流修建了分水水渠,流入的水量減少而漸漸萎縮。[2] / 발하시호(영어: Lake Balkhash, 카자흐어: Балқаш Көлі, 러시아어: Озеро Балхаш)는 카자흐스탄 남부의 호수이다. 발하시 호는 아랄해 다음으로 큰 호수로 카스피해와 아랄 해를 포함하는 분지의 일부이다.】
【자이산호(Zaisan, 湖) / 齋桑泊 :(哈薩克語:Зайсан көлі,羅馬化:Zaisan kölı;俄語:о́зеро Зайса́н,羅馬化:ózero Zaysán),哈薩克斯坦境內東北部一湖泊,位於阿爾泰山西麓,額爾齊斯河流經此湖。該湖面積原為1810平方公里,1959年下游水壩建成後,目前湖面已達到5500平方公里。該湖曾為大清帝國領土,中俄勘分西北界約記簽訂後被割讓與俄羅斯帝國。蘇聯成立後將該湖地區劃歸哈薩克斯坦至今。】
이렇다면 「본시(本是) ‘흑수(黑水)를 약수(弱水)’라고도 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山海經 : 中稱爲黑水,因河水中含有大量腐殖质,水色黝黑而名,其滿語名稱直譯也是黑水」라고 한 것을 보면 : 해국도지(海國圖志)에 말하는 “아피하(阿被河)가 본래(本來)의 흑수(黑水)”였음을 알 수 있다.
➋ 그렇다면 「흑수(黑水)가 약수(弱水)」였을까?
「약수(弱水)」는 고전(古典)에서 찾아보면 : 세 곳에 있는데, 「세 곳 모두 “부여(夫余)”의 위치(位置)를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조건(條件)과 부합(附合)되지 않는다.」
• 첫 번째는, 「액제납하(額濟納河)인 장액하(張掖河)」를 말하는 것인데, 「흑수(黑水)라고 했고, 약수(弱水)라고도 했다.」【額濟納河 (「額濟納」為「亦集乃」的音轉,來自西夏語「𗋽𗰞」,意為「黑水」)】 ➥ 문제(問題)는 「현토(玄菟)와 그 북(北)쪽 천리(千里)라는 조건(條件)이 성립(成立)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 두 번째는,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흐르는 ‘우공(禹貢)의 약수(弱水)’가 있다.
• 세 번째는, 한서(漢書)에서 말하는 서왕모(西王母)와 관계있는 ‘약수(弱水)’가 있다. 즉(卽) 「漢書西王母弱水近日所入之說 : 한서(漢書)에는 서왕모(西王母)의 약수(弱水)는 가까운 곳에 해(太陽)가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 이렇다면 “본시(本是) ‘약수(弱水)는 흑수(黑水)’라고도 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山海經 : 中稱爲黑水,因河水中含有大量腐殖质,水色黝黑而名,其滿語名稱直譯也是黑水 : 하천(河川)의 중류(中流)를 흑수(黑水)라고 했다는 것이고, 하수(河水)의 물속에 많은 분량(分量)의 부식된 흙이 포함(包含)되어있어, 물이 검푸른 검은색의 색깔이어서 흑수(黑水)라고 이름 된 것인데, 그것은 만어(滿語)의 직역(直譯)이다. 흑수(黑水)다.」라고 한 것을 보면 : 해국도지(海國圖志)에 말하는 『아피하(阿被河)가 본래(本來)의 흑수(黑水)였음을 알 수 있다.』
• 또 하나의 힌트는 : 『肅愼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東濱大海。西接寇漫汗。北至弱水。: 숙신씨(肅愼氏)는, 일명(一名) 읍루(挹婁)이다. 불함산(不咸山) 북(北)쪽에 있다. 동(東)쪽은 대해(大海)의 끝이며, 서(西)쪽은 구만한(寇漫汗)과 접(接)해 있으며, 북(北)쪽으로는 약수(弱水)까지에 이른다』라는 기록(記錄)인데, 「숙신국(肅愼國)=숙신씨(肅愼氏)」기록(記錄)에 빠지지 않고 등장(登場)하는 구절(句節)이다.
숙신씨(肅愼氏)는, 숙신국(肅愼國)을 말하는 것으로, 『산해경(山海經)과 회남자(淮南子)에서는 : 서(西)쪽과 북(北)쪽 사이에 있다』라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 그 주석(註釋) 및 회남자(淮南子)에 기록(記錄)된 ‘숙신씨(肅愼氏)=숙신국(肅愼國)’에 대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와 방위(方位)에 따르면 : 『21세기(世紀)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이름이 된 흑룡강(黑龍江)은, ‘옛 흑수(黑水) 또는 약수(弱水)’가 될 수 없다』라는 결정적(決定的)인 증거(證據)다.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본문(本文) : 《大 荒 之 中, 有 山, 名 曰 不 咸 。 有 肅 慎 氏 之 國.》이라고 하였다. 「이곳의 ‘불함산(不咸山)’이 ‘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이라면 : ‘반도(半島) 땅은, 북방(北方)의 대황(大荒)【대황북경(大荒北經) : 산해경(山海經)의 중심(中心)으로부터 북(北)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황폐한 큰 땅이라는 뜻이다】의 땅이었다’」라는 말과 같다.
