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 여행5 - 아폴론신전 아래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를 구경하고 호텔에서 TV를!
2024년 5월 2일 아테네에서 버스로 파르나소스 산을 올라 아라호바 Arachova 를 지나 3시간 만에 신탁으로
유명한 해발 750m 델피 Delphoi (Δελφοί 델포이)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하고 유적지에 도착해 12
유로 입장권을 끊어 박물관을 보고 언덕을 올라 고대 유적지 (Archaeological site of Delphoi) 를 구경합니다.
델포이라는 말은 “자궁” 을 뜻하니 세상의 중심으로 신탁을 전하는 무녀들은 ‘피티아’ 라고
불렸으니 아폴론의 신탁은 피티아가 신전의 삼각의자에 앉아 무아지경에 빠진채
중얼거리면 사제들이 그 말을 운문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내려졌으니 신탁을 받으려는
도시국가나 개인은 '패리노스'라는 세금을 내야 했으니 보물 창고를 이곳에 짓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빛깔을 띤 아폴로 신전은 길이가 60m, 폭이 23m 크기로 3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었는데....
현재는 복원된 6개만 있는걸 보는데..... 조금 더 올라가서 신전 위의 야외극장은
2층 35계단으로 이뤄져 있고, 5,000명 관중을 수용했다고 하는데 보관상태가 양호한게 놀랍습니다?
여기서 멀리 마라톤 전투 현장이 보인다는데.... BC 492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아테네를
공격하려고 보낸 함대가 폭풍우로 침몰하자 분노에 차서 노예에게 “왕이시여, 아테네인들
을 기억 하소서” 라고 외치게 하며 원정을 준비했다고 하니 오월전쟁에서 와신상담이 떠오릅니다.
다리우스 대왕은 사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페르시아 10만 대군이에에해의 여러 섬을 거둔후 BC 490년
에 저기 마라톤에 상륙하자 1만 아테네군의 대장 밀티아테스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상륙하느라
대오를 갖추지 못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니 아테네는 중국의 “송양지인” 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모양입니다?
그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왕은 100만(실제로는 30만?)의 군대를 모아 그리스로 향했으니 폰토스 해협에
다리를 놓아 건너 그리스 북부로 들어와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군의 저지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화살이 san 많아 태양도 덮을 정도” 라고 위협하는 페르시아군에게 스타르타왕은 “그렇다면
우리는 그 그늘 속에서 싸울수 있겠군' 이라고 응수햇다고 하는데, 그러나 샛길을 누설한 그리스인의
제보로 스파르타군 3백과 동맹군 7백이 모두 전멸하고 마니 할리우드 영화 ”300“ 의 소재이기도 합니다.
“ 나그네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해다오/우리는 모두 조국의 법규를 충실히 지켜/이곳에 누워 있노라고
그러고는 하산해서는 큰 도로로 내려가서는 신탁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씨었다는
카스탈리안 샘물을 지나는데 물리 차가운게 더운 날에 여행자들 에게는 가히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델포이 유적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박물관과 아폴론 성역, 원형극장, 스타디움이 있는 위쪽과 김나지움,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 톨로스(Tholos, 도리아식 원형 건물) 등이 있는 도로 아래쪽
구역으로 나뉘니 위쪽을 본지라 이제 도로를 따라 300미터를 걸어서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을 찾아갑니다.
여기 건축물이 참으로 특이한데다가 또 일부이긴 하지만 완전하게 보존이 되어 볼만
한데 어떤 여자분이 사진사를 데리고 여러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것을
보니 단순한 관고아객이라기 보다는...... 무슨 잡지용 사진을 찍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발 2,457m 파르나소스 산 (Παρνασσός, Mt. Parnassos) 의 남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델포이
는 BC 800년에 처음 아폴론 성역이 들어서면서 종교적, 지정학적 중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어느 날 문뜩 세상의 중심이 어딘지 궁금했던 제우스는 세상의 양쪽 끝에서
독수리 두 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양쪽 독수리가 서로 마주친 장소가 바로 델포이였고 합니다.
그리스에는 아폴론 신을 위한 델포이의 피티아 제전을 비롯해 고대 부터 제우스 신의
신전이 있었던 올림피아(Olympia) 언덕에서 개최된 올림피아 제전, 코린트
이스트모스의 포세이돈 성역에서 개최된 이스트미아 (Isthmian) 제전이 있습니다.
네메아 (펠로폰네소스반도 북동부에 엘리소스 강 골짜기 꼭대기 근처에 있는 고대 유적지)
의 제우스의 성역에서 개최된 네메아(Nemean) 제전이 있었는데 이를 4대 제전이라
하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것은 올림피아 제전이라고 합니다.
