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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유학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군자목(장세완)
영남유학연구회 종가문화 제3강 2016. 2. 20
의리와 충절의 鶴峰宗家. 처사의 삶 敬堂宗家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유학연구회
의성김씨 학봉종가와 안동장씨 경당종가 대한 답사계획
1. 제3강(답사)학습계획
❖ 일자 : 2016년 2월 20일(토)
❖ 강좌명 : 의성김씨 학봉종가와 안동장씨 경당종가 대한 답사
2. 답사일정
07 : 30 1차 집결지인 - 법원 출발하여 경대 집결
08 : 00 출발점검 및 반별 탑승(대학원동 서편 네거리)
09 : 50 - 10 : 30 泗濱書院
(알묘, 봉심, 서원 소개, 회원강독)
11 : 00 - 12 : 00 鶴峰(金誠一) 종가
(사당참배, 운장각 및 종가소개, 기념촬영)
12 : 00 - 13 : 00 중식
(금계식당. 오리요리)
13 : 00 - 13 : 30 霽月臺(시조창, 대금연주)
13 : 30 - 15 : 00 敬堂(張興孝) 종가
(사당참배, 종가소개, 기념촬영)
15 : 00 - 15 : 40 丹溪(河緯地) 종가
(안동시 서후면 교리)
15 : 40 - 16 : 20 簡齋(邊中一) 종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16 : 20 - 17 : 30 내앞
川前(靑溪 金璡)대종가, 雲川(金涌)종가, 齊山(金聖鐸)종가
19 : 00 - 19 : 40 저녁(태전동 싱싱굴국밥 053)311-3363)
20 : 00 경북대 하차
20 : 30 법원 하차
3. 참배 및 알묘
알묘 : 사빈서원
참배 : 학봉사당, 경당사당
강독(사빈서원) : 김상만
4. 종손
학봉종손(金鍾吉, 君振 054)852-2087) 경당종손(張晟鎭, 日昇 054)852-2717
단계종손(河庸洛, 成心 054)852-1650) 간재종손(邊聖烈, 潤星 054)853-2345
천전대종손(金昌鈞, 會星 054)822-3101 운천종손(金昇泰, 孔紹 054)822-3077
제산종손(金再玉, 允璋 054)823-3102
목 차
의성김씨와 학봉 김성일 종가 - 의리와 충절
❖ 안동. 의성 세거 의성김씨 개황 /5
❖ 오토재(五土齋) /6
❖ 사빈서원(泗濱書院) /6
* 내앞의 의성김씨 큰 종가, 학봉종택과 운장각, 운천, 제산종택 등 종가에 대해서는 답사 시 현장 설명(역 사, 형태, 규모)으로 대신함
❖ 사빈서원의 제향인물(泗濱書院 祭享人物) /7
청계 김진(靑溪 金璡) /7
약봉 김극일(藥峯 金克一) /7
귀봉 김수일(龜峯 金守一) /8
운암 김명일(雲巖 金明一) /8
문충공 학봉 김성일(文忠公 鶴峯 金誠一) /9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 /10
❖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0
연보(年譜) /10
제향서원(祭享書院) /13
학맥(學脈)(별첨「학봉학맥도」참조) /13
❖ 의성김씨 역사 인물 /14
김안국(金安國) /14
김정국(金正國) /14
김용(金涌) /15
김휴(金烋) /15
김성탁(金聖鐸) /15
김낙행(金洛行) /16
김도화(金道和) /17
김흥락(金興洛) /17
김대락(金大洛) /18
김동삼(金東三) /18
임벽당 김씨(林碧堂金氏) /19
이밖에 /19
❏ 안동장씨와 경당 장흥효 종가 - 처사의 삶
❖ 안동장씨(安東張氏) 개황 /20
❖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20
생 애 /20
행 장(行狀) /21
경당과 17세기 경북북부지역 성리학 /23
❖ 안동장씨 역사 인물 /23
장사길(張思吉) /23
장사정(張思靖) /24
장계향(張桂香) /24
장철견(張鐵堅) /24
이휘일(李徽逸) /25
이현일(李玄逸) /25
장세규(張世奎) /25
❖ 경당종택과 유촉지 / 25
경광서원(鏡光書院) /25
광풍정(光風亭) /25
제월대(霽月臺) /25
경당종택(敬堂宗宅) /26
봉림정사(鳳林精舍) /26
* 경당 종가를 비롯한 경당의 유촉지에 대한 설명(역사, 형태, 규모 등)에 대해서는 답사시 현장 설명으로 대신함.
❏ 참고자료
단계 하위지(丹溪河緯地) /27
간재 변중일(簡齋邊中一) /28
❏ 유학상식 - 祭禮의 節次와 祝文(忌祭祀와 墓祀를 中心으로)
1. 祭禮의 意義 /29
2. 祭禮의 變遷 /29
3. 祭禮의 形式과 節次 /30
4. 忌祭祀 祝文 /31
5. 墓祀 祝文과 山神祝 /33
❏ 義城金氏와 鶴峰 金誠一 宗家 - 의리와 충절
❖ 안동.의성 세거 의성김씨 개황
문소김씨(聞詔金氏) 또는 내앞김씨로도 일컬어지는 의성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김석(金錫. 어머니는 고려 태조의 큰딸 낙랑공주(樂浪公主)로 김알지(金閼智)의 28대손)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안동 입향조인 김거두(金居斗)의 현손 김만근(金萬謹)이 14세기 말 임하면 천전리(내앞)에 정착한 후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 사족으로 발전한 가문이다.
공조전서인 김거두는 고려 공민왕 12년 흥왕사 변란 때 화를 당한 문예부좌사윤 김태권(金台權)의 아들로 화를 피하여 외향의 연고가 있는 안동으로 낙향하여 풍산현에 거주하였는데 김거두의 아들 김천(金洊)이 다시 부내 방적동으로 이거하였다.
김천의 아들 신령현감 김영명(金永命)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은 임하현에 살던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사위가 되어 내앞으로 이거하였고, 김만근의 동생 김만흠(金萬欽)의 후손은 일직면 귀미리에 정착하였다.
김예범(金禮範)의 아들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은 의성김씨 내앞시대의 개창조로서 곳곳에 서당을 세우고 후진양성에 힘써서 아들 5형제가 모두 입신하였다. 장자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은 문과를 거쳐 예조정랑을 지냈고, 4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임진왜란시 진주성을 수호하여 국란 극복에 앞장섰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오자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도 문과에 올라 창원부사를 지냈다. 차자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과 삼자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숭정처사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1598~1669), 대사간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 학행으로 추중을 받는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 1649~1711), 영남 유학의 거장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은 김극일의 후손이다.
김수일의 아들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은 1590년 문과에 올라 임진왜란 때 안동수성장을 지내고 의주 행재소로 선조를 호종하면서 일상을 기록한『호종일기(扈從日記)』를 남겼다. 우리나라 서지학의 효시라 할 만한『해동문헌(海東文獻)』을 저술한 경와(敬窩) 김휴(金烋, 1597~1628), 가학전수와 후진양성에 힘써 손자 셋을 문과에 급제시킨 김임(金, 1604~1667)은 김용의 손자이다.
김임의 손자들 중 칠탄(七灘) 김세흠(金世欽, 1649~1720)이 1687년,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 1652~1720)과 김세호(金世鎬, 1652~1722, 호 귀주)가 1670년 문과에 올라 의성김씨 3학사로 일컬어지며 각각 홍문관교리, 사간원정언, 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66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학문으로 이름이 있는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 1628~1673)는 김명일의 현손이다.
운암 김명일의 후손은 임하면 신덕리와 임하리에 살고 있다. 병조좌랑을 지낸 김시권(金是權, 1583~1643), 이조정랑을 지낸 김기찬(金驥燦, 1748~1812), 귀양살이를 기록한「북천가(北遷歌)」를 남겨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귀중한 자료 하나를 보탠 겸와(謙窩) 김진형(金鎭衡, 1801~1865)은 김성일의 후손이고, 조선 말기의 대학자로 퇴계학맥의 마지막 거봉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35~1899)은 김성일의 종손이다. 1657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 도승지, 한성부윤등을 역임한 김빈(1621~1694)은 김복일의 증손이다.
