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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진평왕 12년(590)에 진골 출신으로 소판벼슬을 지낸 김무림(金武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늙도록 자식이 없던 김무림은 부인과 함께 천수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자식 낳기를 지성으로 발원하여 자장을 얻었다. 자장은 어려서부터 마음이 맑고 슬기롭고 문장과 생각이 풍부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부모를 여윈 뒤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원녕사(元寧寺)라는 절을 짓고 수도의 길로 들어섰다. 구도를 위하여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을 때 조정에서 여러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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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한 지 몇 해 뒤에 신계사 보운강화에 갔다가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뒤로, 한암은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운수행각에 나서 성주 청암사의 경허화상을 만났다.
하루는 경허화상을 모시고 차를 마시다가 경허화상이 '선요'의 한 구절인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라는 문답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자, 한암은 '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이 앞에 섰다 ' 고 대답하였다. 경허 화상은 이튿날 법상에 올라가 대중을 돌아보면서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 고 인가하였다. 이때가 스물 네 살 이었다.
이어 한암은 서른살 되던 1905년 양산 통도사 내원선실의 조실로 있다가 1910년 봄에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보임(保任) 중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때가 서른다섯 되던 겨울이었다. 한암은 이때부터 중생이 서로 의탁하여 사는 이 세상에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면서 수시수처(隨時隨處)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당시 송만공(宋滿空) 스님과 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한암스님은 쉰이 되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 스님으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하면서 오대산에 들어갔다. 한암은 오대산에 들어와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나와 나무가 되니 중대 앞의 단풍나무가 그것이다. 이즈음 조계종 초대 종정이 되었다.
하루는 일본 조동종 사토오가 오대산 상원사에 와 한암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義)입니까?" 하고 묻자 한암스님은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사토오가 "스님은 대장경과 조사어록을 보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하니 한암스님은 사토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적멸보궁에 참배나 갔다 오라" 고 대답하였다. 이어 사토오는 "스님께서는 만년의 경계와 초년이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고 묻자 한암은 "모르겠노라" 대답했다. 이에 사토오는 일어나 절을 하면서 활구 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어 감사하다고 하자 한암은 "활구라고 하였으니 벌써 사구(死句)가 되었네" 하였다. 사토오는 삼 일 동안 머물다 떠나면서 "한암스님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다." 하며 떠났다.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일본 저명인사의 발걸음이 잦았다. 일본 경무국장(치안감) 이케다가 2차대전 막바지에 찾아와 "이번 전쟁은 어느나라가 이기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이 있는 나라가 이기지요" 하며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대답하였다. 패색이 짙은 전세를 아는 이케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떠났다.
6.25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일사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한암 스님은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受) 하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뒤 불을 지르라고 했다. 장교가 "스님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하자 한암스님은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하며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오늘날 상원사 법당이 남은 것은 오로지 한암스님의 덕이다.
일사후퇴로 모두 피난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나 1951년 3월 21일 - 1951년 신묘년 음력 2월 14일 -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때 한암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은 54년이었다.
당시 정훈장교인 김현기 거사가 사진을 찍기 위해 입적하신 방한암 스님을 햇볕이 드는 바깥채로 모셔 나오기 위하여 육신을 드니 몹시 가벼웠다고 한다. 그것은 방한암 스님이 입적하기 보름 전부터 사바세계의 연(緣) 이 다함을 알고 물 외에는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사진 앞에 있는 경상(經床)은 김현기 거사가 가져다 놓았으며 벽에 쳐져 있는 담요는 군인들이 문짝을 태워서 문에 담요로 두른 것이다.
한암 스님은 이야기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발록(一鉢錄)」 한 권을 남겼는데 그마저 1947년 봄, 상원사에 불이 났을 때 타고 말았다. 이 책은 뒤에 1995년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이 문도들의 뜻을 모아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 으로 재간행하였다. 제자로는 보문(普門), 난암(煖岩), 탄허(呑虛)등이 있으며, 한암스님은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뒤 입적할 1951년까지 27년 동안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아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본 21조목의 선문답은 가장 기본되는 선의 본질과 수행방법에 있어서 간화(看話)와 반조(返照)의 조화와 구경(究竟)의 경지 등을 명쾌하게 규명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제10의 간화(看話)와 반조(返照)에 관한 문제는 참선(參禪)에 있어서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중대한 문제인 만큼 수레의 두 바퀴처럼 상호보완의 관계임을 각별한 노파심으로써 상세히 설파였으며, 제11로부터 맨 끝까지는 나옹스님의 문목(門目)을 재인용한 것으로 간명직절(簡明直截)한 착어(着語)로 답하였다.
본 선문답은 스님의 선사상을 가장 체계적이고 조리있게 논술한 것으로 본서의 백미(白眉)라 할 것이며 수행자들의 영원한 보감이라 할 것이다.
이 문안(文案)은 금강산 만일암에서 성원을 개설하고 스님을 조실로 추대하여 결제정진 중 열중(悅衆)이었던 이력(李礫)의 질문에 응답해 주신 것으로 그동안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 출처 : 한암일발록(漢巖一鉢錄) >
제1문:
참선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또한 참선을 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제1답:
달마1)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도요, 도가 곧 선(禪)이다.
고 하시니, 선(禪)이란 곧 중생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중생심에는 두 가지의 구별이 있으니 하나는 청정한 마음이요, 둘째는 물든 마음이다. 물든 마음은 무명삼독(無明三毒)의 마음이요, 청정한 마음은 무루진여(無漏眞如)의 본성이다. 무루진여를 염(念)하고 불이(不二)를 수순(隨順)하는 것은 제불(諸佛)과 같아서 동요가 없는 해탈이요, 무명삼독을 쫓아서 많은 악업을 짓는 것은 육취(六趣)2)에 빠져 영겁에 윤회하는 것이니, 청정한 마음은 사람의 바른 길이요 편안한 집이며, 물든 마음은 사람의 험한 길이요 불구덩이이다. 어찌하여 지혜로운 자가 바른 길을 버리고 편안한 집을 비워둔 채 험한 길로 나아가며 불구덩이에 빠져 만겁의 괴로움을 받으려고 하는가. 그대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참선이란 특별난 일이 아니다. 참(參)이란 합(合)함이니, 자성에 합하여 청정한 마음을 보양(保養)하고 바깥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음이다.