문득 동아일보 최인영 특파원이 쓴 “올림픽 성화, 범선 타고 파리로” 라는 기사가 떠오르니.... 2024 파리
올림픽 성화를 실은 범선이 27일(현지 시간) 프랑스를 향해 항해에 나섰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3개의 돛을 단 범선 '벨렘' 은 고대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에서
지난 16일 채화된 성화를 싣고 그리스 아테네 서남쪽의 피레에프스 항구를 출발했다.
벨렘은 다음 달 8일 약 15만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 도착할 예정이니 성화는
이후 68일간 프랑스 64개 지역을 지나며 봉송된 뒤 7월 26일 파리올림픽 개회식장 성화대에 점화된다.
길이 58m·높이 34m인 벨렘은 그리스에서 근대올림픽이 열린 1896년 프랑스의 조선소에서 탄생한 역사적인
대형 범선이다. 이 범선은 2012년 런던올림픽 때 영국 런던 템스강에 등장하는 등 올림픽과 인연이 깊다.
그러고는 300미터를 걸어서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는 마을 입구에 선 당산목 같은
큰 느티나무 아래에 차려진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아 점심겸
저녁을 먹는데.... 2인분 음식에 맥주 까지 합쳐서 모두 22유로를 내니 싸긴 합니다!
식당 앞 레스토랑 건물로 들어가서는 내일 아침에 메테오라를 보기 위해 칼람바카까지 가는데 바로
가는 교통편은 없으니 우선 새벽 6시 30분에 라미아 가는 버스표를 1인당 9.9 유로씩에 끊습니다.
우리 부부는 저 라미아에서 다시 칼람바카 가는 버스표를 끊을려고
했는데....... 시간 불문하고 내일 버스는 풀 Full 이랍니다?
하루 몇편 없는 버스는 벌써 인터넷으로 매진이 된 것 같은데.... 사람 사는 세상이니
거기까지 가 보면 기차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아님 다른 방법이 있을른지....
그러고는 호텔로 돌아오니 여기서 내려다 보는 절벽 아래 게곡과 또 저 멀리 보이는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노소스 반도 사이테 바다 풍경이 한폭의 그림 입니다.
텔레비전을 트니 여러 영상물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가 동아일보에 쓴“오이디푸스의 길, 심청의 길”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오이디푸스 왕’ 의 주인공은 태어나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것 이라는
신탁(神託·뜻) 의 두려움에 두 발이 묶여 (‘오이디푸스’ 의 뜻은 ‘부어 있는 발’ ) 버려졌습니다.
그후 아기를 양치기가 구해서 옆 나라 왕에게 바쳤는데..... 성장한 그는 친부모로
믿고 살아온 양부모를 해칠 두려움에 가출했으나 어찌어찌해서 결국에는
친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어 친어머니를 아내로 삼아 자식들까지 낳게 됩니다.
원인 모를 역병이 돌고 진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눈을 멀게 만들고 딸의 부축
을 받으며 떠납니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는 이
이야기에 기반을 두었으며 초자아(양심, 자아 이상) 형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심청전’ 에서는 눈이 멀고 곤궁한 집안의 아버지에게 태어나고 태어나자 어머니를 잃습니다.
동네 ‘젖동냥’ 으로 자라난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공양미 삼백 석’ 에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용왕과 옥황상제의 도움을 받아 세상으로 다시 나와
왕후가 되고 아버지를 비롯한 눈이 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들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서울대 교수인 정도언 정신분석가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왕’ 과 우리나라
의 ‘심청전’ 을 ‘오만함’ 을 ‘겸허함’ 과 서로 맞대어 비교해 보면, 오이디푸스의
몰락은 ‘오만함’ 의 결과 입니다. 신탁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오만하기에 함정에 빠졌습니다.
자신이 선의(善意) 에 넘치는 옳은 사람이기에 스스로 믿는 생각은 당연히 옳다는 믿음으로,
친부모로 착각한 양부모 를 지키려고 떠나지만 결국 파행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 생각이 옳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머물렀다면 신탁의 저주를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한 사람은 신의 뜻을 뒤집으려고 했고 다른 사람은 하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한 사람은 신의
뜻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고 다른 사람은 하늘의 뜻을 모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한
결과 오이디푸스에게는 자기 분열과 파괴의 길, 심청에게는 통합과 재생(再生)의 길이 열렸습니다.