또 “학의행(郝懿行)”은, 주석(註釋)에서 이르기를 : 「숙신국(肅愼國)은 해외서경(海外西經)을 보라【郝 懿 行 云 : 肅 慎 國 見 海 外 西 經】」고 하였다.
➥ 山 海 經 第 七. 海 外 西 經 / 海 外 自 西 南 陬 至 西 北 陬 者 1 。 【1 畢 沅 云 : 淮 南 子 墬 形 訓 云 : 自 西 北 至 西 南 方, 起 修 股 民 肅 慎 民, 此 文 正 倒。 知 此 經 是 說 圖 之 詞, 或 右 行 則 自 西 南 至 西 北 起 三 身 國, 或 左 行 則 自 西 北 至 西 南 起 修 股 民。是 漢 時 猶 有 山 海 經 圖, 各 依 所 見 為 說, 故 不 同 也.】
「해외서경(海外西經)은, 산해경(山海經)의 중심(中心)으로부터 가장 먼 서방(西方)을 의미하며, 그 방위(方位)는 “서남(西南)으로부터∼서북(西北)까지”」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특히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墬形訓)’에서는, “서북(西北)으로부터∼서남(西南)까지”」라고 하였다.
이러한 곳 즉(卽), 「〈“대황북경(大荒北經), 해외서경(海外西經)”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옛 숙신국(肅愼國)=숙신씨(肅愼氏)」〉를, 〈「‘반도(半島) 동북방(東北方)에 있었다’라는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根據)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흐르는 모래 곧 유사(流沙) 위에 ‘거대(巨大) 건축물(建築物)’을 짓는 어리석은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다. 엎어진 물은 어떻게 주워 담을 수 있을지… …거짓을, 거짓으로, 그 거짓을, 다른 거짓으로, 또 다른 거짓으로 메꾸고 있는 반도(半島) 땅의 현실(現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山海經, 海外西經 / 肅 慎 之 國 1 在 白 民 北, 有 樹 名 曰 雄 常, 先 入 伐 帝, 于 此 取 之。 【1 珂 案 :大 荒 北 經 云 :大 荒 之 中, 有 山 名 曰 不 咸. 有 肅 慎 氏 之 國. 淮 南 子 墬 形 篇 有 肅 慎 民, 周 書 王 會 篇 云 : 稷 慎 大 麈. 孔 晁 注 云 :稷 慎, 肅 慎 也。】
「불함산(不咸山)」은,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산(山)의 이름”으로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을 말한다」라고 하는데, 『‘대황(大荒)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였고, 또 대황북경(大荒北經)과 해외서경(海外西經) 편(篇)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반도(半島) 백두산(白頭山)은, 애초부터 해당사항(該當事項)이 없다.」
➤➤➤ ‘산해경(山海經) 본문(本文)’과 그 ‘주석(註釋)’ 및 ‘회남자(淮南子)’에 기록(記錄)된 ‘숙신씨(肅愼氏)=숙신국(肅愼國)’에 대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와 방위(方位)에 따르면 : 『21세기(世紀)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이름이 된 흑룡강(黑龍江)은, ‘옛 흑수(黑水) 또는 약수(弱水)’가 될 수 없다』라는 결정적(決定的)인 증거(證據)다.
또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편의 주석(註釋)을 보면 : 『동방(東方)』에 대한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정확(正確)하게 알 수 있는 기록(記錄)이 있다.
《『舜與伯益蓋皆東方殷民族傳說中之祖宗神, 亦即詩玄鳥所謂「天命玄鳥, 降而生商」之玄鳥, 即燕子之化身 : 순(舜)임금과 함께 백익(伯益) 모두 동방(東方)의 ‘은(殷) 민족(民族)’의 전설(傳說)의 조종(祖宗)【시조(始祖)가 되는 조상(祖上)】신(神)이다. 또한 즉(卽) 시(詩)의 현조(玄鳥)는 소위(所謂), 「천명【하늘(天)의 명(命)】을 받은 현조(玄鳥)가 강림(降臨)하여 상(商)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의 현조(玄鳥)는 연자(燕子)의 화신(化身)이다.』》라고 하였다.
