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차은희. (사진 =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 제공) 2023.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경상도 아가씨의 순정' 등 여러 히트곡으로 1950~60년대 인기를 누린 원로가수 차은희(최은섭)가 별세했다. 향년 86.
30일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 등에 따르면, 차은희씨는 전날 오전 5시24분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숙명여중 재학 중 6·25 동란이 터져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부산 데레사여고 3학년 때 인근에 살던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의 권유로 국제신문사 주최 콩쿠르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으로 1등을 차지했다. 차은희라는 예명은 이 콩쿠르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이재호가 지어준 것이다. '리어카에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아이'(車銀姬)라는 뜻이다. 졸업 후 HLKB(현 KBS 부산) 전속가수로 발탁, 부산·경남 지역을 돌며 공연했다.
1956년 '한 많은 오륙도'를 취입하며 정식 데뷔한 차은희는 대구 애호레코드를 거쳐 1958년 신신레코드(이후 신세기), 아세아레코드에드의 전속가수로 활약했다. '경상도 아가씨의 순정' 외에 '일선의 우리 오빠' '대답 없는 추억' '여배우 일기' '청춘 아베크' 등 약 10년간 100여 곡을 발표했다.
[서울=뉴시스] 차은희. (사진 =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 제공) 2023.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특히 1960년에 발표한 곡 '꽃 파는 차은희'가 확인해 주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이 노래 제목에 삽입될 정도 당시 크게 주목 받았다. 이 곡의 작곡가는 송운선이었는데, 그는 차은희와 함께 공연하던 HLKB의 기타리스트였다. 명랑한 분위기의 곡이었는데 노래 제목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 차은희가 개인적으로도 오랫동안 아끼던 노래로 알려졌다.
차은희는 1962년 공연단체를 이끌던 이춘식 쇼단장과 결혼한 이후 자녀 양육 등에 살림에 집중했고, 1965년 신곡 발표와 활동을 중단했다.
다만 1975년 부산연예협회 가수분과 위원장을 맡았고, 2007년 부산 출신 가수 현인을 기리는 현인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는 등 부산과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노래 도시 부산을 지키는 버팀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성서 평론가는 "'사월의 별'(1962)을 통해 4·19 혁명으로 유명을 달리한 넋들을 위로했고 '서울의 전차 차장'(1962)에서는 서울 시내를 달리는 전차 차장의 일과를 유쾌하게 묘사하는 등 노래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그려냈다"고 봤다.
[서울=뉴시스] 1956년 첫 취입한 '한 많은 오륙도'의 장소를 56년 만인 2012년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와 함께 찾은 차은희. (사진 =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 제공) 2023.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또 차은희가 가수로서 높게 평가 받는 부분 중 하나는 대한 맑고 또렷한 발음이었다.
박 평론가는 "맑고 고우면서도 풍부한 성량으로 여러 음반사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발표했던 고인은 서정적인 트로트에서부터 맘보, 트위스트, 민요, 가곡까지 모두 소화해 낼 정도로 다재다능했던 가수"라고 기억했다.
말년까지 부산 양로원 회장을 맡아 봉사활동을 이어간 그는 최근 투병 중에서도 톱 가수 임영웅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평론가는 "누워 있다가도 TV에서 임영웅의 목소리가 나오면 '벌떡' 일어났다고 전했을 정도였다"면서 "임영웅 에 대해 '지금까지 본 가수 중에 표현력도, 표정도 최고'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팬이었다고 유족은 전했다"고 덧붙였다.
빈소 부산전문장례식장 VIP 5호, 발인 31일 오전 10시30분. 051-312-4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