나는 선한 사람이고 선한 내가 좋다고 믿는 일은 당연히 선한 진실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의
오류에 사로잡힌 겁니다. 이에 반해, ‘겸허함’ 은 자신을 성찰할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아는 겁니다. 오이디푸스는 왕의 자리에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심청은 끼니를 겨우 잇는, 곤궁한 입장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이디푸스 주변 사람들은 귀를 막은 그에게서 멀어졌지만, 심청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의 고통에 마음을 연
심청을 진심으로 도왔습니다. 오만하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고 상황
을 가볍게 보아 넘깁니다. 오이디푸스는 얻고자 했지만 잃었고 심청은 잃을 수밖에 없었지만 얻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진실이 밝혀져도 감당할 수 있다는 오이디푸스의 ‘오만함’ 으로 인해
친어머니는 자살하고 왕국은 몰락하는데.... 백성들이 받을 고통을
고려하지 않고 성급하게 행동했습니다. 파국이 닥칠 가능성을 외면 했습니다.
그리고 샤워 후에 텔레비젼을 트니 무슨 사극이지 싶은데..... 이집트인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팔레스타인을 지나 시리아에 도착해 북쪽 터키에서 남진하는
힛타이트 제국 군대와 싸운 최초의 세계대전이라는 BC 1274년 5원 12 "카데시 전투" 인가 봅니다?
이집트군 병력이 2만 5천이고 히타이트군은 4만 5천으로 “7만명의 대군” 이 동원 되었으며
터키에는 전투 후에 평화협정을 담은 점토판 문서가 있으니 “세계 최초로 철제 무기”
를 사용한 "히타이트 제국" 은 1834년에 “핫튜사” (앙카라 동부 보아즈칼레) 가 발견됩니다.
흔히 우리는 그리스의 시인 호머가 쓴 일리어드와 오딧세이가 하도 유명한지라 트로이 전쟁을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케네등 그리스 도시 연합군이 “트로이”
를 공격한 것은 그 보다 80년 후인 “BC 1194년” 이고 또 동원 병력도 양측 모두 1만 내외로
“합계 2만” 정도로 추측되니...... 그럼 “카데시 전투는 최초의 세계대전” 으로 불릴만 합니다!
더욱이 이집트의 기록에서 보면 이집트는 “히타이트가 동맹국의 군대를 총동원” 했지만
자기들이 격파했다면서 적군은 3만에 가까운 히타이트 보병과 3,700여 대의 전차에
11,000명의 용병이라고 했으니...... 저 11,000명의 용병 중에는 “트로이의 이름인
윌루사” 와 호메로스가 트로이의 동맹국으로 언급한 “다르다니아” 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집크군은 람세스를 선두로... 아문 부대는 오론테스강을 건너 카데시 요새를 향했고 두번째
라 부대는 오론테스강을 건너는 중이고, 세트 부대와 프타 부대는 남쪽에 떨어져 있었는데
“오론테스강을 건너는 라 부대” 를 히타이트의 전차 부대가 급습하니, 라 부대는“ 궤멸”
되었으며 히타이트군이 “아문 부대 후미를 공격” 하자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도주 합니다.
히타이트군은 람세스 2세에게 달려들었으니, 람세스 2세는 “신(神 ?)” 이라도 된 양 혼자만으로
“히타이트 군을 대학살하고 승리” 한 후에는 유유히 이집트군 부대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집트 부조 한쪽 구석에는 “정체를 알수 없는 이집트측의 부대” 하나가 보이니....
팔레스타인 지원부대이지 싶은데 전투는 결국 무승부로 끝났고 양국은 혼인동맹을 맺게 됩니다.
람세스 혼자서 히타이트군을 물리졌다는건 이집트측의 터무니 없는 과장이고, 기원전 1274년의
카데시 전투에서 패배에 직면한 이집트군을 구한 것은 바로 저 팔레스타인 부대 인데....
모세의 출애굽 시기는 3가지 설이 있으니, BC 1448년경 아멘호테프 3세시대와 BC
1290년경 람세스 2세때 그리고 1980년 이후 학설은 대규모 탈출 자체가 없었다는게 정설입니다.
전기설은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해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팔레스타인땅을 침략해
기존의 소 왕국들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주인이 됐다면 원수인 이집트군에 저런
원군이 지원될수 없으며.... 후기설은 40년간 유랑기간 시기인데 탈출하면서 추격한 람세가 2세가
홍해에 빠져 죽었다고 했는데, 멀쩡히 살아 카데시 전투를 치뤘고 현대에 그 미이라가 발견되었습니다?
카데사가 위치한 시리아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적 독립과 별개로, 다마스쿠스나 안티오크
같은 수많은 고대 도시들이 발달했고, 동로마제국 시절에는 '안티오키아 학파' 가 신학계
에서 명성을 얻기도 했는데..... 다마스쿠스는 BC 1100년경에는 이미 아람인들의
주요 도시 중에 하나로 명성을 날렸으며...... 또한 우가리트 역시 유구한 역사를 지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