【伯益 (?∼?),嬴姓,名益,大業之子。伯益因助禹治水有功,故受帝舜賜姓嬴,是古代嬴姓的始祖。伯益是蜚廉的祖先,亦是春秋戰國時代秦國、趙國、徐國王室的祖先。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순(舜)임금’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이 별로 없을 것이니… …「백익(伯益)은 영(嬴) 성(姓)으로, 이름은 익(益)이며, 대업(大業)의 아들이다. 백익(伯益)은, 우(禹)의 치수(治水)를 도와 그 공로(功勞)가 있어, 제순(帝舜)으로부터 “영(嬴)”성(姓)을 하사받았다. 고대(古代) ‘영성(贏姓)의 시조(始祖)로 전해지는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진국(秦國), 조국(趙國), 서국(徐國)의 왕실(王室)의 선대(先代) 조상(祖上)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
◉ 여기에 “한반도(韓半島) 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植民史學) 논리(論理)”를 대입(代入)하면 :
「한반도(韓半島)는 동방(東方) 땅이고,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春秋戰國時代, BC 770∼BC 221年 “성주(成周)”로부터 시황제(始皇帝)의 육국(六國) 통일(統一)까지를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칭한다.】가 열렸고, 시황제(始皇帝)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었다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統一)시켰다」라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최고(最高)의 헛소리꾼이 되는 것이다.
◉ ❛동방(東方)❜이란 : 『오늘날의 서역(西域) 일부로부터 중원대륙(中原大陸)을 지칭(指稱)했던 말이다.』
◉ ❛동방민족(東方民族)❜이란 : 『동이(東夷), 구이(九夷), 한족(韓族), 조선족(朝鮮族)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筆者)의 한마디는 : 산해경(山海經)을 주석(註釋)한 옛 학자(學者)들이 오늘날 21세기(世紀)의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역사조작(歷史造作)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좀(蠹, 좀 蠹) 벌레다. “이 민족(民族)”을, “이 나라”를 조금씩 갉아먹는 ’좀‘ 벌레와 같다는 뜻이다.】
옛 「‘은(殷)=상(商)’ 민족(民族)」을, 「동방(東方) ‘은(殷)=상(商)’ 민족(民族)」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동방왕조(東方王朝)는, 곧 ‘은(殷)=상(商)’왕조(王朝)이다」라는 뜻이다.
「동방(東方)」하면 「반도(半島)」라고 하면서 「옛 조선(朝鮮)은 동방(東方) 땅인 반도(半島)에 있었다」라고 역설(力說)하는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뭔가?
그렇다면 ➥➥➥ 「‘은(殷)=상(商)’ 민족(民族)=은왕조(殷王朝)」 곧, 「동방(東方) ‘은(殷)=상(商)’ 민족(民族) = 은왕조(殷王朝)」가 『“발해(渤海)의 동(東)쪽, 해동(海東) 땅인 동방(東方)의 왕조(王朝)였다”』라는 것인가?
이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은(殷) 왕조(王朝)’ 이전(以前)의 고대왕조(古代王朝) 또한 “동방(東方)의 왕조(王朝)”였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혈통(血統)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아래의 문제(問題) 제기(提起)는, 필자(筆者)의 사견(私見)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內容)은 사서(史書)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을 중심(中心)으로 한 것이다.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의 내용(內容)은, 『‘한족(漢族)’의 것이 아닌 ‘한족(韓族)’인 ‘조선족(朝鮮族)’의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한족(漢族)”의 것인 것처럼 해설(解說)하는 곳이 바로 “반도학계(半島學界)”다.
「황제(黃帝)와 염제(炎帝)」간의 전쟁(戰爭)에서 황제(黃帝)가 승리(勝利)하여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주류(主流)가 되었고, 「그의 후손(後孫)들인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들이 대대손손(代代孫孫) 제왕(帝王)을 이었고, 이 혈통(血統) 곧 “희성(姬姓)”으로 내려온 것이‘고구려(高駒驪), 백제(百濟), 신라(新羅)’」라고 하였다.
