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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카고 시민은 마피아를 지지했을까? / ‘밤의 대통령’알 카포네
“미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가 인생을 마감한 호화 주택이 최근 84억원 상당에 팔렸다 (…) 대지면적만 3만 평방피트(3716㎡)에 이르는 대저택에는 60×30 피트(18×9m)의 수영장과 경호원 숙소까지 따로 있다. 주택 정문 옆에도 손님방을 마련하고, 경호원을 세워 철통같은 경비를 유지했다. 미국 최대 폭력조직을 이끌던 카포네가 말년에는 다른 조직의 급습에 대한 불안에 떨었기 때문이다.”
2013년 6월에 전해진 위 외신은 알 카포네(Al Capone, 1899-1947)에 대한 관심이 여전함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하기야 그간 카포네를 소재로 수없이 많은 영화, 드라마, 만화가 만들어져 왔고, 지금도 시카고에 가면 카포네를 추억하는 투어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카포네 마케팅’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게 틀림없다.
알 카포네(왼쪽)이 연방보안관 로벤하이머와 대화하고 있다(1925).
“당시 미국에는 낮과 밤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했다.”
1893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의 9자녀 중 4째로 태어난 카포네는 유년기를 뉴욕 빈민가에서 보냈다. 이미 13세 때 담임교사와 교장을 폭행해 퇴학을 당할 정도로 갱단 두목의 자질을 보였다. 그는 왼쪽 뺨에 칼 맞은 상처가 있어 ‘스카페이스(scarface: 흉터난 얼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카포네를 다룬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 [스카페이스](1983)도 바로 여기서 따온 제목이다.
암흑가의 두목 조니 토리오(Johnny Torrio, 1882-1957)의 보디가드로 출발한 카포네는 1925년 토리오의 후계자가 되어 1천명의 부하를 거느리며 시카고에서 ‘밤의 황제’ 노릇을 했다. 왜 뉴욕이 아닌 시카고였던가? 마피아 내부에도 등급이 있었다. A급인 시칠리 출신이 장악하고 있는 뉴욕에서는 나폴리 출신은 명함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920년 금주법의 시행과 함께 시카고가 지리적 이점으로 주류 밀매의 최대 근거지로 떠오르면서 마피아의 세계에선 시카고가 뉴욕 못지 않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1927년 정부 관리들은 카포네 갱단이 주류 취급으로 연간 약 1억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 엄청난 이권을 놓고 마피아들 사이에선 주도권 다툼이 자주 벌어졌는데, 당시 시카고의 암흑가는 벅스 모런(Bugs Moran, 1891-1957)이 이끄는 아일랜드계 갱단에 카포네의 이탈리아계 갱단이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이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미국 이민사를 지배하는 ‘선착순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계는 백인들 중 이민 막차를 탄 그룹이었으며, 주로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쓸 만한 사업과 일자리들이 먼저 이민을 온 다른 계열의 백인들에 의해 선점된 탓에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이게 바로 조직범죄 집단에 이탈리아계가 많이 진출한 배경이다.
카포네는 스스로 이탈리아계 출신임을 꺼려 자신의 이름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풍으로 앤터니 브라운으로 부르게 했으며, 아들 앤터니에게도 WASP 일류교육을 받도록 예일대학에 입학시켰고, 결혼도 그런 식으로 하게끔 했다.
이탈리아계는 심지어 가톨릭 교회에서도 차별을 받았으며, 이는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1960년대말 이탈리아계가 미국 가톨릭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21명의 대주교는 물론 100여명의 주교들 가운데 이탈리아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탈리아계보다 50년전에 이민을 온 아일랜드계가 미국 가톨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계보다 좀 낫다는 것이지 아일랜드계 역시 적잖은 차별을 받고 있었기에 이들 역시 조직범죄 집단에 많이 진출했다. 암흑가의 세계마저 아일랜드계에 의해 선점을 당한 이탈리아계로선 ‘한판 전쟁’이 불가피한 셈이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게 1929년 2월 14일 미국 시카고 북쪽 링컨공원 근처에서 카포네 부하 7명이 모런 부하 7명을 톰슨 기관총으로 사살한 이른바 ‘밸런타인데이 학살(Saint Valentine's Day Massacre)’ 사건이다.
‘밸런타인데이 학살’의 현장검증 당시 모습(1929).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창무는 이렇게 말한다. “사건 해결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들었다. 알 카포네가 쌓아놓은 거대한 인맥이 움직인 것이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빅 빌’로 불리던 윌리엄 톰슨 시카고 시장도 알 카포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낮과 밤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밤의 대통령이 바로 알 카포네였다.”
