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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 새땅
2025년 3월 9일 제 979회.
사드배치 결사반대 김천시민 촛불집회
#전쟁을반대한다 #평화에살자 #통일로가자
#사드배치결사반대 #김천시민촛불집회
내란수괴 윤석열을 탄핵시키고, 마침내 그를 구속시켰을 때..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는 석방이라니..
계엄을 선포했던 그날 밤 못지않게, 어리둥절하고 분통터지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향해 손을 흔들고 인사하는 그 낯짝을 보고 있으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싶다..
정말 대한민국은 망조가 든 것인가? 그냥 이대로 이 나라는 끝인가?
우리들의 세상을 끝났고, 이제 저들의 세상이라 여겨야 하고 살아야 하는 건가?
우리가 너무 방심했던 탓일까? 아니면 너무 순진해서였을까??
내란세력의 잔뿌리는 어디에나 암약하고 있다..
생각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단단하게.. 또한 치밀하게..
그게 아니라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또 민주주의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값비싼 댓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값을 치르지 않고 그것을 누려온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직도 우린 그것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며, 말로만 주인이고 입으로만 국민이라 외치며, 제대로 누릴 의무와 책임을 소흘히 한 탓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 자리에 모였다.
부족하고, 모자랐던 것을 채우기 위해서..
진정한 이땅의 주인이며, 순국선열께 부끄럽지 않은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 함수연님이 마련해주신 '늙은호박죽'으로 따뜻한 정을 나눈다..
** 사회자는 작은거인 김종희팀장..
" 그제는 TV를 다 외면하고 뉴스를 아예 외면하고 지냈습니다. 다들 심정이 다 어떠실지.. 다 같은 심정이시겠지요.
하지만 반드시 탄핵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탄핵은 되고 그리고 내란 우두머리는, 반드시 민주주의를 짓밟은 그 응분의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끝까지 가야 되겠죠. 그렇습니다.
마음이 좀 정리가 안 됩니다. 그래도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내리라 생각을 합니다.
사드 뽑고 평화 심는 이 길이 10년째 이어지지만.. 우리가 항상 하고 있기 때문에,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끝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항상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함께 움직이며 우리가 희망하는 쪽으로 같이 갈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네 다행입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외세와 독재에 맞서 자주와 이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생각하며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 이어서 민중의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 첫번째 발언 박석민님.
일제 치하, 민족 해방 운동사에 빛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
" 오늘 역사 얘기 한두 가지만 먼저 해보면..
1977년 3월 9일 날 여러분이 생각하는 미국의 대통령 중에..우리한테 잘해준 적 있거나 뭐 좋은 ㄴ이 한 ㄴ도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ㄴ이 누구였나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100세까지 살고 세상떠난 지미 카터.. 이 양반이 사실은 한국 전체 외교나 역사에서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 중에 하나였고.. 실제로 94년에 카터가 방북하면서 한국의 전쟁 위기를 막기도 했던 그런 역할을 하기도 했었는데, 지미 카터가 1977년 3월 9일 날 주한미군 철수를 발표했어요.
그래서 4~5년 만에 철수하겠다 이래서 그때 한바탕 난리가 났었죠.. 이제 뭐 여러 가지 정책으로 복잡한 사안은 다 생략하고.. 트럼프도 예를 들면 뭐 철수 얘기를 하지만 이거 완전히 결이 달라요. 이걸 근거로 해서 협상 카드로 활용하고 이제 이렇게 되는데..
미군이 철수한다고하면 한국은 여기 바짓가랑이 매달려 가지고 많은 돈을 이제 앞으로 퍼주게 되는 이런 꼴로 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역사 하나에서도 한미 간의 관계에서 우리가 얼마큼 자주권을 잃고 있는지 알 수가 있고.. 또 한편으론 자주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생각하게 됩니다.
94년 3월 9일, 국제 MSD에서 한국은 인권 후진국이라고 경고를 발표한 적이 있어요.
아주 옛날 20년, 30년 전이긴 하지만.. 여전히 고문이 자행되고 있고, 그다음에 간첩 조작이 되고 있고, 인권이 후진적이다 이런 이제 사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최근에 우리나라 인권위원회 하는 짓들을 보면 그때로 확 돌아간 거라고 하는 느낌을 받죠.
2000년 오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어요.