오직 바라건대 일체중생이 다함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 무상대도를 깨달아서 다시는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속히 불과(佛果)를 증득하기를 바라고 바라는 바이다.
第一問
參禪은 人生에게 有何關係乎잇가 不爲라도 亦無妨乎잇가 不得不爲之關係가 有乎잇가?
第一答
達摩祖師云하사대 心卽是佛이오 佛卽是道오 道卽是禪이라하니 是知禪者는 卽衆生心也라 大凡衆生心은 有二種差別하니 一者는 淨心이오 二者는 染心이니 染心者는 卽無明三毒之心也오 淨心者는 卽無漏眞如之性也라 念無漏眞如而隨順不二者는 等諸佛而不動解脫하고 縱無明三毒而釀成諸業者는 泥六趣而長劫輪廻하나니 則淨心者는 是人之正路也며 安宅也오 染心者는 是人之險途也며 火坑也라 豈有智者 捨正路, 曠安宅而趣險途, 墮火坑하야 欲受萬劫苦辛哉아 公은 其深思之어다 參禪者는 不是別件物事也라 參者는 合也니 合於自性하야 保養淨心而不外馳求也라 惟願一切衆生이 同發眞正身心하야 悟入於無上大道하야 更不墮於邪網中하고 速證佛果를 幸甚幸甚하노라
제2문:
이미 참선을 하고자 한다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제2답:
참선을 하는 사람이 일단대사(一段大事)의 인연을 밝히고자 한다면, 맨 처음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신의 마음이 법이어서 구경(究竟)에 다름이 없음을 믿어 철저하게 의심이 없어야 하나니, 만일 이와 같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비록 만겁 동안 수행을 한다 할지라도 마침내 진정한 대도(大道)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이때문에 보조선사3)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自性) 밖에 법이 있다고 말하여 이러한 마음을 굳건히 고집하면서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진겁(塵劫 :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신연비(燒身燃臂)하며, 뼈를 부셔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베끼며,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일종식(一種食)으로 아침을 재계하며 그리고 일대장경(一大藏經)을 모두 독송하며, 갖가지 고행을 한다 할지라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기에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라고 하니, 이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것이 제일의 요체(要諦)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곧 외불(外佛)이니 나에게 어찌 부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불(諸佛)이 나의 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第二問
旣欲參禪인댄 判何等心乎잇가
第二答
夫參學人이 欲明此一段大事因綠인댄 最初頭에 信自心是佛이며 自心是法하야 究竟無異하야 徹底無疑니 若不如是自判이면 雖萬劫修行이라도 終不得入於眞正大道矣리라 故로 普照禪師云하사대 若言心外에 有佛하고 性外에 有法이라하야 堅執此情하야 欲求佛道者는 縱經塵劫토록 燒身燃臂하며 敲骨出髓하며 刺血寫經하며 長坐不臥하며 一食卯齋하며 乃至轉讀一大藏敎하야 修種種苦行이라도 如蒸沙作飯하야 只益自勞爾라하니 是知自悟自修하야 自成佛道 爲第一要妙也라 設或心外有佛이라도 佛是外佛이니 於我에 何有哉리오 故云諸佛이 非我道라하니라
제3문:
이미 초발심(初發心)의 마음을 지녔다면,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진실한 참구가 됩니까?
제3답:
상근기(上根機)의 큰 지혜를 가진 이는 하나의 기연과 경계에서 이를 잡아 곧바로 사용하므로 굳이 많은 말이 필요 하지 않지만, 만일 참구를 논한다면 마땅히 조주(趙州)4)의 무자(無字)5)와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6)와 동산(洞山)7)의 마삼근(麻三斤)8)과 운문(雲門)9)의 마른 똥막대기[乾屎쪻]10)등 맛이 없는 말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이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 마치 모기가 무쇠소에 앉아 주둥이를 박지 못할 곳에 몸까지 몰입하듯 하여야 한다. 만일 조그마한 차별의 생각과 털끝만한 계교와 헤아림이 그 사이에 동하면, 옛 사람이 말한잡독이 마음에 침투하여 지혜를 손상한다.함이니, 학인이 가장 먼저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옹11)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생각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滅)하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니, 생사의 즈음에 당하여 힘을 다해 화두(話頭)를 들면 생사가 곧바로 다할 것이니, 생사가 곧바로 다한 것을 적(寂)이라 한다. 적(寂) 가운데 화두가 없는 것을 무기(無記)라 하고 적(寂) 가운데 화두가 어둡지 않은 것을 영(靈)이라 말하니, 공적영지(空寂靈知)가 부서짐이 없고 혼잡됨이 없으면 곧바로 이루어진다.
고 하니, 학인은 마땅히 이 말을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第三問
旣判初心인댄 如何히 用工하여야 爲眞實參究乎잇가
第三答
上根大智는 於一機一境上에 把得便用이라 不必多言이어니와 若論參究댄 當以趙州無字와 庭前栢樹子와 洞山麻三斤과 雲門乾屎쪻等 無味之語로 疑來疑去하며 擧來擧去하되 如蚊子上鐵牛하야 下嘴不得處하야 和身透入이니 若有些毫差別念과 纖塵計較量이 動乎其間이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니 學者第一深誡者也니라 懶翁祖師云하사대 念起念滅을 謂之生死니 當生死之際에 盡力提起話頭하면 生死卽盡하리니 生死卽盡處를 謂之寂이라 寂中에 無話頭를 謂之無記오 寂中에 不昧話頭를 謂之靈이니 只此空寂靈知 無壞無雜하면 不日成之라하니 學者 當以是語로 爲指南이니라
제4문:
이미 여실(如實)히 참구하였다면, 어떠한 것이 여실하게 힘을 얻은 것입니까?
제4답: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힘이 안 드는 곳이 곧 힘을 얻는 곳이다.
