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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 100A.D)는 구약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며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기록된 것이고 그 내용 자료
의 거룩한 성격때문에 세속적 문헌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그것을 다치기만
해도 손이 부정을 타고, 단어 하나도 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
루살렘 함락 후 30년이 되는 해에 에스라가 기도의 응답으로 구약성서를
40일간에 걸쳐서 다섯 명의 조수에게 불러 주어 받아 쓰게 했다는 것이다.
즉, 에스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약 전체를 암송하여 불러 주었다는 것
이다.
구약경전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2세기 그리스도인에게까
지 번졌고, 에스라 때에 구약 정경이 단번에 다 완성됐다는 설은 계속 유
대교와 기독교에 유행되고, 개신교에서도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이런 설을 부인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율법서(창세기,출애굽기,레
위기,민수기,신명기), 예언서(전기예언서-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열왕기, 후
기예언서-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12선지), 성문서(시편,잠언,욥기,전도서,아
가,룻기,예레미야의 애가,에스더,에스라,느헤미야,역대기,다니엘)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인은 율법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성서라면 우선 율법을 생각하게끔
되었었다. 율법은 온통 그리고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것이고,
따라서 율법의 한글자라도 모세 자신이 창안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죄
를 받는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율법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것은 하
나의 합성문서이고 오랫동안 자라고 발전되어서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사
실을 알게 된다. 그 증거는 율법서 여러군데에서 발견된다. 신명기 34장는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을 말하고 있고, 5경에 여러번 블레셋 사람들이 언급
되어 있지만(창21:34, 26:14-18, 출13:17) 실은 기원전 1200년 경(모세의 출
애굽시대는 기원전 1300-1200년경)까지는 그들이 팔레스틴에 나타나지 않
았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정설이다. 그러므로 모세 시대보다 훨씬 이후
에 된 부분들을 5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뿐 아니라 5경에는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묘사하는 기사들
을 발견할 수 있다. 창조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는 세
상 만물과 동물까지 창조된 후에 남자와 여자로 사람이 찬조된다. 그러나
2장에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다음에 동물,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가 창조
된다. 홍수에 대한 기사도 두 가지다. 하나는 노아가 모든 짐승을 한 쌍씩
방주 속에 넣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창6:19), 또 하나는 정
결한 동물은 일곱씩, 부정한 동물은 한쌍씩 넣으라고 명령을 받는다(창
7:2). 이와같이 이야기가 중복된 것은 5경을 오늘의 형태로 작성한 사람들
(편집자들)이 그 사건들에 대한 두가지 기사들을 앞에 놓고 그 자료들을
정직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취급하는 의미에서 그 두 가지를 다 나열한 것
이라고 보여진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5경은 하나 이상의 문서의 편집으로 형성되
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행인지 불행인지 5경의 저자나 편집자가 누구
인지를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왜 5경의 모세 저작권을 부
동의 진리라고 주장할까? 우리는 한글을 가리켜 세종대왕의 한글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만드셨다는 말은 아니다. 집현전의
학자들이 만들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어떤 공로를
돌린다는 것은 일종의 미덕이었고 관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이 가진 모든 법과 기본적인 교훈들과 심지어 그민족 형성의 기본적인 역
사까지도 포함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일종의 기본헌장으로 삼았을 때, 그들
의 국부요 또 이스라엘 법의 창시자이기도 한 모세를 그 저자라고 부른 것
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시편을 다윗이, 잠언과 전도서를 솔로몬이, 룻기
를 사무엘이, 열왕기와 애가를 예레미야의 글이라고 보편적으로 전해 내려
왔던 것도 다같은 이치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구약의 율법이나 예언
서를 막론하고 그런 문서가 생기기전에는 히브리 민족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에게 특별히 예언자들을 일으키시어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해 주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그의 위대하신 구속적 사건들을 계시하셨다. 그 계시는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매개로 인간에게 전해졌다.
예언서는 역사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역사적 경험을 히브리인들에게
체험케 한 하나님의 뜻을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히브리인과 그밖의 모
든 사람에게 가르치는 책이 곧 예언서들이다.