내앞의 의성김씨는 입향 이후 대대로 학문과 과한이 끊이지 않아 문과 급제자 24명, 생원 진사 66명, 문집을 출간하거나 유고를 남긴 이가 215명이다. 특히 한일합방 이후에는 영남 최초의 근대 중등 교육 기관인 협동학교를 세워 청소년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힘쓰면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66세의 노령임에도 마을 청장년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이주 한인들의 정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1845~1914),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등에서 활약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협동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파리장서의거에 참여했다 체포된 종손 김병식(秉植, 1856~1936)등 서훈된 독립유공자도 일송 김동삼을 비롯하여 43명(내앞 26명, 금계17)이나 된다.
일직면 귀미리에는 김만흠의 증손 김안계(金安繼, 1556~1599)가 구계(龜溪) 이중립(李中立)의 사위가 되어 정착하였다. 김안계의 7세손 귀와(龜窩) 김굉(金❏, 1739~1816)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고, 김굉의 증손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는 퇴계학맥을 이은 대학자로 을미사변 이후 의병진을 결성하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현황 김만근의 장자 김인범(金仁範)의 후손은 현재의 송천, 임하, 저전 등지에 흩어져 살았으며, 차자 김예범(禮範)은 임하면 천전리에 정착하여 그 후손이 500여 년 세거하면서 크게 번성하게 된다.
김극일의 후손은 임하면 천전리, 임동면 지례리, 길안면 오대리 등지에, 귀봉 김수일의 후손은 현재 임하면 천전리, 추월리, 서후면 태장리 등지에, 김성일의 후손은 현재 서후면 금계리, 봉화군 소천면 등지에, 김복일의 후손은 김복일이 처가인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로 이거한 이래로 세거하고 있다.
한편 김도화의 후손들은 일직면 귀미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현재까지 살고 있다.
관련유적으로는 임하면 천전리의 청계 종택과 귀봉 종택, 임하면 신덕리의 운암 종택, 서후면 금계리의 학봉 종택을 비롯하여 유적 유물 35점이 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또 일직면 귀미리에 김굉이 지은 자양정(紫陽亭), 김도화가 지은 니산정(泥山亭)있다.
참고로 의성김씨는 군(君)에 책봉된 분이 7인, 시호를 받으신 분이 13인,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가 96인이며 鶴林書院, 臨江書院, 臨川書院, 晴川書院, 道溪書院 등이 대표적 원사(院祠)이다.
❖ 오토재(五土齋)
의성군 사곡면 토현리에 있으며 의성김씨 중시조이자 고려시대에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김용비(金龍庇)의 위패를 안치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재사이다. 의성군 백성들이 용비군의 공덕을 기려 사당 '진민사(鎭民祠)'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던 것을,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후손들이 힘을 모아 오토재로 중창하였다. 경내에는 진민사, 사경당, 전사청, 숭정문, 진선문, 신도비각, 사원지 등이 배치되어 있다.
김용비(金龍庇)는 고려 항몽기에 중서성 참지정사로 재직하면서 여러 차례의 국난에 공을 세워 추절보절공신(推節保節功臣)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었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를 지냈다.
❖ 사빈서원(泗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비리실에 위치한 사빈서원은 내앞 마을에서 풍교(風敎)와 돈목의 전범을 세운 청계 김진(靑溪 金璡 1500~1580)과 그의 자제 약봉 김극일(藥峯 金克一 1522~1585), 귀봉 김수일(龜峯 金守一 1528~1583), 운암 김명일(雲巖 金明一 1534~1570),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 1541~1591) 등 육부자(六父子)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숙종원년(1675)에 임하면 사의리 경출산(景出山) 아래 청계공의 유상(遺像)을 봉안하는 영당인 경산정사(景山精舍)를 창건하였으며, 숙종7년(1681)에 향중사림의 발의로 숙종11년(1685) 3월 상정에 육부자의 위판을 봉안하여 묘호를 경덕사(景德祠)라 하였으며, 숙종35년(1709)에 사수리(泗水里) 강변으로 이건하고 유림의 결의로 승원(陞院)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
숙종43년(1717)에 어사 이명언(李明彦)의 별단주청(別單奏請)으로 철폐령이 내리고, 고종5년(1868)10월 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고종19년(1882) 향유(鄕儒)와 본손 등이 강당과 주사를 복원하고, 1997년 정부의 임하댐 건설로 임하리로 이건하였다.
2002년 임하댐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천상문화보존회(川上文化保存會)」에서 지금의 위치인 내앞 비리실(川前里飛鯉谷)로 이전중건을 결의하고, 사빈서원 이전중건이 문화재청 사업으로 채택되어, 2006년「이전중건기공식」을 거행하였다.
2011년 유림 도회를 개최하여 제향선현의 위패를 주향(主享)은「贈吏曹判書靑溪金先生」(증이조판서청계김선생), 배향(配享)은「內資寺正藥峯金公」(내자시정약봉김공),「察訪龜峯金公」(찰방귀봉김공),「成均生員雲巖金公」(성균생원운암김공),「文忠公鶴峯金公」(문충공학봉김공),「贈宗簿寺正南嶽金公」(증종부시정남악김공)으로 하고, 봉안방식(奉安方式)은 소목지서(昭穆之序)로 정하여, 2011년 11월「사빈서원 복원봉안 및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사빈서원은 매년 3월 중정에 향사하고 있으며 景德祠· 興敎堂· 進修齋(동재)· 存養齋(서재)· 景遠樓· 전사청· 주사(廚舍)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호로 등록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참고로 泗濱書院 편액은 李根必 퇴계종손이, 사당인 景德祠는 三餘齋 金台均, 강당인 興敎堂은 南井 金九稷 문루인 景遠樓는 攸川 李東益, 동서재인 進修齋·存養齋는 劍冑 金明鈞, 典祀廳은 愼堂 金元復 등께서 글씨를 섰다.
❖ 사빈서원의 제향인물(泗濱書院 祭享人物)
증 이조판서 청계 김진 선생(贈吏曹判書靑溪金璡先生)
사빈서원의 주향은「증 이조판서 청계 김진 선생」이다. 선생의 자(字)는 영중(塋仲)이요 본관은 의성이다. 연산군 6 (1500)년 천전(川前, 내앞) 본가에서 탄생하여 선조 13(1580)년 윤 4월 23일 영양 청기(靑杞) 흥림초사(興霖草舍)에서 향년 81세에 졸하였으며, 아버지는 병절교위(兵節校尉)「증 좌승지 휘 예범(贈左承旨諱禮範)」이고, 어머니는 여흥민씨「사정 휘 세경(司正諱世卿)」의 따님이다.
152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학했으며, 뒤에 4자 학봉(鶴峯) 성일(誠一)이 귀하게 됨으로써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기상이 준엄하고 높았는데, 16세에 권간(權幹)의 문하에서 배워 크게 진취하였고, 기묘명유인 민세정(閔世貞)공과 교유함으로써 문견을 넓혔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에는 제생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고, 특히 하서 김인후와는 도의로써 친교를 맺는 등 당시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유학 중 문득 느낀바 있어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열어 자제와 향중의 어린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심력을 다하여 이끌어 도와주기를 수 십 년 동안 그치지 아니하니, 학풍이 크게 진작하였다. 1550년 후반부터는 영양 청기 초동(椒洞)에 들어가 농장을 경경하면서 영양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창건하여 향풍을 교화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다섯 자제로 하여금 가문의 기본교양을 닦게 한 다음 도산으로 보내어 퇴계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영오한 자질을 길러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그 가르침의 근간은 충과 효였으니, 일찍이 여러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믿음을 얻은 다음에라야 면전에서 간언하더라도 가납(嘉納)될 수 있다” 라고 한 바 있고, 또 “사람은 정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도를 굽혀 도생(圖生)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으면 나는 오히려 산 것으로 볼 것이요,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 하였다.
만년에 청기의 산수를 사랑하여 그곳에 살다가 임종하였으며 장지는 임하 경출산진향원(景出山辰向原)이다.