고 하니, 화두가 의심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스스로 들어짐에 이르러서야 육근(六根)의 문이 자연히 툭 열리어 홀로 드높고 드높으며 평탄하고 평탄하게 되어, 마치 달빛이 격랑 속에 투사되어 부딪쳐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휩쓸려도 유실되지 않음과 같은 때에 이르러야 대오(大悟)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털끝만큼이라도 지각의 마음을 내면 순일(純一)한 오묘함이 끊어져서 대오(大悟)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니, 간절히 이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第四問
旣如實參究인댄 如何한 것이 爲如實得力乎잇가
第四答
古德云 省力處 便是得力處라하니 話頭 到不疑而自疑하며 不擧而自擧하야 六根門頭 自然虛豁豁地하며 孤逈逈地하며 平妥妥地하야 比如透照月華 在灘浪中하야 觸不散, 蕩不失時에 大悟近矣리니 到這裏하야 若生毫釐知覺心이면 卽斷純一之妙하야 不得大悟하리니 切須誡之어다
제5문:
이미 여실하게 힘을 얻었다면 반드시 깨달음이 철저[大悟徹底]할 것이니, 어떠한 것이 여실하게 깨달음이 철저한 경계입니까?
제5답: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분명하고 분명하게 법을 깨달음이 없을지언정 법을 깨달음이 있으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
하였고, 또 다시
깨달음이 있으면 도리어 깨닫지 못했을 때와 같다
고 하니, 만일 깨달음이 철저한 경계가 있다고 한다면 곧 이것은 깨달음이 철저한 경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영운(靈雲)선사가 복사꽃을 보고 깨친 것[靈雲桃花]12)과, 향엄(香巖)선사가 대나무에 돌을 던진 것[香嚴擊竹]13)과, 현사(玄沙)스님이 발가락을 접질린 것[玄沙蹴指]14)과, 장경(長慶)스님이 주렴을 걷어 올렸던[長慶捲簾]15) 등의 많은 큰 스님들이 깨쳤던 일은 모두 거짓으로 전해온 것일까?
앙산(仰山)16)이 말하기를,
깨달음이란 없지 않으나 제2의 경지가 됨을 어찌하리오
라고 말하니, 절반쯤 이르름을 말한 것이다.
현사(玄沙)스님이 말하기를,
감히 노형을 보니 아직은 철저하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니, 실로 노파심이 간절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깨달음이 철저한 경계가 있다는 것이 옳은 것일까. 깨달음이 철저한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 까. 어떻게 하면 이를 알 수 있을까?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게송을 읊었다.
해천(海天)에 밝은 달이 처음 솟아난 곳
암벽의 원숭이 울음 그칠 때.
第五問
旣如實得力인댄 必爲悟徹이니 如何한 것이 爲如實悟徹境界乎잇가
第五答
古德云하사대 明明無悟法이언정 悟法이면 却迷人이라하고 又云하사대 悟了에 還同未悟時라하니 若有悟徹境界면 便不是悟徹也라 然則靈雲桃花와 香嚴擊竹과 玄沙蹴指와 長慶捲簾等 諸大宗師所悟徹事는 皆傳虛也耶아 仰山云하사대 悟則不無어니와 爭柰爲第二頭리오하니 道得一半了也라 玄沙云하사대 敢保老兄猶未徹이라하나니 實老婆心切이로다 到這裏하야 道有悟徹境界 是아 道無悟徹境界 是아 如何得諦當去오 良久云 海天明月初生處에 巖岫啼猿正歇時니라
제6문:
이미 깨달음이 철저한 후에는 어떠한 것이 여실한 수양(修養)입니까?
제6답: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이미 관문을 지난 자는 굳이 다시 나루터를 물을 것이 없 다.
고 하니, 이미 깨달음이 철저하다면 어찌 수양을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구름과 달은 한가지이나 시내와 산은 각기 다르니 또한 아래 문장의 주각을 들을 지어다.
한 줌 버들가지 거두지 못하여
봄바람에 날리어 옥난간에 실려 있다.
第六問
旣悟徹後에는 如何한 것이 爲如實修養乎잇가
第六答
古云已過關者는 不必問津이라하니 旣云悟徹인댄 何論修養이리오 雖然如是나 雲月是同이나 溪山各異하니 且聽下文註脚하라 一把柳條를 收不得하야 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제7문:
이미 수양한 후에는 어떠한 것이 여실한 증득입니까?
제7답: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잣나무도 또한 성불을 할 수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있다
어느 때 성불할 수 있습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느 때 허공이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
이는 옛 사람이 무생(無生)의 도리를 철저하게 깨쳐서 거꾸로 사용하고 마음대로 들어 쓰는 시절이겠지만 오늘 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속히 일러라, 속히 일러. 허공이 땅에 떨어지는가, 잣나무가 성불을 하는가. 절대로 허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과 잣나무가 성불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손가락을 한 번 튕기고 이르시기를,
하마터면 주각을 잘못 쓸 뻔 했다.
第七問
旣修養後에는 如何한 것이 爲如實證得乎잇가
第七答
僧이 問趙州호대 栢樹子 還有成佛也無잇가 州云有니라 僧云 幾時에 成佛잇가 州云하사대 待虛空이 落地니라 僧云 虛空이 豈幾時에 落地오 州云하사대 待栢樹子成佛이라하시니 此是 古人이 徹證無生하야 倒用橫拈底時節이어니와 卽今에 作쪻生고 速道速道하라 虛空이 落地乎否아 栢樹子成佛否아 切不得作虛空이 不落地想이며 栢樹子不成佛想이어다 彈指一下云 幾乎錯下註脚이로다
제8문:
이미 증득한 후에는 어떠한 것이 여실히 원만하게 끝을 잘 맺는 것입니까?
제8답: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눈앞에는 스님이 없고 여기에는 노승이 없으니, 이는 눈앞의 법이 아니오 이목(耳目)으로 이를 바 아니다.
고 하니, 제방의 선지식들이 이 말을 가지고서 어떠한 사람의 경계인가를 말들하곤 한다. 나는 여기에 이르러 모두 다 잊어 버렸노라.
第八問
旣證得後에는 如何한 것이 爲如實圓滿克終乎잇가
第八答
古德云하사대 目前에 無쪻梨하고 此間에 無老僧하니 不是目前法이며 非耳目之所到라하니 諸方善智識將此語하야 爲什쪻人境界나 我道這裏에 總忘却了也로다
제9문:
처음 발심으로부터 끝을 잘 맺는데 이르기까지 어떠한 마음이 제일 긴요하며 귀중한 경구(警句)가 되는 것입니까?
제9답:
석두17)화상의 ≪참동계(參同契)≫18) 맨 끝 구절에
삼가 참선인에게 고하노니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고 하였는데, 후일 법안(法眼)19)스님이 이 말을 들어 말하기를,
실다운 은혜를 참으로 갚기 어렵다.