예언자들의 참 목적과 기능은 하나님의 뜻(계시)을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예언서 기자들은 사건을 그대로 분석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실현하고
설명해 주느냐 하는데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성문서는 우선 일반 백성이 널리 알고 읽던 인기있는 책들이었다. 율법
이나 예언서처럼 전체적으로 또는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성서 정경에 들
어 오게 된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 백성들의 일반 종교문학으로 간주되어
전해 오다가, 익명의 책들이어서 그 저작자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다윗,솔로몬,에스라 등)이 쓴 책으로 돌려 정경에 넣었다.
이렇게 전승된 성서들이 정경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주후 90년 경 해안
도시인 얌니야에서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권위있는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구약성서의 책들이 최종적으로 낙착되어 그 수가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서의 그것과 꼭같은 것으로 결정되었다.(박창환의 [성경의 형성사]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췌하였음)
성서를 어떠한 눈으로 읽어야 할까?
성서를 중심하고 성서의 말씀을 따라서 산다고 하는 한국교회가 실제에
있어서 성서의 정신과 엄청나게 배치되는 태도와 생활을 가지는 것은 어떤
영문일까? 한국교회는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처
럼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성서를 무조건 읽기만 하면 되고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많이 읽고 매일 읽기만 하면 그 자체가 어떤 공적이나 되는 것처
럼 생각하면서 읽는다. 성서를 많이 읽음으로써 비록 그 뜻은 모른다 하더
라도 어느 책에 무슨 말씀이 있고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정도
의 피상적 내용만 알 뿐이다. 성서정독보다는 성서통독에 더 중심을 둔다.
성서는 다른 책과 다름없이 사람들이 사람의 말로 쓴 책이지만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이 쓴 많은 성서
자료들 중에서 하필 66권이 성서에 수집되어 기독교 경전이 되었고 하나
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을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지도자들, 제사장들, 왕들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 종교생활, 도덕생활, 국가생활 등의 규범을 구체적으로 말씀하
셨으며 특히 예언자들을 통하여 역사를 해석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사람의 말로 전달하게 함으로써 타락한 백성에게 각성을 주며 의기
소침한 백성에게 희망을 복돋우게 하셨다.
그런데 성서의 계시를 인간에게 주시던 때는 지금부터 4천년(구약)내지
2천년 전(신약)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미개하고 과학적 사
고를 하지 못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지식과 우주관과 제도와 언어와 또는 그 표현 양식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학이 없는 옛 사람에게는 과학적으로 사실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신화적인 표현법을 써서 설명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과학적 정확성을 진술하려는 과학자
의 눈으로 성서를 보면서 성서의 어떤 신비한 사건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성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전혀 전제하지 않는 것이다.
3천년 내지 근 2천년 전에 기록된 성서가 그 당시 그 특정 환경 속에 있
던 특정 독자들에게 잘 이해되던 말과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들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기에 우
리는 성서를 읽을 때 역사적인 한계를 고려하여 역사적인 해석을 우선 필
요로 한다.
성서에 들어 있는 66권의 책은 그 저자도 각각 다르고 그 연대도 다르며
또 환경이 모두 다르다. 성서는 각이한 유형들과 양식들의 집합체이다. 시
가집들, 속담집, 복음서들, 교훈문서들, 예언서들, 서간집들, 묵시서들, 역사
서들, 법전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서는 역사는 역사로, 시는 시로, 비유는 비유로, 격언은 격언으로, 소설
은 소설로, 희곡은 희곡으로, 신화는 신화로 각각 분류하여 거기 해당하는
적적할 해석법에 따라서 해석할 때 그 계시의 참 뜻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박창환의 [성경의 형성사](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췌하였음)
신약성서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1)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여러 저자에 의해서 오랜 기간에 걸
쳐 기록된 책들이 오랫동안, 복잡한 역사를 통해서 집성되어 이루어졌다.