학봉은 묘지를 짓고, 우복 정경세가 지은 묘갈명이 있으며 정조 2 (1778)년 유림의 발의로 선생과 다섯 자제의 문고(文藁)를 모아 대산 이상정이 서문을 쓴 5권3책의「연방세고(聯芳世稿)」를 간행하였다.
내자시정 약봉 김극일 선생(內資寺正藥峯金克一先生)
선생의 휘(諱)는 극일(克一)이며 자는 백순(伯純)이니 청계선생의 장자이다. 중종17(1522)년에 나서 선조 18년 (1585)년에 졸하니 향년 64세였다. 1546년 문과로 성균사성(成均司成), 사도시정(司導寺正), 성주목사와 밀양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호매 · 준일하였고, 자라서는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문학(文學)의 방면에서 우뚝하게 남 먼저 성취하니 퇴계 선생께서 그 기국 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일찍이 “지난날이 잘 못 되었음을 이제야 알았노라!” 라고 한 말을 인하여 편지를 보내어 권면하기를 “작은 것을 얻음에 만족하지 말고 깊이 작철(作輟. 하다 마다 하는 태도)을 경계하되 노력이 오래 쌓이면 끝내 터득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일이 왜 있겠는가?” 하였으니 그 기대하는 바의 원대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발군의 뛰어난 재능으로 문학의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보였으며 세상과 타협하여 총애를 취할 것을 탐내지 아니하고 오직 한직(閒職)을 구하여 부모님을 봉양하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벼슬한지 40년에 관직이 불과 주와 군의 목사와 군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끝내 유학을 홍기하고 선행을 표창함으로써 풍속과 교화를 이루는 데 조력하였으므로 다스린 다섯 고을의 치적이 당세 수령 중 으뜸이었다.
특히 시에 뛰어나 짙고 옅음과 맑고 아름다움에 각각 그 의취를 극대화하였기에 한 시대에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분들이 모두 선생을 맹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난리 중에 다 흩어져 없어지고 겨우 약간 권만이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가「연방세고(聯芳世稿)」에 올려 간행하였다. 방손 귀주 김세호(傍孫龜州金世鎬)가 지은 묘갈명이 있다.
자여도찰방 귀봉 김수일 선생(自如道察訪龜峯金守一先生)
선생은 휘(諱)가 수일(守一)이요 자는 경순(景純)이며 호는 귀봉(龜峯)으로, 청계선생의 둘째 아드님이다. 중종 23 (1528)년에 나서 선조 16 (1583)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였다. 1555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만년에 유일로 천거되어「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배수(拜受)하였다.
자품이 단정하고 엄숙하며 청수(淸秀)한 풍격으로 문장을 짓는데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습기(習氣)가 전혀 없었으며 더욱 시문에 뛰어났다. 일찍이 퇴계선생께서 “명백하고 통철(洞徹)하다”는 말로 칭찬하였다.
명종 10년에 생원시와 향시에 여러 번 장원한 뒤, 아우 명일(明一)·복일(復一)과 문과에 나아갔는데 명일(明一)이 객중(客中)에 병고가 위급하자 선생이 가료(加療)·수호하며 환고하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때 막내아우 복일(復一)은 급제하여 어버이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나 선생은 이로써 과거를 통한 입신의 뜻을 접었다.
이후로 흥학의 진작을 위해 서당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진력하는 아버지「청계(靑溪)」선생을 도우는 한편, 부암(傅巖) 서쪽에 백운정(白雲亭)을 지어 명절가신(名節佳辰)에는 노인들을 모시고 잔치를 열고 집안의 자질들을 가르쳐 성취시켰다.
1580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자 죽과 거친 밥으로 삼년을 시묘하며 애훼(哀毁)하였다. 복을 벗을 무렵에는 병이 장부(臟腑)에 들어 날로 심해 졌으나 유일로 천거되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자 병고를 무릅쓰고 사은숙배 길에 올랐다가 귀로에 몰하니 향년 56세였다.「연방세고」에 유문이 한다. 장자 용(涌)이 행장을 쓰고 6세손 세호(世鎬)가 묘갈명을 지었다. 천전리에 귀봉종가(龜峯宗家)가 있다.
성균생원 운암 김명일 선생(成均生員雲巖金明一先生)
선생은 휘가 명일(明一)이요 자는 언순(彦純)이고 호는 운암(雲巖)이다. 청계선생의 셋째 아드님으로 중종 29(1534)년에 나서 선조 3(1570)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37세였다.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독실했으며 독서와 학문에 기울이는 공력이 남달라 일찍이 문장으로 명성이 크게 드러났다. 아버지의 명으로 순흥의 소수서원에서 독서할 때에는 금계 황준량 공이 한번 보고 큰 그릇임을 알아 도의로 사귀었다.
이때 퇴계선생이 도산에서 강도하고 있어 아우 문충공(文忠公)과 함께 가르침을 청하였다. 퇴계선생께서 손수 잠명(箴銘)을 써 주신 것은 선생에게 거신 기대가 크고 높았던 까닭이었다. 형제분이 이 기대에 부응하여 서로 강마하며 질의하고 사처(私處)에 돌아와서도 배운 바를 정련(精鍊)하여 거의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
또 성균관에 유학하게 되었을 때 진학의 지취(志趣)를 시로 읊어 퇴계선생께 보내었는데 선생께서도 친절하게 장려하고 권면하는 뜻을 시로 화답하여 보내었다.
산수자연을 사랑하여 일찍이 아버지 청계(靑溪) 선생이 낙연(落淵) 남쪽에 지은 선유정(仙遊亭)의 승경을 특히 애호하여 노닐었다. 또한 거소(居所) 부근 추월리(秋月里)의 강안(江岸)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사람들이 운건암(雲褰巖)이라 하였는데, 선생은 그 위에 대(臺)를 쌓고 즐기면서 유연자득(悠然自得)하는 흥취를 누렸다. 운암(雲巖)이라 자호(自號) 한 것은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1569년에 중형 귀봉(龜峯)공과 막내아우 남악(南嶽)공 등 세분이 함께 대과를 보기위해 경사(京師)에 올라가 동당(東堂)에 체류하다가 이듬해 1570년에 병고가 심하여 귀환하던 중 경기도 용인의 금량역(金亮驛)에서 37세를 일기로 조서(早逝)하였다.
연방세고(聯芳世稿)에 선생의 유문이 전하고, 현손 금옹 학배(錦翁學培)공이 행략과 문경공 갈암 이현일 선생의 묘명이 있다. 임하면 신덕(新德)리에 운암종가(雲巖宗家)가 있다.
문충공 학봉 김성일 선생(文忠公鶴峯金誠一先生)
선생은 휘가 성일(誠一)이요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峯)이고 청계(靑溪) 선생의 넷째 아드님이다. 중종33 (1538)년에 나서 선조 26 (1593)년에 진주의 진중(陣中)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였다.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8년에 문과급제하여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봉교(奉敎)때에는 단종복위소(端宗復位疏)를 올렸는데 나중 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과 금성대군 등이 신원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경연 주대(奏對)에서는 왕과 고관의 잘못을 가차 없이 지적하여 전상호(殿上虎)라는 별호로 불리기도 하였다. 함경도와 황해도의 순무어사(巡撫御史)로 파견되어 국방 실태와 민정을 살피고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나주목사로 재직하면서는 목민(牧民)의 도리를 실천하는데 힘썼으며, 오래 동안 적폐가 되어온 토반(土班)의 발호(跋扈)를 막고 까다로운 송사를 명쾌하게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고, 대곡서원(大谷書院. 지금의 경현서원)을 세워 선현을 제향 하는 한편, 성학십도와 주자서절요를 비롯한 퇴계선생의 주요 저술을 간행하여 지방 유생들의 진취를 독려함으로써 지향할 바를 알게 하였다.
명나라 사은사행(謝恩使行)에서는 국초 이래 조정의 미제였던 종계(宗系)를 바로 잡았으며,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 올 때는 명절과 도의에 입각한 엄정한 언동으로 국가의 체모를 세웠다.
통신사행에서 돌아와 복명할 때 정사(正使)의 보고와 달리 “일본이 반드시 군사를 일으키리라는 정황을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복명도 하기 전 동래에서부터 발설한 정사(正使)의 내침설 때문에 극도에 달한 관민의 동요를 진정하려는 것이었다.
