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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22일 토요일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말씀의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맡겨진 양 떼를 사심 없이 돌보아야 하며, 양 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어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인 원로>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5,1-4
사랑하는 여러분,
1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원로들에게 같은 원로로서,
또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2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3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4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던 제자도, 첫눈에 거짓 없다고 칭찬하시던 제자도,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제자도 아닌 어부 출신의 단순하고 우직하며 열정적인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이유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뚜렷하고 분명한 신앙 고백에서 찾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신앙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직무 수행에는 지식이나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끌리는 신앙이 무엇보다 먼저 요구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는 사목의 큰 책임을 맡는 사람에게 먼저 신앙 고백을 요구하는 전통이 이어져 옵니다. 이미 초세기 교부들이 인정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언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확인한 교황의 수위권은 하느님 백성의 ‘친교’인 교회 일치의 중심이자 주교단의 머리로서 가지는 권한입니다.
교황께서 국제 사회에서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시기는 하지만 베드로에게서 이어받은 직무는 행정이나 조직 운영, 또는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일 곧 사목을 위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당신을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의 본당 사제요 로마의 주교라고 즐겨 부르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바로 그러한 목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사람으로 소개하고, 다른 목자들에게 자진해서, 열성으로, 모범으로 양 떼를 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돌보는 임무를 맡은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특히 교황님을 위하여 오늘 더 기도합시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은 계속됩니다. 벳사이다를 떠나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한 수제자, 언제나 듬직한 반석 같고 큰 바위 같은 제자 베드로를 축복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7-18)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막중한 임무, 엄청난 역할을 수여하십니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정말이지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은, 세상 전부를 쥐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존재 자체로 우리 후배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손에 쥔 분으로, 그 어떤 시련과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았던 분, 넓직한 반석같이 든든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에게도 한때 치명적인 과오, 치욕적인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과 더불어 참 제자가 되기 전, 그는 여러 측면에서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도로 사도의 성격은 과격했고 불같았으며, 마치 럭비공 같아 어디로 튈줄 몰랐습니다. 때로 조용히 있었으면 50점이라도 딸텐데, 괜히 먼저 나서다가 스승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수난의 시기, 그는 스승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배반하는, 결정적 과오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재 양성의 귀재이신 예수님의 탁월하고 예술적이며 인내로운 단련에 힘입어, 베드로 사도는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 제자로 거듭납니다. 작은 바람에도 쉼없이 흔들리던 나약한 갈대 같았던 베드로는 그 어떤 시련과 고초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큰 바위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 사도는 매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수제자 배반 사건’을 떠올리며 크게 울었답니다. 낮 동안에도 틈만 나면 송구한 마음에 울고 다녔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눈자위 주변은 늘 붉게 물들어있었으며, 짓물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왕이면 작은 모난 돌맹이가 아니라, 크고 든든한 반석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 흡족해하실 반석,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편히 앉아 쉬고 갈 수 있는 그런 반석이 되기 위해, 뾰쪽하고 모난 부분들을 갈고 또 갈아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책길에 가끔 코요테와 같은 동물을 만납니다. 보통은 서로 갈 길을 가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저를 보더니 멈추어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순간 당황해서 멈추었습니다. 옆을 보니 나뭇가지가 있어서 손에 잡았습니다. 그러자 코요테는 가던 길을 갔고, 저도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저의 길을 갔습니다.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를 향해 다가오는 유혹의 코요테가 많았습니다. 시기, 질투, 욕심, 게으름, 분노, 이기심의 코요테입니다. 저는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런 유혹의 코요테를 만났고, 쉽게 넘어졌습니다. 유혹의 코요테를 몰아낼 영적인 나뭇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나뭇가지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나눔이 있습니다. 기도, 말씀, 나눔의 나뭇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유혹의 코요테가 저에게 다가와도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유혹의 코요테가 우리를 보고 무서워서 자기 갈 길을 가도록 영적인 나뭇가지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푸른 녹지와 사막이 있습니다. 녹지는 좋고, 사막은 나쁜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사막은 필요하고도, 소중한 존재라고 합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 덕분에 지구의 대기는 흐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는 바람을 타고 멀리 아마존까지 도달한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에 있는 미네랄 성분이 아마존 나무들을 울창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막에는 많은 지하자원이 있어서 우리의 삶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지구에 사막이 없고 모두 울창한 녹지가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지구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지금 대기 중의 산소는 20%인데 만약 사막이 모두 녹지가 되면 산소의 농도가 40%까지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에는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에 그런 환경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석탄, 석유는 모두 그때 화재로 인해서 생겼다고 합니다. 좋은지, 나쁜지 결정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자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생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자리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동생 안드레아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이라고 생각하였고, 기꺼이 베드로에게 사도좌의 권위를 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3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는 교황은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나누는 이곳이 이미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조건으로 용서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는 유리와 같아서 쉽게 깨지고,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아낌없이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는 불의와 폭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며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나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권위가 아닙니다. 나의 체면과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권위일 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희생으로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가 푸른 녹지라면 열매를 맺으면 좋습니다. 그 자리가 뜨거운 사막이라면 정화와 단련의 기회로 만들면 좋습니다.