고 하니, 나 또한 실다운 은혜를 참으로 갚기 어렵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야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소식인가.
한 차례 큰 기침을 하고서 게송을 내렸다.
달큰한 복숭아와 감을 먹지 아니하고
산을 따라 올라가 시큼한 배를 따노라.
第九問
自初發心으로 至克終히 何心이 爲第一緊要하오며 爲有力寶箴乎잇가
第九答
石頭和尙參同契末句云하사대 謹白參玄人하노니 光陰을 莫虛度라하야늘 後來法眼이 擧此語云하사대 實恩大難酬라하나니 吾亦實恩大難酬로다 雖然如是나 如何是不虛度底消息고 噓一噓云 不喫甘桃柿하고 緣山摘醋梨니라
제10문:
간화(看話)와 반조(返照)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매양 참선인들이 서로 논쟁하니, 바라건대 자상히 논변하여 밝혀 주소서.
제10답:
나는 웃으면서 말한다. 위에서 물은 바는 엇비슷이 곡조가 같아서 들을만 하지만, 여기에서 물은 뜻은 또다시 바람이 별조(別調)로 부는구나. 하지만 나의 한 마디 말을 들어보아라.
큰 코끼리가 강을 건넘에 흐르는 물을 가로지르니
토끼와 말이 밑바닥에 닿지 못함을 관계치 말라.
알겠는가. 만일 알지 못한다면, 나는 오늘날 그대들과 더불어 자세히 말하리라.
옛날에 앙산스님이 위산20)스님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참부처의 주처(住處)입니까?
위산이 말하였다.
생각으로써 생각없는 데 이르게 하는 오묘함으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반조(返照)하여서 생각이 다하여 근원(根源)으로 돌아가면 성상(性相)이 상주(常住)하여 일과 이치가 둘이 아니요, 진불(眞佛)이 여여하다.
앙산이 그의 말에 곧바로 대오(大悟)하였다. 그 후 심문분(心聞賁)21)선사가 이 화두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생각으로써 생각없는 데 이르게 하는 오묘함으로써 신령한 불꽃의 무궁함을 반조하여서 생각이 다하여 근원(根源)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여기에서 벗어나면 다시 무슨 정결한 병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시끄러운 티끌 속에 들어가서 거스르고 순응한 들 무엇이 물들게 하고 기뻐하게 하고 성나게 하리오. 그러한 이후에 밝음과 어둠 두 가지를 철저하게 타파하여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곳을 향하여 대비원(大悲院)에 재(齋)가 있다(大悲院裏有齊).22)는 화두를 간파하여야 바야흐로 유래(由來)를 알 수 있으며 바야흐로 낙처(落處)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한 쪽 눈만으로도 산하대지를 조파(照破)하니, 마치 하늘에 장검을 빗겨든 것 같아서 어느 누가 감히 그 앞에서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이와 같은 힘이 있어야만이 바야흐로 능히 성인의 대열에 들어가서 인행(因行)을 부지런히 닦아 자비와 지혜의 원력(願力)을 성취하게 되며,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이로운 법문도 또한 오직 이 길을 따라 나아갈 뿐이요 별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신령스런 불꽃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것이 반조가 아니겠는가.
대비원(大悲院)에 재(齋)가 있다는 것을 본다.는 것이 화두(話頭)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앙산은 신령한 불꽃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말에 이미 대오(大悟)하였거늘, 심문분(心聞賁)선사는 무엇 때문에 다시 화두를 관(觀)하도록 하였을까?
깨달음을 얻은 자가 모두 앙산과 같다면 다시 말할 것이 없으려니와, 만일 앙산의 깨달은 바에 미치지 못한다면 지견(知見)이 없어지지 않아서 생사의 마음을 타파하지 못할 것이다. 생사의 마음을 타파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대오(大悟)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심문분(心聞賁)선사가 반조하는 가운데 철저하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이처럼 특별히 말한 것이다.
또한 고봉(高峰)23)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를 들다가 죽은 시체를 끌고 다닌다.는 언구(言句)를 타파하여 대지가 잠기고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서 정(定)을 잡고 주인이 되었지만, 설암스님의 잠잘 때에 꿈도 없고 생각이 없는 곳에서는 주인이 어느 곳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받았을 때 곧바로 대답할 말이 없고 말할 수 있는 이치가 없었다. 설암스님이 다시 나에게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이 어느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하는가.를 관(觀)하도록 하였는데, 결국은 함께 잠자는 도반 스님이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서 그물 속에서 뛰쳐나온 듯이 툭 트이어 한 생각에 작위가 없어 천하가 태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 그 사람이오, 옛날의 행리(行履)가 바뀌지 않았다.
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일귀하처(一歸何處)는 화두(話頭)를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을 보라는 것이 관조(觀照)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고봉은 이미 일귀하처에서 굳건히 정(定)을 잡고 주인이 되었는데, 설암스님은 무엇 때문에 힐책하여 다시 일각주인공 (一覺主人公)을 보도록 하였을까?
이는 특별히 화두를 보는 가운데 철저하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이와 같이 가르쳐준 것이니, 과연 무엇이 우수하고 무엇이 열등하며, 무엇이 원만하고 무엇이 편벽하다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깨달음이 철저하고 철저하지 못함이 사람의 진실과 허위, 구경(究竟)을 얻었느냐와 못 얻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방편의 우열(優劣)과 심천(深淺)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삼가 불조(佛祖)의 정법(正法) 위에서 부질없이 이견(二見)을 내어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종고24)선사가 영시랑(榮侍郞)에게 보내는 답서에 이르기를,
다만 일상생활의 인연이 있는 곳에서 무시로 살피되, 내가 타인과 더불어 명쾌히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끊어버림은 누구의 은혜를 입은 것이며, 필경 어느 곳에서 유출되었는가를 살피고 살핀다면 평소에 생처(生處)인 화두는 스스로 숙처(熟處)가 되리니, 생처(生處)가 이미 숙처(熟處)가 되면 숙처(熟處)는 도리어 생처(生處)가 될 것이다. 어느 곳이 숙처(熟處)인가. 5음(五陰)․6입(六入)․12처(十二處)․18계(十八界)․25유(二十五有) 등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사량계교(思量計較)하는 심식(心識)이 밤낮으로 아지랑이처럼 번뜩여서 잠시도 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하나의 끄나풀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에 유랑케 하며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이 하나의 끄나풀이 이미 화두가 되면 보리열반과 진여불성이 문득 현전(現前)하게 될 것이다. 현전(現前)한 때에 이르러서는 또한 현전했다는 사량도 없어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옛 스님이 깨달음을 얻고서 말하기를,
눈에 응한 때에는 일천 개의 태양이 비춤과 같아서 만상이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고, 귀에 응한 때에는 깊은 골짜기와 같아서 크고 작은 소리가 족히 응하지 않음이 없다.