백사 이항복이나 서애 유성룡 상공과 나눈 대화에도 보이지만, 나중에는 왕과 비변사에 ‘왜(倭)가 장차 쳐들어올 것이라’ 한 왜사(倭使)의 말을 보고하여 국방에 대비토록 진정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홍문관부제학이 되어서는 민심을 얻는 것이 국사의 최급무가 되어야 함을 거듭 주청하였으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왜군 선발대를 격살하고 물리쳐 임란최초의 승전을 이루었다.
통신부사 복명의 책임을 묻는 나명(拿命)이 있자 지름길로 환경(還京)하는 길에 다시 초유사로 제수하는 상명(上命)을 받았는데, 경상도로 돌아가서는 일도(一途) 의병을 분기시키고 전의를 잃고 흩어진 관군의 기강을 다시 세워 함께 왜적을 격퇴하도록 하는데 진력하였다.
임란초기의 승전인 진주대첩으로 나라의 보장(保障)인 호남과 호서의 길목을 확고히 지켜 국가보전의 계기를 확보한 것은 모두 학봉선생의 주모(籌謀) 아래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1593년 봄 왜군의 재침을 맞아 진주성을 수보하고 병마의 군기를 엄정히 하고 있을 때 불행히 역질이 창궐하여 진주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한강 정구선생이 묘방석(墓傍石)에 새긴 학봉 선생의 생애를 요약하면 “일본에 사신으로 가셨을 때 바르고 곧고 흔들리지 않아서 임금의 위엄이 멀리 떨쳤다. 초유사의 명을 받아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도민을 감동시켜 적을 막고, 한 지방을 장악하여 충성으로 사직을 지키니 이름이 죽백(竹帛)에 올랐다. 일찍 퇴계 이선생의 문에 들어 심학의 중요한 이치를 깨달았으며 덕행과 훈업이 모두 백세에 빛났다” 로 간명하게 정리된다. 호학독행의 대선현의 말이니 그대로 일부 돈사(敦史)이다.
선조 38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1등(宣撫原從功臣一等)에 녹선(錄選) 되고,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嘉義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2 (1676)년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資憲大夫吏曹判書弘文館大提學)으로 증직이 더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렸다.
안동의 임천(臨川), 호계(虎溪), 사빈(泗濱), 영양의 영산(英山), 의성의 빙계(氷溪), 청송의 송학(松鶴), 하동의 영계(永溪), 나주의 경현(景賢), 진주의 경림(慶林) 서원에 제향되었다. 학봉선생문집과 속집 12권 7책 외에「연방세고」등에 유문이 있다.
서후면 금계(金溪)리에 학봉종가가 있으며, 종택의 인근에 정부와 경상북도 및 안동시가「임란역사학봉문화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증 종부시정 남악 김복일 선생(贈宗簿寺正南嶽金復一先生)
선생은 휘가 복일(復一)이요 자는 계순(季純)이며 호는 남악(南嶽)으로 청계(靑溪)선생의 다섯째 아드님이다. 중종 36 (1541)년에 나서 선조 24 (1591)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였다.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전적, 형조좌랑, 호조정랑, 성균관 사예(司藝), 사성(司成)과 외직으로 강원도사, 창원부사, 풍기군수 등을 역임했다.
어릴 때부터 뜻을 세움이 범상치 않아 형이신 학봉 선생과 순흥의 백운동서원에서 독서하고, 퇴도의 문하에 등문하여 학문의 요지를 깨우쳤다.
평소 거쳐할 때도 반드시 의대를 갖추고 책상을 대하여 주서절요, 대학연의(大學衍義), 심경, 근사록 등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일거일동을 사훈(師訓)에 의거하였다.
일찍이 예천 금곡(醴泉金谷)에 살면서 문서로 부노들을 권하여 덕진동(德進洞)에 서당을 세우고 많은 선비들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곳이 뒤에 정산(鼎山)으로 옮겨 서원으로 승품이 되었는데, 학문을 일으키고 선현의 교훈을 밝힘으로써 예천이 영남일역(嶺南一域)의 명촌이 되게 한 데 그 공이 컸다.
경오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몇 해 뒤 안동 호계(虎溪)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워 퇴계선생을 제향 할 때 사액(賜額)을 청하는 정문(呈文)을 지으니, 그 글을 읽은 사람마다 “도학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유현의 덕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성품이 검박한 것을 좋아하고 과단성이 있었는데 임금의 명으로 경기재상경차관(京畿災傷敬差官)이 되어 기전(畿甸)을 안무(按撫)할 때는 강화유수(江華留守)가 중신으로서도 쫓겨났으며, 호남을 안찰할 때는 전주부윤이 귀척(貴戚)이면서도 꾸짖음을 당하니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창원부사가 되어서는 부내의 갖가지 악폐를 제거하였음에도 끝내 감사와 의견에 맞지 않아 고과(考課)에서 불리함을 당하였다. 고을 선비들이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올려 방백의 처사가 부당함을 성토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을 백성들이 순영에 구금되고 형장을 맞는 일까지 있었으나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송덕비를 세워 그 덕을 추모하였다.
풍기군수에 제수되어서는 병고에 신음하면서도 석 달 치적에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고을 백성 중에 이후에도 선정비를 볼 때 마다 눈물을 떨어뜨리는 이가 많아 이를 듣는 사람마다 고금에 드믄 일로 여겼다. 완평 이원익(完平李元翼) 상국과 한강 정구선생은 일찍이 공의 처사를 두고 “절행이 금세에 이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찌 가당하다고 하랴” 하고 칭송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51세이다. 안동의 사빈서원과 예천의 봉산서원에 향사되었다. 유문이 연방세고(聯芳世稿)에 실려 전하고, 학사 김응조(鶴沙金應祖)가 행장을 쓰고, 정재 유치명(定齋柳致明)이 묘갈명을 썼다.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에 남악종가(南嶽宗家)가 있다.
❖ 학봉 김성일 선생(鶴峯 金誠一 先生)
1. 연보(年譜)
1538(중종33, 1세) 12월 6일 안동부 임하현 천전리 本第에서 출생.
(오형제 중 藥峯· 鶴峯· 南嶽公은 文科에 급제하고, 龜峯· 雲巖公은 생원진사에 급제하여「내앞」마을 의 성김씨 청계종 를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칭함.
1556(명종11, 19세) 소수서원에서 아우 복일과 함께 공부 중 도산으로 퇴계선생을 찾아가 문하생이 됨.
1566(명종21, 29세) 퇴계선생으로 부터 친필80자 병명을 받음.(별첨자료)
1568(선조원년, 31세) 6월 문과급제
1569(선조2, 32세) 퇴계선생께서 조정을 물러나면서 임금의 하문에 따라 金誠一, 李浚慶, 奇大升 3인을 조정의 인재로 천 거함.
1572(선조5, 35세) 최초로 단종(魯陵)복위와 사육신 복작을 건의하는 종친서용소(宗親敍用疏)를 올림
1576(선조9, 39세) 여름에 사가독서함, 7월 한훤당 김굉필 및 일두 정여창 선생의 시호를 송사(諡號頌 賜)함. 12월 퇴계 이황 선생의 시호를 송사함.
1577(선조10, 40세) 사은겸개종계주청사(謝恩兼改宗系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우리 나라에 관한 내 을 바로잡음. 율곡 이이선생을 방문함.
1579(선조12, 42세) 6월 사헌부 장령이 됨(임금 앞에서 조정의 문제를 과감하게 간(諫)하고 대신들의 비 리를 탄핵함으로 전상호(殿上虎. 궁궐의 호랑이)라 불리어짐. 9월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使)에 차임.
1581(선조14, 44세)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음.
1583(선조16, 46세) 3월 황해도 순무어사에 차임됨. 7월 나주목사에 제수 됨.
1584(선조17, 47세) 호남지역 최초로 나주 금성산에 대곡서원(大谷書院. 景賢書院)을 세우고 동방 5현으 로 불리는 김 굉 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퇴계 이황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여 향사하고 직접 강론을 함.
