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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길을 물으라 여호수아 9:3-6, 14-15 엡 6:10-11,18
우리는 덴마크라는 나라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국토라야 남한의 반도 안 되는 땅이요 인구라야 4-5백 만 명이니 서울시 인구의 약 삼분의 일쯤 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1600년대에는 그 유명한 바이킹족으로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 바이킹족은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전쟁 배상으로 가장 비옥한 땅인 '딕'이라는 지역과 '홀스타인'이라는 지역을 하나는 독일에서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 내주고 말았습니다. 남은 땅은 모래땅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돌아온 병사들은 술 먹고 도박하고... 그냥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땅엔 지하자원도 없습니다. 자연 기후도 좋지 않습니다. 토지도 사막뿐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제 우리는 끝났다'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있을 때, 전쟁에서 돌아온 패잔병중 공병상사 '달라스'라고 하는 청년이 한 손에 성경 들고 한 손에 괭이 들고 군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친애하는 덴마크 국민 여러분, 칼로 잃어버린 우리의 조국 괭이로 찾읍시다. 해적 질로 잃어버린 도덕, 성경을 통해 찾읍시다.'라고 외쳤습니다.
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룬두비'목사입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덴마크 사랑'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거들떠보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어려운 그 땅을 살리려고 나무심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나무 심어 안되면 저 나무도 심어보고, 저 나무 심어 안되면 또 다른 나무 심어보고, 그러다가 어느 산골에 있는 이름 없는 나무를 심어 조림하고, 조림하다보니 그 땅이 옥토로 변해, 옥토가 되니 그 땅이 초원이 되어지고, 초원 따라 낙농을 해서 소를 먹여 세계적으로 우유와 버터와 치즈를 만들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소득 높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살아가다 보면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고민이 시작될 때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직면하게 되면 그때 누군가를 찾아가 상의하게 됩니다. 그때 누군가 상의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그 상담자가 때로 부모일 수도 있습니다.
교사, 선배,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인의 상담대상은 누구입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때 상담 수단은 물론 기도입니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했습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마음]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이다.”
그러니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 기도의 사이렌을 울리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15절에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일방적인 간구만 기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에는 더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묵상의 기도입니다.
묵상의 기도는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하는 자세가 묵상의 기도입니다.
예레미야 9:23~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고 상담하는 기도입니다. 일이 있을 때만 아니고 매사를 상담[성경]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무슨 일을 할 때,
전쟁할 때는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삶이 일반화 되었습니다. “전쟁에 나갈까요, 말까요?” 그때 마다 “가라 네 손에 맡겼느니라.”하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실수가 없었습니다. 이 묻는 삶이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되면서 두 가지 실수를 하였습니다.
하나는 아이성 전투에서 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트린 후 내친 김에 아이성까지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성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아이성은 여리고 성에 비해 아주 작습니다. 정탐꾼들은 2-3천명만 나가도 이길 수 있겠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정탐꾼들의 말만 듣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 그만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실수는 전열을 가다듬고 아이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때 주변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가슴이 서늘할 만큼 두려움에 떱니다.
그때 기브아 족속이 여호수아에게 사신을 보내 ‘우리는 먼 곳에 사는 부족인데 당신들의 하나님 소식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와 화친합시다.’ 하고 찾아왔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냥 그들과 화친조약을 맺었습니다. 3일후 알고 보니 그들은 이웃 백성들이었습니다.
왜 속였느냐고 물으니까 죽을까 봐 겁나서 그랬으니 처분대로 하라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하였으니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 기브아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의 발목을 잡고 가시가 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어떻게 할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14).”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길을 물으라 매사를 물어야 합니다. 진로를 상담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상담하고 물어 은혜 입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살인하고 도망하여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의 고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40년 왕궁생활과 오늘 광야생활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생활은 버려진 자의 삶입니다. 미래가 걱정입니다. 내 인생은 이대로 끝나는가 하고 심각한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호렙산으로 갑니다
모세의 고민을 성경이 굳이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호렙산에 이른 모세의 동태를 더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모세는 심각하게 고민을 토로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가야 할 내 앞 길은 도대체 어떤 길입니까” 모세는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이런 진지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 신발을 벗으라, 여기는 거룩한 곳이다” 그 말은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네 염려를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 하셨습니다.