「염제(炎帝)는 적제(赤帝)」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의 한족(漢族), 강족(羌族), 경족(京族), 묘족(苗族), 글란(契丹) 등(等)의 각 민족(民族)이 염제(炎帝)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 「황제(黃帝)와의 전쟁(戰爭)에서 패배(敗北)한 염제(炎帝) 및 그 후손(後孫)들은 비주류(非主流)로 전락(轉落),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각각 흩어져 살게 된 것이다」
‘전쟁(戰爭)의 신(神)’이라고 일컬어지는 “치우(蚩尤)”는 ‘염제(炎帝)의 친족(親族)’으로 황제(黃帝)와의 전쟁(戰爭)에서 패(敗)한 장수(將帥)이다… …, “치우(蚩尤)”에 대한 여러 주장(主張)은, 그 논거(論據)가 약(弱)할 수밖에 없다. 염제(炎帝)를 시조(始祖)로 하는 자칭(自稱) ➨ “한족(漢族)”은, 중원대륙(中原大陸) 곧 동방(東方)의 주류(主流) 종족(種族)이 아닌, 소수민족(少數民族)이었다. 이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 〈오늘날의 “중국어(中國語) 위키백과”인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도 ‘지’들 스스로 열심히 주장(主張)하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무엇을 더 바라시나? “주는 떡도 못 받아먹는 어리석은 자(者)들이 말이다”』
➌ 「여러 기록(記錄)의 몇 가지 조건(條件)을 취합(聚合)」해보면 :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북방(北方)의 준갈이분지(準噶爾盆地)와 그 서(西)쪽의 평원지대(平原地帶)인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자이산호(Zaisan湖)【宰桑泊=基台湖】∼발하슈호(Balkhash湖)【巴爾喀什湖=異播海】와 그곳의 북방지대(北方地帶)로 ‘카라간다(Karaganda), 아스타나(Astana)’ 땅이며 그곳의 북(北)쪽에는 이르티시강(Irtysh, R)【액이제사하(額爾濟斯河)】이 흐르는데, 이곳에는 ‘늪과 택(澤)’이 많은 곳이며,
또한 “본래(本來)의 ‘만주(滿珠)=만주(滿洲)’ 땅”을 흐르는『이르티시강(Irtysh, R)【액이제사하(額爾濟斯河)】을 “흑수(黑水) 또는 약수(弱水)”라고 했다』라는 것으로 결론(結論)을 내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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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여국(夫餘國) 영토(領土)는 방(方) ‘二 千 里 (2,000 里)’」라고 하였다.
➥ ‘한반도(韓半島) 학계(學界)’의 주류(主流)라고 자칭(自稱)하는 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추종(追從)하는 국민(國民)들, 또 학계(學界)에 직접(直接) 몸담고 계신 분들께서는 “계산(計算)에 많은 투자(投資)를 좀 하셔야 할 것 같다.” 충고(忠告)라고 해도 좋다.
➤ 사서(史書)【杜佑, 通典 : 其地後漢時方二千里。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至隋漸大, 東西六千里.】를 보면 : 「고구려(高駒驪)는 수(隋)나라 때 점점 커져 동서(東西) ‘6 천리(千里)’나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6,000리(里)는 곧 2,400㎞를 말하는 것으로, 그 면적은 ‘2,400㎢×2,400㎞=“5,760,000”㎢’이니 한반도(韓半島)와 그 부속도서(附屬島嶼) ‘220,000㎢’의 「26」배(倍)가 넘는 어마어마한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사서(史書) 기록(記錄)’과 ‘필자(筆者)의 해설(解說)’은, 농담(弄談) 따먹기 아니다. 「두우(杜佑)」가 누군가? “당(唐)나라의 정치가(政治家)로, 사학가(史學家)로 재상(宰相)을 역임(歷任)한 분이다.” 【杜佑 (735年∼812年), 字君卿,唐代政治家、史學家,京兆萬年縣人,官至宰相,著有通典.】 「동서(東西)‘6,000’里? 금방 떠오르지 않는 거리(距離), 그 땅의 크기다.」
➤➤➤ “쉽게 말해서 : 감(感)잡히게 말하면” : 「오늘날의 ‘중국(中國) 총면적(總面積)’은, “9,600,000”㎢」인데 여기에서 「신강성(新疆省, 1,665,000㎢)+티베트(西藏, 1,220,000㎢)+내몽고(內蒙古, 1,180,000㎢)= ‘4,065,000’㎢」을 뺀, 제외(除外)한 : ➨➨➨“중원대륙(中原大陸)과 동북삼성(東北三省, 遼寧省, 吉林省, 黑龍江省)”을 모두 합(合)한 땅에, 「수(隋)나라 때의 고구려(高駒驪) 영토(領土) 크기」를 말하고 있다.
결국(結局) 「당시(當時)의 “수(隋)와 당(唐)”은, 동방(東方)의 나라가 아닌 서방(西方)의 나라였다」라는 뜻이다.
백성(百姓)이 발(足)을 땅(地)에 딛고 살아가야 함에도, 발(足)을 디딜 땅(地)이 없는데 어떻게 백성(百姓)들이 살아갈 수가 있었겠는가! 「오늘의 주제(主題)는, “부여(夫余)”다.」
“부여(夫餘)의 영토(領土)는 : 「地 方 二 千 里 : 땅은 사방 2 천리(千里)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게 생각할수록 교묘(巧妙)하게 숨겨 놓은 한 수와 같다.
‘천리(千里), 1,000리(里)’란 곧 ‘375∼400㎞’를 말하는 것이니, ‘2 천리(千里)’라는 말은 ‘750㎞∼800㎞’를 말한다. 그 면적(面積)은 ‘562,500㎢∼640,000㎢’ 정도(程度)의 면적(面積)을 말하는 것인데, 쉽게 표현(表現)하면 : 「한반도(韓半島) 전체(全體)의 3배(倍) 정도(程度) 가량의 큰 땅」을 말하는 것이다.