1585(선조18, 48세) 나주목사 재임 중 퇴계선생의 성학십도와 계산잡영(溪山雜詠)을 발간하고 퇴계선생 의 친필을 모각
하여 두 권의 유묵집을 간행함.
1586(선조19, 49세) 나주에서 주자서절요와 퇴계선생자성록을 발간, 의례도(儀禮圖)와 향교예집(鄕校禮 輯) 간행(향교예집 중 동자례(童子禮)와 거향잡의(居鄕雜儀)를 중시하여 자질(子姪)과 후진들에게 입교 의 급선무로 삼게 함)
1587(선조20, 50세) 월천 조목, 겸암 류운룡선생과 함께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퇴계선생문집을 편집 교정함. 봉선잡의
봉선雜儀)와 길흉제규(吉凶諸規)를 지음. 천성산 중턱에 석문정사(石門精舍)를 세워 경 학강론. 내앞종가 화재로 명나라 건축양식을 참고하여 기자형(己字形) 종가(보물 제450호)를 재건함.
1590(선조23, 53세) 일본통신사행 부사로 차임되어 3월 5일 서울 출발, 4월29일 부산출국, 5월 대마도를 경유하여 7월 일본의 국도(國都. 교토京都)에 들어감.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를 지어 경도 대덕사(大德寺)의 학승 종진(宗陣)에게 줌.
일본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잘못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풍속을 고쳐주고, 우리 민족사의 주 체성과 문화예속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천명함.
객잡설(客雜說), 입도출향변(入都出鄕辨), 왜인예단지(倭人禮單志)를 지음. 11월7일 경도에서 국서를 전하 고, 25일 계빈(堺濱. 오사카大阪)에서 서계를 받았으나 내용이 패만(悖慢)하여 현소(玄蘇)등에게 강하게 항의하여 고쳐오게 함(일본 체재 중 기행 시와 문답서 등을 담은 해사록(海槎錄)이 있음)
1591(선조24, 54세) 1월 28일 부산귀국, 황정사 치계(黃允吉 馳啓)함.(통신사 보다 한 달 정도 먼저 귀 국한 역관이 퍼뜨린 왜국침입의 소문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황정사(黃正使)의 귀국 즉시 시 치계(馳啓)로 민심을 더욱 부채질한 결과를 초래함), 3월 귀임하여 일본사행복명(日本使行復命)
▸黃允吉上使 :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다.(必有兵禍)” 라고 보고함.
▸金誠一副使 : “신은 그런 정황을 보지 못하였다. 황윤길은 민심을 동요하게 하니 마땅치 못하다.
(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張皇論奏 搖動人心甚乘事宜)“라고 보고함. (선조 임금과 조정은 김성일 부사의 보고를 수용하였음)
대마도에서 석창포(石菖蒲)와 종려나무를 가져옴.(석창포는 학봉종가와 임천서원 마당에 생장하고 있음)
7월 대제학으로 천거되어 수망(首望)으로 의망(擬望)됨. 8월 경연에서 정여립 모반사건 연루자로 모함 받아 옥사한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의 억울함을 신원극론(伸冤極論)하여 최영경의 관작이 회복되 게 함(壬亂중 鶴峯이 南冥문인 등의 전폭적 도움을 받는 바탕이 됨)
1592(선조25, 55세) 4월1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창녕 본영으로 부임하던 중 충주에서 4월 13일 왜적의 침입소식을 접함.(漢陽留別詩를 남김)
4월17일 주상의 나명(拿命)으로 한양으로 상경 중 서애와 대신 등의 신구(伸救)로 사면됨.
4월26일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경상우도에 복귀 왜적토벌에 나섬. 5월4일 함양서 초유문을 포고 (招諭文 布告)하고 의병창의.
6월 임란초기 진주성을 떠나있던 판관 김시민(判官 金時敏)을 불러내어 진주성사수를 주획(籌畫)함(6월22 일 선조임금 의주로 몽진함)
7월 제1차 진주성승첩(晉州城勝捷)을 지휘함(선조수정실록에는 “이 때 이순신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막고 있었으며, 김성일은 진주를 지켰으므로 왜적들은 전라도를 들어가려 다가 여러 번 막히어 오던 길을 따라 물러갔다. 이에 힘입어 호서도 함락되는 것을 면하였고 국가도 이 두 도에 힘입어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으니 이 때 장사(將士)들이 막고 지킨 공(功)이 많았다고 하겠다. (李舜臣以舟師據 西海金誠一守晉 州...)”(제1차 진주성 전투 승리의 공훈으로 김시민 진주목사로 승진함))
6월1일 경상좌도관찰사에 제수된 명을 받고 9월4일 부임 도중 경상우도민의 열화 같은 유임운동으로 9월 16일 경상우도관찰사에 제수 명으로 경상우도로 돌아감(고을마다 선악적(善惡籍)을 두고 왜적과 싸우는 자는 선적에 왜적에 부역하는 자는 악적에 기록토록 함. 또 관군과 의병 사이의 갈등을 화해시키고 의병대 장 곽재우의 억울함을 풀어주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킴.
10월 관군과 의병을 통괄 지휘하여 진주대첩(10.5~10.11)을 이 끔(호남의병장 고경명이 아들 3형제와 김 천(金山)전투에 출전하면서 4남 고용후(高用厚)를 가솔 50여명과 함께 학봉선생 본가에 3년간 피난시킴.
1593(선조26, 56세) 3월 서애 류성룡 좌상께 도움을 청해 호남의 곡식 2만 섬을 제급 받아 경상우도 각 고을에 나누어줌. 4월 진주지역에 질병이 만연하여 병들고 굶주린 주민들을 몸소 보살피던 중 괴질에 전 염되어 29일 진주공관에서 순국하심.
(임종때에도 “왜적이 도망쳐 물러가면 나라야 회복하겠지만 조정의 붕당은 누가 능히 깨뜨릴 것인” 라 한 탄하심. 학봉선생의 별세소식에 서애는 “평생에 지우는 오직 사순(士純) 한 사람 뿐이었는데...”하시 면서 슬퍼하심. 선조실록에 “盡瘁王事 卒於軍中(진췌왕사 졸어군중. 나라 일을 위하여 심신을 다하다가 군중에서 죽었다.”라고 기록됨(전란중이라 지리산 기슭에 임시로 가장(假葬)하였다가 12월에 안동 와룡 가수내(嘉樹川)에 장사함.
1605(선조38)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됨.
1607(선조40) 사림에서 안동 임하 서쪽에 임천향사(臨川鄕社)를 세우고 학봉선생의 위판을 봉안함.
1617(광해군9) 3만여 字의 행장을 한강 정구선생이 지음.(학봉선생 제문에 한강선생은 “忠義骨髓 道理心 腸. 충의가 골수에 사무치고 도리가 심장에 가득하다.)”이라 하심.
1618(광해군10) 임천향사를 임천서원으로 승격하고 위판을 봉안한 묘우를 숭정사(崇正祠)라 함.
1620(광해군12) 여강서원(廬江書院)에 학봉·서애 두 선생 배향되심. (1676(숙종2) 호계(虎溪)서원으로 사액, 1868(고종5) 대원군 훼철. 1973 안동댐건설로 수몰 강당이건)
1649(인조27)학봉선생문집(목판7권4책)을 여강서원에서 간행함.(용주 조동(龍洲 趙絧)선생이 서문을,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선생이 발문을, 택당 이식(澤堂 李植)선생이 해사록(海槎錄)의 발문을 씀)
1655(효종6) 영양(英陽)에 영산서원(英山書院)을 세워 퇴계선생을 봉안하고 학봉선생을 배향.
1664(현종5) 가수 내 묘소 앞에 신도비를 세움.(6,000여자로 비문은 우복 정경세(文莊公)가 지음)
1676(숙종2) 증직되심(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經筵 義禁府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弘文館大 提學 藝文館大提學. 여강서원에 사액하고 호계서원(虎溪書院)으로 이름을 고침.
1679(숙종5) 문충(文忠)의 시호를 추증함.(道德博聞曰文 危身奉上曰忠).