초대교회는 그들 자신의 책이라고는 가진 것이 없었고 구약성서를 그대로
물려 받았었다. 구약성를 경전으로 계속 가지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생활
과 죽음과 부활이 주는 감격스러운 의미에 도취되고, 성령의 감동과 지도
를 받으면서 교회는 성장해 갔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도 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발전하여 나갔다. 왜 1세기 사도 교회는
신약 정경을 가지지 않고 성장해 갔을까? 그것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고 하나님의 활동과 그리스도의 약속
을 찾아낼 수 있어서 구약성서에 대한 그들의 감격과 신뢰감이 더욱 두터
워갔고, 그리스도의 사건을 목도하고 혹은 사도들이 구두로 전하는 증언을
듣고 기뻐하는 것으로 충분하였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성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신약정경이 곧 나타나지 않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1세기 사
도교회가 종말적 기대를 강하게 가졌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곧 재림하여 심판할 것이라는 강한 기대에 영구보전을 목적으
로 하는 문서같은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복음이 구두로 전달되던 시대가 적어도 30년 이상 흘렀다. 그런데
복음의 내용이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 전해지면서 어떤 면으로든지 변질
되거나 확대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가
지고 있는 대로의 복음 사화들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사라고 단정할 수 있는 두어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는, 옛날 사람의 기억력은, 많은 정보를 손십게 찾을 수 있어서 구태
여 기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억력이 많이 상실된 현대인의
기억력과 비교해서 상당히 뛰어나다. 책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아서 중요
한 지식이라면 불가불 머리 속에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한 번
들은 것을 잊거나 외곡하는 경향이 우리들보다 훨씬 적었다.
둘째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와 교훈에 대한 모든 것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계속해서 설교하던 자료였기 때문에 교회의 동동적 기억의 제
재와 감시를 받아 왜곡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그러나 복음 사화의 기
본내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복음 기자들은 각각 그들의 신앙과 소견을 쫓
아 그리고 독자들의 평편을 참작하여 적절한 해석을 붙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건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던 사도들이 점차 죽어
버려 구전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그래서 불가불 구전방법을 대용할 수 있
는 방법으로 글로 써서 전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발전함
에 따라 희랍과 로마 사회로 선교할 필요성을 느껴 전도 내용을 문서화시
킬 수 바까에 없었고, 그리스도의 급박한 재림을 기다리던 초대 교회는 재
림이 점점 늦어짐을 인식하고 장래의 교회 문제에 신경을 써 문서화된 말
씀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구전된 내용을
점차 문서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서 예수의 교훈과 생애를 실은
기록을 인용하면서 그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
다. 신약 문헌의 대부분은 어떤 개체 교회 혹은 교회의 작은 단체를 위해
{{
■■■■■■■■■■■■■■■■■■■■■■■■■■
복음서의 예수의 생
애와 교훈은 구전시대(주
후 30-60년 이후)에 단편
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다
가 문서화되면서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결과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
{{
}}
서 기록된 것들이다. 이 교회들은 이 편지(바울서신들)들을 반복해서 읽음
으로써 생활의 여러 가지 위기와 문제들을 해결
하는데 참 좋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
다. 그 편지들이 수집되고 또는 널리 반포되어
결국 정경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복음서의 예수의 생애와 교훈은 구전시대(주
후 30-60년 이후)에 단편적인 이야기로 전해지
다가 문서화되면서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결
과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
다. 구전시대가 지나고 문서운동이 시작되자 기
독교 문헌이 우후죽순 격으로 사방에서 생겨나
게 되었다. 누가는 자기보다 먼저 복음사건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눅
1:1). 애굽인의 복음, 도마 복음, 맛디아 복음, 바돌로매 복음, 12사도의 복
음, 바실리데스 복음, 아벨레스 복음 등등. 행전도 여러가지가 나타났다. 도
마행전, 안드레행전, 빌립행전, 베드로행전, 요한행전, 바울행전, 데클라 행
전 등이다. 요한계시록 외에도 베드로의 계시록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문서들 중에서 왜 어떤 것은 성서로 채택되고 어떤 것은 버
림을 받았을까? 우선 그 책이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읽혀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어떤 책이 공중 예배에 낭독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보통문서
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특별한 존재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채택되는 데 표준이 된 것은 사도적 권위를 가졌는가
아닌가에 있었다. 다시말해서 그것이 어떤 사도의 저술이든지 그렇지 않
으면 적어도 사도들과 작접 접촉하뎐 사람이 쓴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과 동등하
시며 예수가 보내신 사도들은 곧 예수와 동등하다는 생각으로 사도의 말을
예수의 말씀처럼 권위있게 존중하였기 때문에, 사도적 권위는 정경선택의
표준이 된 것이다.