“너는 애굽으로 가서 고난 받는 네 백성을 인도해 내라” 드디어 새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등용시켜 민족의 지도자로 나서게 됩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가다가 광야에서 잠을 잡니다.
야곱 이야기도 역시 성경은 거두절미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야곱이 그날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잤겠습니까. 세상에 어떤 사람이 그 밤에 잠이 옵니까. 그 밤에 야곱은 고민하고 걱정하고 몸부림치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날 밤 미래가 불투명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는 이 삭막한 현실에서 뜨겁고 진지하게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 밤에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야곱은 기도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환상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야곱은 그 밤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앞길이 시원하게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주 불행한 사례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28장을 보면 사울이 블레셋 군이 침입해 오자 겁이 났습니다. 두려우니까 상대가 더 크게 보였고 더 무서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때 누굴 찾아가야 합니까.
불행하게도 사울은 변장하고 무당집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 오라고 요구합니다.
생각의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망한 것입니다. 그때 죽은 사무엘이 환상으로 나타납니다.
사울이 절규 했습니다. “답답해 죽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사무엘이 매몰차게 말합니다. “너는 틀렸어, 하나님이 이미 너를 버리셨어.” 그 소리를 듣고 사울은 기진해서 쓰러집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여 아들과 함께 죽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렇게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 어떻게 살게되는가? 29절 이하 말씀 대로 될 것입니다.
(롬1:29-32)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의 결말입니다.
잠언 11장 22절에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사람도 막 살면 돼지 코에 금고리같이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좋지 않아도 자신을 세워나가면 큰 인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유다서 1장 20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집을 세우듯이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전쟁 포로지만 자기를 세워서 공부하니 그 나라 총리가 되고 도지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남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갔어도 종이라고 막 살지 않고 자기를 세우니 그 가정의 총무가 되고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세워야 됩니다.
아무리 밑바닥에 있어도 자기를 세우면 앞길이 자꾸 열리지만,
아무리 좋은 조건, 좋은 출신이라도 자기를 세우지 않고 막 살면 허물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고민 처리를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은 고민의 시대입니다. 직장문제, 배우자 문제, 장래 문제 등 문제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그때 누굴 찾아갑니까? 산에 한번 가 보셨습니까.
골방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금식하며 몸부림치며 기도해 보았습니까?
아니면 수단방법 찾아 헤맸습니까? 그러니까 길은 보이지 않고 지치는 것입니다. 고민처리법이 다양합니다. [살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씨름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무겁고 힘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분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짐은 서로 나누어 져야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주신 것입니다.
짐은 나누어 져야 가벼워집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해소됩니다.
중보 해야 할 때 중보요청하지 않고 혼자 짐 지고 한숨만 쉬니까 짧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미래문제, 장래문제, 운명의 문제, 현실의 모든 문제 등 다 가지고 가야 합니다. 주님은 “무거운 짐진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미국 부흥사 윌리엄 퀘일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자 밤새 기도했습니다. 걱정하느라 잠도 자지 못하고 베개를 끌어안고 몸부림 쳤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얼마나 몸부림치며 기도했던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일이구나 너는 자라 내가 깨어 있을 테니” 이런 은혜를 입어 보셨습니까.
다윗의 영성 [마음] 성경을 보면
매사 그렇게 하나님께 길을 물으며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가는 곳 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대상 18:6,13)고 하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묻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하실 때 키를 보고 선택하셨습니다.
사무엘상 9장2절을 보면 “사울은 준수한 소년이라 키는 백성 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훤칠한 키에 장수 스타일이었습니다.
오늘 사람들도 외모를 중시하다가 속고 눈물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울을 선택하시고 나중에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키가 왜소하였습니다. 골리앗에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뿔에 기름을 채워 들고 이새 집으로 가서 아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가면서 얼마나 잘 난 사람일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삼상 16장7절)”고 타 이르셨습니다.