<잇는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당신과 나
곱게 이으신
하느님께서
당신 닮은
잇는 나
되라고 하시니
하늘과 땅
땅과 하늘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하느님과 나
나와 하느님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하느님과 벗
벗과 하느님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벗과 나
나와 벗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벗과 벗
벗과 벗
잇는 나
일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나 있음에
모두 이어지기를
하느님의 믿음대로
하느님의 희망대로
하느님의 사랑대로
오늘의 성인
성 아타나시오 (Athanasius)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니코메디아(Nicomedia)
활동연도 : +818년경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성 아타나시우스(또는 아타나시오)는 어려서부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그는 니코메디아 부근 성 바오로(Paulus)와 성 베드로(Petrus) 수도원에서 가난한 은수 수도승이 되었고, 후에 원장이 되었다.
그는 성상파괴주의자인 아르메니아 사람 레오(Leo) 황제의 통치 중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추방당하는 등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성녀 마르가리타(Margaret)
신분 : 3회원
활동지역 : 코르토나(Cortona)
활동연도 : 1247-1297년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라비아노(Laviano)에서 살던 어느 농부의 딸인데, 7세 때에 훌륭한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갖은 학대를 받으며 진정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채 성장하였다.
외모가 뛰어나게 예뻤을 뿐만 아니라 다소 관능적이었던 그녀는 집을 뛰쳐나와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에서 온 어느 기사와 눈이 맞았다. 그는 그녀와 결혼을 약속하고는 9년 동안이나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죄녀의 대명사처럼 불렸고 사람들로부터 천시를 당했다.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자기 옷을 물고 잡아당겨 어느 밤나무 밑에 가 보았다가 무참하게 살해된 자기 애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처참한 모습을 보자마자 하느님의 심판을 절실히 깨닫고 몬테풀치아노를 떠나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안고 고행복을 입은 채 아버지께로 돌아갔지만 계모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이제 거의 절망 상태에 빠졌을 때, 그녀는 문득 작은 형제회 회원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수도원을 찾아 헤매었으나 찾지 못하던 중 어느 두 부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는 작은 형제회 재속 3회원이 되고자 하였으나 죄녀라는 이유로 허락을 받지 못하다가, 3년 후인 1227년에 입회가 허락되어 철저한 보속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탄이 그녀의 통회를 방해하며 지난날의 욕정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기도와 고행이 무가치함을 보여주며 실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따뜻이 안아 주시어 관상의 은혜와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은총을 주셨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통회생활을 시작한 지 23년째 되던 해인 1297년 2월 22일에 50세의 나이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작은 형제회의 성녀 막달레나'로 불린다. 그녀의 시체는 코르토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장되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유해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고 한다. 그녀는 1728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베드로 사도좌
Feast of the Chair of Peter
Cattedra di San Pietro Apostolo
Cathedra St. Petri Romae
가톨릭 신자하면 누구든지 다 아는 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사도를 선택해 3년간 이들을 특별히 가르치셨고 그 중에서 성 베드로를 뽑아 교회의 으뜸으로 삼으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은 베드로 반석입니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마태 16,18). 또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시오”(즉 신자와 성직자를 잘 다스리라)(요한 21,15-17) 하고 말씀하신 것을 보더라도 명백하다.
이처럼 성 베드로가 온 교회의 으뜸이라면 그의 교좌(敎坐)가 있는 교회가 전 그리스도교회의 모교회 (母校會)로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당연지사라 볼수 있으며 로마 교회야말로 이에 해당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 강림으로써 굳은 신덕을 갖게 된 성 베드로는 그 후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삼고, 혹은 전교에 활약하고,혹은 사방의 신자들을 방문해 그들을 격려했다.
