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廣州李氏)는 신라시대 경남 함안칠원의 호족이던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고 광주(廣州)를 본으로 하는 성씨이고 2015년 인구는 18만명이다. 이자성의 약 9백년 뒤 후손인 이당(李唐, 1300~1369)은 고을 아전으로 있으면서 원님 딸과 혼인하여 5남을 두었고 5남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중 차남 둔촌(遁村) 이집(李集,1327~1387)은 고려 공민왕때 판전교시사를 지내고 정몽주등과 교류한 문인이다. 광주이씨는 이당계열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당-이집-이지직-다섯아들로 이어지면서 번성하였다. 이 계열은 이당을 중시조로 하고 이집을 기세조로 한다.
2. 이당의 묘와 발복
* 경북 영천 북안면 도유리 산85에 있는데 왕릉처럼 크다란 봉분과 넓은 묘역으로 인하여 광릉이라 부른다. 이 묘를 쓰게된 내력에 관하여 아래와 같은 설화가 있다. 이집은 1368년 신돈을 비난한 탓으로 처형당할 처지가 되자 함께 근무하면서 절친으로 지낸 최원도에게 의지하기로 작정하고 아버지 이당을 모시고 경북 영천에 있는 최원도를 찾아갔다. 최원도는 다른 사람보는 앞에서는 역적이라 꾸짖고 매정하게 내쫒은 뒤 밤에 몰래 이당부자를 찾아서 집으로 데려와서 숨겨 두고 그 사실이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처를 벙어리로 만들고 여종 연아(燕娥, 제비)를 자살하게 조치하였다. 도피생활 중 1369년 이당이 사망하자 최원도는 자기의 신후지를 제공하고 남에게는 자신이 사망한 것처럼 소문내고 집을 나갔다(벙어리가 된 최원도 부인이 홀로 농사를 지으며 3년간 이집과 함께 살면서 시중을 들었다는 셈인데 그랬을가?). 이집은 4년간의 도피생활 끝에 신돈이 1371년 권력을 잃고 처형되는 덕택에 고향으로 돌아갔다.(이집의 묘는 성남시 하대원동243-11에 있다.) 두 사람의 우정은 2001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실려있다.
* 묘역에는 이당의 묘 그리고 위에 최원도의 어머니 영천이씨 묘가 있고 청룡입구에 계집종 연아의 묘가 있다. 최원도는 영천최씨로 그의 선조 최무선은 화약을 제조하여 왜구토벌에 큰 공을 세운 가문인데 그는 복권후에도 벼슬을 사양하고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하며 묘는 실전되어 형제2명과 단소에 모셨다.
* 이당의 후손중에서 상신5명 대제학2명 급제188명(5정승 6판서 7공신이라는 말도 있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출세한 것 못하지 않게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는 불행이 따랐다. 연산군(재위1495~1506)때 이극돈은 김일손 일파를 역적으로 몰아 제거한 무오사화의 주모자로 몰려서 그 후손들까지 조정에서 배척당하였고 연산군이 생모 죽음에 대한 분풀이로 일으킨 갑자사화에서 이세좌가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가져다준 것이 빌미가 되어 일족 수백명이 처형(주로 6세손이 처형당했다) 또는 유배됨에 따라 가히 멸문지화를 당했다. 한동안 뜸하다가 이덕형이 나타나서 부흥하는가 싶더니 간신으로 낙인찍힌 이이첨(1560~1623)으로 인하여 종지부를 찌었다. 즉, 이이첨은 임란때 광해군(재위1608~1623)을 수행하고 광해군을 적극지지하여 등극시킨 공로로 장기집권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부자(父子)5명이 처형당하고 이로써 10대에 걸친 대과급제의 명가가 사라진 것이다.
3. 조선8대 명당
이당의 묘는 야자형(也字形)의 명당으로 조선8대명당 중 하나이다. 그러나 간혹 말하기를, 혈뒤에서 기운을 묶어주는 속기가 없다 또는 혈처가 넓고 둥글어 기운이 결집되지 않는다 또는 참화를 많이 당하는 것을 보면 명당이 아니라고 한다.
* 생기는 변화를 하면서 진행하므로 혈처 뒤에서 묶어주는 곳이 필요한데 여기는 그런 곳이 없으나 혈처에서 방향전환을 하는 것으로 변화를 주었고 자세히 보면 전순이 형성되어 있다. 옛 중국 山書에 혈처는 균형과 조화가 맞아야 된다고 하였지만 균형은 조화속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변화없이 생기가 형성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변화와 조화가 지표가 되어야 한다.
* 출세를 하는 것만으로 복이라 할 수 없고 천수를 누리고 가문이 평안해야 된다. 이집의 후손이 참화를 많이 당한 이유는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풍수적으로 국세가 백호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청룡쪽은 백호쪽에 비하면 허전하다. 둘째 몸종 제비가 19세 나이로 스스로 자결할 생각을 하였을 리 없고 주인들이 은근히 요구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친구 최원도 부부의 헌신적 희생으로 이 묘를 썼다. 시제때 수저 한벌 더 올리는 것으로 보은이 되겠는가? 이러한 원죄(原罪)가 원인은 되지 않았을가? (2023.9)
* 야자형(也字形)---
* 기맥선의 방향전환---
* 기맥선이 방향을 틀자 여력이 도포자락 펼치 듯 전개되었다. 변화가 없으면 혈이 맺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