어떤 책이 신약성서 정경속에 들게 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하
는 것이다. 우선 그것이 기록되어야 하고 다음에는 그 기록된 책이 교회에
서 널리 읽혀져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리에 유용한
것으로 인정되고 수락되어야 한다. 다음에는 온 교회가 채택하고 수락해야
만 한다. 끝으로 온 교회의 지도자들의 회의의 결정에 의해서 승인을 받
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2)
신약문서들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것들이 바울 서신이고, 또 제일 먼
저 한 책으로 수집된 것도 바울서신들이었다. 바울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
어서 어떤 지방의 잠정적 형편을 다루어 글을 썼다. 어떤 특정 시간에 어
떤 특정 교회가 당면한 급박한 정황을 취급하려는 목적에서 기록하였다.
실제 문제에 있어서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 또는 교회의 화평과
통일을 유지하게 하려고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바울서신 수집은 바울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소규모로 진행되어 왔었고, 그의 사망으로 인해서
자극을 받아 좀 더 활발하게 전개되던 서한수집 작업이 사도행전 발행 후
에 한층 더 본격화하여 종결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는 전도자들과 교사들에 의해서 예수의 복음이 직접 선포되는 구
전시대를 거쳤다. 현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들이 대번에 기록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오늘의 형태로 나타나기 전에
예수의 교훈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자료 문헌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현재 학자들이 이름 붙인 'Q자료'(자료라는 뜻을 가진 독일 말
Quelle을 대표하는 것)같은 것이 있어서 마태나 누가가 자기들의 복음서를
쓸 때 자료로 사용했으리라는 것이다. Q자료는 공관복음 특히 마태와 누가
의 두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예수의 교훈이 어떤 동일한 자료에서
왔으리라는 생각에서 끌어낸 가상적 자료이다. 그러나 그 개연성이 아주
짙은 것이다. 이 자료이외에도 누가가 그의 복음서 서두에 암시한 것처럼,
작고 큰 많은 복음서들이 유포되고 있었을 것이다.
사이비 복음서들을 포함한 여러 복음서들 중에서 4복음서만이 채택된
것은 4복음서 자체가 지닌 그 진리성과 권위가 독자들을 압도하고 강박하
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그렇지 못한 사
이비 문서들은 자연히 도태당하고 말았다고 생각된다. 교회는 4복음서가
한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르게 서술함에 곤란을 느꼈지만 복음서의 수를 줄
이거나 하
나로 통일시키지 않은 것은 교회가 사도적 증언을 무엇보다도 존중히 여
겼기 때문에 다양성을 인정하여 네 복음서를 모두 수락하였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확실한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시기에 도달했다. 2세기 경에 영지주의(혼합주의
종교로 이단으로 배척받았다)자인 마르시온이 스스로 성서의 정경을 작성,
발표하여 교회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바울을 거의 우상처럼 예배하
였고 구약성서를 완전히 그의 정경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교회는 정경확정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제2세기 중엽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으니, 성서
는 무진장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정경확정 운동에 더 박차
를 가하였고, 2세기 말경에 이르러서 교회는 신약 정경을 한정하고 원칙적
으로 성서 산출이 이미 끝났다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3세기와 4세기 초에 걸쳐서 문제 된 책들을 분류하여 가려내는 과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더러는 정경으로, 더러는 외경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
다. 이제 정경형성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주후 367년에 애굽 알
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꼭 같은 내용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 목록은 신약 정경 형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계점을 이루고 있다.
동방 수리아 교회만이 오늘날까지 22권을 신약정경으로 가지고 있지만 거
의 모든 교회가 현대의 27권을 신약정경으로 채택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인간의 말에 담아, 오고 오는 인간에게 전달하
시고 계시다. 정경 형성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성서의 여러 책들은 그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이유때문에, 서로
성미와 구미가 다른 수억만 명의 까다로운 인간의 체질과 기질을 모두 통
과하여 오늘날까지 건재하고 책 중의 책으로서의 영광을 차지하고 있는 것
이다.
