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기행 - 4분의 왕에게 치제문을 받다.인평대군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10.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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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기행 - 4분의 왕에게 치제문을 받다. 인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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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4. 21:39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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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麟坪大君, 1622년 ~ 1658년 5월 13일)은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이다.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 본명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1622년 능양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이듬해 아버지가 인조반정으로 즉위하면서 1629년 왕명으로 인평대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후, 두 형 소현세자,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오단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인평대군은 효종 즉위 후까지 살아남은 효종의 유일한 동복 아우였기에 효종은 인평대군과 우애가 좋았으며 그 아들들 또한 총애했다. 인평대군이 서인들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의 총애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인평대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에는 집안사람처럼 후히 대접하였고 희귀한 물건을 두고 승부를 벌이기도 하였다. 효종의 아들 현종 또한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들과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조정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삼복 형제들을 대접하였다.
숙종의 외척인 김우명과 김석주는 삼복 형제의 외숙부들이 남인 정권의 실세인 오정위, 오정일 등임을 경계하였고, 어리고 후사도 두지 못한 숙종에게 변고가 생기면 왕위가 인평대군의 아들들에게로 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때문에 이들 형제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일찍 죽은 복녕군을 제외한 나머지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훗날 <삼복의 변>에 연루되었다.1658년 인평대군의 병세가 위독하자 효종이 직접 집을 찾아갔으나 임종을 보기 전에 죽었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에 있다.
인평대군은 제자백가에 정통하였고 시서화에 능해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에 비유되기도 했다.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을 찾은 청의 화가 맹영광과 교류하기도 했다. 〈고백도〉,〈노승하관도〉,〈산수도〉와 같은 작품을 비롯해 〈송계집〉,〈연행록〉,〈산행록〉같은 저서를 남겼다.