우리나라 정상들이 보통 이런 한반도 문제나 이런 거를 얘기할 때 어디서 하냐 하면 주로 독일에서 그것도 베를린에서 주로 해왔어요.
왜냐하면 독일이 강대국에 의해서 분단이 됐지.. 그다음에 이 철의 장막이 무너지기도 하고, 통일로 나왔던 거 역사가 있으니까.. 보통 베를린에서 남북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하고 이런 걸 하는데 박근혜 얘기도 있죠..
어디서 했어요? 박근혜는 드레스덴에서 했어요. 드레스덴이라고 하는 곳, 여긴 어디냐 하면 2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완전히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갖고 폐허가 됐던 도시예요. 그러니까 이 베를린의 상징과 드레스의 상징은 완전히 다르죠. 거기에서 북하고 대화하자고 제안했는데, 사실 박근혜는 그 전부터 흡수통일을 얘기해 왔기 때문에 엉뚱한 제안들을 한 거 아닌가 하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그런데 윤석열 이 S끼는 3년을 아무것도 안 한 거를 뛰어넘어서, 가장 최악의 관계로 치닫은 게 지금 3년이었죠.. 가능할 것도 아니지만, 다시 복귀해서도 안 되는 건.. 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도, 우리가 사드 반대 싸움을 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90년 3월 9일날 있었던 사건입니다.
90년 3월 9일날 두 아이가 죽었어요. 서울 망원동에서.. 정태춘씨가 이걸 가지고 노래를 만들기도 했죠.
누군지 기억나시죠? 아빠는 회사 경비원의 일을 나갔고.. 엄마는 시간제 파출부 일을 나가는데 이 아이 둘만 두는 단칸방이에요.
문만 열면 바로 부엌이고 부엌 문 열고 나가면 연탄불에, 칼.. 이런 것들이 위험해서 부엌문을 잠그고 일을 나갔는데.. 아이들이 방안에서 성냥불 놀이하다가 불이 나서 불에 타 죽은 사건이 있었어요. 그 사건은 아이들이 죽은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죽은 사건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게 벌써 30년 훨씬 넘은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빈곤, 사회 양극화, 그리고 노동자 계급 내에서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이런 차별이 만연하고.. 이런 사회를 우리가 이제 벗어나지 못하는.. 그래서 윤석열만 끝내면 되는 게 아니고 이 사회의 근본을 바꾸는 이런 싸움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과제를 우리가 여러 번 확인할 수밖에 없는 이런 것을 기억하는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또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이건 좀 힘이 되는 이야기인데..
2019년 3월 9일날 돌아가신 분이 하나 있어요.
근데 이제 이분이 누구냐 하면, 문익환 목사님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가 돌아가신 날이에요. 문동환 목사님이 이제 한신대 교수를 할 때였는데, 박정희가 쿠테타를 통해서 권력을 찬탈하고 장기 집권 들어가면서.. 사실은 이제 그 본질이 드러나면서 70년대 되면서부터 반대가 시작되었죠.
가장 먼저 반대한 데는 원주에 있는 지학순 주교 여기서부터 박정희 반대 원주 시민들하고 1500명 이상이 모인 시위가 1970년에 시작되고.. 물론 그때는 이제 원주 MBC 방송국 문제 가지고 싸운 거지만 72년에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73년에 11월 2일 날 서울대생 시위가 있고 이 유신 정권에 반대했던 최종길 교수가 의문사로 죽는 이런 사건들이 막 터지기 시작해요.
근데 우리나라에 이제 기독교 특히 개신교나 천주교나 이승만이 취임식 할 때 느닷없이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아주 뜬금없이 손을 얹고 취임식을 했냐하면 성경책에다 놓더래요.
원래 헌법에다 놓고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이래로 개신교나 천주교가 모두 정권에 굉장히 호의적이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70년대 유신 이후부터 이제 개신교도 그렇고 천주교도 싸우고 그러는데, 이 개신교 중에 한 대학이 가장 선봉에 서요.
거기가 어디냐면 한신대.. 한신대가 선봉에 섰죠. 한신대는 73년 11월 9일부터 일주일 동안 학생들이 이창식이라고 하는 학생회장 중심으로 해서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가 수업을 들을 수 없다. 그래서 휴업을 결정해요. 그래갖고 이제 휴업에 들어가고 교수들도 사실은 여기에 이제 동조하고 근데 박 정권에서 뭐가 날라오냐 하면.. 학생들 다 퇴학시키고 잡아들여라.