신구약성경은 어떻게 전해내려온 것일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어떻게 전해 내려온 것일까. 성경원본과
오늘의 성경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
월간 선한이웃
}}
분명한 사실은 신구약 성경의 원본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경 저자들이 직접 쓴 자필원본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성경원문의 전승에 문제가 있어서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과 원문
이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면 1947년 지중해 동부 사해의 쿰란지역에서 우연하게 여러 사본
들이 발견됐다. 주전 150년경에 "정의의 선생"으로 알려진 사람에 의해 창
설된 이 쿰란수도원에서 그들이 읽던 구약성경의 일부와 그들의 신앙규례
를 적어놓은 두루마리들이었다.그것들은 적어도 주전 1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성경의
내용과 비교하면 거의 차이점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원본이 낡고
헐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사용하기 어렵게 되면 원문의 내용을 면
밀주도하게 대조해 가면서 그대로 베껴서 새로운 사본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파손된 원전은 불사르거나 벽에 바르거나 땅에 묻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시대마다 새로운 사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구약사본은 유대인 특유
의 정확성과 면밀성을 가지고 다시 작성되었다.
이러한 정확성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그것은 언어적이고 문학적인 관
점에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성경 원전은 결코 그릇되게 복사되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교의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감지된다.
"그렇게 오랜 기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성경의 어느 한 음절까지라도
어떤 것을 첨가하거나 없애거나 또한 변경하려고 감히 시도하지 않았다"
이 말씀은 구약의 신명기 4장2절의 말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내가 너
희에게 명하는 것을 가감하지 말고."
구약성경의 본문은 주전 3세기에서 주후 12세기까지의 사본들로 구성되
어 있다. 크게 나누면 히브리어로 된 사본들과 헬라어로 된 사본들, 그외에
라틴어등 외국어로 번역된 사본들이다. 신약성경의 사본 중 가장 빠른 것
은 주후2세기 초엽에 쓰여진 것인데 다만 요한복음 몇 귀절만이 기록된 사
본의 단편이다.
초기 사본은 주로 파피루스 종이에 쓰여진 사본으로서 그 보관상태가 온
전하지 못하나 주후 4,5세기부터 등장하는 양의 가죽위에 기록한 양피지
사본들로 말미암아 신구약 전체는 잘 보관된 상태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다. 이 모든 과정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
게 말할 수 있다. 성경만큼 순수하고 확실하고 정확하게 전승되어진 고대
의 책은 역사상 하나도 없다.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을 주신 것이 그분의 은총과
섭리라고 한다면 신구약 성경을 그토록 오랜동안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도 손상되지 않고 내용 그대로를 사본을 통해서 보존되도록 배려해주신 것
또한 하나님의 은총이요 섭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불교보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가?
비기독교인들, 특히 불교인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종종 듣는
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
서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가 개
방적인 것에 비해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
다."
과연 그럴까? 불교가 개방적인 것에 비해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가? 이글에서는 비종교인들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기독교와
불교의 상식적인 내용을 토대로하여 이 말의 옳고 그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서두에서 인용한 말을 하는 저변에는 다분히 불교가 기독교보다
좋은 종교라는 것을 주입시키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이 말은 무
심히 지나쳐 들으면 그럴 듯 하지만, 한 번 더 살펴보면 서로 다른
논리 구조를 지니고 있는 예증으로부터 왜곡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 그런가? 먼저 위의 인용문을 예증과
결론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예증>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
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결론>그러므로 불교가 개방적인 것에 비해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성이 강하다.
예증에서 핵심이 되는 두 문장은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문장은 '누가'(주체)-'어떻게 된다'(결
과)는 '주체+결과'의 구조이고,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는 문장은 '어떻게 하면'-'어떻게 된다'(결과)는 '조건+결과'의 구조이
다.
여기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문장에 생략되어
있는 주체는 -기독교사상에서 파악할 때- "누구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문장은 "누구나 에
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로 바꿀 수 있으며, 그럴 경우 '누
가'(주체)-'어떻게 하면'(조건)-'어떻게 된다'(결과)는 '주체+조건+결과'
의 구조를 지니게 된다.
