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 안강1
455 안강2
456 안강3
457 웅략1, 시변압반1
458 웅략2, 시변압반2, 7월 백제 지진원 죽음
459 웅략3, 시변압반3
460 웅략4, 시변압반4
461 웅략5, 시변압반5, 6월 무령왕 탄생, 7월 곤지 입경, 8~10월 지배층 몰살, 11월 웅략 즉위
462 웅략6, 3월 웅략 공립, 4월 오국 사신,
463 웅략7, 8월 전진옥 일족 70인 학살,
464 웅략8, 2월 오국 사신 파견, 신라가 고구려군 격파.
465 웅략9, 3월 신라정벌 실패,
466 웅략10
467 웅략11
468 웅략12, 4월 오국에 사신 파견,
469 웅략13
470 웅략14, 정월 오국 사신 도착,
471 웅략15
472 웅략16
473 응략17,18,
474 웅략19
475 웅략20, 한성을 함락한 장수왕이 더 이상 남하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 백제는 오랫동안 왜국의 관가(왕비족), 혼인동맹으로 왜국에서 백제 구원군 출발.
476 웅략21, 백제의 왕비족인 문주에게 웅진을 주었다고 함. 삼국사기에 금강유역 최초 출현, 왜국 각료들이 거의 다 사라짐. 다 어디로 갔지?
477 웅략22, 정월 후계(태자)를 세움, 7월 괴기 기록(웅략 사망).
478 <없음>
479 웅략23, 5월 수군으로 고구려 공격, 8월 웅략이 죽었다고 함. 10월 태자가 옥새를 받음(장사지냄), 백제 동성왕 즉위.
480 청령1, 10월 웅략을 장사지냈다고 함. 대반옥실대련과 평군진신조대신을 제외한 웅략시대 각료가 다시는 안 보임.
475년 겨울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한 후 더 이상 남하하지 않는 이유가 나오는데 백제가 오랫동안 왜국의 관가(왕비족)였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4세기 초 비류왕부터 두 나라가 혼인동맹을 맺고 있었으니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백제가 위험에 빠지면 왜국은 반드시 구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문주가 웅진으로 천도하는데 목협만치와 조미걸취가 도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한성이 공격받자 웅략이 백제에서 가장 가까운 큐슈지역 군대를 급파했고 그 지휘관이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라는 뜻입니다. 왜국에서 혼인동맹에 의하여 구원군이 온다는 보고를 받은 장수왕은 더 이상 남하를 않고 돌아갑니다. 웅략이 급파한 백제 구원군 규모는 1~2만명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야 문주가 신라에서 데려온 1만 군대를 합하여 고구려군 3만과 맞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제 왕실이 모두 죽어 대가 끊기자 웅략이 477년에 후계자를 세운 후에 모든 각료를 이끌고 백제로 천도합니다. 그래서 웅략조에 나오는 수많은 왜국 각료들이 모두 증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고구려군에게 잔국이 토벌되는 396~397년에 왜국으로 천도했으므로 80년 만에 다시 백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제로 돌아간다고 웅략이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괴기 기록이 나타나는 477년 7월에 죽었습니다. 웅략의 군대 지휘관인 목협만치(73세)와 조미걸취도 이때 죽었을 것입니다. 웅략이 갑자기 죽자 시신은 왜국으로 이송되고, 왜국은 후계를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하여 그의 죽음을 숨깁니다. 왜왕 무의 국서가 가는 478년은 일본서기에 없습니다.
이로부터 2년 3개월 후인 479년 10월에 장사를 지내고 태자가 옥새를 받았는데, 이때 장사를 지냈다고 하면 죽자마자 바로 장사를 지낸것이 되어 모순이므로, 옥새 받은 것은 그냥 두고 장사만 1년 늦추어 기록하였습니다. 일본서기는 해는 잘 속여도 달은 웬만해서는 속이지 않습니다. 무령왕릉 지석을 보면 당시 부여씨 왕실은 죽은 지 2년 3개월 후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웅략은 부여씨 왕실의 법도에 따라 장사지내진 것입니다. 일본의 곤지신사는 지금도 매년 음력 10월에 장사(제사)를 지냅니다.
웅략의 재위기간: 461년 11월 즉위, 477년 7월 퇴위, 총 17년 재위.
이 재위기간은 앞의 " 1. 왜왕 무와 웅략천황의 재위기간 비교"의 송서의 왜왕 무의 재위기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제 삼국사기를 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3년(477), 5월 웅진에 흑룡이 출현하였다.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정확히 일치합니다. 문주는 왜국에서 귀국한 곤지에게 제2인자인 내신좌평을 주고 백제를 공동 통치하자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왕이 되기 위해 천도했는데 되겠습니까? 2달 동안 벌어진 내란에서 곤지가 패하고 죽었습니다.
477년 내란에서 패한 곤지의 왜국 군대는 부여씨의 근거지인 영산강유역으로 후퇴합니다. 부여씨는 영산강 중류에서 옹관묘를 쌓던 마한계 성씨로, 3세기 후반에 목지국 왕비족이 되고, 4세기에 목지국 왕족이 되면서 성이 필요해지자 자신들이 부여에서 왔다고 하여 부여로 성을 삼은 것입니다(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백제는 본래 목지국 국명이었습니다.
삼국사기=일본서기=송서=무령왕릉지석=곤지신사, 현존하는 모든 사료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479년에 동성왕이 왜국에서 백제로 돌아와 즉위하는데, 곤지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파견한 큐수지역 군대의 무력이 그 배경입니다. 그래서 이후 영산강유역에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데 큐슈 양식인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한성백제는 문주-삼근으로 왕통이 끝나고, 동성왕부터 의자왕까지는 80년 동안 왜국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백제로 돌아온 왜국(목지국) 왕실입니다. 동성왕 이후 6세기까지 왜국은 백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자치령이 됩니다. 그러니 외교권도 없습니다. 동성왕-무령왕-성왕-위덕왕-... 시기의 왜국은 백제 영토의 일부로 22대 청령천황 이후는 모두 백제의 지방관들입니다.
[추신] 어떤 한일고대사 전공 교수님이 동성왕이 왜국에서 와서 백제왕이 된 배경이 웅략 23년조에 나오는 5백 명의 축자국 군대 덕분이라고 했는데 5백 명으로 백제왕이 됩니까?
첫댓글 송서에서는 왜왕 무가 478년 전후로 즉위했다고 나와 있으므로 일본서기의 웅략의 재위 기간과 확실하게 다르지요 왜왕 무의 국서 내용에 부형 즉 아비와 친형이 갑작스럽게 사망해서 부형의 상을 치르는 상황이라는 표현 내용은 갓 즉위한 새왕의 정황을 담은 색채가 강한 내용이라 18년전에 즉위했다는 웅략 천황의 재위 정황과 거리가 먼 내용으로 웅략이 그래서 왜왕 무가 될수 없는게 자명한 법입니다 송서에 기록된 왜왕 무가 웅략이라는 주장은 왜왕 무의 국서 내용을 제대로 고려치 않은 무리한 주장일수밖에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