이제 이게 연락이 오는데 여기 학장이 김정준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문익환, 문동환 교수가 학장실에 들어갔더니 이 양반이 혼자 머리를 깎고 있는 거야. 그래갖고 모든 교수들이 이 학장을 따라서 다 삭발을 하고, 학생들과 교직원들도 삭발을 해요. 하다못해 운전기사까지..
유신에 이제 맞서 싸우느라고 이렇게 싸웠던 이런 싸움들이 한신대에 이제 그때 73년에 있었고 여기에 안병무하고 문동환하고 동기 동창인데 서로 얼굴 보니까 빡빡이잖아요.
그래 갖고 그때 이제 처음으로, 안 교수 문 교수 막 이러고 불렀던 사람들이.. "야.. 동환아, 병무야!!" 이러고 부르며 동심으로 한번 돌아간 일화가 있었더랍니다. 머리 빡빡 깎고 서로 부둥켜 안으면서... 그리고 2019년 3월 9일 날 그 문동환 목사님 돌아가셨어요.
저는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그분들의 죽음을 보면서.. 지금 현재의 민주주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공기, 호흡.. 이런 것들이 이런 분들한테 빚진 게 너무 많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유신에 맞서고 박정희에 맞섰던 이런 싸움들의 온기를 우리가 받고 있는 거죠. 그래서 윤석열 파면 그다음에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이 싸움은 누구 몫이에요? 예.. 우리 몫이에요. 그분들에게 받은 은혜가 너무 크잖아요..
이제 일제 하의 여성독립운동사입니다..
이렇게 우리 역사에서 이런 싸움들을 해왔던 3.1운동 과정, 민족 해방 운동 과정에서 이 땅에 이제 여성들의 투쟁들을 쭉 말씀을 드렸는데..
최근에 이제 영화로 나왔던 <하얼빈> .. 여기에 3남매를 모두 이제 독립운동 최전선에 이제 내보냈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안중근 의사가 1910년 2월 14일 날 사형 선고를 받자, 아들 둘을 보내서 항소하지 말고 항소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보낸 편지가 있어요.
안중근한테 살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 그렇게 죽는 것이 어미에겐 효도라고 말합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가는 거다. 나는 내가 너한테 쓰는 마지막 편지일 텐데 내가 수의를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그다음에 다음 생에서 만나자'..
이런 편지를 써서 이제 보낸 건 굉장히 유명한 건데 이 편지도 당시에 안중근 의사를 감독했던 지바 도시치라고 하는 일본 군인이 이걸 다 기록으로 남겨서 이제 우리가 지금 받아보게 이제 된 거죠.
그런 이제 조마리아 여사 그리고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두 분이 상해에서의 독립운동 임시정부의 이제 어머니 역할을 하는 이런 이제 어머니들이 이제 계시죠.
근데 3.1운동이 있기 전에 전초가 있어요. 3.1민족 해방 운동이 전 세계의 이 독립을 알리는 이런 위대한 본격적이고 거족적인 투쟁이 되기 전에 동경에서 2월 28일 날 독립선언 발표를 해요.
주로 누가 하냐 하면 조선의 유학생들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갈 수밖에 없었던, 애국심이 있는 학생들이 어떤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조선 유학생이 단체에 들어오지 않으면 일본의 개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일본으로 유학 가는 학생들은 다 여기에 이제 가입을 했던거죠.
근데 거기에 조선 유학생 학우회에서 <학지광> 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했는데, 이거를 이제 냈던 편집장이 최팔용이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분이 1919년 봄부터 해서 웅변 대회를 개최하면서 지금 전 세계 정세를 볼 때..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가장 절호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고.. 그 세계 어떤 나라도 강대국이 끝까지 강대국인 나라가 없고, 나라가 뺏긴 나라가 끝까지 나라를 뺏겨서 소멸한 나라는 없다.
이런 이제 일장 연설을 하면서 사람들의 가슴에 이제 불을 지피죠. 그래서 이런 흐름들로 2월 8일 날 독립 선언 이걸 준비를 해요.