고 하니,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데에서 구하지 않고 다른 힘을 빌리지 않은 것이다. 자연히 인연에 응할 때에 활발하고 활발한 것이다. 이와 같음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세간의 속된 일을 사량하는 마음으로 사량이 미치지 못한 곳을 돌이켜서 사량하여 보아라. 어느 곳이 사량이 미치지 못한 곳인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이
없다.
고 말씀하시니, 이 하나의 글자에 어떠한 기량이 있는 것일까? 청컨대 안배하여 헤아려 보도록 하라. 계교와 안배를 놓아 둘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뱃속에서 번민하며 마음에서 번뇌할 때가 바로 좋은 시절이어서 제8식(第八識)25)이 서로 차례로 행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은 때에는 놓아 버리지 말고 다만 무자(無字)를 들어야 한다. 이를 들어오고 이를 들어가면 생처(生處)는 스스로 숙처(熟處)가 되고 숙처(熟處)는 스스로 생처(生處)가 될 것이다.
고 하였으니, 대체로 일용 인연처에서 살피고 살피는 것이 반조가 아니겠는가. 사량진로(思量塵勞)의 마음을 가지고서 무자 (無字) 상으로 돌아가 이를 들어서 놓지 않는 것이 화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종고선사 또한 사람들에게 반조하는 것으로써 법식(法式)을 가르쳤고, 겸하여 화두드는 것으로써 대략 (大略)을 보여주었으니, 다만 그 법식(法式)과 대략(大略)만을 가르쳐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분명하고 분명하게 말씀하기를,
보리열반과 진묘여불성(眞妙如佛性)이 문득 현전(現前)하여 생처(生處)는 스스로 숙처(熟處)가 되고 숙처(熟處)는 스스로 생처(生處)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살펴 본다면, 화두를 드는 것과 반조하는 두 가지의 공부에서 그 효험을 얻음이 어찌 깊고 얕음이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와 같이 가르쳐 준 기연을 하나하나 낱낱이 들어 말할 수는 없으나 모두 반조와 간화(看話)로써 차별상을 가지지 않았거늘, 오늘 날의 학인들이 서로가 공격하여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 이처럼 배워 왔는가.
혹자는 본분화두에 따라서 여법(如法)히 참구하다가 조금 쉬어진 곳이 있으면 곧 만족하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조금 이로(理路)를 섭렵해 보았다 하면 곧 이를 쓸어버리고자 하듯 발자취를 없애니, 이는 불조(佛祖)의 가르침 가운데 무한한 방편이 모두 의리(義理)에서 나와 진흙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 사람들을 위하여 철저하게 큰 방편을 삼은 줄 알지 못함이니, 이러한 사람들은 냉담무위(冷淡無爲)의 깊은 구덩이 속에 빠져 꼼짝도 하지 않는 자이다.
혹자는 반조의 법문으로써 여실히 참구하다가 조금이라도 응집된 기미가 있으면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여 다시금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기이한 생각을 가져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도리를 말하고 지견을 나타내니, 이는 납승가(納僧家)의 본분정령(本分正令)이 부처를 삶고 조사를 삶으며 뼈에 사무치고 골수에 사무쳐 거듭거듭 모조리 명근(命根)을 끊어버리는 참 수단인 줄 알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은 문호(門戶)의 빛과 그림자를 잘못 알아서 구경(究竟)의 안락처로 삼은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하고서 방치한다면, 우리 부처님의 바른 종지가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니 애통하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그대가 물은 바는 때에 맞게 힘써야 할 일을 바로 알고서 물은 것이라 하겠다. 내 비록 얇은 지식으로 공부한 게 없으나 어떻게 한 마디 말로 분명한 것을 가려서 말류(末流)의 폐단과 고질병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와 같이 갈등하노라.
그러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학인은 다만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
고 하였으니, 사구(死句)는 이로(理路)와 언로(言路)와 견문과 이해와 사상이 있기 때문이며, 활구(活句)는 이로(理路)와 언로(言路)와 재미와 모색이 없기 때문이다.
