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대면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니터를 통해서 보는 것일지라도 누구의 얼굴을 1년 이상 1 주일에 한 번씩 몇 시간 동안 볼 수 있다면 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 아둘람e공동체를 통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서로를 웬만큼 알게 되었다.
누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의 구조나 성격 등이 들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히 자기 주장을 많이 할수록 자기를 더 많이 들어내게 되어 있다. 그가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을 이야기를 함으로써 듣고 알게 된다.
그런데 자기가 말하는 것에 의하여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들어나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자기가 옳다는 생각으로 이야기 할 때인 것이다. 그럴 때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잘못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증세가 나타나면 그 사람을 희피하게 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이 온라인 모임의 파생적 효과일 것이다.
나는지난 40 여년 동안 조직활동을 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조직이란 비영리 성격으로 자발적인 참여를 하는 조직을 말하고 활동이라함은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운영 혹은 관리를 하는 입장을 말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산전 수전 공중전 월남전을 거친 내가 터득한 바는 어느 조직이나 그 조직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져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져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단체의 성격이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지는 것이기 때문에 전자가 대부분이지만 반드시 후자도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특징은 ‘어떻게 하면 단체에 기여를 해서 좋은 단체를 만들 수 있을까?’보다는 철저히 자기 입장에서 무엇이 마음에 안드니 무엇이 틀렸니 하는 개인적인 기호를 우선으로 하는 경향성이 강하다.
사실보다 느낌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이 있다. 아이들처럼 ‘싫어, 좋아’가 많은 사람이다. 사물과 사건을 판단할 때 객관적인 생각 보다 주관적인 판단이 강하다. 말을 할 때 자기감정을 잘 들어낸다. 그러나 사람을 마주하면서 드는 느낌들은 피차의 상호작용 속에서 오는 것이지만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지만 가장 중요한 전쟁은 자기와의 전쟁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늘 지고 살아서 아예 긴장을 느끼지를 못하고 산다. 타인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자기와의 싸움일 경우가 더 많다.
사람은 에고라는 이른바 ‘존재의 벽’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 깊숙한 곳에 에고라는 ‘반향판’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타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에고의 반향판으로 받아들인 뒤 그 반향음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타인의 음성을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에고가 듣는 셈이다.
“저 사람은 저래서 맘에 안 들고 이 사람은 이래서 맘에 안 든다.”고 남을 탓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에고와 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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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성향으로 음모론적인 시각이 있다. 음모론자들은 무엇과 무엇 사이에 존재하는 인상적인 연관성을 주장하면서 자기 사고 속에서 제멋대로 중요도를 다르게 부여한다. 어떤 사건이나 사태에 대하여 나타난 객관적 사실 보다는 추측하고 넘겨 집고 짐작하고 나름대로 판단한다.
기질적으로 음모론적 기질을 가진 사람은 객관적 사실을 전제 없이 바라보기 보다는 주관적 해석이 강하다. 전체적 조합 보다는 부분적 분석이 능하다. 유별나게 분석을 하고 원칙을 잘 내세운다. 그러나 사실 그 원인은 자아가 불안하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