1685(숙종11) 경출산(景出山)의 경덕사(景德祠)에 배향함(청계공(靑溪公)의 묘소 아래에 경덕사를 세워 청계공 영정을 봉안하고 오형제분을 배향하여 나중 사빈사(泗濱祠)라 함.
1688(숙종14) 학봉선생께서 세우고 강학하던 나주의 대곡(景賢)서원에 고봉 기대승 선생과 학봉선생의 위판을 추봉(追奉)함.
1689(숙종15) 의성에 빙계서원을 건립해 慕齋 金安國, 晦齋 李彦迪, 西厓 柳成龍, 鶴峯 金誠一, 旅軒 張顯 光선생을 봉안함.
1699(숙종25) 하동에 영계서원(永溪書院)을 건립해 일두 정여창선생을 봉안하면서 학봉선생을 배향함.
1702(숙종28) 청송에 송학서원(松鶴書院)을 건립하고 퇴계선생의 위판을 봉안하면서 학봉선생과 여헌선 생을 배향함.
1782(정조6) 학봉선생문집 속집(5권3책)을 간행
1823(순종23) 진주에 경림서원(慶林書院)을 건립하고 학봉선생, 대소헌 조종도(선생의 위판을 봉안함.
1847(현종13) 석문정사 서편에 임천서원을 다시 세움.
1868(고종5) 임천서원 훼철됨.(大院君의 毁撤令)
1908(순종2) 영남유림이 임천서원복원소(臨川書院復元訴)를 올려 허가 받음.
1987 임진진주대첩비(壬辰晉州大捷碑) 건립(학봉선생께서 진주대첩 주획(籌畫)사실을 새김)
1993 학봉선생 순국400주년 추모행사, 학봉선생문집(鶴峯先生文集 元, 亨, 利, 貞) 발간
2002 학봉선생 시비 건립(日本國 對馬島 西山寺)
2004 학봉선생 시비 건립(忠淸道 보령 開花藝術公園)
2009 학봉기념관 건립(학봉종택 내, 경상북도, 안동시)
2011 사빈서원 중건복원. 사단법인 학봉선생기념사업회 출범
2013 임란진주대첩 학술대회(남명학연구소), 학봉선생 순국 7갑 주년 추모행사(성균관대학교)
2015 호계서원 복원복설 추진 중
3. 제향서원
안동 : 虎溪서원 (퇴계, 서애, 학봉, 대산), 泗濱서원 (청계, 약봉, 귀봉, 운암, 학봉, 남악 六父子 분), 臨 川서원 (학봉 선생 단독서원)
영양 : 英山서원 (퇴계, 학봉 선생)
의성 : 氷溪서원 (모재, 회재, 서애, 학봉, 여헌, 鶴洞 李光俊 선생)
청송 : 松鶴서원 (퇴계, 학봉, 여헌 선생)
하동 : 永溪서원 (일두, 학봉 선생)
나주 : 景賢서원 (한훤당, 일두, 정암, 회재, 퇴계, 고봉, 학봉 선생)
진주 : 慶林서원 (학봉, 대소헌 선생)
4. 학맥도 (별첨「학봉학맥도」참조)
❖ 의성김씨 역사 인물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국경(國卿)이며 호는 모재(慕齋)로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경기도 여주군 주촌에서 태어났다.
고조할아버지는 함흥 소윤(咸興少尹) 김호지(金好智)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예조 정랑(禮曹 正郞)으로 후에 예조 참판(禮曹 參判)에 추증된 김통(金統)이고, 할아버지는 성천 부사(成川 府使)를 역임하고 예조 판서에 추증된 김익령(金益齡)이고, 아버지는 예빈시 참봉으로 의정부 우찬성에 추증된 김연(金璉)이고, 어머니는 영월군수 허지(許芝)의 딸인 양천허씨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전주이씨로 송림군(松林君) 이효창(李孝昌)의 딸이다.
영남 사림파 정맥을 이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을 사사하였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기준(奇遵) 등과 교유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03년 별시 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홍문관 박사, 부수찬,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07년(중종 5)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지평, 예조 참의, 대사간,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17년 경상도 관찰사 재임 중 소학을 가르치게 하고,『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錄諺解)』,『정속언해(正俗諺解)』등 교화서를 간행 보급하였다.
또한 향약을 시행하도록 해 주자학적 향촌 질서 수립에 힘썼으며,『농서언해(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등의 농서와 『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등과 같은 의서도 간행하였다.
관찰사로서 의성에 들러 민정을 살필 때에 의성 김씨 중시조인 김용비(金龍庇)의 사당에 ‘진민사(鎭民祠)’란 편액을 써주었다 [1868년 의성관아에서 오토산 아래 오토재(五土齋)로 이건]. 이로써 관향인 의성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실제 1556년(명종 11)에 관찰사 재임 때 흥학·교화 사업에 힘쓴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의성 지역 유림들이 춘산면 빙계리에 묘우를 지어서 제향하였다.
이것이 빙계서원의 전신으로 1576년(선조 9)에 ‘장천(長川)’이라고 사액되었다가, 1600년(선조 33)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빙계 서원으로 개칭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를 재임한 후 1519년(중종 14)에 참찬에 올랐지만,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다. 이후 고향인 경기도 여주군 주촌과 여주군의 폐천녕현(廢川寧縣) 별장에 20년간 은거하면서 학문 토론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린 44인은 상당수가 이 시기에 인연을 맺은 문인이다.
김안로(金安老) 사사 뒤 홍문관 등 현직(顯職)은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예조 판서, 대사헌, 병조 판서, 좌참찬, 대제학, 찬성, 판중추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저서로『모재집(慕齋集)』,『동몽선습(童蒙先習)』,『이륜행실록(二倫行實錄)』,『여씨향약(呂氏鄕約)』,『정속언해(正俗諺解)』,『농잠서(農蠶書)』 등이 있다.
사후에 출생지인 기천서원(沂川書院)과 별장이 있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부임지였던 의성의 빙계서원과 같이 연고가 있던 지역에 배향되었다.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생가에 김안국의 부조묘가 있다.
김정국(金正國. 1485(성종 16)∼1541(중종 36)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국필(國弼)이며 호는 사재(思齋)·은휴(恩休)로 안국(安國)의 동생이며 김굉필의 문인이다.
1509년(중종 4)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하였으며, 이조정랑·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1537년에 복직, 다음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수십조에 달하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정책을 건의,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으며, 그뒤 병조참의·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40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성리학과 역사·의학 등에 밝았다. 문인으로는 정지운(鄭之雲) 등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사재집』을 비롯하여,『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기묘당적(己卯黨籍)』·『사재척언(思齋摭言)』·『경민편(警民篇)』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김용(金涌. 1557(명종 12)∼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이다. 예범(禮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진(璡)이고, 아버지는 찰방 수일(守一)이며, 어머니는 사과(司果) 조효분(趙孝芬)의 딸이다. 김성일의 조카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해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6奉敎), 성균관의 전적(典籍)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正言)·헌납(獻納)·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 등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해 많은 활약을 했으며, 교리에 재임 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이 생겨 그를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이 서인에 의해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옮겨졌다. 이 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중앙 관직과 지방 관직을 전전하였다.
일시 제용감정(濟用監正)·세자필선(世子弼善)·집의(執義) 등 중앙 관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지방 관직을 지내면서 오직 백성의 보호와 학문의 진흥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냈다. 그 후 1616년 60세의 나이로 여주목사로 나갔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자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죽었다.
안동 임호서원(臨湖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보물 제484호) 등이 있다.
김휴(金烋. 1597(선조 30)∼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자미(子美) 또는 겸가(謙可)이고 호는 경와(敬窩)이다. 아버지는 시정(是楨)이며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15세 때 향리의 백일장에서 장원한 일이 있었고, 성격이 대쪽 같아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폐모론을 주장하였던 정조(鄭造)가 경상도안찰사로 부임하여 예안을 순시하던 길에 도산서원에 들러 자기 이름을 원록(院錄)에 기재하였는데, 그때 이를 보고 분개하여 유적(儒籍)을 더럽히는 자라며 그 이름을 지워버렸다.
1627년(인조 5)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의 연구에만 힘썼다. 그뒤 조경(趙絅)의 간곡한 권유와 천거로 강릉참봉에 임명되었으며, 1637년에 부모 유사(遺事)를 찬술하였다.