「부여(夫余)」가 ‘한반도(韓半島) 3배(倍)’가량의 큰 땅에 있었다? 과연(果然) 누기 이러한 말을 신뢰(信賴)할까? 이 모두는 세뇌(洗腦)에 당한 것이다. 곧 나쁘게 말하면 : “사육(飼育)당해왔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흑룡강성(黑龍江省) ‘473,000’㎢+길림성(吉林省) ‘191,000’㎢= ‘664,000’㎢이니 이 두 성(省)의 모두가 “부여(夫余) 땅”이었다」라는 이야기다. 【664,000㎢ : 한반도(韓半島)의 ‘3’배(倍)에 이르는 큰 땅이다】그렇다면 이곳 땅에 있었다는 수많은 종족(種族), 부족(部族) 또는 옛 국가(國家)들은 어디로 사라져 줘야 하나? 식민사학(植民史學)의 기막힌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이렇게 “국가(國家)의, 나라의 영토(領土)”를 생각지 아니하고 말하기 쉽게 ‘몇 천리(千里), 몇 천리(千里)’한다고 해결(解決)될 일은 없다.
무조건(無條件), 막무가내(莫無可奈)로 옛 부여(夫余)는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라고 주장(主張)하는 「“반도사학(半島史學)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의 논리(論理)는, 이제 사라져야 할 때다.」
오늘날의 흑룡강(黑龍江)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 즉(卽) 근세(近世)에 명명(命名)된 강(江)의 이름일 뿐이다.
(4) 『본시(本是)의 부여(夫余)는 어디에 있었을까?』
후한서(後漢書)에 기록(記錄)된 결정적(決定的)인 증거(證據)는 「(1) “현토(玄菟) 북(北)쪽, ‘1 천리(千里)’에 있다.”라는 것과 (2) “북(北)쪽에 약수(弱水)가 있다”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3) “땅은 2 천리(千里)까지다”」라는 것으로 “위”의 글에서 하나하나 설명(說明)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내용(內容)을 다른 사서(史書)로 고증(考證) 및 설명(說明)해보기로 하자.
➊ 《기언(記言) 32권 외편(外篇) / 동사(東事) 1 : 肅愼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東濱大海。西接寇漫汗。北至弱水。扶餘在玄菟北千餘里。南與鮮卑接。北至弱水。地方二千里。有城邑宮室。》 대륙(大陸) 사서(史書)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즉(卽), 「‘숙신씨(肅愼氏)’는 일명(一名) 읍루(挹婁)이며, 불함산(不咸山) 북(北)쪽에 있다. 동(東)쪽은 큰 바다에 닿고, 서(西)쪽은 구만한(寇漫汗)과 연접해 있고, 북(北)쪽으로는 약수(弱水)까지다.」 「‘부여(扶餘)’는, 현토(玄菟) 북(北) 천리(千里)에 있다. 남(南)쪽은 선비(鮮卑)와 접해 있고, 북(北)쪽으로는 약수(弱水)까지다. 지방(地方)은 2 천리(千里)이며, 성읍(城邑), 궁실(宮室)이 있다」라고 하였다.
➋ 《통전(通典) : 부여(夫餘) : 其國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地可方二千里。: 그 나라【부여(夫餘)】는 장성(長城) 북쪽에 있는데, 현도(玄菟)에서 천리(千里) 떨어졌다. 남(南)으로 고구려(高句麗), 동(東)으로 읍루(邑婁), 서(西)쪽으로 선비(鮮卑)와 이어지고, 북(北)에는 약수(弱水)가 있으며 땅이 사방(四方) 2 천리(千里)는 된다.》라고 하였는데,
「두우(杜佑) 통전(通典)」에서는 “옛 부여(夫餘)”의 위치(位置)를 찾을 수 있는 조건(條件) 하나가 더 추가(追加)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卽), ➥ 「장성(長城)의 북(北)쪽에 있는데, 현토(玄菟)로부터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조건(條件)은 결정적(決定的)일 수밖에 없다. 곧 여기서 언급(言及)된 장성(長城)은 옛 장성(長城)【고장성(古長城)】을 일컫는 말로, 「오늘날의 포창해(蒲昌海)로부터 옥문관(玉門關) 돈황(燉煌)으로 이어진 옛 장성(長城)」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여(夫餘)는, 돈황(燉煌)의 동(東)쪽으로는 설명(說明)할 수가 없다. 즉(卽), 「장성(長城)【고장성(古長城)】의 북(北)쪽에 있다」라고 했기 때문인데, 그 유지(遺址)【역사적(歷史的) 자취가 남아있는 터】가 지금도 남아있다(尙存)고 전(傳)해진다.