교회가 점차 발전됨에 따라 헤로데 왕의 박해는 시작되어 예루살렘의 주교 성 야고보는 순교하고, 성 베드로는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결국 그도 사형에 처하게 될 몸이었지만, 기묘하게 천사의 특별한 도움을 받아 감옥에서 구출되고,신자들의 요청으로 안전 지대인 안티오키아로 피하게 되었다.
그곳은 신자들도 많고 성대한 교회가 있어서 베드로는 그 교회를 7년간이나 다스리며 착한 목자가 되었고, 다른 사도들에게는 착한 지도자가 되었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마르16,15)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사도들에게 남겨주신 이 말씀은 항상 베드로의 마음을 울려왔다.
전 세계의 서울이라고 할만한 로마, 굉장한 인구를 가지고 있는 로마, 그곳이야말로 교회의 씨를 뿌릴 만한 가장 좋은 땅이 아니었던가?
마침내 이 신천지의 개척을 결심한 베드로는 안티오키아를 후계자 하가보의 손에 맡기고 로마로 가기로 했다.
그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42년이었다.
그 후 25년 동안 그는 주로 이 지방에서 전교에 전력을 다해 큰 책임을 가진 그는 그동안 대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온 교회를 다스리는 큰 책임을 가진 그는 그동안 이곳 저곳 교회의 시찰과 전교를 위해 순회했을 때도 있었고 예루살렘의 사도회의(使徒會議)에 참석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그의 성좌의 소재지였던 것은 언제든지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
교회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오의 시대까지는 비교적 평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네로 왕이 황제가 되자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매일 수백 명의 신자가 체포되어 살육되었다. 이런 때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위험한 것이 교황인 베드로였다.
신자들은 간곡히 그의 피난을 재촉했다.
“당신이 다스릴 신자들은 비단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많은 신자들을 위해서도 아무쪼록 귀중한 목숨을 아껴 주십시오”하고 요청했다.
베드로는 처음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마침내 그들의 요청에 의해 일시 로마를 떠나기로 했다.
옛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어느 날, 날이 새기 전에 사람 몰래 로마를 떠나려고 유명한 아피아 가로(街路)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멀리서부터 큰 십자가를 지고 창백히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상히 생각하면서 베드로가 가까이 가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니까 그는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시며 고통과 비애에 깊이 잠겨 계시는 바로 예수님이었다.
베드로는 즉각 그대로 땅에 엎드려 말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쿠오 바디스 도미네?)
주님께서는 그가 주님을 세 번 배반했을 때와 같은 슬픈 얼굴로 한참 바라다 보시면서 대답하셨다.
“그대가 신자들을 버리고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재차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로마에 들어가는 길이오!”
이런 비통한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솟아오르는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곧 일어선 베드로의 얼굴에는 굳을 결심이 보였다. 그는 그곳에서 바로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주님의 훈계로 자기 갈 길을 확실히 깨닫고 지금이야말로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당신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요한 21,18) 하신
주님의 예언 말씀이 이루어지고, 순교할 때가 온 것을 깨달았다.
과연 베드로는 오래지 않아 체포되어 십자가 형(刑)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는 주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부당히 생각하고 스스로 자원하여 거꾸로 못 박혀 장렬히 순교했다.
때는 67년 6월 29일이었다.
지금도 로마에는 성 베드로가 집회(集會)시에 사용했다는 의자가 잘 보존되어 있다.
새 교황이 선발되면 우선 그 의자에 앉음으로써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거룩한 권리를 받는 표시로 삼는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사도좌는 이런 형태를 가진 교좌나 베드로의 의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교좌, 즉 예수께서 설정하신 지상 교회의 중심인 교황직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Sermo 4 de Natali ipsius, 2-3: PL 54, 149-151)
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굳건한 신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온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베드로가 모든 민족을 구원으로 부르고 모든 사도들과 모든 교부들의 으뜸이 되도록 간택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많은 사제들과 사목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먼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지만 베드로도 자신의 고유한 권한으로 다스립니다.
형제들이여, 이러한 직분의 부여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 권능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몫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권한을 갖기를 원하시지만, 그것은 항상 베드로를 통해서만 주십니다.
주님께서 언젠가 모든 사도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호한 대답을 전해 주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희들 자신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맨 먼저 주님을 고백한 사람은 사도들 가운데서 첫 자리를 차지했던 그분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세상의 견해가 너를 오류로 이끌지 못하며, 천상적 감도로 말미암아 교훈을 받고 육정이나 혈통이 아닌 외아들의 아버지이신 그분께서 가르쳐 주셨기에 너는 복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너에게 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나의 신성을 계시하신 것처럼 나도 너에게 너의 높은 위치를 알려 주겠다고 하십니다.