스승인 장현광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서책을 도시(圖示)하고 분류, 정리하는 등 우리나라 서지학(書誌學)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 발달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저서로는 『경와집』·『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이 있다.
김성탁(金聖鐸. 1684년(숙종 10) ~ 1747년(영조 23)
김성탁의 자는 진백(振伯)이며 호는 제산(霽山)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김방렬(金邦烈), 아버지는 김태중(金泰重),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호군 김여만(金如萬)의 딸이다.
김성탁은 영양 청기(靑杞, 현 영양군 청기면)에서 태어났으나 선조들은 모두 임하현 천전리에 세거하였다. 6대조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별업(別業)이 이곳 영양 청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김태중이 잠시 이곳에 우거하였으나 이후 다시 안동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김성탁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통달하여 인근의 각광을 받았으며 17세에 갈암 이현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아울러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과 밀암 이재에게도 배웠으며, 고재(顧齋) 이만(李槾)과 도의지교 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의 초청을 받아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강좌(江左) 권만(權萬) 등과 창의하여 토역문(討逆文)을 지어 각지 유문(儒門)에 보내 의병 가담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안핵사(按覈使)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다.
1734년 어사 박문수와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다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의 추천으로 사과(司果)에 기용되어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중 상소하여 치국평천하의 도를 건의하고 왕도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이현일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정의(旌義, 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뒤 광양으로 이배되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이현일-김성탁-류치명으로 이어지는 퇴계학맥을 이었다. 문집으로는『제산집(霽山集)』16권 9책이 있다.
김낙행(金洛行)
김낙행(1708년(숙종 34) ~ 1766년(영조 42))의 초명은 김진행(金晉行)으로 자는 퇴보(退甫)·간부(艮夫)이며 호는 구사당(九思堂)이다. 아버지는 교리 김성탁,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로 통덕랑 박진상(朴震相)의 딸이다. 본래 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사후에 지인(知人)들이 ‘안자실약허(顏子實若虛)’의 뜻을 취하여 허암(虛庵)이라 불렀다가, 서재에서 '구사당(九思堂)이란 도장을 발견하고 ‘구사당’으로 호를 정했다고 한다.
임하현 천전리에서 태어나 18세에 밀암 이재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며 스승으로서 지극히 모셨으며 23세에 이재가 죽자 심상하였다. 27세에 문수산(文殊山)을 유람하며 견문을 넓히고 이때 처세와 수신에 관하여「자경문(自警文)」을 짓기도 하였다.
30세에 이르러서는 아버지 김성탁이 밀암 이재를 변호하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자 유배지까지 아버지를 모셨다. 그 뒤 아버지가 광양에 이배되어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안동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다. 42세에는 대산 이상정과 사단(四端)에 대해 논의하였다. 46세에는 류장원에게 편지하여『중용장구』에 대해 논하였다.
48세에는 봉성(鳳城, 현 합천군 삼가면)으로 이주했고, 이듬해는 봉화현(奉化縣) 황해촌(黃海村)에 우거하였다. 50세에 다시 임하로 돌아왔다. 55세에는 류도원에게 편지하여 격물치지에 대해 논하였다.
57세에『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의 의심난 뜻에 대해 이상정과 논하였다. 2년 뒤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낙행은 효행이 지극하고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제문에 뛰어나서 구제밀찰(九祭密札: 구사당의 제문, 밀암의 편지라는 뜻)의 미칭이 전한다.
김낙행의 학문의 연원은 퇴계학맥의 중심에 있는 밀암 이재에게 시작된다. 이재에게서『근사록(近思錄)』을 비롯한 성리학의 주요 저작을 배웠다. 또 아버지를 모시고 제주도에 갔을 때 마침 이상정이 내방하여 더불어『중용』,『심경』,『태극도설』의 의심나는 뜻을 강론하였다.
이재, 권만(權萬), 이상정, 류장원, 이광정(李光庭), 이동영(李東英)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경학(經學), 성리학, 예학 등에 대해 논변하였다. 이광정에게 보낸 편지「여이눌옹광정(與李訥翁光庭)」에는 초년에 학문은 정주를, 문장은 한당(漢唐)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에서 중년 이후 문장보다 도학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상정과의 총 18편의 왕복 편지에서는 주로『심경』,『주서강록간보차의(朱書講錄刊補箚疑)』,『태극도설』 등과 관련된 성리학적 주제들과 상제례(喪祭禮)에 관해 논하였다. 기타『중용』의 의의(疑義),『대학』의 공부(工夫), 사단칠정의 동이(同異), 심통성정, 기해예송(己亥禮訟) 때 송시열이 인용한 ‘가규(賈逵)의 상복소(喪服疏)’에 대해 고증 등 다양한 논의를 하고 있다.
저술 및 작품문집으로『구사당집(九思堂集)』이 있고 기타 저술로는『계몽질의(啓蒙質疑)』,『기법질의(耆法質疑)』,『상복경전주소통고(喪服經傳註疏通考)』,『강록간보고의(講錄刊補攷疑)』등이 있다. 1801년 종제(從弟) 김도행(金道行)이『구사당집』9권 5책을 간행하고, 1893년 9세손인 김시발(金時潑)이 4권 2책의 속집(續集)을 간행하였다.
김도화(金道和)
김도화(1825년(순조 25) ~ 1912년)의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이며, 한말 안동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서 아버지 김약수(金若洙)와 곡구처사(谷口處士) 정상관(鄭象觀)의 딸인 어머니 진양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3년 유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김흥락, 류지호(柳止鎬) 등과 더불어 안동의진 결성을 결의하고「안동통문(安東通文)」작성에 참여하였다. 1896년 1월 20일 안동의진이 구성될 때 여러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봉화 유곡(酉谷, 닭실) 출신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뽑았다.
안동의진의 1차 대장 권세연이 물러나자 김도화는 3월 13일 안동의진의 대장에 추대되었다. 3월 14일 대장에 취임한 후 류난영(柳蘭榮)을 도총(都摠)에, 김흥락과 류도성을 지휘장에 선임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다. 또 의병을 일으킨 뜻을 왕에게 아뢰는「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를 올리고 각지로 격문을 발송하는 한편 인근 지역에도 의병을 모으는 소모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태봉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권문팔(權文八)을 대표로 삼아 안동의병 250여 명을 파견하였다. 3월 26일 예천에서 안동 지역의 6개 의진과 제천의 호좌의진(湖左義陳)은 연합전투를 다짐하였고, 3월 29일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태봉 전투의 패배 이후 다시 병력을 보충하여 의진을 정비하고 전투 준비를 갖추었으나 8월 영남 지역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칙령이 안동부에 도착하고 이어 9월 11일 관군이 안동부에 도착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의진을 해산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청파오조약소(請罷五條約疏)」,「포고만국문(布告萬國文)」,「포고각국공사문(布告各國公司文)」을 작성하였다. 1910년 끝내 일제 강점으로 나라가 망하자 “국가의 통치 권한이 폐하의 사유가 아니고,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 사물(私物)이 아닙니다. 폐하, 어찌하여 필부들이 자기 논밭을 매매하듯이 해버렸습니까?”라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고, 1912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평생 위기지학에 힘써 ‘숙흥야매(夙興夜寐) 온고지신(溫故知新)’ 여덟 글자를 벽에 붙여 놓고, 사서와 태극도·서명(西銘)·근사록·역번(易繁)·주자서절요 등에 침잠하였다. 류치명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을 하니, 류치명은 ‘전척(展拓)’ 두 글자를 써줌에 이로써 ‘척암(拓庵)’으로 아호했다. 문집으로『척암집(拓庵集)』이 있다.
김흥락(金興洛)
김흥락(1827~1899)의 자는 계맹(繼孟)이며 호는 서산(西山)이다. 학봉 김성일의 적장손(嫡長孫)이다. 아버지는 능주목사(綾州牧使) 진화(鎭華)이며, 어머니는 참봉 이원상(李元祥)의 딸이다. 유치명의 문인으로, 1841년(헌종 7) 성현의 격언을 발췌한《제훈집설요람(諸訓集說要覽)》을 지었다.