결과적(結果的)으로 「개마대산(蓋馬大山)【천산(天山)】과 현토(玄菟)는, 고장성(古長城)의 북(北)쪽에 있었다」라는 것이 된다. 실제(實際) 그곳의 지세(地勢)와 딱 어울린다. 고장성(古長城)을 증거(證據)하는, 고증(考證)하는 사료(史料)가 바로 산해경(山海經)의 주석(註釋)에 있다.
➥ 산해경(山海經) 해내서경(海內西經) : 《弱 水, 青 水 出 西 南 隅 1, 以 東, 又 北, 又 西 南, 過 畢 方 鳥 東 2。》라고 하였는데,
【1 郭璞云 :(漢書) 西域傳 : 烏弋國去長安萬五千餘里, 西行可百餘日, 至條枝國, 臨西海。 長老傳聞, 有弱水西王母云. (三國志魏志) 東夷傳亦曰, 長城外數千里, 亦有弱水. 皆所未見也。: 곽박(郭璞)이 말하기를 :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 : 오익국(烏弋國)은 장안(長安)에서 15,000 여리(餘里) 떨어져 있는데, 서(西)쪽으로 백여(百餘) 일(日)을 가면, 조지국(條枝國)에 닿는데, 서해(西海)에 임(臨)한다. 장노(長老)가 전하여 들은바, 약수(弱水)와 서왕모(西王母)가 있다고 전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역시 또 장성(長城) 밖으로 수천리(數千里)에, 역시 약수(弱水)가 있다. 모두 이곳을 아직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위 주석(註釋)이 시사(示唆)하는 바 크다”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
㈠ 「“장안(長安)으로부터 15,000 여리(餘里), 또 백여(百餘) 일을 가면 조지국(條枝國)에 다다르는데, 이곳에 ‘서해(西海)=지중해(地中海)’에 임(臨)한다”」라고 했는데… …어떤 핑계를 대고, 명분(名分), 이유(理由), 변명(辨明)을 대더라도 “동이전(東夷傳)”이 등장(登場)할 곳이 아니다. 이곳은 ‘서이(西夷)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㈡ 그러나, 이곳 “서해(西海) 즉(卽) 지중해(地中海)”나 서역국(西域國)이 있는 곳에 “동이전(東夷傳)”이 언급(言及), 등장(登場)하려면 : 그 조건(條件)은 단 하나다. 「‘서해(西海) 곧 지중해(地中海)’가 “발해(渤海)”이고, 지중해(地中海)의 동(東)쪽 땅은, 해동(海東) 곧 동방(東方 : 震域)으로 ‘동이(東夷)=구이(九夷)’들의 영역(領域)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정답(正答)이다. 즉(卽),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㈢ 「장성(長城)은 곧 고장성(古長城)」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이전(東夷傳) 옥저(沃沮)’ 편(篇)에… …“여인국(女人國)과 여국(女國)”에 대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정보(情報)가 기노(耆老)들의 입(口)으로부터 나올 수가 있었던 거다.
➤ 이런 경우(境遇)가 아니라면 : 「“2 만리(萬里)” 이상(以上) 떨어져 있던 한반도(韓半島) 동해(東海) 연안(沿岸)에 있었다」라고 하는 「“옥저국(沃沮國)”의 기노(耆老)들이 무슨 재주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극비(極祕) 정보(情報)를 입수(入手)해 구전(口傳)되어 질 수 있었겠는가! 언감생신(焉敢生心) 말이다.」
○ 옛 「부여국(夫餘國)」은,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의 서(西)쪽에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은 벨루하산(Belukha, 山)【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별노합산(別盧哈山 : 4,506m), 우의봉(友誼峰 : 4,374m), 규둔봉(奎屯峰 : 4,082m)을 말한다. 오랍산맥(烏拉山脈: Ural, 山脈)의 동(東)쪽, 벨루하산(Belukha, 山) 북방지대(北方地帶)가 바로 본래(本來)의 ‘만주(滿洲)=만주(滿珠)’이다】을 말하는 것이다.
◈ 「부여국(夫餘國)」은, 「현(現)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발하슈호(Lake Balkhash)∼ 자이산호(Zaisan湖)’를 포함(包含)한 북부지대(北部地帶)에 자리 잡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곳은 “본래(本來)의 만주(滿洲) 땅”으로 “늪과 택(澤), 호수(湖水)가 많고, 평탄(平坦)한 땅”이 많은 곳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는 ‘뭔 犬 소리’」라고 하겠지만… …기록(記錄)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필자(筆者)는, 「“옛 부여(夫余)가 오늘날의 동북삼성(東北三省) 땅에 있었다”라는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야말로 일제제국주의자(日帝帝國主義者)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 귀신(鬼神)들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혼(魂)이 없는 강시(僵尸) 같은 정신 빠진 학자(學者)들이다」라고 비난(非難)한다. 여기서, “옛 부여(夫余)”는,
◈ 〈그 중심(中心)에“숙신씨(肅愼氏)=숙신국(肅愼國)”이 있으며, 「이들은 서북(西北)쪽 땅에 있었다는 ‘산해경(山海經) 및 그 주해(注解), 회남왕(淮南王)의 회남자(淮南子)’의 기록(記錄)을 신뢰(信賴)하기 때문이며, “이들의 서(西)쪽에 ‘부여(夫餘)=부여(夫余)’가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환빠」논쟁(論爭)이 재현(再現)되었나?