한편,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문장에는 '어떻게 하면'이라
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이 빠져 있다. 이 조건은 -불교사상에
서 파악할 때- "깨달음을 이루어야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문장은 "누구나 깨달음을 이루어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로 바꿀 수 있으며, 그럴 경우 "누구나 예수를 믿
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문장과 같은 '주체+조건+결과'의 구조를
지니게 된다.
이제 예증의 문장을 다시 써보도록 하자.
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음을 이루어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누구나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
다'고 한다.
두 문장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보듯 기독교와 불교라는 두 종교에서 각각 추구하고 있는
지향점(기독교의 구원, 불교의 부처가 되는 것(성불)은 모든 사람들에
게 열려져 있다. 그러나 두 종교의 지향점은 누구나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종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지향
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종교에서 각기 제시하고 있는 조건을 만
족시켜야만 한다. 비록 불교도들이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가 서로 가는 길만 다를뿐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이다"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기독교나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서 추구하는 궁
극적인 지향점과 불교에서 추구하는 부처가 되는 것이 동일하다고는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불교 외의 다른 종교에 부처가 되는 길이 있
다고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는 오직 불타의 가르침
에 따라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어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증으로부터 합당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기
독교와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과 '성불'에 이르는 조건(과정,
개방성 등)을 다시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에서 제시하고 있
는 구원의 조건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다. 다시말해 마음 문
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ㅣ에는 그 어떤 수행이나 노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
므로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한편,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불의 조건은 수행을 통하여 "깨
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내용으로서 근
본불교(원시불교) 경전에서는 삼학(戒, 定, 慧), 팔정도(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와 같은 수행 체계를 말하고 있
고, 대승불교 경전들 가운데 반야경과 화엄경에서는 각각 열단계의
수행 체계(보살 십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불교 종파 가운데
율종(律宗)에서는 수행의 내용으로 계율을 강조하고 있고, 선종(禪宗)
에서는 참선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
서 불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내용이 각
양각색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경전이나 종파를 뛰어넘어 공통적인
것은 '깨달음/성불'의 산봉우리는 누구나 원한다고 해서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산봉우리는 매우 높고 골
이 깊어서 수행자가 혼신의 정열과 노력을 쏟아야만 올라갈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즉 성불하기 위해서 불교도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취하는 방법은 세속적인 삶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수
행에 몰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출가 승려가 되어 전문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출가 승려가 되어 수행한다고 해서 '깨달음'의
성취가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교의 <사십이장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리심을 냈을지라도 닦음도 없고(無修), 증함도 없는
(無證) 경지에 이르기는 참 어렵다"([불교성전] 동국역경원, 1980,
p.257.). 이러한 현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불교도들마저도 석가모
니 당시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500년이 넘는 불교의 오랜 역사
에서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겠다는 열망을 품고 출가한 수많은
불교 승려들 가운데 지극히 적은 수의 수행자들만이 성불의 산봉우리
에 올라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 본 바와같이 기독교와 불교라는 두 종교에
서 각각 추구하고 있는 지향점(구원-성불)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들을
살펴 볼 때, 불교는 기독교보다 폭이 좁고 어려운 길을 제시하고 있
다. 불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더 닫혀 있다.
따라서 서두의 인용문 결론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불교가 개방
적인 것에 비해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성이 강하다"라는 말은 매
우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독교가 불교보다 훨씬 더 개방
되어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동국대 불교학과 출신의 승려였다가 지금은 신학박사 과정 중에
있는 이가 쓴 것입니다
창세기 다시보기 - 인간의 타락(창3장)
(차준희 / 창세기 다시보기 / 대한기독교서회).
1.악의 기원(?) : 악의 현실 전제
보통 창3장은 악 또는 죄의 기원을 밝혀주는 본문으로 읽히고 있다. 그
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본문은 악(죄) 그 자체의 존재와 기원에 대해서
는 설명하지 않는다. 악을 하나의 현실로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는 하
나님의 전재와 그 기원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문제 삼는 것 조차 어리
석은 행위로 간주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이와같이 하나님의 기원이 신비의 영역으로 가려 있듯이
그 악도 인간 실존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신비로서 그 기원이 결코 해명
되지 않는 불투명한 실존이다. 죄와 악은 현실적으로 우리 안에 상존한다.