1845년 4월 유치명의 제자가 되면서 이황·이상정·유치명으로 이어지는 근세 영남유림에서 빼어난 존재가 되었다. 이해 겨울에 곤학록(困學錄)을 편성하고,《초학잠(初學箴)》《외천설(畏天說)》을 지었다.
1850년 친명(親命)으로 증광시에 응시하였고, 1851년《학봉집》을 중간하고, 그 이듬해에는《가례의(家禮儀)》를 편성하였다. 1854년에는 졸수요결(拙守要訣)과 입학오도(入學五圖)및 주일설(主一說)을 지었다.
1867년(고종 4) 어사 박선수(朴瑄壽)가 유일로 천거하여 인릉참봉(仁陵參奉)에 임명되었고, 뒤 사옹원주부(司甕院主簿)·경상도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882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또 나아가지 않았고, 1894년 우부승지에 제수되고, 이어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다. 이돈우(李敦禹)·권연하(權璉夏)등과 교유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문집에《서산집(西山集)》이 있다.
김대락(金大洛)
김대락(1845-1914)의 자는 중언(中彦)이며 호는 비서(賁西)로 1845년(헌종 11) 임하면 천전리에서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기슭에 산다는 뜻에서 백하(白下)라는 별호(別號)를 사용하기도 했다.
퇴계학맥을 계승한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헌수, 숙부 김진기, 족숙 김흥락의 문하에서 성장하였다. 특히 김진기는 안동의 대표적인 위정척사 운동가였고, 서산 김흥락은 전기 의병을 지휘하였던 인물이다.
이렇게 좋은 집안의 장자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며, 구학문으로 일가를 이루는 수구적 삶을 66년 동안 살아왔다. 1907년 마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설립하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신학문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던 김대락은 1909년 초 노유(老儒)로서는 하기 힘든 일대 전환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협동학교의 신교육이야말로 ‘시조지의(時措之宜)’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인식하고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고, 협동학교의 확장에 노력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변화는 안동의 향중은 물론 영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김대락은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일가를 이끌고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즉 도(道)가 무너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정의 삶을 지향하겠다는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하고자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11년 윤6월 12일에 작성한 신흥학교「권유문」에서는 사상적으로 한층 진일보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서양의 문명과 새로운 조류에 대해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강자인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서양을 배우되 나라를 빼앗긴 특수한 상황에서 유가의 정신인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도리 정신으로 국혼은 지켜야 한다는 유가(儒家)로서의 본질적 취지는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1913년「공리회 취지서」에서 삼원포의 한인 단체였던 경학사가 무너지고, 갖가지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삼원포 사회에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공리회를 조직하였다.
김대락이 지향했던 자치단체는 ‘도와 덕’이 중심이 된 유교적 이상 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사회였다. 이것이 바로 김대락이 꿈꾸었던 ‘만주 망명 한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김대락은 만주 망명 후 줄곧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이주 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에서 사망하였다.
김동삼(金東三)
김동삼(1878(고종 15)-1937)의 원명은 긍식(肯植), 호는 일송(一松)으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젊은 일꾼의 양성을 위해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에는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기반 마련과 독립투사의 양성책을 협의하였다.
1910년 국권 침탈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삼원보(通化縣三源堡)에서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재만 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
1913년 경학사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여준(呂準)·이탁(李沰) 등과 남만주의 동포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민생 교육과 군사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같은 해에 이탁·김창환 등과 유하현(柳河縣)의 밀림지대에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개설하였다.
1919년 4월 이상룡·이탁 등 남만주 각지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을 확대, 개편하여 한족회(韓族會)를 발족시켰으며, 서무 부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1920년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소속 부대를 안도현(安圖縣) 밀림 속으로 옮겨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1월 일제의 대병력이 간도를 침략하여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 토벌(討伐)이란 명목으로 서북간도 전역에 걸쳐 한인들을 무참히 학살을 자행하던 당시, 북로군정서군 및 홍범도(洪範圖)의 군과 합세하여 밀산(密山) 및 러시아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희생을 줄였다.
1922년 연해주(沿海州) 각지 등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던 끝에,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서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23년 북경(北京)에서 열린 국민대표대회에 서로 군정서 대표로 참석하고 의장으로 선임되어 회의를 이끌었다. 이때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갈려 대립을 보이자 이를 조정하여 독립운동기구를 일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였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위원에 취임하여 화순(樺旬)·유하(柳河) 등지를 돌며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일본 경찰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1926년에는 두 차례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8년 길림(吉林)에서 정의부 대표로 김좌진(金佐鎭)·지청천·현정경(玄正卿)·이규동(李奎東) 등과 두 차례나 만나 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 등과 삼부통합회의(三府統合會議)를 진행하였다.
그 해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 의장,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내적인 모순점인 계파간의 갈등을 없애고 유일당을 결성하는데 주력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 정인호(鄭寅浩) 집에 투숙 중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임벽당 김씨(林碧堂金氏)
조선 중종 때 여성시인. 본관은 의성(義城), 별좌(別座) 수천(壽千)의 딸이며 기묘사화 때 고향인 한산(韓山)으로 가서 은거한 유여주(兪汝舟)의 계실이다.
문장을 잘 했고 서법(書法)에도 식견이 있어 글씨를 잘 썼다. 시집으로 ≪임벽당집≫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그의 시는 ≪열조시집 列朝詩集≫, ≪난설헌집 蘭雪軒集≫, ≪대동시선 大東詩選≫ 등에 일부가 전한다. <빈녀음 貧女吟>에서는 깊은 산골 벽촌에서 가난하여, 술이 없어 손님을 밤에 돌려보내는 안타까운 심정을 진솔하게 나타내어,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빈녀음>과 쌍벽을 이룬다.
<증별 贈別>에서는 이별의 슬픔을 나타낸 일반적인 한시의 주제를 다루었으면서도 여성특유의 정한(情恨)과 수심(愁心)의 내면세계를 곡진하게 나타내었다. 묘는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에 있다고 ≪기계유씨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김희삼<1507년(중종 2)~1560년(명종 15)>, 김우옹<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김성구<1641(인조 19)∼1707(숙종 33)>, 김담수<1535(중종 30)∼1603(선조 36)> 김창숙은 성주와 봉화지역 답사자료에서 자료에서 소개하였음
堯欽舜一 (요흠순일) 공경과 정일로서 덕 이룬 건 요순(堯舜)이고
禹祗湯慄 (우지탕율) 두려움과 공경으로 덕 닦은 건 우탕(禹湯)이네.
翼翼文心 (익익문심) 공손하고 삼감은 마음 지킨 문왕(文王)이고
蕩蕩武極 (탕탕무극) 호호탕탕 드넓음은 법도 지킨 무왕(武王)이네.
周稱乾惕 (주칭건척) 노력하고 조심하라 말한 건 주공(周公)이고
孔云憤樂 (공운분락) 발분망식 즐겁다고 말한 건 공자(孔子)였네.
曾省戰兢 (증성전긍) 자신을 반성하며 조심한 건 증자(曾子)이고
顔事克復 (안사극복) 사욕 잊고 예를 회복한 자 안자(顔子)였네.
戒懼愼獨 (계구신독) 경계하며 조심하고 혼자 있을 때 삼가서
明誠凝道 (명성응도) 명성으로 지극한 도 이룬 건 자사(子思)이고,
直義養浩 (직의양호) 바른 의로 호연지기 기른 것은 맹자(孟子)였네.
主靜無欲 (주정무욕) 고요함을 주로하며 욕심 없이 지내면서
光風霽月 (광풍제월) 맑은 날 바람에다 비 갠 뒤 달 렴계(濂溪)이고,
吟弄歸來 (음롱귀래) 풍월을 읊조리며 돌아오는 기상에다
揚休山立 (양휴산립) 온화하고 우뚝한 기상 지닌 명도(明道)였네.
主一無適 (주일무적) 전일을 주로 하여 변동 없음 이천(伊川)이고.
博約兩至 (박약양지) 박문에다 약례까지 양쪽 다 지극하여
淵源正脈 (연원정맥) 연원정통 이어받은 그 분은 주자(朱子)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