참선을 하는 도인이 반조와 간화를 막론하고 여실히 참구하면 마치 한덩이의 불과 같아서 가까이 하면 얼굴을 태우게 됨과 같으리라. 도무지 불법의 지해(知解)를 붙일 곳이 없으리니 어느 겨를에 화두니, 반조니, 같으니, 다르니 하는 허다한 것들을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생각이 앞에 나타나 투철하게 관조하여 남음이 없으면 백천법문과 무량한 묘의(妙義)을 구하지 않고서도 원만하게 얻어서 여실히 보고 여실히 행하며 여실히 써서 생사(生死)에 큰 자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오로지 모든 생각들이 여기에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第十問
看話與返照가 有何差異乎잇가 每見今之學者 互相爭論하오니 幸垂詳細判明하소서
第十答
余笑云上來所問은 依쪻似曲쪻勘聽이어니와 此之問意 又被風吹別調中이로다 雖然如是나 聽吾一言하라 香象이 渡河에 能截流하나니 莫關兎馬未窮底로다 會쪻아 若未會댄 吾今日與公으로 仔細說호리라 昔에 仰山이 問쪻山호대 如何是眞佛住處잇고 쪻山云하사대 以思無思之妙로 返思靈焰之無窮하야 思盡還源하면 性相이 常住하야 事理不二오 眞佛이 如如니라 仰山이 於言下에 大悟하시다 後來에 心聞賁이 擧此話云하사대 以思無思之妙로 返思靈焰之無窮하야 思盡還源이라 하시니 這裏에 脫得去면 更有什쪻淨潔病이리요 恁쪻入쪻塵逆順하면 敎誰로 嗔喜染着이리요 然後에 打徹明暗兩頭하고 向不明不暗處하야 看大悲院裏有齋話하야사 方知來由며 方知落着이며 恁時에 一隻眼으로 照破山下大地하니 如倚天長劒하야 誰敢當頭쪻着고 爾有如是筋骨이라사 方能向列聖叢中入作하야 因行掉臂하야 成就悲智願力하며 己他兼利法門도 亦只從遮一條路去오 別無道理라 하니라 返思靈焰之無窮이 非返照乎아 看大悲院裏有齋話 非話頭乎아 仰山 於返思靈焰之言下에 旣大悟어늘 心聞賁이 何故로 更敎看話頭耶아 發悟人이 皆如仰山則已어니와 若未及於仰山所證處則知見이 未忘하야 生死心不破矣니 生死心不破면 則何言大悟이리오 此賁禪師 特爲返照中未徹者하야 言之也오 又高峰이 擧萬法歸一, 一歸何處하다가 觸破打死屍句子하사 大地平沈하고 物我俱忘하야 把得定, 作得主어늘 而被雪岩和尙의 問正睡着時에 無夢無想(闕一字) 主在甚處오하야 直得無言可對하며 無理可伸하야 更敎看我者一覺主人公이 在甚處하야 安身立命고하야 畢竟於同宿道友 推枕作聲之下에 如網羅中跳出하야 一念無爲하야 天下太平이라 依前只是舊時人이오 不改舊時行履處라 하시니 一歸何處 非話頭乎아 看一覺主人公이 非觀照乎아 高峰이 旣於一歸何處上에 把得定, 作得主어늘 而雪岩이 因甚詰問而更敎看一覺主人公乎아 此는 特爲看話中未徹者하야 敎之也라 果何優何劣이며 何圓何偏之差異乎아 是知悟之徹不徹이 在於人之眞實與虛僞와 究竟與不究竟이오 不在於方便之優劣淺深也라 愼莫於佛祖正法上(闕一字)生二見하야 自作障難焉이어다 且쪻禪師 答榮侍郞書云하사대 但向日用應緣處하야 쪻捕호대 我自能與人으로 快斷是非曲直底는 承誰恩力고 畢竟에 從甚쪻處流出고 쪻捕來, 쪻捕去하면 平昔에 生處路頭는 自熟하리니 生處旣熟則熟處却生矣리라 那箇是熟處오 五陰, 六入, 十二處, 十八界, 二十五有 無明業識으로 思量計較인 心識이 晝夜쪻쪻호대 如野馬하야 無暫停底 是라 遮一路索이 使得人으로 流浪生死하며 做不好事하니 遮一路索이 旣生則菩提涅槃과 眞如佛性이 便現前矣리라 當現前時하야 亦無現前之量이니 故로 古德이 契證得了코 便解道하사대 應眼時에 若千日하야 萬象이 不能逃影質이오 應耳時에 若幽谷하야 大小音聲이 無不足이니라 如此等事는 不可他求요 不借他力이라 自然向應緣處하야 活潑潑地니 未得如此댄 且將這思量世間塵勞心하며 回在思量不及處하야 試思量看호대 那箇是思量不及處오 僧이 問趙州호대 狗子還有佛性也無잇가 州云無라 하시니 只這一字는 쪻爾有什쪻計技倆고 請安排計較看하라 計較安排를 無處可以頓放이오 只覺得쪻裏悶하고 心頭煩惱時에 正是好底時節이니 第八識이 相次不行矣리라 覺得如此時에 莫要放却하고 只就這無字上提쪻하야 提쪻來, 提쪻去하면 生處自熟하고 熟處自生矣라 하니 大抵向日用應緣處하야 쪻捕來, 쪻捕去 非返照乎아 將思量塵勞底心하야 回在無字上하야 提쪻來, 提쪻去 非話頭乎아 然則쪻禪師도 亦敎人以返照法式而兼示以擧話大略하나니 非特敎示其法式大略而已라 明明道하사대 菩提涅槃眞妙如佛性이 便現前하야 生處自熟하고 熟處自生矣라 하니 推此觀之則看話與返照兩箇做工上에 得其效力이 有何淺深也耶아 古人之如斯敎示機緣을 不可一 一校擧而皆以返照與看話로 不存差別想이어늘 今之學者 互相攻擊하야 以爲杜撰者는 從甚쪻處學得來오 或依本分話頭하야 如法參究하다가 小有休歇處則便以爲足而更不進步하고 쪻見涉理路者는 卽欲掃除하야 使滅踪跡하나니 殊不知佛祖化門中에 無限機權 全從義理中出來하야 入泥入水하야 爲人徹困底大方便이니 此人이 滯在冷淡無爲深坑中하야 動彈不得者也오 或以返照法門으로 如實看究하다가 小有凝閒意味則自以爲得而更不細審하고 便作奇特想하야 逢人에 輒說道理 呈知見하나니 殊不知衲僧家本分正令이 烹佛烹祖하며 徹骨徹髓하야 七穿八穴하야 斷盡命根底活手段이니 此人이 認門頭戶口光影하야 爲究竟安樂處也라 若如是乃爾則吾佛正宗이 幾墜地矣리니 可不痛惜哉아 言念及此에 公之所問이 正識時務而發起也라 余雖淺識蔑學이나 豈可無一言判明하야 以救其末流之弊痼也哉아 故로 不覺打葛藤如此하노라 然이나 古人이 云하사대 學者 但參活句언정 莫參死句니 死句者는 有理路語路聞解思想故也오 活句者는 無理路語路 沒滋味摸索故也라 하니 學道人이 莫論返照與看話하고 如實參究者댄 如一團火相似하야 近之則燒却面門이라 都無佛法知解措着之處어니 何暇에 論及於話頭也, 返照也, 同別也, 許多之乎者也아 但現前一念하야 照徹無餘則百千法門無量妙義를 不求而圓得하야 如實而見하며 如實而行하며 如實而用하야 出生入死에 得大自在矣리라 深願은 在玆焉이니라
제11문:
온 누리의 사람들이 색을 보고 색을 초월하지 못하고 소리를 듣고 소리를 초월하지 못하니, 어떠한 것이 소리와 색을 초월한 것입니까?