○ “환빠논쟁(論爭)”이 재현(再現)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大統領)”께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말하면서…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 곧 주류학계(主流學界)가 모조리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발끈’하는 것을 보면 : 100% 이해(理解)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歷史)는 ‘학계(學界)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다. 누구든지 자유(自由)롭게 공부(工夫)하고, 연구(硏究)하여 그것을 토대(土臺)로 자신(自身)의 주장(主張)을 자유(自由)롭게 내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19∼20세기(世紀)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도 마찬가지다. 위서(僞書)를 가지고, ‘1천(千) 몇 백년(百年) 전(前)’의 유물유적(遺物遺跡 : 王陵)을 고증(考證)한다? 이건 ‘코믹’한 연기(演技)라고 할 수 있다.
그 묘지(墓地)는, 이미 일제(日帝)가 파먹은 곳이고,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正確)하게 모르나 그냥 덮어버린 곳이다. 누가 “아니다”라고 자신(自信)있게 말할 수 있나?
「1,971년에 송산리 벽돌무덤 6호분의 유입수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라고 하면서 ‘무녕왕릉(武寧王陵)의 묘지석(墓地石)’이라는 것을 내놓은 것을 보면 : 초라하기 그지없어,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저게 무슨 왕(王)의 묘지석(墓地石)이라는 건가? 누구의 자식(子息)으로 태어나, 어떻게 자라서, 어떻게 즉위(卽位)하여, 어떤 업적(業績)을 쌓았고 등등(等等)을 상세(詳細)하게 기록(記錄)해 놓았을 것은 자명(自明)한 일이다. 그러나 대륙(大陸)에서 나오는 군수(郡守)의 것만도 못한 초라하기 그지없는 돌(石)에, 글자는 삐뜰 삐틀, 무슨 조각칼로 그어 놓은 것 같은 엉성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가장 핵심(核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해 확인(確認)된다’라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건 충격(衝擊) 중의 충격(衝擊)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이미 “위서(僞書)”로 판명(判明) 난 사서(史書) 아닌 사서(史書)다. 19∼20세기(世紀) 초(初)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기록(記錄)을 보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기록(記錄)으로 가득 차 있다.
◈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위서(僞書)’ 중의 ‘대표적(代表的)인 위서(僞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서문(序文)도 없으며, 편찬(編纂) 또는 편수(編修)를 누가 했는지도 전혀 모르며, 언제 시작(始作)해서 언제 완성(完成)하였다는 것도 없다. 또 그 내용(內容) 또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내용(內容)으로 되어 있다. 이건 세계사학계(世界史學界)가 다 인정(認定)하고 있는 것인데, 「황당무계(荒唐無稽)하게도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이런 “일본서기(日本書紀)”로 “무녕왕릉(武寧王陵)”을 고증한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하루라도 빨리 없어져야 할 세력(勢力)이다.」
➤ 「누가, 누구에게 “유사역사학(類似歷史學=擬似歷史學) 또는 사이비역사학(似而非歷史學)”이라고 매도(賣渡)할 수 있겠는가? 위서(僞書) 중의 위서(僞書)를 가지고, 백제(百濟)의 왕릉(王陵)이 “맞다”라고 고증(考證)한다? 바로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가 “유사역사학(類似歷史學=擬似歷史學) 또는 사이비역사학(似而非歷史學)”이라고 지탄(指彈)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 오늘날의 중국(中國)의 ‘정사(正史)’라고 인용(引用)하는 여러 사서(史書) “왜(倭)” 편(篇)에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이 아닌 남아세아(南亞世亞) 땅에 ”왜(倭)“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런 사서(史書)도 위서(僞書) 중의 위서(僞書)인가?
➤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무녕왕릉(武寧王陵)을 고증(考證)하고 있다’라는 것 자체(自體)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20세기(世紀) 초(初)에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것을 역설적(逆說的)으로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서(僞書)가 무녕왕릉(武寧王陵)을 고증(考證)한다? 그렇다면 「일제(日帝) 강점시절(强占時節) ‘일제(日帝) 하수인(下手人)’들에 의해 일부(一部) 발굴(發掘)되어 그곳에 소위(所謂) 묘지석(墓地石)을 던져 놓고 덮었다. 이후(以後) 어떤 정보(情報)를 입수(入手)한 이들에 의해 배수로(排水路) 공사(工事)를 하다가 우연(偶然)히 발견(發見)되었다」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可能)한 이야기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사(人士), 있나?