그러나 그 기원은 단지 신비에 싸여 있다. 이 죄와 악은 타락 이전의 인간
안에 하나의 가능한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여 타락한 이후 하나님은 사람(아담과
하와)에게는 계속해서 심문을 한다. 그러나 뱀에게는 "왜 유혹하고 속였는
지"를 전혀 추궁하지 않으신다. 뱀에게 심문이 없다는 것은 악의 기원이 설
명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창3장의 이야기는 악의 기원
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악의 현실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악의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세다.
2.여자만의 책임(?) : 남자도 공범자
흔히 창3장은 죄라는 것을 인간 사회에 들여놓은 장본인이 바로 여자
혼자였으며 그 책임도 여자에게만 있다고 말하는 본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결국 많은 여성해방론자들로 하여금 인간 타락 이야기를 비
롯하여 성서 자체를 여성해방운동의 적이 되는 책으로 간주하게 하였다. 그
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본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오해임을 알 수 있다.
첫째, 뱀은 여자에게 말하면서 일관성 있게 복수 대명사(1절 "너희더러"
/ 3절 "너희는 먹지도 말고" / 4절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5절 "너
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뱀이 여자를 유혹
하고 있는 동안 줄곧 남자는 아내와 근접한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된
다.
둘째,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6절)라는 구절에서 '함께 한'이
란 말은 흔희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공간적 접촉을 의미하
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자는 '함께 있던 남편'에게 주었다는
뜻이 된다. 본문은 여자가 실과를 먹을 당시 남편도 그 범죄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더욱이 나무의 실과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금지 명령을 받은 사람
은 남자 혼자였다(창 2:17, 3:17).
이상의 몇가지 사실에 의하면 여자는 물론 남자도 범죄의 현장에 함께
있었으며,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함께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단지 주도권만을 여자가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남자도 여자와 더불어 공동
책임을 지닌 공범자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금지명령을 받은 자가
남자라는 사실은 여자보다는 오히려 남자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하고 있다.
3.바로 우리 이야기
창3장의 타락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첫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고 이미 흘러간 과거의 사건만도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과거의 한 인물일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간을
대표한다. 창 3장에서 아담이라는 히브리말은 예외없이 정관사 '하'가 붙어
서 나온다(창 3:9, 12, 17, 20, 21, 22). 여기서 아담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한
사람'을 지목하는 고유명사("그 아담")가 아니라 그 낱말의 원뜻대로 '일반
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그 사람")로 쓰인 것이다. 여기서의 아담
은 과거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바로 오늘의 우리라는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다.
따라서 타락 이야기는 우리(사람)가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바로 오늘 우
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타락 이야기에서 말하는 우리(인간)란 과연 어떤 존
재인가?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호의, 배려, 자비에 대하여 불신하는 존재다. 이
것은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계명)에 순종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충동
을 가진 존재다. 이것은 '하나님과 같이'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충동을 부채
질하는 뱀의 유혹에서 나타난다.
셋째, 인간은 죄 지은 존재다. 인간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위치를 떠남으로서 결국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
이러한 죄의 결과로 인간은 고통스럽고 암울한 현실에서 살게 되었다. 즉
사람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삶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스스로
의 죄에 있다.
넷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다. 인간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멈
추는 곳에는 인간의 삶도 정지한다. 인간의 죄의 역사는 또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는 행위에서 쉽게 발견된다.
4.선악을 알다 :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창3:5)
1)전지(全知) : '선과 악'이란 좋은 것에서부터 나쁜 것에 이르기까지
의 모든 것을 가리키는 통칭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은 곧 모든 것을 아는 것(全知)을 말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밖
에 없다. 뱀의 유혹은 곧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모든 것을 알게 될 수 있
다"고 하는 것이었다.