원래는 이제 10명이 실행위원을 했다가 그중에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제 그만둬서 두 사람이 다시 결합을 하는데.. 여기에 결합하는 사람이 김철수 이광수 이광수가 여러분들이 아는 그 이광수예요. 조선의 3대 천재라고 하는 그래서 2.28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써요.
3.1 독립 선언문은 최남선이 쓰고.. 조선의 3대 천재 중에 한 명이라고 하는 이런 사람들이 이제 쭉 쓰는데 2.38 독립선언서를 하려고 이제 마음을 딱 먹고 있는데 아무래도 소문이 날 거 아니에요?.. 그래서 1919년 2월 8일 날 동경은 눈이 잘 안 오는데 그날 눈이 왔대요.
눈이 오는 낮 2시에 YMCA 강당에 이제 모였는데.. 일본 경찰들도 이런 첩보를 들고 이제 모이기 시작해서 강당에 이제 한 500명 정도가 모여서 이제 독립 선언을 낭독하기 전에.. 원래는 조선 유학생 총회를 하려고 하는 자리인데, 거기에서 사회자가 개회 선언하는데 이 7, 8명이 "긴급 동의 있습니다." 그러고 뛰어나가서 독립선언서를 읽는 거죠.
"우리는 2천만 동포를 대표해서 전 세계 자유와 이것을 획득한 나라에게 독립을 선포한다."
이게 이제 첫 문장으로 하는 독립선언서를 이제 발표해요.
그러면 장내가 어떻게 됐겠어요? 격투가 벌어지고 경찰에게 체포, 연행되는거죠.. 독립선언서와 3.1 기미 독립선언문을 비교해보면 질적으로 차이가 느껴지는데, 2.28 독립선언서가 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제는 2.28 독립선언한 조선유학생들을 내란죄로 처벌하려고 했지만, 후세 다스찌라고 하는 일본인 변호사가 열심히 변호하며 '조선의 학생들이 조선의 나라를 빼앗기고 이를 독립하기 위해서 이걸 되찾으려고 하는 이런 운동을 일본의 내란죄로 한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 이러고 싸워서 일본이 내란죄를 적용 못해요.
이 후세 다스지라고 하는 변호사는 그다음에 한국의 독립운동 전체의 모든 변론을 하는 이런 역할들도 해요.
그런데 이때 강당에 있었던 한 여성이 있어요. 연행됐다가 나왔는데 이분이 지난번에 얘기했던 김마리아예요. 11명의 이 대표단이 다 남자인 걸 보고 이 독립에 대한 의지나 이런 싸움들은 여성들의 몫이기도 하고 우리들도 해야 되는 건데 여성들한테 제안도 안하고 이렇게 된 거에 대해서 사실은 좀 분개하고 2.28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서 가슴에 품고 와서 복사해서 사실은 3.1 운동 준비를 먼저 해요.
이분이 이제 고향이 황해도인데 그래서 3월 1일 당일 날 서울에서는 종각 탑골공원에서 2시에 시작하는데 평양은 1시에 시작하잖아요.
그리고 원산 의천 이런 여섯 군데에서 먼저 하는 게 이 사람들이 먼저 가서 취직해서 3월 1일 이북 지역에서는 6군데에서 동시에 해요.
3월 1일 날 이 남쪽은 3일 만세 운동이 시작되고 난 다음에 경부선 타고 내려오는 소식 전해 듣고.. 김천이 3월 8일 시도했고 대구가 3월 8일, 부산이 3월 11일 그다음에 아우내가 4월 1일 이런 식으로 이제 남쪽은 그 이후에 이제 독립 민족 해방 운동이 전개되는데.. 이런 역할들이 이제 김마리아라고 하는 여성이 하죠.
그래서 이 3.1운동 때문에 감옥에 가요. 감옥에 가는데 어마어마한 고문을 당하는데.. 이 김 마리아는 자신을 고문했던 형사에게 절대 일본 연호를 말 안하고 거부합니다.
