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 주일, 7시 식사 후 8시, 쿠스코 산토 도밍고 수도원 성당 호스텔
에서 조식 후,
4월이지만 해발 3,400m 고산지대 특성으로 기온이 낮아 두툼한 옷을 입고
일찌감치 쿠스코 시내 스페인 문화 탐방에 나선다.
탐보마차이에서 내려오다가 보니 쿠스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쿠스코 한복판 넓은 광장, 이곳은
스페인식 ‘아르마스 광장’으로 스페인 정복 도시의 기본형이다.
본디 이곳은
잉카 제국의 신성한 광장 ‘아우카이파타’ 로
쿠스코 왕국을 이어 잉카 제국이 시작된, 쿠스코의 중심이요, 잉카의 마지막
황제가 스페인에 의해 처형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쿠스코를 점령한 피사로, 먼저 잉카 제국 건축물을 모조리 허물고 그 자리에
스페인식 ‘아르마스 광장’을 만들고 그 가장자리 중심에 성당과 관청을 두고,
유럽식 정원으로 꾸몄다. 그러므로 이곳은 마드리드 거리 처럼 성당이 군데
군데 서 있다.
쿠스코 대성당은 잉카인의 태양, 달, 별, 그리고 시간을 만들어냈다는 위대한
창조의 신 '바라코차' 신전을 허물고 그 위에 지었다. 잉카 문화를 가톨릭 문화로
개조하려는 당시 시대적 요청으로 여겨진다.
성당 중앙제단은 300톤의 은으로 장식하고, 성당 곳곳에 아름다운 돌과 금속
세공 작품들로 장식했다. 이 세상 것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린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금박을 입힌 쿠스코 성벽과 정원에서 보석이 달린 조각상을 발견
하고 얼마나 흥분했겠는가? 그들이 신대륙을 찾아 나선 것도 황금 때문 아니었
던가?
성당 건축에 쓰여진 돌은 대부분 삭사이와망 요새 등 잉카 건축물에서 빼내어
온 것이라고 한다.
산토 도밍고 수도원 성당은 잉카 제국의 최고의 신 비라코차와 태양신 인티
에 바쳐진 코리칸차(태양의 신전) 토대 위에 세워졌으니, 이것 또한 정신 문화
개조 일환이 아닌가?
이 코리칸차 건물은 잉카 제국 최고 신전답게 잉카의 지혜와 기술을 총동원
한 그 어느 유적보다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전 돌궤는 55kg의 순금으로 덮였고, 코리칸차의 화강암 벽도 순금판으로
뒤덮였으며, 넓은 정원은 실물 크기 동물과 여러 가지 금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야말도 황금의 나라였음을 보여주고도 남는다.
라 꼼파니아 데 헤수스 성당은 쿠스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바로크 양식 성당으로
잉카 제국의 황제(10대 왕 토파 유판키)가 살던 태양 처녀 궁전 터에 세워졌고,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과 박물관도 잉카 제국 황제(10대 토파 유판키)가 살던
태양 처녀 궁전 터에 세워졌으니, 스페인 문화 보급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 수도원은 시스테르 안나 수녀가 시성(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되어 더욱
유명해 졌다고 한다..
쿠스코 주교좌 대성당에 우리 일행들이 도착했을 때 마침 미사 전례 진행
중이었다.
성당 중심 제대와 성당 벽이 완전 금으로 장식되어 매우 화려해 보인다.
성당 안에 워낙 많은 신자들이 가득 차 있어 맨 뒤에 서서 미사 전례 끝 부분
만 참례하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9시, 성당 앞 광장에서 국기 게양식 준비 중, 국기 게양식에 참여하려는
시민들이 모여들고, 게양식을 거행하기 위해 집총 군인 행렬까지 모여드는
모습이 새로운 구경거리가 된다. 우리 나라는 정권에 따라 국기 게양식 하는
양상이 달리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 잉카 제국 도읍이었던 쿠스코 시가지를 탐방하면서
일찌기 해양으로 진출한 스페인, 한손에 십자가, 한 손에 총칼을 들고 미지의
땅을 정복하면서 이 땅의 기존 토착 신을 밀어내고 창조주 하느님을 알게 하고
(가톨릭 80%) 스페인 문화로 물들여 놓은 현장을 역력히 볼 수 있는 하루였다.
다음 장에서는 스페인이 잉카문화 지우기에 힘썼으나 워낙 거
대하고 견고한 잉카 석조문화는 페루 쿠스코 시내외 곳곳에 아직
도 남아있는 모습을 찾아보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