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의 상당수는 불교만이 제일이며, 남의 종교는 공부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불교종립대학에서조차 타종교에 대한 접근은 제도적으로 차단되어 있을 정도다. 이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경우, 신학대학에서조차 교과과정 중에 불교과목이 상당히 많은 것과 대조적이다. 타종교 성직자 가운데 불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참선을 생활화하는 경우는 있지만, 불교인의 타종교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기독교를 매우 천박한 종교로 매도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지독히 자폐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나 종교간 긴장과 갈등이 필연적으로 노정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다종교사회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이해는 필수적이다.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저지르는 불교훼손을 궁극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길은 그들이 정확하게 불교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그 책임은 틀림없이 불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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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목사는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라는 발제에서 이웃종교 공부에 대한 불교계의 안일한 태도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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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기독교를 대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한 목사에 의해 제기됐다.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라는 눈길을 휘어잡는 주제로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지난 24일 발제를 한 이찬수 목사(종교문화연구원장)가 그 주인공이다.
이찬수 목사는 이날 토론에 참여한 지식인 불자들을 향해 그리스도교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자로서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많아져야 한다는 요청이다. 그는 불자로서 그리스도교, 도교, 무속 등 한국의 다양한 종교들을 연구했던 이능화(1869~1943) 같은 이가 없지는 않았다고 전제했지만, 정작 문제는 이능화 사후 50년이 지나도록 그리스도교 및 타종교를 연구한 불자가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능화와 함께 이기영 박사가 기독교 연구,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연구에 관심을 보였지만 완성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안타까워 한 그는 “윤영해나 종교연합(U. R.)운동을 주도하는 진월 스님, 아울러 신학적 소양을 갖춘 뒤 한국 조계종단으로 출가한 현각(폴 뮌젠)도 어떤 형식으로든 불교 안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오해를 줄이고 이해 폭을 넓힐 수 있을 적절한 인물이라 생각된다”고 기대했다.
그는 ‘21세기의 불교유신론’을 언급하면서, 21세기 불교의 ‘유신’은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상생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토인비가 20세기 최대 역사적 사건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을 지목한 바 있듯이, 불교의 그리스도교 연구야말로 불교를 더욱 충실한 불교로 변모시켜줄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이웃종교를 배우고 포섭하는 행위는 종단의 제도 개혁 이후에 취해야 할 느긋한 과제가 아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행위 자체가 바로 오늘날의 불교개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불교계 안에도 21세기 유신이 일어나야 할 시점에 와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인 원효의 일심(一心)사상과 여래장사상, 의상의 화엄일승(一乘)사상 등 최고 스승들의 뛰어난 사상들은 한결같이 일체의 차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포섭해내려 한 시도였다는 사실에서도 오늘날 불교유신의 이유와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화쟁(和諍)을 자기 사유방식의 큰 틀로 삼았던 원효가 21세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를 화쟁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의상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일승’이라는 우주적 구원의 진리 안에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포섭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불교적으로 보건대 외적 차별이라는 것은 무지[無明] 내지는 분별심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극복의 대상”이라고 전제하고 “이 마당에 그리스도교를 차별의 대상으로 남겨두지 않고 적극 포섭하는 자세는 불교적으로 보더라도 필연적, 자연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불교를 억압하거나 배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면서도 그리스도교 안에 수용해내는 자세 역시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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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목사의 발제를 경청하고 있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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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의 깊이와 넓이를 수치화해 표현해본 적이 있으며, 그 요지인즉 불교가 90%쯤 완성된 종교이고, 그리스도교, 그 가운데 가톨릭이 80% 쯤 완성된 종교라면, 그리스도교 가운데 개신교는 70%쯤 완성된 종교라는 것”이라고 소개한 그는 “교리적인 완성도에서 보면 불교는 그리스도교를 포용하고도 남을 깊이와 넓이를 가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러한 수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수치상으로만 그럴 뿐이다. 실제로 그만큼 깊고 넓으냐는 교리상의 문제와 다른 차원에 있다. 내가 보기에 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깊고 넓은 종교라는 자긍심만을 가졌을 뿐, 정작 다른 종교나 사상을 실제로 포용할 만큼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불교계의 움직임에 대해 “서구에서 불교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드디어 세계는 불교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며 쉽사리 받아들이고, 과학적 세계관이 불교적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결국 서구 과학도 불교로 오게 되어 있다는, 다소 안일한 반응을 보이고 만다”며 “불교계는 서구의 사상 조류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서구에서 발전시킨 과학적 세계관, 그 사상적 근거를 꿰뚫어보지도 못한 채 쉽사리 안일한 포용주의에 머무는 경향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불교의 이런 태도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며 “내심 불교는 그리스도교보다 한 수, 아니 여러 수 위라는 심리적 위안감만 가질 뿐,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런지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자세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어떤 때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직접 대하기, 한 자리에서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우물에만 안주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의무 관심충실하지 못한 태도로 이어지게 된다”며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이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찬수 목사는 “불교는 나머지 10%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도 30%를 채우려는 그리스도교인의 노력 이상으로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리스도교가, 서양이 제대로 보일 것”이라고 강조하고 “그리스도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을 제대로 보아야만 불교가 미래 사회에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수 천 년의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거나 만만하지 않다. 도리어 거의 모든 불교 고전을 영역해놓았을 만큼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도리어 동양에 그 결과를 역수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소개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양 세계의 치열함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치열함의 정도에서 불교는 서양에, 좁게 말하면 그리스도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본다”며 “종교성 자체가 그러한 치열함을 넘어서고자 한다지만,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태도 자체에 치열함이 없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세계에 매일만큼 그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치열한 매임과 속박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상대를 알고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자세 없이는 언제까지고 자신의 ‘우물’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 세상 모두를 내 지혜의 ‘바다’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이찬수 목사의 지적은 기독교는 물론, 불교조차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채 불교를 기복의 종교로 전락시키고 있는 작금의 불교계에 대한 준엄한 경고에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