그 말은 다윗은 작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가서 이새의 일곱 아들을 보니 다 기골이 장대하고 훌륭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싸인이 없습니다.
말째가 있는데 그는 아버지가 부르지도 아니했습니다.
그 말은 여덟 아들 중 가장 시원찮았다는 말입니다. 양을 치던 다윗을 데려와 보니 얼굴이 붉고 아름다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왕감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까.
다윗은 키는 작고 왜소하였지만 중심은 견고하였고 속은 거인이었습니다. 그 중심은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을 욕하는 것을 보자 속에서 피가 끓어올랐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이것을 보신 것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두드러졌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다윗은 순간 뜨거운 분노가 일어나 돌멩이를 들고 골리앗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근거는 그의 이 영성 [마음]때문입니다.
이 영성이 다윗을 만든 것입니다.
막12;33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짐승을 불에 태워 바치는 모든 제물과 그 밖의 여러 제물보다 낫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진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 하는사람입니다.
그리고 배워 나아갈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영성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보다 하고 불평만 하지 말고
내안에 이 영성이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이 욕을 당하고 있을 때 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가를 보십시오. 다윗에게는 이 열정과 영성이 있었습니다.
그 열정과 영성이 골리앗 앞에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려 나아갈 때 다윗은 골리앗의 키를 보지 않았습니다.
베틀 채 같은 그의 칼도 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오직 믿음에 근거해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영성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만 가지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다윗의 섭리의식 -다윗은 사울로부터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이목이 다윗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더 질투심에 불탔고 군대를 끌고 다니며 다윗을 잡아 죽이려 혈안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녔습니다. 한번은 엔게디 광야 굴속 깊이 숨었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사울 일행이 그 굴속으로 쉬기 위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울은 보지 못했지만 속에 은신해 있는 다윗은 보고 있습니다. 굴 입구 쪽에 자리를 깔고 낮잠을 잡니다.
지금 낮잠을 잘 시간입니까. 그런 면에서 이미 사울은 패배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울 일행에게 깊은 잠을 자게 하셨습니다.
부하들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니 사울을 죽입시다!”하고 명령만 내리라고 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사울을 죽이기만 하면 다윗은 당장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고 금방 왕이 됩니다.
그때 다윗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이 말이 다윗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하나님의 섭리의식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은 자를 내 어찌 손 대리요(삼상 24:4)” 그리고 다윗은 왕의 옷자락만 살짝 베고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에게 손대지 말라고 엄중 경고하였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울이 또 군대를 이끌고 추적해 옵니다.
광야 한곳에 진을 치고 잠을 잡니다.
다윗이 장수 아비새를 데리고 가서 보니 칼을 땅에 꽂아 놓고 잠자고 있습니다. 아비새가 “단칼에 찔러 죽이자”고 말합니다.
그때 다윗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께서 기름 부은 자를 치면 죗값을 치르리라 내가 기름 부은 자를 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삼상 26:8-12).” 그리고 물병만 가지고 돌아갑니다.
이것이 다윗의 영성[마음]입니다.
사울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길을 형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반란 당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낙향할 때 제사장 사독이 언약궤를 메고 왔습니다.
그때 다윗은 “언약궤를 다시 놓으라,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여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나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할 수 없지 않느냐(삼하 15:25)”고 말합니다.
다윗은 지금 법궤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판단에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도피해 가는데 사울의 친척 시므이가 따라오며 돌을 던지며 욕을 합니다.
그때 장수 아비새가 죽이려고 하자 다윗이 말합니다. “내 몸에서 난 자식도 애비를 죽이려 하는데 하물며 저 베냐민 사람이랴 그냥 버려두라 하나님이 저 사람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삼하 16:11).”
이것이 다윗의 성공 요인입니다. 다윗은 매사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매사 하나님 뜻을 존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선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앞길을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윗의 길을 인도하신 것처럼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