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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일 [천주의 모친 성모 대축일]
루카 2,16-21
어머니는 자녀의 어떤 미래를 지원했느냐에 따라 공경의 수준이 결정된다
개신교에서는 성모님을 한 신앙인으로서 공경하지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알고 지지하고 어머니의 역할을 했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공경받아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낳고 키우시며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평생을 헌신하신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 묵상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구원의 계획에서 하느님과 깊이 협력하신
마리아의 역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머니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희생적인 사랑과 자녀의 진정한 목적을 위한 변함없는 헌신입니다.
진정한 어머니는 자신이 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미래를 위해 주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1열 3장 16-28에서 솔로몬 왕의 유명한 판결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지만, 솔로몬은 희생정신을 통해 진짜 어머니를
알아냅니다.
참된 어머니는 아이가 다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며, 자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희생할 수 있다면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성모님도 요셉 성인과 함께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하셨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이십니다.
성경에서도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보여준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탈출기 2장 1-10절에서 그녀는 파라오의 명령에서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기고,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맡겼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모세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강물에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장을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탈출시키는 인물인 모세가 되었기에 구약의 모세의 어머니로서 공경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받아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자녀든 그 정체성에 대한 사명이 존재합니다.
그 사명에 협조했다면 어머니는 그 사명을 수행한 자녀의 어머니로 공경받습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어머니인 투르 페카이의 삶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문맹이었고, 여아 교육을 금기시하던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딸의 여성 교육에 대한 꿈을 지지하며 위험에 직면해 있던 말랄라를 끝까지 응원했습니다.
말랄라가 생명을 위협받으면서도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힘은 어머니의 도덕적 지지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말랄라는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고, 어머니의 믿음과 희생이 세상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투르 페카이는 그냥 어머니가 아닌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지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은 처음부터 ‘하느님 아드님의 사명’을 지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명은 당신 희생으로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메시지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한 순간부터 마리아는 믿음과 용기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습니다.
천사가 지시한 대로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며(루카 2,21), 그분이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맡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삶 동안 마리아는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매 순간 지지했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는 종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하며 예수님이 첫 번째 기적을 행하고 공생활을 시작하도록 도왔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아래에서도 마리아의 침묵 속의 존재는 그녀가 아들의 사명에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리아의 삶은 어머니의 역할이 단순히 생물학적 관계를 초월하여, 하느님 아드님의 사명을 지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고 지혜가 자랐다고 합니다.
부모가 예수님의 사명을 지원하며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드님, 곧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불리시고 공경받아야 당연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교육받지 못하고 자라셨습니다.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라셨지만, 아들 셋을 잘 키웠고 그중 하나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성당 가면 사제의 어머니로서 존경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어떤 공경을 받을지는, 내가 이 세상에서 누구의 어머니가 되느냐에 달렸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하느님 자녀를 낳고 성장시키면 하느님 자녀의 어머니로서 하늘에서 공경받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이 어떻게 하늘에 들어가고 하늘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보여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은 마리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끄는 삶을 살 때, 우리도 이 거룩한 사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양육하고 지원했는지에 따라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계획에 봉헌하며, 우리의 희생이 영원한 열매를 맺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믿음, 용기,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목적을 향해 인도하는 영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됩시다. 아멘.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복음: 루카 2,16-21
평범한 일상을 사랑했던 마리아님,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이토록 큰 부끄러움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은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인간 역사의 잔악함과 남루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무리 슬프고 스산함에도 불구하고 힘과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주님 축복과 사랑의 표시로 받은 이 은혜로운 첫날, 우리 모두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죽음과도 같은 깊은 슬픔에 잠긴 이웃에게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며 따뜻이 위로하는 사랑의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교회 전례는 새해 첫날을 세상 모든 신앙인들의 모델이요 이정표이신 성모님 대축일로 정해 경축하게 합니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의미 있는 결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마리아는 지극히 작은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산골이자 변방 나자렛 출신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작은 존재 마리아를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첫째가는 협조자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휘황찬란한 영광의 길, 떠들썩한 권력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큰 것을 작은 것 안에, 참나무를 도토리 안에, 말씀을 육신 안에, 영원을 순간 안에 담아두기를 좋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화려한 겉모습이나 번쩍거리는 빛 또는 성전의 장엄함과는 거리가 먼 하느님의 새로운 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계실 거친 지푸라기로 만든 구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아기는 젖이 먹고 싶어서 훌쩍 거리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지으며 우리를 향해 아주 작은 손을 내뻗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아기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신앙 여정의 가장 좋은 모델이요 본보기가 되시는 나자렛의 마리아의 삶과 영성에 대해 소개하는 짧으면서도 유익한 소책자가 하나 출간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종 수도회 소속 사제이며 대 영성가인 에르메스 론키의 ‘마리아는 길을 떠나’(바오로딸)입니다.
열심히 책을 읽다보니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너무나 적합한 기도문이 눈에 띄길래 소개합니다.
평범하고도 거룩한 여인 마리아님, 저희가 평범한 일상의 삶을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터전으로 여기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나자렛 집의 냄비와 베틀 사이에서, 눈물과 기도 사이에서, 양모 실타래와 성경 두루마리 사이에서
당신은 진정 온전한 여성의 품위를 지닌 모습으로
회한 없는 기쁨, 절망하지 않는 슬픔, 기약없는 이별을 체험하셨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사랑했던 마리아님,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하늘의 모후 관을 쓰시기 전 가련한 이 땅의 먼지를 먼저 맛보셨던 마리아님, 저희가 하느님의 업적에 경탄하는 마음만은 잃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스도에게 위안을 받는 그리스도인이기보다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안토니오 벨로 신부)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강론>
(2025. 1. 1. 수)(루카 2,16-21)
<“땅에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16-21).”
1)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예수님은 황제의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시골의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황궁의 침대가 아니라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셨던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는 표징, 또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나타내는 ‘표징’이 됩니다.
“메시아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표징.
2) 그리고 천사 군대가 나타나서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첫 번째로 들었던 목자들, 바로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즉 충실하고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소식’만 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두 가지 선물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과 ‘평화’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4.17-18).”
그리스도 예수님은 참 평화의 원천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이고, 참 평화를 누리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그 평화가 어떤 평화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최소한의 자기 방어력도 없는, 너무나도 연약하기만 한 갓난아기, 그러나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 그 모습 자체가 평화입니다.
4)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사야서의 예언이 연상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 11,6-9).”
이 예언을 간단하게 줄이면, “메시아의 나라는 약육강식도 없고, 적자생존도 없는, 오직 사랑만 있는 나라이다.”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고, 그 나라에는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고, 증오심도 없고 적개심도 없습니다.
5)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려면 우리 쪽에서도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평화를 빼앗아가는 죄들에서 벗어나려면 회개해야 하고, 이기심과 미움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도 함께 살아야 합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높은 장벽을 쌓아 놓고서, 또 감시 카메라와 경보 장치들을 잔뜩 설치해 놓고서, 그 안에 숨어서 혼자서 살면, 몸은 ‘안전’할 수 있겠지만, ‘영혼의 평화’는 없습니다.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두려움만 있습니다.
바로 그 두려움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6ㄴ-18).”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