"너는 베드로, 반석이다." 말하자면, "내가 부서질 수 없는 반석이고 두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모퉁이 돌이며 누구도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반석이라면, 너도 내 힘으로 견고해진 반석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한에 참여함으로써 너도 그 권한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즉, 이 견고한 기초 위에 나는 영원한 성전을 짓겠으며 하늘까지 오를 내 교회가 이 신앙의 견고함 위에 세워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힘도 이 신앙을 누르지 못하고 죽음의 사슬도 이 신앙을 묶어 버릴 수 없다. 이 말은 생명의 말이다.
이 신앙은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것처럼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던져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지극히 복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이 권리를 행사할 권한을 다른 사도들에게도 물려주셨으며 또 교회의 모든 주교들에게도 물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이들에게 나누어 줄 권한을 한 사람에게 위임하시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에게 이 권한을 위임하시는 것은 베드로를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의 으뜸으로 내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홈에서)
사도좌 使徒座
라틴어 Sedes Apostolica 영어 Apostolic See
사도의 장인 성 베드로가 창설한 로마 주교좌를 말한다. 따라서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로마 사도좌의 주교도 된다. 그러므로 사도좌는 교황좌, 혹은 성좌(聖座)라고도 하며 수위권을 가지고, 전세계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세계교회를 말한다.
성좌 聖座
라틴어 Sancta Sedes(S.S.) 영어 Holy See, Apostolic(Papal) See
세계 교회를 뜻하는 로마의 주교좌를 가리키는 말이나. 일반적으로는 최고의 주교인 교황과 교황을 보좌하는 로마 교황청의 각 성성(聖省), 재판소 등의 행정기관까지도 포함하여 이를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교황은 이 기관을 통해서 세계 각국의 교회를 관리한다.
주교좌 主敎座
라틴어 cathedra 영어 cathedra
주교좌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교회의식(敎會儀式) 때 주교가 앉는 의자를 가리켰다. 초기 교회시대에 주교는 이 주교좌에 앉아서 의식을 거행하고, 교도직을 수행하였다. 이 때문에 주교좌란 말은 주교의 권위, 주교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상징하는 말로도 쓰인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에서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에서 모세의 자리(Super Cathedram Moysi)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앉은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편 전례용어로서 주교좌라는 말은 주교가 그 직위에 오르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가 로마에 ‘주교좌’를 정한 축일”(The feast of the Cathedra of St. Peter at Rome, 1월 18일)의 경우에서 주교좌는 바로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주교좌 성당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주교좌는 나무나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천장이 있고, 팔걸이와 등받이가 있다. 그 위치는 복음서대 옆 3대의 계단 위에 위치한다. 천장의 색은 축제일의 색을 사용한다.
수위권 한자 首位權
라틴어 primatus 영어 primacy
모든 주교 가운데 제1의 지위인 교황이 가진 권한을 수위권이라 한다. 이 수위권은 교회의 창설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권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교회의 반석이라 부르고, 그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였다(마태 16: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도들 가운데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이루어졌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세 번씩이나 당부하셨다(요한 21:15-17). 이러한 베드로의 수위권은 그를 계승한 후임 교황들에게 전수되었다.
수위권에 대한 교리는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년), 피렌체 공의회(143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 등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규정되고 확인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에 따라 성 베드로가 전 교회에 대해 수위권을 가지고, 그것은 후계자들에게 영속적으로 계승된다"고 발표하고, 이를 부정하는 주장은 이단이라고 하였다. 또한 베드로의 수위권을 계승할 자는 로마의 주교임도 아울러 밝혔다. 즉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의 주교는 어떤 시대이든가를 막론하고 수위권을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 로마의 주교가 수위권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는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로서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죽었으며, 로마의 주교들은 베드로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의 질서를 보존해 왔다는 것으로, 이 견해는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가 수위권을 갖는다는 사실은 사람이 정한 바가 아니라 신이 정한 바라고 한다.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수위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발전해왔다. 가장 최근의 견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다. 공의회는 교화에 대한 주교들의 역할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기본적인 가르침은 변경되지 않았다. 여전히 교황은 전교회와 신자들에게 신앙과 도덕을 가르치고,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한 최고의 권우를 갖는다.
(가톨릭대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