발굴(發掘) 과정(過程)의 어수선하며, 방치(放置)하고…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보면 : 이해(理解)할 수 없는 행태(行態)가 있기 때문이다. 「‘1’ 만년(萬年) ∼‘5’ 천년(千年)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 속에 그 수많은 군주(君主)의 무덤이 실제 왕(王)의 무덤 곧 왕릉(王陵)이란 것은, “반도(半島) 삼천리(三千里) 화려강산(華麗江山)”에서 딱 ‘1’ 군데 바로 무녕왕릉(武寧王陵)뿐이다.」
그런데 「이 왕릉(王陵)이 “위서(僞書)”로 판명(判明)이 난 “일본서기(日本書紀)”로 고증(考證)된다, 또는 되었다」라는 것이다. 이는 누구 보아도 웃기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에서는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위서(僞書)다’라고 주장(主張)하기 전(前)에, 이런 이해불가(理解不可),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것에 대해 해명(解明)이 먼저 아닐까?
‘무녕왕릉(武寧王陵)’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라면 : 그 외(外)의 여러 왕릉(王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외계인(外界人)들이 모조리 파헤쳐 외계(外界)로 빼돌렸다는 것일까?
그럼 외계인(外界人)들은 왜, 무엇 때문에 “무녕왕릉(武寧王陵)”은, 방치(放置)한 것일까?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記錄)이 사실(史實)을 입증(立證)하려? 의문(疑問)이 꼬리를 물고, 또 꼬리를 문다는 것은, 그만큼 “합리적(合理的)이지 못하다”라는 것을 방증(傍證)하는 것이다.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식민사학(植民史學)과는 과감(果敢)하게 절연(絶緣)해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 ‘다음 편(篇)’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奇異) 편(篇)을 재해석(再解釋)한다”라는 주장(主張)과 함께 「과연(果然)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왜곡(歪曲)【특정(特定) 종교(宗敎) 또는 식민사학(植民史學)에 의한】된 산물(産物)인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인가」에 대해 「가슴으로 가 아닌 옛 기록(記錄)으로 논(論)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025년 12월 28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사학(史學) 곧 歷史學(역사학)은,
어떤 '특수층'들 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나의 조상(祖上)들이 살았던 고토(故土)에 대한 연구는 누구든지 맘대로 할 수 있으며,
무슨 얼어 죽을 "공인된 역사 기술의 관습"이라는 것일까?
"공인된 역사기술의 관습을 도대체 누가, 어떤 '0'들이 만들어 놓은 건가?"
지들 맘대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결론이 다르면... ...그게 '사이비'라는 것인가?
* 무엇이 정사(正史)고,
무엇이 유사역사라는 건가?
그러는 반도사학계는 '정사'에 기록된 내용을 왜 따르지 않는 건가?
정사, 동국지리지, 왕조실록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지 않고, 지들 입맛에 맞게 해설하는 것, 그게 바로 유사역사학이 아니겠는가!
각종 정사서에서 말하는,
동국의 지리지,
왕조실록,
학자들의 문집,
연행일기등등 문헌에서 말하는 지형지세, 기후, 특이지형, 토산물, 거리(距離), 방위 등이 한반도 땅과는 전혀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못하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이야기만 나오면 벌떼가 달려드는듯 난리법썩, 호들갑을 떨며, 발작을 한다.
반도사학은,
한반도 땅에서 벌어졌던 반만년 역사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나?
역사서, 지리지등은 존재하지만... ...그 내용에 맞는 땅이 어디냐? 하는 것이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그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역사학도 있더냐?
그 땅이 없는데, 뭔 조상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더라도... ...
입는 삐틀어져 있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하는 것이다.
* 다음 편은 원래 "후한서 왜" 편이어야 하는데... ..방향을 조금 틀어... ...삼국유사 기이 편을 주제로 논해보기로 했습니다.
황제(黃帝)와 염제(炎帝), 치우(蚩尤)는 무슨 관계에 있고,
왜 "舜(순)임금과 백익, 은왕조는 동방의, 동이의 왕조였다는 건가?
그럼 동방은 대륙 땅이라는 건가? 반도 땅이라는 건가?
참 헤헷깔리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헷깔릴것이 없는데, '반도사학자'들이 헷깔리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왜 고구려 왕조는 고씨(高)이고,
신라 왕조는 왜 금씨(金)인가?
도대체 단군은 누구고,
요(堯)임금은 누군가?
* 삼국유사 기이편을 보면서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