2)전능(全能) : '선과 악'은 문자 그대로 '옳고 그름'을 의미할 수도 있
다. 선과 악 다시말해서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 / 분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
벽하게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능력이다. 인간에게는 옳은 것(선)
과 그른 것(악)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선과 악의 관계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선과 악
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전능(全能)을 소유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것이
다.
결국 뱀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전지와 전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유혹했다.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될 필요도
없다. 인간은 인간일 때 가장 아름답다.
5.죄의 4중 파괴성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인간 본연의 위치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같
이 높아지려고 했던 인간은 죄를 범한다. 이러한 죄는 지금까지의 조화로운
관계를 4중적으로 파괴한다.
1)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
인간은 본래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러한 본래적인 궤도를 일탈한다. 하나님과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창 2:16-17,
3:6).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다녀야만 했으며(3:8), 더 나아가 자
신이 타락하게 된 1차적인 책임을 뻔뻔하게도 하나님께로 돌린다 : "하나님
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
가 먹었나이다."(3:12).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깨진 것이다.
2)인간 스스로에게도 자기 분열이 오게 되었다 :
인간은 타락하기 이전에는 스스로에게서 부족한 것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무엇인가 부족한 존재로 여기게 되
어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몸을 가린다(3:7).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맨 처
음 찾아온 것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감 / 분열 / 자기 만족의 상실이었다. 노
이로제, 열등감, 불안감, 절망과 자살 충동 등이 자신과의 불화(자기 분열)에
서 오는 증상들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자기 자신과도 단절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자족이란 없다(빌 4:11-13).
3)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깨져버렸다 :
타락 이전 최초의 인간 관계는 부부 관계처럼 완전한 일체감을 이룬 관
계였다. 원래의 인간관계는 금실 좋은 이상적인 부부 관계처럼 완벽한 조화
를 이루는 관계라는 것이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2:24-25). 그러나 타락 이후 하나
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자신과도 분열하게 되자 타락 이전에는 "내 뼈 중
의 뼈요 살 중의 살"(2:23)이라 여겼던 아내에게 타락의 책임을 전가한다
(3:12). 이는 최초의 부부 싸움이 일어나는 순간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반목, 시기 등은 인간 관계가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
다.
4)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도 파괴되었다 :
인간은 땅에서 와서 땅 위에서 땅을 갈며 땅의 소산을 먹고 살다가 땅
으로 되돌아가는 존재다(2:7, 3:19). 타락한 이전 인간은 원래 땅을 경작하기
위해 피조되었다(2:5). 그런데 인간은 타락 이후 그 땅의 저주를 받았다. 그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어 정신토록 수고하여야 겨우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3:17-18).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깨져버린 것이다. 가뭄,
홍수, 지진 등 여러 가지 장ㄴ의 재난 등이 심각할 정도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타락한 이후 네 가지의 본질적 관계가 파
괴되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이는 곧바로 인간의
자기 분열로 이어졌고, 연이어 인간 관계가 파괴되었고, 결국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깨져버리게 되었다. 원래 조화로운 관계였던 것들이 모두 부조화의
관계로 깨져버렸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창조 당시의 "보시기에 참 좋았다"
던 조화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 아니다.
구약이 전하는 참 구원이란 이렇게 깨어진 네 가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네 가지 관계가 모두 회복될 때 비로소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모
든 관계의 파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파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
리스도교의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거기
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구원의 파장은 자기 분열
이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데까지 이르러야 하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 화해하며, 인간과 자연(환경, 생태계)이 진정으로 화해할 때 참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6.하나님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9)
인간은 대체적으로 자신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을 떠난 사람에게도 먼저
찾아오셔서 말을 거시는 분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아
담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아담이란 '사람'이라는 뜻이기에
이 질문은 "이 사람아, 자네는 지금 나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라는 바
로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묻는다. "너는 지금 나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느냐?"
7.인간의 죄에도 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
니라"(3:21)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은 다음에도 그들을 내치지 않고 사랑으로 거
두어 주신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다. 이로
써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가 무화과 잎으로 만들었던 엉성한 가리개(3:7)보다
더 튼튼하고 따뜻하게 그들을 감싸주신다. 이것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의 구원이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실은 문명의 기
초를 이루는 각종 제도와 소유물들이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사실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