이 일본인 형사가 남긴 이야기가, 정용욱이라는 사람이 쓴 책.. <대한의 독립과 결혼한 김 마리아>에 형사의 소회가 나와요. 거기에 보면 형사가 뭐라고까지 썼냐 하면' 김 마리아는 위대하다. 김 마리아를 낳은 어머니는 더 위대하다' 라는 이야기를 남길 정도로.. 그러다가 이제 석방이 됐지만 그 해를 못 넘기고 또 이제 감옥에 가서 1921년에 이제 조선을 탈출해요.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그래서 임시 정부를 돕다가 미국에서 유학하고 교사 같은 이런 지위를 가지고 오는데, 일본의 조건은 '신앙만 가르쳐라'.. 그래서 원산에서 마스타 신학원에 자리를 잡지만, 애국 부인회를 만들고 평생을 독립운동 하다가 44년 3월 13일 날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요.
이런 여성들의 위대한 투쟁들이 우리 운동 전체에 빛나는 투쟁으로 있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확인하고.. 그분들을 위해서도, 그분들이 남긴 우리한테 준 유산을 우리가 더 크게 발전시켜야 될 몫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936년 3월 10일 내일이죠. 도산 안창호 선생이 돌아가신 날이에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어떤 글을 남겼냐 하면 <그릇된 목표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실패하지만 올바른 목표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성공한다.
그래서 그것이 당장은 아니어도 반드시 성공한다고 하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한 발도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안창호 선생이 글에 이제 남긴 게 있어요. 우리가 사드 반대 투쟁을 하는 건 옳은 거죠. 그릇된 투쟁이 아니죠? 너무나 옳고 이 시대에 우리가 꼭 해야 되는 이런 싸움의 과제를 우리가 안고 지난 10년 동안 쌓아온 거고, 안창호 선생이 얘기한 것처럼 옳은 그런 목표는 반드시 성공하게 돼 있다고 하는 이런 신념을 확신을 우리는 갖고 있어야, 힘들고 당장이 안 될 뿐이지 그것이 갖고 있는 그런 지향과 이것이 옳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한다고 하는 이런 힘으로.. 우리 선배들이 쓰여 왔던 이 땅의 역사, 민주주의 역사, 그리고 조선을 자주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이런 투쟁들을 잊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함께 해 나갑시다. 그렇게 하실 수 있죠?
사드 뽑고 평화 심자.!!"
** 두번째 순서.. 소성리 조선동님의 무대
" 우리 역사가 이어져 있다는 것.. 제가 공부한 바로는 근현대사의 기준이 동학혁명이라고 보거든요. 이미 쓰러져 있는 분들, 왔다가 사라진 분들도 우리의 불씨이고 밑불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불씨였고, 밑불이었어요. 우리 마당에 젖은 장작들이 남아있지만, 많은 불씨와 밑불들이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를 이어주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장기투쟁 현장들에 핫한 희망들이 보입니다. 그들을 말벌동지라고 부르는데, 꿀벌을 죽이는 말벌을 잡는 동지라는 뜻입니다. 모든 투쟁현장에는 꿀벌들이 있는데, 그 현장에 다니면서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들을 말벌동지라고 합니다. 그분들의 특징을 보면, 언어가 굉장히 낮아요. 그 현장에 보면 실업자들이 많고, 학생도 많고 여성들이 많아요. 이 사이에 가장 밑바닥에서 온갖 설움과 탄압을 받는 그런 친구들이에요. 그런 친구들의 언어 자체가 굉장히 낮아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친구들한테서 그런 언어를 배우면서, '아, 내가 빨리 꼰대를 벗어나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꼰대를 벗어나는 길은 딱 한가지더라고요.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 되요. 그게 바로 연대입니다. 연대를 하게 되면 아주 신선한 말벌동지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전국에 있는 투쟁 현장을 두루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은 겸손의 미덕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와있는 차헌호씨도 겸손을 실천하는 분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않고 빈자리를 채우며 묵묵히 도와주는 사람들.. 현장에는 그런 분들이 많이 있고, 존경스러운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살고싶습니다."
첫번째 곡..
두번째 곡..
세번째 곡..
네번째 곡..
** 사회자 마무리 발언.
" 여러분,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방법을 알고 계신가요?.. 네.. 맞습니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집어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도 이 자리에서 평화를 지켜냈습니다.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고, 다음주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뵙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
어둡고 캄캄한 밤이다.. 내란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탄핵을 위해서는 좀더 가야한다.
잠시 방심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촛불시민들의 하나된 힘으로, 반드시 윤석열을 탄핵시키고
그 일당들을 일망타진하고, 남아있는 내란의 잔뿌리들을
모두 소거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민주시민의 하나된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