※ 이 아래 열 가지 물음은 나옹조사의 물음을 그대로 인용한 것임
제11답:
성색(聲色)을 초월하여 무얼하려는가.
※ 이 아래의 열 가지 물음은 나옹조사가 공부의 절목(節目)을 물은 것이기 때문에 착어(着語)를 붙이는 데 그칠 뿐이다.
第十一問
盡大地人이 見色不超色하고 聞聲不越聲하나니 作쪻生超聲越色去오
※ 此下十問은 懶翁祖師垂問을 仍用함
第十一答
用超越聲色하야 作什쪻오
※ `此下十問은 懶翁祖師 垂問工夫十節目故로 但着語而已로다
제12문:
이미 소리와 색을 초월하였다면 반드시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공부입니까?
제12답:
벌써 삿됨이로다.
第十二問
旣超越聲色인댄 要須下工이니 作쪻生下箇正工고
第十二答
早是邪了也로다
제13문:
이미 공부를 하였다면 반드시 공부가 무르익어야 할 것이니, 공부가 무르익었을 때에는 어떠합니까?
제13답:
밥이 익는 것은 그럴싸 하지만 공부가 익는 것은 아니다
第十三問
旣下工인댄 要須熟工이니 正熟工時에 如何오
第十三答
飯之熟은 似是나 工之熟은 未是로다
제14문:
이미 공부가 무르익었다면 다시 더욱 콧구멍을 잃어야 할 것이니, 콧구멍을 잃어버릴 때는 어떠합니까?
제14답:
공부가 무르익기 전에도 또한 콧구멍이 있는가, 없는가.
第十四問
旣能熟工인댄 更加打失鼻孔이니 打失鼻孔時如何오
第十四答
熟工之前에 還有鼻孔也無아
제15문:
콧구멍을 잃어버리면 냉랭하고 담담하여 전혀 맛이 없고 힘이 없어 의식이 미치지 못하고 마음이 행하지 않는 이러한 때에도 또한 환신(幻身)이 사람에게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하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시절입니까?
제15답: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이요, 무명실성(無明實性)이 곧 불성(佛性)이다.
第十五問
鼻孔을 打失하면 冷冷淡淡하야 全無滋味하며 全無氣力하야 意識不及하고 心路不行時에 亦不知有幻身이 在人間하리니 到這裡하야 是什쪻時節고
第十五答
幻化空身이 卽法身이오 無明實性이 卽佛性이니라
제16문:
공부가 이미 동정(動靜)에 사이가 없고 자나깨나 항상 한결같아서 부딪쳐도 부서지지 아니하고 휩쓸려도 잃지 아니하여, 마치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넘보는 것처럼 핥으려고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16답:
절대 자만하지 말라.
第十六問
工夫旣到動靜無間하고 寤寐恒一하야 觸不散, 蕩不失하야 如狗子見熱油쪻相似하야 要쪻又쪻不得하야 要捨又捨不得時에 作쪻生合殺오
第十六答
切莫自慢이어다
제17문:
갑자기 120근의 짐을 부려버리는 것처럼 졸지에 꺾이고 갑자기 끊어진 때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것이 자성(自性)입니까?
제17답:
장한(張翰)이 강동으로 떠나가니, 바로 가을 바람이 불어온 때이다.
第十七問
驀然 到得如放百二十斤擔子相似하여 卒地便折하며 暴地便斷時에 那箇是爾自性고
第十七答
張翰이 江東去하니 正値秋風時로다
제18문:
이미 자성을 깨쳤다면 반드시 본용(本用)과 응용 (應用)을 알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것이 본용과 응용입니까?
제18답:
몸을 감춘 곳에 자취가 없고, 자취가 없는 곳에 몸을 감추지 말라.
第十八問
旣悟自性인댄 須知本用과 應用이니 作쪻生是本用과 應用고
第十八答
直須藏身處에 沒踪跡이요 沒踪跡處에 莫藏身이어다
제19문:
이미 본성의 작용을 알았다면 생사를 초탈해야 하니,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죽음을 말함)에는 어떻게 초탈해야 합니까?
제19답:
잠꼬대 하지 말라.
第十九問
旣知性用인댄 要脫生死니 眼光落地時에 作쪻生脫去오
第十九答
莫寐語어다
제20문:
이미 생사를 초탈하였다면 갈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니, 사대(四大)가 각기 흩어짐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가야 합니까?
제20답: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
第二十問
旣脫生死댄 須知去處니 四大各分에 向什쪻處去오
第二十答
日面佛, 月面佛이니라
제21문: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 온다면, 어떻게 제접하시렵니까?
제21답:
그에게 대도(大道)를 체득하도록 하여줄 것이다.
第二十一問
正當恁쪻人來하야는 如何提接乎잇가
第二十一答
且敎伊體會大道니라
또 물었다.
이미 이러한 사람인데, 어떻게 대도(大道)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답하였다.
다만 이 하나의 봉합(縫合)을 오히려 어찌 할 수 없다.
又問: 旣是恁쪻人이시니 敎什쪻大道오
答: 只這一縫을 尙不柰何로다.
다시 물었다.
위에서 말한 21가지의 대답은 철저하고 철저하지만 이후의 한 방망이는 어떻게 상량(商量)하시렵니까?
답하였다.
양화병(養化柄)을 치면서 말하기를,
무슨 견해를 일으키는가.
更問: 已上 二十一答이 徹困徹困이어니와 此後一棒은 作쪻生商量잇고
答: 以養化柄으로 打之云 起着什쪻所見고
또 물었다.
나를 잘못 치지 마소서.
답하였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 . 말하지 말라. 나의 법은 오묘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又云: 莫錯打某甲하소서
答: 住住不須說하라 我法이 妙難思니라
도반에게
(與道友偶吟)
[해설]
본 시에서는 도반에게 4천 년의 유구한 문화를 가진 불국토에 태어나 이왕 출가한 몸으로 보월(寶月)의 불성을 밝혀서 색계를 초월하여 영겁에 옛 조사의 선풍(禪風)을 다시 한 번 드날려 주기를 바라는 염원과 정문일침(頂門一鍼)의 경책을 담고 있다.
[국역]
해동에 단군 기자 가르침 드높아서
4천 년 도(道)의 마음 한가지로 이어졌네
그대에게 묻노니 어이해서 심산에 들어왔오
다행히도 이 내 몸은 불국토에 태어났네
보배달이 하늘과 땅에 사무치고
오묘한 꽃은 희지도 않고 붉지도 않네.