‘현대판 로빈 후드’로 여겨지기도
때는 바야흐로 조직범죄의 춘추전국시대였는데, 1929년 시카고에는 91개의 협박 조직이 존재해 사업가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걸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주류 밀매업을 하는 갱단은 톰슨 기관총을 애용한 반면, 협박 조직들은 주로 폭탄을 사용했다. 1927년 10월 11일부터 1929년 1월 15일까지 15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시카고 지역에서 적어도 157건의 폭탄이 터졌지만, 이 모든 사건의 가해자들 가운데 벌을 받은 사람 역시 한 사람도 없었다.
법이 썩었을 뿐 아니라 무능한 상황에서 사업가들은 카포네 갱단의 보호를 요청해 안전을 도모하는 길을 택했다. 일반 시민들도 ‘밤의 대통령’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기까지 했다. 카포네는 부모에 대한 효성, 형제간 우애, 아내에 대한 충성이 지극했다. 실업자들을 위해 무료 급식소를 차려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파티도 열어주고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병원비를 대신 내주는 등 자선사업도 많이 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카포네를 ‘현대판 로빈 후드’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는 아인슈타인, 헨리 포드와 함께 당시 시카고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밤의 대통령’이란 말은 결코 나쁜 뜻만은 아니었던 셈인데, 그는 이에 걸맞게 자신이 좋은 일을 하는 사업가라고 주장했다. “만일 사람들이 술을 원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것을 팔려고 하는 놈은 미친 놈일 것이다. 나는 좋은 술을 공급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29년 알 카포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카고트리뷴>자의 기자 제이크 링글턴의 살해 사건 직후에 저널리스트 클라우드 콕번은 <런던타임스>의 요청을 받고 카포네를 인터뷰했다. 인터뷰를 통해서 콕번은 엉뚱하게도 ‘미국체제’가 가진 미덕을 칭송하는 강의를 들어야 했다. 카포네가 자유와 기업정신과 개척자들을 칭송하면서,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해선 경멸적인 혐오감을 표출했다는 것이다. 카포네는 자신의 범법 행위마저 철저하게 미국적인 방식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우리들의 이런 미국적인 방식은 (그는 소리 높여 말했다) 그걸 ‘아메리카니즘’이라고 부르든 ‘자본주의’라 부르든, 아니면 뭐라 부르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 기회를 던져주는 겁니다. 우리는 다만 양손으로 그걸 꽉 붙잡아서, 충분히 활용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결국 이 인터뷰는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영국인들이 미국의 갱단 두목으로부터 그런 ‘강의’를 듣게끔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카포네는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악명(惡名)에 대해선 언론에게 화살을 돌렸다.
“뉴스 갱들은 아마 영원히 나를 팔아먹을 거요. 꼭 내가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죄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이오. 당신도 내가 무한정한 권력과 엄청난 재력을 가졌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내가 권력을 가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대에 내 재정 형편 역시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어려운 상태입니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돈은 언제나 엄청나죠. 하지만 이익금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아마 내가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당신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이름도 많을 겁니다.”
알 카포네가 실업자들을 위해 운영했던 무료급식소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알 카포네의 식당(Big Al’s Kitchen for the Needy)”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무료급식소에서는 하루 3끼의 식사가 제공되었으며 매일 약 3,500명이 이용했다.
카포네 갱단은 25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살해했지만, 카포네는 건재했다. 그가 엘리엇 네스(Eliot Ness, 1903-1957)를 비롯한 사법당국에 걸려든 죄목은 우습게도 연방소득세법 위반이었다. 그는 그 혐의로 1931년 기소돼 8년간 징역살이를 했으며, 출감후 플로리다주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매독으로 고통받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흥미롭게도 1990년 미국 주류업협회는 카포네의 탈세에 대한 모의재판을 열었는데, 여기서 나온 결론은 카포네의 변호사들이 그들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카포네의 변호인단은 연방 정부가 자신들의 고객에 대한 반대 증인으로 내세운 이들 중 일부가 강요로 출두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카포네가 구속된 1931년에만 전년의 두 배가 넘는 체납 세금이 들어왔다는 점이다. 탈세범에 대한 강력한 처벌에 놀란 범죄자와 시민이 체납된 세금을 납부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를 가리켜 ‘알 카포네 효과’라고 한다. <중앙일보>(2013년 2월 25일)는 “국세청, 역외탈세와 전면전 돌입: ‘알 카포네 효과’ 노린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세청이 역외탈세와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역외탈세는 세원 발굴은 물론 국부 유출 엄단을 위해서도 근절해야 한다는 게 국세청의 인식이다. 수천억 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기소된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이 최근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면서 국세청은 한층 자신감을 얻었다 (…) 국세청은 특히 권혁 시도상선 회장의 법정구속을 계기로 그동안 세금을 탈루해온 이들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는 ‘알 카포네 효과’가 생겨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알 카포네 효과’는 그럴 듯한 작명이긴 하지만, 왜 희대의 범죄자가 보통사람들의 지지나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관련하여 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조직범죄 집단이 대중의 지지를 누리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적잖이 일어나고 있기에, 이런 의문과 관련하여 카포네를 써먹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낮의 대통령’이 타락하면 ‘밤의 대통령’이 부활한다
조직범죄 전문 역사가인 루치아노 이오리초(Luciano Iorizzo)는 카포네가 누린 인기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카포네는 불황기에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일찍이 전 세계적 경기 불황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카포네는 무료식당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그는 번영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는 희망을 품은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증거가 되면서 한참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런 점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답은 카포네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 나는 시민이 바라는 것을 공급했을 뿐이다. 내가 범죄자라면 선량한 시카고 시민들 역시 유죄다.”