곳마다 활보하며 감춤이 없는 곳에
영겁에 옛 조사의 종풍을 떨치네.
[원문]
檀箕化高海以東하니
四千年繼道心同이라
問君何入深山裏하야
幸我得生佛國中고
寶月은 徹天兼徹地하고
妙花는 非白亦非紅이라
隨方闊步無藏處에
永劫宣揚古祖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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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방한암 스님의 명성을 듣고 19살에 처음으로 한암스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무려 삼 여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문장이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탄허스님은 정든 속세, 부모 형제를 두고 방한암 스님을 찾아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사교, 사집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 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님의 사상은 한국불교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1983년 6월 5일 오후 향년 71세로 입적하실 때까지 오대산 방산굴에 계셨다.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강원문화 회고](6)탄허당(呑虛堂)과의 만남
-율곡 이후 처음보는 석학을 찾아 이 지방에서 학문이 깊다는 노인을 찾던 가운데 한 노인이 “자네 공연히 우리와 만날 것 없이 오대산 월정사에 탄허(呑虛)라는 승려가 있는데 내가 만나 본 바로는 율곡 이후에 처음 보는 대학자니 시간이 나거든 그를 만나보게”라는 것이다. 이 노인에게서 탄허라는 법명을 처음 들었고 어떤 분이기에 `율곡 이후에 처음 본다고 하나' 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새겨두었다. 이 무렵 휴전이 되어 포성은 멎었으나 전후의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나라에서 주는 봉급이라는 것이 우선 연명을 하라고 쌀 몇 말과 보리쌀 몇 말로 그것도 부정기적이었으나 불평하는 교사는 없었다. 전후 교통기관이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담임을 맡고 있던 학생들이 가을에 오대산 월정사로 수학여행을 갔다. 후생사업을 하는 군 트럭을 빌려서 타고 월정사로 갔다. 개화 이전 우리 문화의 바탕을 따지고 보면 동양 3대 사상이라 하는 유·불·도(선)가 우리 토속사상의 근간이다. 그 가운데서도 유·불이 가장 영향이 컸다. 그 증거로 오늘까지 남아 있는 문화유산 가운데 7, 8할이 불교유물이고 강원도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강원도에 본산 사찰이 3곳 있었다.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 건봉사, 금강산 유점사가 그것이다. 건봉사와 유점사는 38선 북에 있었으나 전쟁 때 다 소실되었고 월정사는 38선 남에 있었으나 전쟁중에 소실이 되었다는 말만 듣고 있었다. 중국의 시성인 두보(杜甫)가 그의 시에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나라는 망하였는데 산천은 그대로다.)'라더니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에서는 전쟁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월정사의 계단을 마지막 올라서니 그 고색이 창연한 웅장한 가람은 오간 데 없고 초라한 간이건물인 함석집 한 채가 1,300년 옛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유·불·도(선) 3교가 우리 문화의 근간적 역할을 했다는 말을 앞에서 했거니와 강원도의 불교문화를 말할 때 첫손 꼽아야 할 곳이 월정사이다. 강원도 내에서는 38선 이남의 유일한 본산 사찰로 강원도 불교문화의 본원지인 월정사가 자취도 없이 타버려 1,300년의 세월이 폐허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때 필자가 담임했던 학생 중에는 군에서 제대했거나 제대한 상이군인도 있어 나이 든 학생이 더러 있었다. 학생의 통솔은 반장에게 맡기고 필자는 홀로 강릉에서 들은 `율곡 이후에는 처음이라'는 우리나라 불교계의 석학 탄허당을 만나러 갔다. 승려 중 한 사람에게 찾아온 내력을 알리고 뵙게 주선해 달라 했더니 가건물 뒷방으로 안내하였다. 이때 처음 탄허당을 대면하고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만남 이후 그 학문적 온축에 경도하여 열반 때까지 교분을 가졌다. 그때 스님 거처에는 지금 월정사 성모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합천 해인사에서 인출한 8만대장경의 일부가 꽉 차있었다. 월정사는 강원도 불교문화의 보고다. 강원도에 있는 국보가 8개인데 그 가운데 오대산 내에 4개가 있으니 강원도 국보의 반이 오대산에 있는 셈이다. 전쟁으로 회진이 되어버린 대찰의 사정이 이러하니 학생들의 숙소로 정한 민가는 더 어떠했겠는가. 임시가옥으로 지붕에 판자를 얹고 그것이 날아가지 않게 베개 크기의 돌을 얹져 놓았으니 불안하여 잠인들 편하게 잤을 리 없었다. 다음날은 학생들과 같이 상원사를 거쳐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까지 갔다. 비로봉 정상에는 일제 때 국토 측량의 기점으로 잡은 돌기둥이 눈을 끌었고 노정에 있는 중대사와 적멸보궁은 전화를 피하여 제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월정사는 잿더미가 되었으나 상원사는 전화를 면하였다. 거기에는 한국 근세의 고승인 방한암(方漢岩) 조실스님의 힘이 작용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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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사교 입선하여 서래밀지(西來密旨)를 참구하였다. 그 뒤 1945년부터 상원사 총무로 대중외호에 전념하였고, 1950년 육이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방한암 조실 스님이 모두 안전 지대로 피하라고 하였으나 조실 스님만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며 끝까지 남아서 방한암 선사의 좌탈입망坐脫立亡을 지켜보았던 효법손孝法孫이다.
1953년에 상원사 주지. 1956년에는 월정사 주지로 취임하였다가 1957년 설악산 신흥사 주지로 부임하여 적묵당을 건립하였고, 1959년 다시 월정사 주지로 취임하여 6.25 전쟁으로 전소된 대웅전을 웅장한 모습으로 중건하였으니, 그 법당이 지금의 월정사 적광전寂光殿이다. 이어 종무소, 동별당, 서별당, 용금루, 사천왕문, 일주문, 진영각, 방산굴 등을 중건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1973년에 중앙종회의원이 되었고 1977년 5월부터 탄허 큰스님과 함께 인도, 동남아 성지를 순례하였다. 1981년 8월 월정사 회주會主로 추대되었다가 1983년 12월 11일 입적하니 세수 64세요, 법랍은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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