영국 정치학자 수잔 스트레인지(Susan Strange, 1923-1998)는 ‘국가의 퇴각(the retreat of the state)’이라는 관점에서 마피아 현상을 바라본다. 마피아 권력의 강화와 세계적 확산에 주목하는 그는 “국가와 같이 마피아 조직 또한 경제적 기생충과 같다. 이는 시민들로부터 보호할테니 돈을 내라는 식의 수입을 얻어내는 방법에서의 말이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탈리아의 마피아 조직들은 질서와 투표권을 지켜 나가면서 정부 기관의 그림자와 같은 시스템으로 작용하여 왔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탈리아를 어느 정도의 문제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게 했다. 몇 십 년 동안 국가는 마피아에게 사회적 매개체로서의 중재 역할을 맡겨 왔다. 더불어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권 보호 그리고 질서 유지가 모두 마피아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알 카포네가 주최한 시카고 컵스와 화이트 삭스 자선경기에서 야구선수 개비 하트넷이 카포네의 아들에게 사인볼을 주고 있다(1931).
또 영국 미래학자 이언 앵겔(Ian Angell)은 일본의 마피아(야쿠자)가 1990년 도요타 자동차의 여덟 배에 달하는 55억6천만 달러의 이익을 냈으며, 일본 증시에 등록된 기업의 98%가 범죄 조직에 ‘연구비’ 등의 명목으로 많은 돈을 지급하고 있다는 추정 통계를 거론하면서, “하지만 이러한 거래가 현대 국가들에 만연한 정당에 대한 기부 행위와 다른 점은 또 뭐란 말인가?”라고 묻는다.
“범죄자들은 중산층 시민들만큼이나 무정부 상태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난폭하고 잔인한 도덕성은 주로 범죄 조직들 사이의 싸움에서 나타난다. 범죄자들은 기생충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먹이로 삼을 건강하고 질서 정연한 사회가 필요하다 (…) 국가는 조직 범죄 집단들이 무정부 상태와 사회 붕괴를 낳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린다. 그러나 진실보다 앞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마피아조직이 주변을 다스릴 때에는 힘없는 할머니들조차도 거리에서 강도를 당하지 않는다 (…) 범죄자들은 점차 지배 범위를 넓히고 있으며, 자신들을 새로운 독립국가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1995년 1월 고베 대지진 직후에 야쿠자들은 일본 정부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식량과 담요들을 전달했다.”
카포네 갱단은 이탈리아나 일본의 마피아 수준에 미치진 못했지만, 위와 같은 시각은 카포네가 누린 인기를 설명하는 데엔 도움이 된다. 국가, 즉 공직자들 역시 마피아 조직원들과 같이 경제적 기생충이라는 점에선 같다는 시각은 공직자들이 본분에 충실하지 않을 때에 벌어질 수 있는 시나리오를 예고해준다.
카포네를 어떻게 평가하건, 그가 당시 상류사회와 권력층의 탐욕·부패·위선을 이용하고 그 터전에서 자신의 제국을 건설했다는 데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낮의 대통령’이 타락하거나 시원찮으면 언제건 ‘밤의 대통령’이 인기를 끌 수도 있다는 사실, 카포네는 바로 그 점을 온몸으로 웅변해준 게 아닐까?
글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글쓴이 강준만은 언론과 대중문화를 포함하여 문화사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조지아대에서 신문방송학 석사, 위스컨신대에서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고 1989년부터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현대사 산책(전 23권)](2002~2011), [한국대중매체사](2007), [미국사 산책(전17권)](2010), [세계문화의 겉과 속](20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